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맨이라 불린 사나이 "벤치만 있다 끝낼 순 없겠더라고요"

최창환 기자 / 기사승인 : 2022-01-14 06:0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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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프볼=최창환 기자] ‘슈퍼맨’이라 불리는 등 화려한 동기들 속에서도 존재감을 남겼지만, 김재환의 커리어는 예상보다 빨리 마침표를 찍었다. 데뷔 시즌 가능성을 보여줬지만, 애석하게도 데뷔 시즌이 커리어하이로 남았다. 하지만 인생의 커리어하이는 이제부터가 아닐까. 슈퍼맨이 변신에 능했듯 김재환 역시 선수, 매니저를 거쳐 체육교사로 변신을 거듭해왔다. 시작이 히어로무비였다면, 속편은 휴머니즘이다.

슈퍼맨 더 비기닝

2007 신인 드래프트는 KBL 판도를 뒤흔들만한 유망주들이 대거 참가, 일명 ‘황금 드래프트’로 불렸다. 실제 2007 드래프티 김태술, 양희종, 정영삼, 박상오, 이광재, 김영환, 함지훈 등은 화려한 커리어를 쌓았고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스타들도 있다. 모든 선수가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건 아니다. 지명 여부가 불투명했던 이들에겐 드래프트 보드에 이름표가 하나씩 채워지는 게 이루 설명할 수 없는 압박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연세대 출신 빅맨 김재환도 이 가운데 1명이었다. “친구들은 다 앞에서 뽑혔는데 저만 계속 안 불리니 별별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제 군대 가야 하나? 엄마, 아빠한테 뭐라고 말씀드려야 하지?’ 싶기도 하고, 응원해주러 온 후배들도 눈에 들어오고….”

포기하려던 찰나, 옆자리에 앉아있던 신제록이 김재환을 툭툭 쳤다. “너 불렀잖아. 빨리 뛰어나가.” 강양택 서울 SK 감독대행(현 KCC 코치)이 김재환을 20순위로 지명한 것.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단상 나가는 길에 부모님을 찾았는데 엄마가 눈물을 뚝뚝 흘리고 계시더라고요. 죄송했죠. (감사한 마음이 먼저 들었던 게 아니고요?)동기들은 다 일찍 뽑혀서 스포트라이트 받았잖아요. ‘나도 열심히 해서 일찍 지명됐으면 마음고생 안 하셨을 텐데…’라는 생각에 죄송한 마음이 앞서더라고요.”

한국농구의 가드 계보를 이을 것이란 극찬을 받은 김태술과 함께 입단,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했던 김재환은 실제로 2007-2008시즌 1라운드에 코트를 밟지 못했다. 2라운드 첫 경기였던 2007년 11월 11일 부산 KTF(현 KT)전에서 뒤늦은 데뷔 경기를 치렀다. 4쿼터 막판 단 19초만 소화했지만, 김재환의 가슴에 불씨를 지피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외국선수 2명 다 파울아웃, 파울트러블에 걸린 상황이었어요. 김진 감독님이 갑자기 들어가라고 하시더라고요. 그 시간이라도 뛴다는 게 너무 좋았죠. 남들은 외국선수 땜빵이라 봤을지 몰라도 ‘나도 뛸 수 있구나’란 생각에 행복하더라고요.”

사흘 후 열린 원주 동부(현 DB)와의 경기에 결장한 후 대구 원정길로 향한 김재환은 불쑥 김진 감독의 방으로 찾아가 “이동준 한 번 막아보겠습니다”라며 호기를 부렸다. 신인의 패기에 김진 감독은 웃었지만, 사무국장은 “신인이 여기까지 와서 그런 식으로 얘기하는 건 예의에 어긋나는 짓”이라며 나무랐다. 김재환은 “한 번만 기회를 주세요”라며 물러서지 않았다. “꼭 상대가 이동준이어서 말씀드렸던 건 아니에요. 데뷔 경기를 치러서 그 맛을 알았는데 그 다음 경기에서 또 결장했잖아요. 팀이 모비스(현 현대모비스)와 트레이드한 날이기도 했고요. ‘친구들은 다 잘 뛰고 있는데 나는 언제 저렇게 뛰나?’ 싶었어요. 벤치만 있다 끝낼 수는 없겠다는 생각에 찾아간 거죠.”

간절함이 통했던 걸까. 김진 감독은 이내 “준비하고 있어”라며 OK 사인을 내렸다. 밤잠을 설치고 맞은 대구 오리온스전(현 고양 오리온). 1쿼터 중반 벤치에 대기하고 있던 김재환은 이내 몸을 풀었다. 2명 모두 뛰는 1쿼터와 달리 2쿼터는 외국선수가 1명만 뛴 시절이었던 만큼, 곧 투입될 거란 직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문경은 감독님이 당시 최고참이었는데 ‘너 왜 몸 풀고 있냐?’라고 하시더라고요. ‘감독님이 준비하라고 하셨어요’라는 말에 ‘그냥 한 소리겠지’라고 하셨지만, 김진 감독님은 2쿼터 멤버 정하실 때 제 이름을 부르셨어요. 다들 깜짝 놀랐죠. ‘이동준 죽이지 못하면 못 살아남겠구나’ 싶더라고요(웃음).”

그렇게 맞이한 데뷔 후 2번째 경기. 김재환은 블루워커로서 존재감을 발휘했다. 리온 트리밍햄을 상대로 데뷔 첫 블록을 기록하는 등 16분 35초만 뛰고도 6리바운드에 1스틸, 1블록을 곁들였다. 리바운드는 팀 내 국내선수 중 가장 많은 수치였다. 화려한 선수가 많아 궂은일을 도맡을 선수가 필요했던 SK에서 김재환이 맡아야 할 역할이 분명하게 드러난 경기였다. 이를 기점으로 팀 내에서 꽤 비중 있는 식스맨으로 자리 잡았다. 37경기에서 평균 15분 15초를 소화하며 SK가 5시즌 연속 플레이오프 탈락 잔혹사를 끊는 데에 힘을 보탰다. 평균 출전시간은 ‘황금 드래프트’를 거쳐 데뷔한 신인 가운데 10번째로 높았다. 2008년 1월 9일, 다시 찾은 대구체육관에서 문경은의 3점슛이 림을 맞고 나오자 이를 풋백덩크슛으로 연결하는 등 인생경기를 치르기도 했다. “신인 때라 흐름을 보고 리바운드에 참여한 게 아니라 누가 슛을 던지면 반사적으로 골밑에 들어갔죠. ‘못 잡으면 쳐내기라도 하자’라는 생각으로 점프한 건데 엉겁결에 덩크슛으로 연결됐어요. 노렸다면 더 멋있게 덩크슛을 했겠죠(웃음). 데뷔 시즌이 선수 인생을 돌아보면 제일 좋았던 기억으로 남아있어요. 오랫동안 알고 지낸 (방)성윤이 형, (김)태술이랑 함께 뛰어서 더 수월했던 것 같아요. 멋 모르게 뛰었고, 무서울 것도 없었죠. ‘열심히 하면 기회가 온다’라는 걸 새삼 느낀 시즌이기도 했고요.”

슈퍼맨 수트를 벗고 수트를 입다


2007-2008시즌은 김재환에게 분신과도 같은 별명이 생긴 시즌이다. 당시 SK는 유니폼에 이름 대신 선수들의 별명을 새기는 마케팅을 전개했는데, 김재환의 별명은 ‘슈퍼맨’이었다. 영화 슈퍼맨 주인공인 클락 켄트와 비슷한 이미지 때문이었다. 올스타게임에서는 ‘슈퍼맨’ 복장을 입고 국내선수 덩크콘테스트에 나서 시선을 끌었다. NBA 스타 드와이트 하워드가 선보인 슈퍼맨 퍼포먼스에 비할 순 없었지만, 적어도 KBL에서는 ‘김재환=슈퍼맨’이 각인된 무대였다. “신인은 하라면 다 해야 하는 시기였어요. 덩크콘테스트만 나가는 줄 알았는데 그날 아침에 구단 홍보팀에서 쫄쫄이를 주더라고요. ‘쪽팔려서 어떻게 입어요’라고 했는데 결국 입었죠(웃음). 그래도 단번에 이미지가 각인되니 좋더라고요. 다른 팀 형들도 ‘슈퍼맨’이라고 불러주셨으니까요.” 김재환의 소셜미디어 아이디까지 슈퍼맨으로 된 계기다.

예상보다 많은 기회를 받으며 데뷔 시즌을 치렀던 김재환은 곧바로 입대, 상무에서 군 복무를 했다. SK로선 김재환이 상무에 갈 수 있는 좋은 기회였고, 2008 신인 드래프트 2순위로 김민수를 선발해 교통정리도 필요했다. 선수 인생이 꼬인 건 군 제대 후였다. 낯설었다. 김재환이 자리를 비운 사이 SK의 사령탑은 신선우 감독으로 바뀌었고, 빅딜을 통해 김태술 대신 주희정이 자리하고 있었다. “신선우 감독님의 농구는 작전 하나에도 여러 가지 옵션이 있었어요. 그걸 다 숙지해야 해서 공부를 많이 했지만, 쉽지 않았죠. 선수 구성이 많이 바뀌기도 했고요.” 2010-2011시즌 개막 직전에는 예기치 않은 악재도 겹쳤다. 무릎부상을 입어 컨디션 조절에 어려움이 따른 것. 시즌 개막에 몸을 맞춰야 한다는 조급함은 김재환의 몸을 더욱 악화시켰고, 결국 복귀 시즌 23경기 출전해 평균 5분 55초를 소화하는 데에 그쳤다. “길게 내다보고 재활했어야 하는데 아프다고 하면 배제될 거란 걱정이 앞섰죠. 어떻게든 개막일에 맞춰야 한다는 생각만 하다 보니 더 무리하게 되더라고요.”

문경은 감독대행이 지휘봉을 잡은 2011-2012시즌에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김재환은 1군보다 D리그에 머무는 날이 더 많았고, SK와의 계약도 만료됐다. “1군 10분 뛰고, 다음 날 D리그 또 뛰다 보니 쉬는 날이 없었죠. 그래도 힘들다는 말은 못하겠더라고요. 그러는 사이 심적으로 지쳐갔던 것 같아요. 지금 생각하면 바보 같은 짓인데 아프다고 하면 경기장에 못 가잖아요. 그러면서 계속 뛰다 보니 무릎 외에 아픈 부위도 점점 늘어나더라고요.” 결국 김재환은 2011-2012시즌을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SK와 재계약할 수도 있었지만, 냉정히 말해 김재환의 자리는 빅맨 중에서도 3, 4번째 위치였다. 대학 선배이자 팀 동료이기도 했던 문경은 감독은 다른 팀을 알아봐주겠다고 했지만, 김재환은 “그럴 거면 빨리 그만두고 다른 길을 찾자”라는 아버지의 충고와 함께 미련을 접었다.

SK와의 인연이 그대로 마무리된 건 아니었다. 석사를 거쳐 박사과정을 준비하려던 찰나, 문경은 감독은 김재환에게 매니저를 제안했다. 매니저의 업무 특성상 공부를 겸하는 게 힘들 거라 판단한 김재환은 정중히 거절했지만, SK 사무국은 “박사과정을 도와주겠다”라며 다시 러브콜을 보냈다. 결국 김재환의 복장은 유니폼에서 수트로 바뀌었고, 2012-2013시즌에 SK의 창단 첫 정규리그 1위를 함께 했다. “SK에서 배려를 많이 해주셨어요. 대학원 가는 날은 업무를 조정해주셨고, 사무실에서 과제도 할 수 있었죠. 다른 팀 매니저들이 ‘쟨 뭔데 저렇게까지 해주냐’ 싶었을 거예요. 문경은 감독님이 ‘이런 건 안 해도 돼. 공부 잘해서 나도 김 박사 키웠다는 소리 좀 들어보자’라고 하시더라고요(웃음). 사실 매니저는 힘든 업무가 많은데 저는 그렇게 힘든 일은 없었죠. 매니저 맡았던 동안 팀 성적도 좋았고요. ‘김재환 은퇴하니까 정규리그 우승한다’라고 놀리는 사람도 있었지만, 팀 성적이 좋다 보니 대학원 공부할 때 눈치도 덜 볼 수 있었죠.”

또 한 번의 변신, 그리고 인생 선배


김재환은 2013-2014시즌을 끝으로 SK 매니저를 그만뒀다. 전력분석원을 거쳐 코치까지 올라갈 수 있는 시스템이었지만, 장고 끝에 공부를 택했다. “SK에서 배려해주셨지만 양쪽 모두 최선을 다할 수 없더라고요. 공부에 올인하는 것도 아니고, 일은 박사과정 핑계로 빠지는 것 같고…. 그러던 중 졸업시험에서 떨어졌어요. 그걸 계기로 ‘하나 때려치우고 하나에 올인하자’라며 고민하게 됐죠. 결정하는 데에는 대학교수인 아버지 영향이 컸어요. 매니저-전력분석원을 거칠 수 있는 팀이어서 많이 고민했지만, 박사과정 밟고 멋있는 사람이 돼 농구장으로 돌아오고 싶었어요.” 공부에 몰두한 김재환은 약 1년 뒤 ‘한국프로농구 활성화 방안 연구’ 논문을 썼고, 용인대 대학원에서 박사학위 취득이라는 꿈을 이뤘다.

이후 모교 연세대 박사과정을 밟겠다는 새로운 목표를 세웠다. 논문 주제까지 정해놓고 시간제 강사, 유소년 농구교실, 방과 후 체육교사를 맡는 등 24시간이 모자란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2개월 주행거리가 1만 km에 달할 정도였다. 스스로는 또 다른 꿈을 향해 달려가고 있던 시기였지만, 부모 입장에서는 새벽에 나가 저녁에 들어오는 아들의 일상이 달갑지 않았다. “2017년초였어요. 부모님이 언제까지 그렇게 살 수 있을 것 같냐고 하시더라고요. 일 들어올 때 가리지 않고 해야 한다고 말씀드렸더니 부모님은 안정적인 직업을 찾아야 한다고 하셨죠. 그때 권유해주신 게 선생님이었어요.” 애초 설정한 목표가 아니었기에 방법도 몰랐다. 뒤늦게 경기도 교육청 홈페이지를 뒤졌지만, 2월 중순이었던 터라 대부분의 학교가 이듬해 교사 임용까지 마친 터였다.

그때 운명처럼 인연이 닿았던 학교가 현재 근무 중인 비봉고교였다. “‘없나 보다’하고 있던 찰나에 이 학교만 서류접수가 가능한 걸 발견했어요. 서류 넣고 면접 봤는데 덜컥 합격이 됐죠. 2월 말에 곧바로 부임했어요. 바로 1학년 담임까지 맡게 됐죠.” 선수 경력이 화려하지 않았기에 곧바로 ‘전 프로농구선수 김재환’을 알아본 학생은 없었다. 하지만 교사치곤 키가 컸기 때문일까. 합리적 추리를 하는 학생들이 꼬리를 물었다. “과거에 대해선 전혀 얘기를 안 했어요. ‘운동하셨죠?’라고 물어봐도 아니라고 딱 잡아뗐죠. 그런데 유튜브에 영상이 남아있더라고요. 아이들이 검색하는 바람에 다 들통났죠.” 김재환이 농구선수 출신이었다는 사실이 알려진 후, 비봉고교 내에는 점차 농구를 즐기는 학생이 늘어났다. 김재환이 따로 만든 아침 운동반에 들어와 농구를 배우는 학생들이 있는가 하면, 김선형의 서커스샷을 따라 하는 학생도 생겼다. “반마다 스테픈 커리, 르브론 제임스 놀이하는 아이들이 있잖아요. 그런데 언제부턴가 KBL 선수들을 흉내 내면서 맞춰보라고 하더라고요. 농구장 다녀왔다며 자랑하는 아이도 있어 내심 뿌듯했죠. 아이들이랑 있다 보면 좀 피곤하긴 한데(웃음), 웃고 떠들다 보면 금세 잊히더라고요. 아이들에게서 밝은 기운을 받을 수 있다는 게 특히 좋은 것 같아요.”

교사로 제2의 인생을 만들어가고 있는 김재환은 향후 여건이 닿는다면 동아리 농구부를 만들어 학생스포츠클럽에 학생들을 출전시켜보고 싶다고 한다. “승패를 떠나 농구의 맛, 희열을 느낄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싶어서요”라는 게 김재환의 설명이다. 하지만 궁극적인 목표는 따로 있었다. 언제든 고민 상담을 해주고, 때론 직언도 해줄 수 있는 인생 선배. 한때 ‘슈퍼맨’이라 불렸지만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간 김재환이 그리는 인생 2막이었다. “아이들보다 나이만 많을 뿐이에요. 고리타분한 사람이 되긴 싫더라고요. 90도로 인사하지 말라고 했어요. 제가 손 흔들면서 ‘안녕’하면 아이들도 똑같이 손 흔들면서 인사해요. 옆에 있는 선생님이 혼냈지만 ‘제가 그렇게 하라고 했어요’라고 말씀드렸어요. 반말만 하지 말라고 했죠(웃음). 언제든 편하게 대화하고, 고민 상담해줄 수 있는 인생 선배가 되고 싶어요. 항상 좋은 말만 해주는 게 아니라 때론 ‘네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거야’라고 직언도 해줄 수 있는 인생 선배요.”

코피 터질 정도로 강렬했던 김태술의 패스


“소문으로만 듣던 친구들이랑 대학에서 같이 운동해보니까 확실히 클래스가 다르더라고요. 특히 태술이 패스는 언제 올지 몰라서 생각할 게 너무 많았죠. 청소년대표 때는 픽앤롤 하다가 타이밍 놓쳐서 공 맞고 코피까지 흘렸어요(웃음). 프로에서도 태술이랑 뛸 수 있어서 좋았죠. 대학 동기 중 (양)희종이가 제일 오랫동안 선수 생활하고 있는데 전 태술이가 제일 오래 할 줄 알았어요. 몸이 아니라 센스로 농구하는 선수였으니까요. 그건 나이 먹어도 어디 안 가거든요. 그렇게 은퇴할 줄은 생각도 못했죠. 동료가 안 좋았다기보단 태술이와 맞지 않는 선수 구성에서 뛰었던 영향이 있지 않았을까 싶어요. 스크린 걸어주고 잘 달려주는 빅맨이랑 잘 맞는 가드거든요. 말년에 김종규가 있는 DB에서 제 역할을 했죠. 파트너를 잘 만났다면 더 오랫동안 뛰었을 것 같아요. 제 은퇴는 별로 아쉽지 않았어요. 오히려 매니저 하면서 ‘내가 진짜 저런 선수들이랑 같이 뛰었다고? 저 외국선수들이랑 몸싸움을 했었다고?’ 싶었죠. 그런데 태술이 은퇴 소식 들었을 땐 기분이 이상하더라고요. 코치든 뭐든 농구와 관련된 일을 계속할 줄 알았는데 방송 쪽으로 가서 인정을 받고 있네요. 역시 패스처럼 예측할 수 없는 친구인 것 같아요(웃음).”

#사진_유용우 기자, KBL PHOT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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