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진석의 농담(籠談)] 은퇴의 변

기자 / 기사승인 : 2022-01-12 20: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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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기의 『갈채와의 밀어』 다시 읽기⑤
▲김영기는 1960년 1월 서울신문사에서 제정한 제6회 한국체육상을 수상했다. 『대한뉴스』화면 캡처.

 

김영기는 1966년 2월 28일자 경향신문 8면에 ‘은퇴의 변’을 발표했다. 이 글을 통해 은퇴할 무렵 김영기의 입장을 유추해볼 수 있다. 그가 공식적으로 내세운 은퇴 이유는 대략 세 가지다. 첫째 부상, 둘째 체력 저하, 셋째 후배들의 발전을 위한 선택.

김영기는 자신이 하고많은 운동 가운데 농구를 선택한 이유가 ‘상호 협조하는 묘미와 신사적인 경기’였기 때문이라고 소개했지만, 곧 농구가 “신사답고 깨끗한 스포츠로 생각한 것은 커다란 잘못이었다.”라고 털어놓는다. 그는 13년 동안 과격한 운동을 하면서 양 팔뚝이 모두 부러졌고 양쪽 발목이 여섯 번이나 부러졌으며 얼굴에는 다섯 곳이나 꿰맨 자국이 남았다고 했다. 그는 178㎝, 67㎏의 신체조건이 농구에는 맞지 않았는데 작은 체격을 최대한 이용하려다 보니 무리한 동작을 일으켜 남보다 부상이 잦았다고 설명했다.

김영기가 은퇴한 나이는 지금 기준으로 보면 너무나 이르다. 그러나 그가 활약하던 시절에는 20대 후반이 되면 ‘노장’ 대접을 받았다. 선수들의 체력을 관리하는 과학적인 연구도 부족했다. 훈련 방식도 세련된 편은 아니었다. 한국농구, 특히 남자농구가 미국인 코치 찰리 마콘과 제프 고스폴을 통해 현대농구를 경험하는 1966~1968년 이전까지 선수들의 훈련방법은 매우 뒤떨어져 있었다. 훈련 시간도, 방법도 정해진 매뉴얼 없이 코치의 결정에 따랐다. 체력훈련은 장거리 달리기를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이 역시 주먹구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콘과 고스폴의 지도를 받은 선수들은 김영일, 김인건, 신동파, 이인표, 방열, 김무현, 박한, 최종규, 유희형, 신현수 등 당대의 스타들이었다. 재능으로 충만한 이들은 김영기의 맹활약으로 인해 고조된 국민들의 농구에 대한 관심과 미디어의 활발한 보도 및 중계 문화를 유산으로 물려받은 세대였다. 또한 존 번과 내트 홀맨, 찰리 마콘과 제프 고스폴로 이어지는 일련의 미국인 코치들이 전한 선진 농구를 직접 배우고 경기에 활용하면서 내면화한 그룹이기도 하다. 이들은 훗날 1970년 아시안게임과 1969년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한국 남자농구를 우승으로 이끈다. 광복 이후 나타난 첫 ‘황금세대’라고 할 수 있다. 나중에 설명하겠지만, 이들을 이끌고 아시아 정상 등정이라는 숙원을 이룬 코치가 바로 김영기다. 김영기는 마콘과 고스폴의 지도를 경험하지 못했지만 존 번에게서 배운 새로운 농구의 개념과 정신을 후배 세대에게 전수하는 한편, 후배들이 익힌 선진농구를 한국적으로 변용하여 한 시대를 호령하는 강력한 팀으로 조련해낸 우수한 지도자이기도 하다.

마콘은 아주 중요한 시기에 우리 대표 팀을 맡았다. 마콘이 국가대표팀 코치로 부임할 무렵 한국 남자 농구의 경기력 수준은 아시아에서 3~4위권이었다. 필리핀과 일본, 대만이 정상을 다투고 있었다. 필리핀은 1960년 1월에 자국의 수도인 마닐라에서 열린 제1회 아시아남자농구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한 뒤 1963년 12월 대만의 타이베이에서 열린 2회 대회에서도 우승하였다. 일본은 1965년 12월 말레이시아의 쿠알라룸푸르에서 열린 제3회 대회에서 필리핀을 누르고 아시아를 제패하였다. 대만은 1, 2회 대회에서 모두 준우승을 기록하였고, 3회 대회에서 5위로 밀려났다. 반면 한국은 1회 대회 4위, 2회 대회 3위, 3회 대회 3위를 기록하는 등 정상과는 거리가 있었다. 한국 남자농구의 간판 역할을 한 김영기가 은퇴한 뒤로는 대표 팀을 재편할 필요도 있었다. 김영기는 경기를 조율하는 포인트 가드이자 주된 득점 선수였으므로 그의 역할을 대신할 선수들의 성장이 필요했다. 김영기가 물러난 대표 팀에서 경기 조율의 책임은 김인건과 유희형이 맡고 득점 전문 선수로는 후일 ‘아시아의 득점 기계’로 명성을 떨치는 신동파가 두각을 나타냈다. 신동파는 제4회 아시아남자농구선수권대회 취재단이 선정하는 베스트5 선정 투표에서 총 31명의 투표 가운데 29표를 얻어 최우수선수로 뽑히면서 한국남자농구 부동의 에이스로 자리를 굳혔다.

한국남자농구 대표 팀 최초의 미국인 코치 마콘을 발탁하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한 인물로 조동재를 들 수 있다. 1956년부터 농구협회의 기획 및 국제 업무를 맡아 본 조동재는 1964년 대한농구협회 회장단에 농구선수 출신의 미군 장교를 코치로 활용하는 방안을 제안하였다. 협회 부회장 이성구와 전무이사 김용무 등이 이에 동의하였고 미8군에서 스포츠 관계 업무를 맡아 보던 손동욱을 통하여 마콘을 농구협회에 소개하였다. 농구협회는 마콘에게 한국 대표 팀의 선수 구성과 훈련 등 코치로서 전권을 부여하였다. 예를 들어 농구협회는 1966년 6월 13일 열린 이사회에서 아시아경기대회에 파견할 대표선수 후보 15명을 선정하여 발표하였다. 이들은 1차 후보 35명 가운데 마콘의 개인 평가를 토대로 선발된 선수들이었다.

마콘의 지도를 받은 우리 선수들은 신선한 충격을 받는다. 마콘은 우리 선수들이 이전까지 받은 훈련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훈련하고 경기했다. 미국인 코치들이 당시의 한국 코치들과 가장 달랐던 부분은 스케줄에 따라 집약적인 훈련을 시킨다는 데 있었다. 특히 훈련 시간은 한국 코치들에 비해 매우 짧아서 선수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그러나 기본기를 강조하고 수비 기술에 중점을 둔 훈련의 질은 매우 높아서 두 시간 남짓 훈련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선수들이 느끼는 피로감이나 성취감은 서너 시간 훈련했을 때에 못지않았다. 이에 대해 김인건은 “그 동안은 보통 3시간에서 3시간 30분을 훈련했는데 미국 코치들은 2시간에 전 과정을 끝냈다. 몸을 푸는 시간까지 합해도 2시간 30분이면 족했다. 대신 훈련 강도가 높았다.”고 증언하였다. 이인표와 최종규의 증언도 있다.

“국내 지도자들이랑 다른 게, ‘스케줄’이란 게 나오니까…. 두 시간이면 두 시간, 뭐는 몇 분식으로 100퍼센트 여기 맞춰서 해라 하고…. 과거 분들은 네 시간도 좋고 다섯 시간도 좋고…. ‘야, 오늘 백 바퀴 돌아 봐라….’ 이런 식이야. ‘줄넘기해라.’ 그러면 한 시간도 좋다 식이고. 우리가 정식 스케줄이라는 걸 미국 코치한테서 처음 받아본 건데, 이런 식으로 하니까 자기가 훈련 시간만큼은 힘을 풀로 발휘할 수 있고, 그런 게 달랐지요.” (이인표)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마콘이란 사람이 참 대단한 사람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내가 대학교 3학년 때 처음으로 대표선수가 됐는데, 그 전까지는, 물론 이경재 선생님이나 이성구 선생님도 마찬가지로 다들 훌륭한 선생님들이셨지마는 포 맨 플레이, 스리 맨 플레이, 투 맨 플레이 아니면 속공 같은 거, 이런 걸 어떻게 해야 하고 그런 걸 배워 본 적이 없어요. 그분들은 그냥 ‘뛰어.’, ‘야, 슬라이딩해.’, 그런 식으로 정신력, 일본식으로 ‘도꾸다이’, 체력, 리바운드, 그런 식으로 배웠지, 플레이를 해나가는데 하나씩 의미를 생각하면서 하는 게 없었다 말이지….”(최종규)

이들은 행운을 타고난 사람들이었다. 김영기가 이들과 같은 세대였다면 선수생활을 더 오래 했을지도 모른다. 전대미문의 테크니션이라는 평가를 받은 김영기가 미국인 코치의 지도를 받으며 선수로서 능력에 합당한 역할을 요구받았다면 우리 농구의 역사가 지금과는 많이 달랐을 수 있다. 그러나 김영기는 오직 혼자만의 힘으로 미지의 영역을 개척해 나가야 했다. 그나마 존 번의 지도를 받은 경험이 그에게는 엄청난 자산이 되었다. 김영기는 두고두고 존 번의 영향을 이야기했는데, 경향신문에 실린 기고문에도 “병아리 농구 선수를 면치 못하고 있을 때 아시아재단의 주선으로 유명한 미국인 코치 번 씨에게 지도를 받게 된 것이 나의 농구에 커다란 계기를 이루게 해주었다.”고 썼다. 필자도 2010년 3월 5일 김영기를 면담할 때 선명한 증언을 들었다.

“내가 드리블을 잘한다는 말을 들었지만 원래부터 잘했던 건 아니에요. 그때만 해도 선수가 드리블을 하면 선생님한테 혼이 났어. 패스를 해야지, 드리블을 하면 팀플레이가 안 된다면서. 그런데 존 번 코치는 그걸 하게 하더라고. ‘해 봐라’ 말이지. 그때 내가 드리블이 많이 늘었어. 그래서 미국 코치가 뭔가 다르다는 걸 알게 됐지. 그게 나한테는 아주 큰 계기가 된 거야.”

김영기의 남다른 점은 배운 것을 그대로 사용하지 않고 자기만의 것으로 소화한 다음 다양한 방식으로 변용했다는 데 있다. 존 번의 지도를 받은 다음 김영기는 “남이 하지 않는 새로운 농구를 해보겠다고 마음먹었다.”고 한다. 그는 1957년 봄 미국의 농구 잡지를 읽고 알게 된 ‘트위스트 슛’과 드리블 기술을 열심히 몸에 익혀 여름 시즌 경기에 출전한다. 야심차게 새로운 기술을 구사했지만 돌아온 것은 코치와 선배들의 무서운 혹평뿐이었다. 훗날 새로운 스타일의 농구로 인정받았지만 처음에는 그저 엉뚱한 짓으로 받아들여졌을 뿐이다. 김영기의 트위스트 슛은 한동안 다른 선수들이 흉내 내기 어려운 고난도의 기술로 통했다. 김영기는 “다른 선수들이 좀처럼 흉내 내지 못하는 것은 점프력과 허리힘이 부족하기 때문”이며 자신은 고등학교 1학년 때 스피드 스케이팅 선수로 대회에 출전한 일도 있어 기초체력이 뒷받침되었다고 설명했다.

김영기가 밝힌 또 하나의 은퇴 이유는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그는 현역에서 물러나는 이유가 오직 체력의 한계 때문만은 아니며, 자신을 중심으로 한 ‘스타 플레이’가 팀 동료들로 하여금 지나치게 자신에게 의존하게 하였으며 그 결과 그들의 실력이 위축되어 충분한 실력을 발휘할 수 없는 점을 지적하였다. 그는 제 1, 2, 3회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자신이 우수선수로 뽑힌 것은 영광이지만 한국 팀이 아시아 정상을 제패하지 못한 점은 부끄럽다고 했다. 또한 이 숙원을 이루지 못하고 은퇴해 가슴 아프다고 고백했다. 그러면서 “내가 물러나도 방열, 김무현, 정진봉, 신동파 같은 선수는 노력만 하면 나보다 더 훌륭한 선수가 될 소질을 가졌다.”고 기대했다.

“나는 13년간의 선수생활 가운데 15회의 해외 원정을 통해 22만 마일을 볼을 동무 삼아 다녔고 비행기 안에서 5백 시간 이상을 지냈다. 내가 공식 경기에서 넣은 골은 2만 점이 넘고 연습까지 통한 슈팅 골 수는 3천만 개가 넘으며 리바운드로 점프한 높이는 부산에서 신의주에 이르는 3천리를 세워놓은 높이와 맞먹는다. 13년간의 내 선수생활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것은, 남은 내 팔과 발목을 부러뜨렸어도 나는 경기 중에 한 번도 남을 다치게 한 일이 없다는 점이다.”

허진석 한국체육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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