[THE LEGENDS] ① '한국농구의 91년 역사' 이성구

서민교 / 기사승인 : 2022-01-07 14:5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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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열한 승리보다 당당한 패배를…” 한국농구의 선구자이자 아버지로 불리는 故이성구 옹(1911~2002년)의 묘비에 적힌 글이다. 연세체육의 모토이자 그의 농구 인생과 철학이 담겨 있는 이 짧은 글에는 한 평생 한국농구를 위해 헌신(獻身)한 그의 노고(勞苦)가 서려 있다. 그가 숨 쉬며 걸어온 91년 인생은 고스란히 한국농구의 역사다. 한국농구 근대화의 기틀을 마련한 그는 한국농구 사상 처음으로 베를린올림픽에 참가한 선수이자 지도자, 교육가, 외교가, 행정가였다.  


퇴짜 맞은 야구부
‘한국농구 아버지’ 이성구가 태어난 해는 한국농구와 인연이 깊다. 그는 이화학당에서 한국여자농구가 최초로 시도되던 1911년 1월 1일 충북 천안에서 태어났다. 국민학교 시절 키는 작았지만, 힘은 장사였다. 뛰어난 운동소질로 운동이란 운동은 다 잘하는 만능 스포츠맨의 피를 타고 났다. 하지만 어린 시절 그의 꿈은 아이러니하게도 농구가 아니었다.

국민학교 졸업 후 야구선수를 꿈꾸고 서울로 올라온 것. 당시 야구로 유명세를 탔던 휘문고보에서 그의 삼촌이 야구선수로 활약하고 있던 것도 이유였다. 무작정 찾아간 야구부에서는 ‘체격이 너무 작아서 안 된다’는 이유로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퇴짜 맞은 야구부를 등지고 찾아간 곳이 농구부였다. 체격이 작아 거절당한 선수를 농구부에서도 받아줄리 만무했다. 당시 휘문고보 농구부에는 YMCA 대표 출신 이혜봉이 코치를 맡고 있었다.(이성구의 휘문고보 코치였던 이혜봉은 연희전문학교 농구부 창단 멤버로 이성구와 함께 선수로 활약했다. 돈 없고 배고팠던 그 당시로서는 1~2년 묵은 선수는 보통이었고, 이혜봉처럼 몇 년을 묵는 일도 많았다. 전문학교를 다닐 정도의 학생은 하이 클래스 집안이었다.) 농구와의 인연 때문일까. 이성구는 포기하지 않았다. 수개월 동안 코치를 쫓아다니며 점프력이 좋다고 펄쩍펄쩍 뛰어보였다. 결국 코치의 마음을 움직인 그는 휘문고보에 입단했다. 그가 맺은 농구와의 질긴 인연의 첫 고리였다.

휘문고보는 1920년대 중반 가장 화려한 멤버를 보유하며 절대강자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1925년 YMCA 대표들이 주축이 된 조선바스켓볼협회가 주관한 제1회 전조선중등부농구선수권대회가 창설하면서 휘문고보도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시기였다.

이성구가 농구부에 입단한 것은 이후 1926년의 일이었다. 이후 대성황을 이뤘던 전조선중등부농구선수권대회는 13년 동안 명맥을 이어가다 1938년 일제가 각종 체육단체를 강제 해체시키면서 사라졌다.


연전 농구부 창설 멤버가 되다
1928년 이성구가 정규멤버로 활약한 휘문고보는 제4회 전조선중등부선수권에서 강력한 우승후보로 꼽혔다. 하지만 한국인 2명을 제외한 일본인으로 구성된 경성사범에게 일격을 당하면서 패했다. 예상 외 결과였다. 이 대회를 끝으로 그는 2년 뒤 연세대의 전신인 연희전문학교(이하 연전)의 농구부 창단 멤버가 됐다.

1930년 당시 창단 멤버는 이성구를 비롯해 강신홍 정상윤 강인희 이혜봉 황필한 황대걸 이상락 이순덕 김용구 등 10명으로 구성됐다. 창단과 동시에 강세를 보였던 연전은 이에 앞선 1928년 창단한 고려대의 전신 보성전문학교(이하 보전)와 영원한 맞수로서 라이벌 구도를 확립했다. 지금까지 대학스포츠축제로 이어지고 있는 연고전의 효시다.

해를 바꿔가며 3개 대회에서 우승을 나눠가진 연전과 보전의 경기는 서울 장안이 화제가 될 정도로 대호황을 이뤘다. 당시 YMCA 체육관에는 앞 사람 때문에 경기를 관전할 수 없을 정도로 관중이 꽉 들어찼고, 30분을 기다려야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연전을 이끈 이성구의 포지션은 지금으로 말하면 포인트가드에 가까웠다. 170cm도 채 되지 않는 신장이었지만, 백보드를 양손으로 몇 번씩 칠 정도로 점프력은 대단했다. 입담도 수준급이었다. 당시 그가 했던 유명한 말이 있다. “내가 한 번 점프를 하면 차고 올라갔다가 차고 내려오는데 한참 걸려.” 연전 상과에 재학 중이던 그는 1932년 전조선선수권대회와 조선신궁경기대회를 우승으로 이끈 뒤 졸업했다.

지도자의 길… 연전 복귀 사건
이성구는 졸업 후 연전 연구원으로 있다가 1933년 연전 농구부에서 공식 코치로 임명됐다. 같은 해 연전 야구부 코치에는 이영민이 공식 코치에 임명됐다.(이성구기념상과 같이 야구천재이자 한국야구 발전의 토대를 만든 이영민의 이름을 딴 타격상은 지금까지도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사실, 당시에는 졸업자들이 자진해서 코치를 맡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연전에서의 코치직은 오래가지 않았다. 진명여고 이세정 선생(교무주임)이 연전을 찾아가 그에게 교사직을 제안한 것. 그는 해방 직전까지 진명여고에서 교사와 코치직을 겸했고, 해방 뒤에도 시간강사로 적을 뒀다. 연전과의 잠시 이별이었다.

그러나 화려한 선수 복귀 사건이 벌어졌다. 진명여고에서 교사를 맡고 있던 1936년 1월의 일이다. 연전과 보전이 동반 참가한 동경명치신궁외원구장에서 열린 제16회 전일본종합선수권대회. 애초 이성구는 선수가 아닌 관계자로 동행했다. 당시 연전 주장을 맡았던 이만걸이 보전과 서울 경기 이후 YMCA 지하실 목욕탕 폭행사건에 연루돼 징계를 받은 것. 성격이 걸걸했던 이만걸이 보전의 신입생 선수에게 약이 올라 머리로 받아 종로경찰서까지 가서 진술서를 쓴 사건이 발생했다. 연전은 비상이 걸렸다. 베스트5 가운데 한 명이 빠진 것.

그 당시 베스트5는 지금과 의미가 달랐다. 스타팅으로 출전하면 5반칙 퇴장을 당하기까지 교체를 하는 일이 없었다. 축구와 같이 교체를 하면 다시 뛸 수 없었기 때문. 연전 부장을 맡고 있던 노동규 씨는 급한 마음에 관전으로 온 이성구를 불렀다. “자네가 뛰어!” 당황스런 일이었다. 그는 1933년 졸업 후 만 2년간 농구공을 잡아보지도 않은 상태였다. “선생님, 운동을 안 한지 오래돼서 전 못합니다. 지더라도 그냥 하시죠.” 소용이 없었다. 노 부장은 막무가내로 그를 출전 시켰다. 현지에서 갑자기 선수로 유니폼을 입게 된 것.

당시 연전 신입생이었던 장이진은 그를 이렇게 기억했다. “불쌍해서 못 보겠더라. 숨은 차고 얼굴은 하얗게 돼서…. 백코트에서 드리블도 정말 천천히 쳤다. 숨을 고르기 위한 방법이었다.” 장이진의 선발도 이성구의 체력 부담을 덜기 위한 방편이었다. 신입생이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수비와 리바운드를 도맡았다.

연전 농구는 답답했다. 그런데 이런 뜻하지 않은 지연전술이 상대팀에 오히려 먹혀들었다. 상대는 초조한 마음에 실책을 연발했다. 연전이 뜻하지 않게 승승장구를 달린 것. 준결승전에서도 일본 최강이라 불리던 도쿄제대를 46-38로 꺾고 결승전에 진출하는 이변을 낳았다.

그때 일본으로 전보가 날아왔다. 이성구를 진명여고로 데려온 이세정 선생이었다. 한글로 적힌 짧은 글이었다. ‘한 번만 더 이겨라.’ 이세정 선생의 재치였다. 한 번만 더 이기면 우승이었다. 이성구도 작고 전까지 이 글귀를 두고두고 회고했다는 후문. 연전은 결국 결승전에서 교토제대를 20점차로 완파하고 한국농구 사상 최초로 전 일본 농구를 평정한 것이다.

이 대회 우승은 그 어떤 대회 우승보다 의미가 깊었다. 대회 이전인 1935년 일본 최강이었던 도쿄제대가 한국에서 3전 전승을 하고 가면서 1936년 베를린올림픽 농구대표단을 이 대회 우승팀을 주축으로 구성하겠다고 선포한 것. 사실상 한국 선수들을 제외한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연전이 일을 낸 것. 일본 농구대표팀에 한국선수가 이성구, 염은현, 장이진 등 3명이나 포함됐다. 당시 베를린올림픽 참가한 마라톤 손기정 등 조선인 7명의 선수 가운데 단일 종목으로는 가장 많은 한국선수였다. 당시 일본농구협회 전무이사를 맡고 있던 이상백 박사의 입김도 많이 작용했다. 한국인 최초로 올림픽에 출전해 참가국 21개 국가 중 8위라는 성적을 거둔 것이 이성구의 선수로서 마지막 업적이기도 했다.


일본도 무릎 꿇은 카리스마
지도자로서 이성구는 카리스마가 넘쳤다. 1940년의 일이다. 일본 권부가 세계2차대전 준비로 동경올림픽 유치권을 반납하면서 청년층의 반발을 우려해 일본기원 2600년 기념 동아경기대회가 개최됐다. 이 대회에는 일본을 비롯해 필리핀, 중국, 만주 등 4개국이 참가했다. 한국선수는 일본 대표팀의 절반인 6명이 참가했다. 감독은 일본 농구이론의 대부로 불렸던 마키야마가 맡았고, 코치는 이성구였다. 중국과 만주는 상대가 되지 않았지만, 필리핀을 상대로는 고전했다. 스타팅은 일본선수만 5명이었다. 전반은 8점차로 지고 있었다. 후반에 급해지자 마키야마는 이성구에게 “한국인을 내보내자”고 도움을 청했다.

그의 대답이 시원했다. “니네가 해서 지고 있으니까, 니네가 끝내!” 조급해진 마키야마를 뒤로 하고 이성구는 후반 12분을 남기고 선수 전원을 한국인으로 교체해 존 프레스를 지시했다. 경기에 나서지 못했던 선수들은 독을 품고 달려들어 13점차로 역전승을 거두는 기염을 토했다. 마키야마가 고맙다고 이성구를 찾아오자 한 마디로 일축했다. “내가 했냐? 선수가 했지.” 이 얘기를 듣고 마키야마는 직접 한국선수들에게 고개 숙여 감사하다고 했을 정도였다. 이후 1954년 제2회 마닐라 아시안게임 대표팀 감독을 맡았지만 불행하게도 4위의 성적에 그쳤다. 그는 한국에 돌아와 방송인터뷰에서 “이번 4위 성적은 전적으로 감독인 내가 계획을 잘못 세워 그렇다”고 선수가 아닌 감독의 탓으로 돌렸다. 이 거침없는 인터뷰는 당시 센세이션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성구는 정상윤과 함께 이론가로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한국농구 규칙서 확립에 있어서도 이성구의 영향이 가장 컸다. 일본에서도 규칙서를 만들 때 급하면 이성구를 불렀을 정도였다.

1961년 일본을 잠재운 또 하나의 사건이 있었다. 당시 이성구는 한일고교농구대회 초대 대회 단장으로 일본에 건너갔다. 일본농구협회에서 규칙서 문구만 가지고 나름대로 해석해놓은 것. 이런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그는 일본농구협회 관계자들을 다 불러 모으게 했다. 일본어로 한 첫 마디는 “내가 일본기원 2600년 동아대회 일본 대표팀 코치를 맡은 사람이다”였다. 10여명의 협회 관계자들은 그 말을 듣자마자 고개를 숙였다. 이어진 그의 말에는 독설이 가미됐다. “농구선배로서 한 마디 하겠다. 일본농구 돼먹지 않았어!”

일본에서 이론가로서 추앙받던 마키야마도 인정한 그의 불호령에 일본농구협회가 들썩였다. 일본농구협회 관계자들은 그의 말에 따라 다시 뜯어고쳤다. 규칙서를 보지 않고도 줄줄 외울 정도인 이상구의 카리스마에 대꾸 한 번 못한 것이다. 이상백 박사도 “이성구 같은 사람은 나오기 힘들 거야”라며 이성구의 말이라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일 정도니 설명이 뭐가 더 필요하겠는가.


亞농구를 움직인 행정가이자 외교가
한국농구의 발자취에 이성구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었다. 선수와 지도자 생활을 마친 뒤 단장이나 임원으로 농구와 관련된 것이라면 빠지지 않았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움직였다. 1931년부터 조선농구협회를 최초 결성하자는 젊은 층의 움직임을 주도했고, 1945년 해방 후 11월 대한농구협회 창립과 함께 초대 이사에 취임해 협회 체제를 확립해 나갔다. 당시 협회 창립을 주도했던 정상윤은 체육회 정관을 직접 쓸 정도로 학구파였고, 이성구는 행동파에 가까웠다. 특히 행정가로서 수완이 대단했다.

해방 직후 어려웠던 시절 미 군정청의 개입으로 1948년 런던올림픽에서 농구는 제외 종목이었다. 주한미군부대 팀과의 연습경기에서도 가끔 패할 정도의 약체라는 것도 이유가 됐다. 그러나 농구협회는 당시 미군정사령관 하지 중장의 수석비서이자 통역을 맡았던 이묘묵 박사(전 연전 교수)를 협회장으로 추대해 농구파견 제외 방침을 철회시키는데 성공했다. 이묘묵 박사의 뒤에 서서 조정한 사람이 바로 이성구였다. 그의 제자인 이해병은 “그런 보이지 않는 행정에 있어서도 정말 비상할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었다”고 회고했다.

또한 그는 1958년 아시아농구연맹 설립회의를 추진했다. 같은 해 동경아시안게임부터 필리핀을 ‘너희가 최고’라고 구워삶았고, 동경에서 우에다(일본), 칼보(필리핀), 존스(FIBA)와 회의를 통해 만장일치로 ABC를 결성했다. 이후 1960년에 제1회 아시아남자선수권대회가 필리핀 마닐라에서 개최됐다. 그는 3년 뒤인 1963년에 남자도 있는데 여자도 만들자고 제의하기 시작했다. 당시 여자농구가 아시아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었기 때문. 결국 2년 뒤인 1965년 아시아여자농구선수권대회가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개최됐고, 박신자의 활약으로 한국이 초대 우승을 할 수 있었다.

여자농구로 눈을 돌린 이성구는 한-일 교류전에 적극 나섰다. 1959년 여자농구가 일본을 상대로 9전 전승을 거두자 일본을 이겼다는 것에 감격해 이승만 대통령이 눈물을 흘렸고, 이후 1960년대 초반 윤보선 대통령도 “대단하십니다. 자랑스럽습니다”라고 격려했고, 박정희 당시 소장을 찾아가 인사를 했을 정도라는 후문도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그를 두고 이상백 박사 이후 체육외교의 핵심 인물이라고 불리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바로 선진농구를 꾸준히 받아들였다는 점이다. 선진농구의 도입은 1931년부터 자연스럽게 이뤄졌다. 우연이자 행운이었다. 한국인 2세로 미국 워싱턴대학 농구팀 센터 출신인 전봉운이 졸업 후 미국 광산회사에 취업해 함경도 지역의 현지조사차 한국에 들어와 그의 부친과 친지였던 이춘호 연전교수의 사택에 머물게 된 것. 그리고 이성구는 월등한 체격조건을 갖춘 그를 보자마자 눈이 번쩍 떠졌다. 이성구는 당시 전봉운을 보고 “걸작이다. 개 눈에는 똥밖에 안 보인다”며 쫓아 올라가 농구를 가르쳐 달라고 간절히 요청했다. 거절을 당하자 이춘호 교수를 찾아가 다시 요청해 결국 승인을 받아냈다. 전봉운은 한국농구의 현실을 보고 당황했다. “이런 운동장에서 어떻게 농구를 하냐?”며 빗자루로 운동장의 모래를 모두 걷어냈고, 수비의 기본 풋워크를 처음으로 가르치기도 했다. 슛 자세를 가르치는 것도 달랐다. 그는 “자세는 필요 없다. 어떻게든 집어넣어라”며 당시 훅 슛과 비슷한 슛을 전수하기도 했다. 1개월을 예상했던 그의 잔류는 3개월 동안 계속됐고, 당시 보전에 밀려 3연패를 당했던 연전은 그의 지도 이후 2연승을 거두기도 했다.

1950년대 후반에는 아시아재단 사무총장이었던 조동재 씨의 후원으로 미국 스프링필드대학의 코치 겸 조교수였던 존 번을 초청했다. 대학팀들을 모두 모아 미군부대에서 하루 2시간씩 교육이 진행됐다. 일명 ‘번 시스템’이라고 불렸을 만큼 획기적인 농구를 익힐 수 있었던 계기였다. 그 중 큰 변화 중 하나는 투핸드 슛에서 원핸드 슛의 변화라 할 수 있다. 이때 역시 이성구의 고집과 노력으로 존 번은 3개월이나 한국에 머물렀다. 몇 년 뒤 미국 세미프로선수 출신인 냇 홀맨이 영입 됐을 때 고교선수들을 선발해 붙인 것도 이성구의 생각이었다. 당시 1기가 김인건과 방열이었다. 존 번이 이론에 강했던 왕도주의 농구라면, 냇 홀맨은 실기를 강조한 패권주의 농구라고 할 수 있다.

이후 한국농구가 1960년대 말 다시 한 번 도약기를 맞을 수 있었던 것은 1965년 찰스 마콘 소령이 한국대표팀 코치로 부임(1965~1966년)하면서부터 맺은 주한미8군과의 유대관계가 큰 원동력이 됐다. 미국 코치 영입에 대한 반대 여론도 만만치 않았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적극적으로 미국코치 영입을 추진한 사람 역시 당시 협회 전무이사였던 이성구였다. 결국 그의 노력은 결실을 맺었다. 1969년 방콕에서 열린 제5회 아시아남자선수권대회 우승과 다음해 1970년 방콕아시안게임에서 한국이 금메달을 얻는 쾌거로 이어졌다.


한국농구의 산증인이자 멈추지 않은 농구열정
이성구는 한국농구 역사의 산증인과도 같은 인생을 걸었다. 노년에 들어서도 그의 농구열정은 식을 줄 몰랐다. 언제나 의욕적이었고, 신기술과 신교육을 개발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연구하고 공부하는 것이 필수항목이라는 교육자 정신도 갖추고 있었다. 대한농구협회 정관을 구술할 정도로 머리가 비상하기도 했다. 주변의 도움도 많았다. 진명여고 이세정 선생은 그의 교육관을 심어줬고, 이상백 박사는 그에게 외교관, 윤덕주 여사는 경제적 뒷바라지를 책임지기도 했다. 그는 이런 도움을 한국농구 발전을 위해 쏟아 부었다.

그는 1984년 한국농구코치협회 창립회장, 1998년 WKBL 초대 총재를 지낸 것을 비롯해 대한체육회 이사, 연세체육회 부회장, KOC 상임위원 등을 역임했다. 체육행정가로서 스포츠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1962년 문화포장, 1971년 국민훈장 목련장, 1982년 대한민국 체육상 공로상을 받기도 했다. 88세의 고령이던 1999년에는 농구인생 70년을 기념해 “후배들에게 뭔가 남겨야겠다”며 농구전술서 「농구의 기본적 배경. Winner Basketball」을 저술하기도 했다.

그의 마지막 운명은 기구했다. 한국남자농구가 1982년 뉴델리아시안게임 우승 이후 20년 만에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에서 기적적인 금메달을 획득하던 날. 한국농구가 20년 한 맺힌 눈물을 흘리던 날 한국농구의 큰 별은 졌다. 그해 결승전이 열렸던 10월 14일. 그는 91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떠나는 길에 마지막 선물을 안겨준 후배들의 투혼을 가슴 속 깊이 새기며….

이성구는...
‘한국농구의 아버지’로 불리는 이성구는 1911년 1월 1일 충남 천안 출생으로 휘문고보와 연희전문(현 연세대)을 거쳐 한국농구 근대화 기틀을 만드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1936년 한국농구선수로는 처음으로 베를린올림픽에 출전했고, 1945년 대한농구협회를 창립해 초대 이사장을 역임했다. 또한 한국농구코치협회 회장, WKBL 초대총재를 비롯해 대한체육회 이사, 연세체육회 부회장 등 체육행정가로서도 활약하며 문화포장, 국민훈장 목련장, 대한민국체육상 공로상 등을 수상했다. 고령의 나이인 1999년 농구전술서 「농구의 기본적 배경. Winner Basketball」을 펴낸 뒤 2002년 10월 14일 9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 본 기사는 JUMPBALL 스페셜 에디션「TEAM KOREA」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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