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FA 최대어 부럽지 않은 저비용 고효율, ‘틈새시장’을 공략하라!

최창환 기자 / 기사승인 : 2026-07-04 06: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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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프볼=최창환 기자] 저점에 매수했는데 기대 이상의 수확을 거두는 것만큼 짜릿한 일이 또 있을까. 주식 시장이 아닌 FA ‘틈새시장’ 얘기다. “내 월급 빼고 다 오른다”는 말대로 프로선수들의 몸값이 나날이 치솟고 있다. 거액을 투자할 때는 실패 시 따라붙는 리스크도 큰 법. 너도나도 FA 최대어에 주목하고 있을 때, 틈새시장도 공략해 보자. 혹시 모른다. 이 글에서 언급될 선수들처럼 투자 이상의 가치를 안겨줄 복덩이를 찾게 될지도.

※ 본 기사는 농구전문 매거진 점프볼 7월호에 게재됐습니다.

‘갓관희’가 그렸던 우상향 그래프

KBL을 2020년대 들어 접한 팬들이라면, 이관희는 스포트라이트에 익숙한 선수로 인식이 되어있을 것이다. 꼭 ‘솔로지옥’이나 앙숙이 된 선수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화제의 중심에 설 때가 많았다. 평균 두 자리 득점을 만든 시즌이 한자리 득점일 때보다 훨씬 많았고, 인터뷰마다 톡톡 튀는 코멘트를 남겨 마감할 때 머리를 싸매는 기자들의 수고도 덜어줬던 선수다.

데뷔할 때부터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건 아니었다. 오히려 작전타임에서 감독에게 꾸중을 듣는 등 부정적 이슈가 더 많았다. ‘갓관희’도 사실 거슬러 올라가면 달갑지 않은 별명이 시발점이었다.

다만, 꾸준히 우상향 그래프를 그린 선수였다는 점은 분명했다. 프로 무대에 데뷔한 2011-2012시즌부터 LG로 트레이드된 직후 FA 대박을 터뜨린 2021-2022시즌에 이르기까지. 10년 동안 이관희의 연봉은 한 시즌도 인상되지 않은 적이 없었다.
2013-2014시즌을 마친 후 입대한 이관희는 상무에서 제대한 후 2015-2016시즌 막판 9경기를 치렀고, 시즌 종료 후 첫 FA 자격을 취득하며 삼성과 1년 재계약했다. 보수는 입대 전 연봉(9000만 원)에서 1000만 원 인상된 1억 원이었다.

데뷔 후 첫 억대 연봉이었지만, 이때까지 이관희는 삼성에서 비중이 큰 선수가 아니었다. 1억 원은 팀 내 연봉 7위에 불과했던 데다 가드 포지션에 주희정, 김태술, 이시준 등 쟁쟁한 선배들도 버티고 있었다.

이관희는 묵묵히 내실을 다졌다. 오프시즌에 자비를 들여 필리핀으로 스킬트레이닝을 다녀왔고, 귀국 후에는 김현중이 운영하는 스킬트레이닝 센터도 찾으며 기본기를 다시 다졌다. 문태영, 리카르도 라틀리프(당시는 귀화 전이었다)가 있었던 만큼 공격 욕심도 버렸다.

이관희는 “선수라면 공격에 더 욕심나는 게 사실이지만 우리 팀은 (문)태영이 형, 라틀리프가 있다. 팀에서 강조하는 수비에 초점을 맞춰 역할을 하겠다”라는 각오도 다지며 FA 체결 후 첫 시즌을 맞이했다.

출전시간 자체에 큰 변화가 있었던 건 아니지만, 2016-2017시즌은 이관희의 농구 인생을 논하는 데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시즌이었다. 데뷔 후 처음으로 전 경기를 소화하며 에이스 스토퍼 역할을 도맡는 등 벤치의 신뢰를 받는 주요 식스맨으로 자리를 잡았다. 당시 삼성의 국내선수 가운데 전 경기를 소화한 선수는 김준일, 이관희 단 2명이었다. 삼성도 2008-2009시즌 이후 처음으로 챔피언결정전에 진출하며 암흑기 탈출을 알렸다(이후 더 깊은 암흑기가 기다리고 있었던 건 함정).

주요 식스맨으로 가치를 증명하며 다시 FA 신분이 된 이관희는 2번째 협상에서는 삼성과 3년 계약을 맺었고, 이 기간에 주전으로 도약하며 시즌을 거듭할수록 연봉도 대폭 상승했다. 삼성에 대한 애정이 컸던 이관희는 2020-2021시즌 중반 LG로 트레이드되며 마음고생도 겪었지만, 이적 후 새로운 전기를 맞이해 2021년 계약기간 4년 첫 시즌 보수 총액 6억 원이라는 ‘잭팟’을 터뜨렸다. 우승만 없을 뿐, 드래프트 지명 순위(2라운드 5순위)를 감안하면 KBL을 대표하는 ‘대기만성’ 스타 가운데 1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터.

이관희는 데뷔 후 무려 5차례나 FA 자격을 취득했지만, 이 가운데 2차례는 1년 계약이었다. 모두 자신의 의지에 따른 년 계약이었다. 이관희는 “더 성장하겠다”라는 의지를 담아 1년 계약을 즐겼고, 냉정한 시장의 평가도 받아들일 준비가 된 선수였다.

첫 FA 계약을 맺기 전 평균 13분을 소화하는 벤치멤버에 불과했던 이관희는 현재 KBL에서 17번째로 많은 628경기를 소화한 베테랑이 됐고, 통산 3점슛 793개를 기록하며 이 부문 19위에 올라있다. 새 시즌에는 ‘조선의 슈터’ 조성민(800개)도 넘어설 가능성이 높다. 첫 FA 협상에서 비교적 저렴한 연봉에 계약했던 이관희의 대기만성 스토리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은퇴 위기의 노장 뛰게 한 명장의 한마디 “너 수비 잘해~!”

제아무리 슈퍼스타라 해도 서른 중반을 넘어선 시점부터는 출전시간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천하의 양동근도 2015-2016시즌부터 은퇴 시즌이 된 2019-2020시즌까지 평균 출전시간이 계속해서 하락했다. 물론 기량이 녹슬었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은퇴 시즌에도 양동근은 양동근이었다.

전력 외로 분류된 벤치멤버라면 더더욱 가는 세월을 붙잡을 수 없겠지만, 그래서 오용준의 커리어는 더 특별했다. 오용준은 고려대 3학년 재학 시절 연세대와의 정기전에서 51점을 퍼부으며 이름을 알린 장신 슈터였다. 2003 신인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 10순위로 대구 오리온스에 지명됐고, LG와 KT를 거치며 쏠쏠한 롤플레이어로 활약했다. 데뷔 3년 차였던 2006년 3월 18일 전자랜드를 상대로 3점슛 9개 포함 31점을 퍼붓기도 했다.

오용준의 커리어가 급격한 내리막길을 걸었던 건 박상오와 트레이드되며 SK 유니폼을 입은 2015-2016시즌이었다. 이적 전 2시즌 연속 전 경기 및 평균 22분 이상을 소화했던 오용준은 이적 후 첫 시즌 51경기를 소화했지만, 출전시간은 15분 45초로 하락했다. 이어 2016-2017시즌은 1경기를 소화하는 데에 그쳤다.

2017년 FA 시장에서 벼랑 끝으로 몰렸던 오용준은 사인&트레이드를 통해 SK에서 KGC(정관장)로 이적했고, 이 과정에서 이전 시즌 1억 3500만 원이었던 보수는 6500만 원까지 삭감됐다. KGC 이적 후에도 29경기 평균 10분 11초 동안 1.9점에 그쳐 마음의 준비를 했던 오용준에게 손을 뻗은 이는 ‘만수’ 유재학 현대모비스 감독(현 KBL 운영본부장)이었다. 이전 시즌보다 더 줄어든 6000만 원에 1년 계약을 맺었지만, 오용준에게 중요한 건 돈이 아닌 기회였다.

“유재학 감독님을 처음 만난 날을 잊을 수 없다. ‘몇 살이야?’라고 물으셔서 39살이라고 말씀드리니까 ‘29살이라고 생각하면서 운동하면 얼마든지 뛸 수 있어’라고 하셨다. 그때 열심히 준비하고 있으면 기회는 올 거란 생각이 들었다.” 오용준의 회고다.

희망 고문이 아니었다. 때론 문태종의 체력 부담을 덜어주는 백업으로, 때론 함께 뛰며 외곽 공격력을 극대화하는 무기로. 39살 오용준은 그렇게 부활했다. 52경기 평균 16분 33초 동안 3.5점 3점슛 0.9개(성공률 41.5%)를 기록하며 유재학 감독의 믿음에 부응했다. ‘수비가 약한 반쪽 선수’라는 평가를 받았던 오용준에게 명장이 남긴 “너 수비 잘해~!”라는 칭찬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훈장이기도 했다.

KT를 떠난 후 가장 많은 경기수, 출전시간을 기록한 오용준에게는 데뷔 후 첫 우승의 감격도 뒤따랐다. ‘몹벤져스’라 불릴 정도로 화려한 전력을 구축했던 현대모비스는 2018-2019시즌 내내 독주한 끝에 통합우승을 달성했고, 오용준은 챔피언결정전에서도 5경기 모두 투입되며 농구 인생 최고의 순간을 보냈다.

은퇴 위기를 딛고 챔피언 팀의 일원이 된 오용준은 현대모비스와 FA 재계약을 체결했고, 이후에도 KT-오리온을 거치며 한국 나이로 43살까지 커리어를 쌓았다. 점차 출전 기회가 줄어드는 베테랑도 궁합이 맞는 팀과 감독을 만나면 불씨를 되살릴 수 있다는 교훈을 남긴 사례였다.

“쟤가 저 정도로 잘하는 선수였어?” 저니맨의 믿을맨 진화 스토리

고려대 동기 이규섭과 김기만이 프로에 데뷔하자마자 주전, 주요 식스맨으로 자리 잡은 반면, 강대협이 이름을 알리기까진 꽤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2000 신인 드래프트에서 2라운드 2순위로 대전 현대(현 부산 KCC)에 지명됐던 강대협은 데뷔 후 5시즌을 치르는 동안 무려 5개 팀에 몸담았다. 2002-2003시즌 안양 SBS(현 정관장)로 이적한 후 수비 5걸에 선정되며 저니맨 커리어를 끝내는 듯했지만, 울산 모비스(현 현대모비스)로 트레이드된 이후 다시 전력 외가 됐다.

2005-2006시즌 중반 김재훈과의 1대1 트레이드로 서울 SK 유니폼을 입은 후에도 15경기 평균 6분 45초를 소화하는 데에 그친 강대협은 ‘반짝’했던 SBS 시절을 제외하면 별다른 존재감을 못 보여준 채 첫 FA 자격을 취득했다. 강대협에게 손을 뻗은 팀은 동부(현 DB)였다. 계약기간 3년, 이적 첫 시즌 연봉은 1000만 원 인상된 8000만 원이었다.

“SK로 트레이드되자마자 FA가 됐는데 ‘남은 연봉이 이것밖에 안 된다’라는 제안을 받았다. 내가 뭘 내세울 입장은 아니었지만, 그 돈 받고는 못 하겠더라. 그래서 FA 시장에 나갔는데 감사하게도 전창진 감독님이 불러주셨다.” 강대협의 회고다.

기회를 받지 못했을 뿐, 강대협은 신인 시절부터 개인 훈련에도 많은 시간을 투자한 선수였다. 현대 시절 코치였던 유도훈 정관장 감독은 “슛이 약한 선수는 슛 던지는 연습에 앞서 핸들링부터 연습해야 한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다음 날 새벽 2시에 체육관 쪽에서 ‘퉁탕퉁탕’ 소리가 들리더라. ‘환청인가?’ 하며 나가봤더니 (강)대협이가 볼 핸들링 연습하는 소리였다”라고 돌아봤다.

이후에도 오랫동안 빛을 보지 못했지만, 훈련량이 줄어든 건 아니었다. 그리고 강대협의 성실함은 오프시즌 훈련을 소화하는 자세를 중시하는 전창진 감독을 만나 꽃을 피웠다. 이전 시즌 31경기 평균 7분도 뛰지 못했던 저니맨이 2006-2007시즌에는 데뷔 첫 전 경기에 출전, 평균 31분 38초 동안 11.6점 3점슛 1.8개를 기록하는 주축으로 환골탈태한 것. 강대협이 2006-2007시즌에 기록한 총 628점은 이전까지 통산 172경기에서 남긴 649점과 비슷한 수준의 득점이었다. 또한 통산 31.1%에 불과했던 3점슛 성공률도 40.6%에 달했다.

“오프시즌 연습경기 때부터 경기력이 좋았다. 전창진 감독님이 ‘쟤가 저 정도로 잘하는 선수였어?’라고 하실 정도였다(웃음). 사실 내 플레이 스타일이나 기량은 변한 적이 없었다. 보여줄 만하면 트레이드됐고, SBS에서는 줄부상으로 얼떨결에 포인트가드를 맡기도 했다. 결국 선수는 많이 뛰어야 한다. 3~5분 뛰면서 제 기량을 보여줄 선수는 많지 않다. 물론 (김)주성이 덕을 본 측면도 있었지만, 꾸준히 출전시간을 받으니 자신감도 살아났다. 그게 경기력에 도움이 됐다.”

2006-2007시즌 기량발전상을 수상하며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강대협은 2007-2008시즌에 처음으로 억대 연봉(1억 2000만 원)을 받았다. 평균 출전시간이 7분 이상 줄어들어 득점(10점)이 소폭 하락했지만, 3점슛은 폭발력을 더한 가운데 더욱 정교해졌다. 커리어하이 시즌보다 높은 1.9개(성공률 43%)를 성공하면서 ‘전문 수비수’ 이미지를 깨고 공수를 겸비한 슈터로 가치를 끌어올렸다. 동부도 TG삼보 인수 후 첫 통합우승을 달성했다. 저니맨의 설움을 딛고 우승팀의 핵심 전력으로 자리 잡았던 강대협은 이후 LG-인천 전자랜드(현 대구 한국가스공사)를 거쳐 2012년 은퇴했다.

강대협은 “연차가 얼마 안 됐을 때 5분이라도 뛸 수 있는 팀으로 보내달라고 한 적이 있었다. 은퇴 후 돌아보니 미친 짓이었지만(웃음), 어느 팀에 가더라도 아등바등 버텼다. 경기에 못 나가도 주전들보다 많이 운동했고, 그래서 체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한 팀에서 오래 뛰었다면 동료들이나 구단 직원들에게 속마음도 털어놓으며 더 여유를 갖고 농구를 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래도 결과적으로는 잦은 이적이 11시즌을 뛰는 데에 긍정적으로 작용한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라고 돌아봤다.

재기한 ‘역대급 재능’이 남긴 역대급 숫자 557.1%

한순간의 실수로 선수 생명의 위기를 맞았지만, 재기에 성공한 후 FA 대박까지 터뜨렸다. ‘역대급 재능’으로 평가받았던 김민구의 파란만장 스토리다. 김민구는 경희대 재학 시절 ‘포스트 허재’라 불린 유망주였다.

실력으로도 보여줬다. 프로 데뷔 전이었던 2013년 FIBA(국제농구연맹) 남자농구 아시아컵에서 평균 12.7점 4.1리바운드 2.7어시스트로 활약한 것. 김민구는 특히 대만과의 3-4위 결정전에서 3점슛 5개 포함 21점으로 맹활약, 대한민국에 16년 만의 월드컵 티켓을 안기며 대회 베스트5에 선정됐다.

2013 신인 드래프트에서 2순위로 KCC에 지명됐던 김민구는 46경기 평균 32분 41초 13.4점 3점슛 1.9개 5.1리바운드 4.6어시스트 1.8스틸을 기록, 기대에 걸맞은 루키 시즌을 치렀으나 이것이 커리어하이 시즌이 됐다. 2014 인천 아시안게임 남자대표팀 예비명단에 이름을 올렸던 김민구는 합숙기간에 외박을 나와 음주운전으로 물의를 일으켰고, 이 과정에서 고관절을 크게 다쳤다.

한창 성장해야 할 2년 차 시즌을 통째로 날린 김민구는 끝내 KCC에서 부활하지 못했다. 평균 10분 안팎의 출전시간을 소화하는 평범한 벤치멤버로 커리어를 이어가다 2018-2019시즌 종료 후 생애 첫 FA 자격을 취득했다.

당연히 ‘FA 대박’은 언감생심이었다. 경희대 동기이자 신인상 경쟁을 벌였던 김종규가 역대 최고액인 12억 7900만 원이라는 초특급 대우를 받으며 DB로 이적한 반면, 김민구는 KCC와 최저 연봉(3500만 원)에 계약한 후 사인&트레이드를 통해 DB 유니폼을 입어 극명한 대조를 이뤘다.

하지만 이대로 사라질 재능이 아니었다. 김민구가 지녔던 역대급 재능은 장점만큼은 확실히 살려줬던 이상범 감독을 만나 다시 꽃을 피웠다. 부상 여파로 1대1 상황에서의 순간적인 방향 전환은 루키 시즌에 비할 수 없었지만, 스크린을 받은 후 던지는 무빙슛이나 2대2 전개 등 ‘감각’을 바탕으로 한 공격은 여전히 번뜩였다.

2016-2017시즌 평균 4.1점(그마저도 14경기 출전에 불과했다)이 부상 이후 최고 기록이었던 김민구는 DB에서 치른 2019-2020시즌에 37경기 평균 19분 26초 동안 7점 2.7리바운드 2.8어시스트 1.1스틸이라는 쏠쏠한 활약을 펼쳤다. 부상 이후 15점을 넘긴 적도 없었는데 DB 이적 후에는 2경기에서 20점 이상을 기록하며 재기를 알렸다.

프로는 결국 가치로 말하는 것. 최저 연봉의 굴욕을 겪었던 김민구는 1년 만에 여러 팀이 계산기를 두드리게 만드는 선수가 됐고, 현대모비스와 2년 2억 3000만 원에 계약을 맺었다. 이전 시즌 연봉에 비하면 약 7배에 가까운 계약 규모였고, 557.1%는 김우람의 400%(3800만 원→1억 9000만 원)를 훌쩍 뛰어넘는 역대 최고 인상률이었다.

계약 직후 “내 잘못으로 사고가 났었고, 많은 시간 동안 힘들었다. 첫 FA 때 힘들어서 그만둘 생각도 했었는데 이상범 감독님이 기회를 주셔서 감사했다. 이번에는 느낌이 조금 다른데 기분이 좋긴 하다. 다만, 현재에 안주해서는 안 된다. 1년 전과 같은 자세로 진지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겠다”라는 각오를 남겼던 김민구는 2020-2021시즌 48경기 평균 19분 42초 동안 6.3점 3점슛 1개 2.8리바운드 2.1어시스트를 기록했다. 이후 계약 만료를 1년 남겨두고 은퇴를 선언했다.

‘만년 유망주’ 꼬리표 떼니 빛과 소금이 됐다

이상민 시대 이후만 놓고 본다면, 2019년은 KCC에 구단 역사상 전례 없는 격변기였다. 2018-2019시즌 초반 추승균 감독이 지휘봉을 내려놓은 KCC는 스테이시 오그먼 코치가 감독대행을 거쳐 정식 감독을 맡으며 시즌을 매듭지었지만, 명가 재건을 위해선 체질 개선이 필요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이상민-추승균의 뒤를 잇는 프랜차이즈 스타였던 하승진, 전태풍과의 FA 계약을 포기한 이유였다.

KCC는 FA 최대어 김종규를 중심으로 팀을 재건하겠다는 계획을 세웠지만, DB와의 경쟁에서 밀리며 뜻을 이루지 못했다. “KCC가 마음먹고 들어오면 이길 수 없다”라는 FA 속설이 뒤집힌 몇 안 되는 사례였다.

결국 KCC는 외부 FA 가운데 최현민, 한정원, 정창영을 영입하는 데에 그쳤고, 팀에 큰 영향을 끼칠 정도의 전력 보강은 아니라는 평가가 주를 이뤘다. 이 가운데 정창영은 유망주 꼬리표를 떼지 못한 선수였다. 오세근-김선형-최진수가 1~3순위로 지명됐던 2011 드래프트에서 8순위로 LG 유니폼을 입었지만, 7시즌을 치르는 동안 평균 20분 이상을 소화한 시즌이 한 번도 없었다. 설상가상 생애 첫 FA를 앞둔 2018-2019시즌은 22경기 평균 7분 18초에 그쳤다.

LG는 시장의 평가를 받아보라며 정창영을 격려했고, 정창영도 새로운 환경을 원했다. “영입의향서 제출 기간 내내 폐인처럼 지냈다. 2주가 지난 후 한 번에 발표되는 방식이었지만, 혹시나 해서 잠도 못 자고 핸드폰만 보고 있었다. 모르는 번호로 전화와도 다 받았는데 대출 상담 전화였다(웃음). 마지막 날 KCC에서 영입의향서를 제출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너무 감사했다. 가서 죽기 살기로 해야겠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정창영의 회고다.

불미스러운 일을 겪은 후 천신만고 끝에 사령탑으로 돌아온 전창진 감독은 독하게 정창영을 조련했다. 이정현, 송교창 등 화려한 역할을 맡길 선수는 많았던 만큼 정창영이 수비, 리바운드, 궂은일 등 그간 생소했던 역할에 집중하길 바랐다.

‘죽기 살기’로 이적한 정창영은 각오를 실천으로 옮겼다. 뚜렷한 색깔이 없었던 장신 가드에서 악착같은 1대1 수비에 한 방(3점슛 성공률 43.7%)을 지닌 3&D 유형으로 변신한 것. 정창영이 공을 따내기 위해 몸을 던지는 모습을 본 임원이 일어나 박수를 보낸 것은 KCC에 남은 전설 같은 일화다.

별명도 ‘만년 유망주’에서 ‘빛과 소금’으로 업그레이드된 정창영은 KCC 이적 후 2번째 시즌이었던 2020-2021시즌 54경기 평균 24분 24초를 소화하며 8.2점 3.8리바운드 1스틸로 활약했다. 데뷔 후 첫 전 경기 출전이었으며, 평균 20분 이상을 소화한 것도 처음이었다.

커리어하이 시즌을 만든 정창영은 기량발전상을 수상했고, KCC도 간판이 현대에서 KCC로 바뀐 이후 첫 정규시즌 우승을 차지했다. 이어 최준용을 영입한 2023-2024시즌에 챔피언결정전 우승을 달성하며 명가의 부활을 알렸고, 주장 정창영은 ‘슈퍼팀’을 대표해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리며 대표적인 저비용 고효율 성공 사례로 우뚝 섰다.

#사진_점프볼DB(문복주, 유용우, 박상혁 기자), KBL PHOT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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