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진석의 농담(籠談)] 두 번 본 고려대 입학시험

기자 / 기사승인 : 2022-05-13 17:2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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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기의 『갈채와의 밀어』 다시 읽기㉖

▲고려대학교 재학 시절의 김영기. (뒷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 

 

학업과 선수생활의 병행은 평행으로 이어진 밧줄 사이를 오르내리는 것과 흡사했다. 밧줄에서 떨어지면 낙오자가 된다는 신념으로 두 줄 위에 올린 발을 헛딛지 않고 이어갔다. 하지만 학년이 올라갈수록 어렵고 힘들었다. 절친한 친구들은 학업이 끝나면 도서관으로 향했지만, 나는 체육관으로 향했다. 성적이 떨어지면 학업 줄에 매달렸고, 농구 기량이 부족하면 농구 줄에 매달렸다. 청소년 시절부터 비판력을 갖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비판의 역량은 사고력이 그 바탕이며, 생각의 힘은 충실한 학업과 독서 등으로부터 얻게 된다. 세상은 천태만상에 변화무쌍 그 자체이다. 무지의 상태에 빠지지 않으려면 운동 못지않게 학업에도 충실해야 한다. (방열, 『인생이라는 코트 위에서』 중)

농구협회에서는 1961년부터 1962년 제4회 자카르타 아시안게임에 출전할 대표후보선수를 선발하여 훈련시키고 있었는데 후보 선수 일원으로 선발된 나는 후보를 사퇴하고 대입시험을 준비하게 되었다. 국가에서 관리하는 시험에 모든 지원자가 전공과별로 시험을 치르고 그 성적을 바탕으로 원하는 대학을 선택 지원하여 체능시험을 치르도록 했다. 필기시험 성적과 체능시험성적을 합하여 당락을 결정하게 된다. 이듬해 1월 시행된 국가고시 시험 성적을 가지고 연세대 경영학과를 지원하여 무난히 합격해서 연세대 학생으로 다시 농구선수로서 활약하게 되었다. 농구 훈련은 당연히 각자 대학 수업을 다 마친 후 보통 야간까지 계속되었고, 특히 방학 때는 학교 체육관에서 합숙을 하며 하루 4회씩이나 고된 훈련이 반복되었다. (김인건 자필 수기, 2017년 7월 28일)

방열은 고등학교 3학년 마지막 학기를 대학입학시험 준비에 바쳤다. 당시 그의 집은 종로에 있었다. 어머니가 금정관이라는 요식업소를 운영하고 있었기에 공부하기 좋은 환경은 아니었다. 어머니는 신촌에 하숙방을 얻어 주었다. 방열은 학교와 하숙방을 왕래하며 4개월 동안 공부에만 몰입했다. 사정은 김인건도 비슷했다. 그가 대학에 진학하던 해에는 대학입학자격시험이 처음으로 시행되었다. 정부에서는 학과별 커트라인을 정해 통과하는 학생에게만 진학 기회를 부여했다. 전례가 없는 조치였기 때문에 운동을 하는 학생들은 준비가 부족했고 그 영향은 즉각적으로 나타났다. 이 해에 자격시험을 본 운동선수는 409명이었는데 이중 98명만 진학했다. 농구의 경우 34명 중 5명만 대학에 갔다. 김인건은 고등학교 졸업시험이 끝난 1961년 10월부터 자격시험을 치는 이듬해 1월까지 3개월 동안 공부에 매달렸다. 당시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면 운동을 그만둘 생각까지 했다고 한다.

김인건이 3개월 집중학습으로 연세대학교에 진학했다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 3개월 벼락공부로는 그때나 지금이나 대학에 갈 수 없다. 김인건은 나름대로 공부를 늘 염두에 둔 학생이었고 독서량이 많은 편이었던 데다 무엇보다도 수학에 특출한 재능이 있었다. 그는 교과서에 나오는 수학문제를 참고서 없이 술술 풀어냈다. 어느 날엔가는 수학선생이 수업 중에 학생을 칠판 앞으로 불러내 문제를 풀게 했는데 김인건도 불려 나갔다. 아무도 정답을 쓰지 못했지만 김인건은 공식을 척척 적어가며 정답을 써내 수학선생의 놀라움을 샀다. 참고서나 과외의 도움 없이 대학입학자격시험에 나온 문제를 풀어낼 수 있는 실력이 있었기에 3개월에 걸친 집중학습만으로 연세대학교에 진학할 수 있는 길을 열었을 것이다. 방열도 시험 때면 한 집에 몰려가 함께 공부하는 친구들이 있었다. 아무리 해도 안 되는 과목은 선배들에게 물어서 깨우쳤다.

방열과 김인건의 술회는 그들이 학생이던 시절 학교체육의 일면을 엿보게 한다. 방열이 학년이 올라갈수록 느낀 어려움, 즉 친구들은 도서관에 가는데 자신은 체육관에 가야 했다는 기억은 역설적으로 당시 학생 선수들의 학업에 대한 인식을 보여준다. 지금 우리 학생 선수들이 처한 환경은 방열과 김인건의 청소년기와 비교해 보아도 우려되는 부분이 적지 않다. 체육에 재능이 있는 학생들의 학습을 어떻게 보장해 주어야 할지를 놓고 어른들은 끝없이 논쟁을 거듭하고 있을 뿐이다. 가능해야 할 일들이 가능하지 않은 현실은 운동하는 학생들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고 있다. 필자는 우리의 가능하지 않은 일들이 여전히 가능한 일이라고 믿는다. 농구 현장에서 기자로 일하던 시절에 쓴 칼럼 한 줄이 생각난다.

서울 잠실학생체육관에서 열리는 95국제대학농구올스타전에 참가한 캐나다의 브리티시 컬럼비아 대(UBC) 선수 12명은 모처럼의 한국나들이를 즐기기 위해 오는 6일까지 기다려야 한다. 진급과 졸업여부가 달려 있는 학기말 시험을 치러야 하기 때문이다. 이 대학은 선수들이 한국에서 시험을 치르게 하기 위해 5일 시험지를 휴대한 부총장급 감독관을 서울에 파견한다. 캐나다 선수들은 경기가 끝나면 곧장 숙소인 올림픽 파크텔로 달려가 샤워를 마친 뒤 문을 걸어 잠그고 시험공부에 열을 올리고 있다. 필요 없는 전화는 사절, 쇼핑은 어림도 없는 일이다. 웨이트 트레이닝 장에 가장 먼저 모습을 나타내는 팀도 이들이다. 캐나다 선수들은 지난 1일 개막 리셉션에 모두 넥타이를 맨 정장차림에 단정하게 머리를 빗어 넘긴 모습으로 참석했다. 또 경기가 있는 날은 몸을 풀기에 앞서 반드시 태극기를 펴든 채 입장해 한국 팬들의 인기를 모으고 있다. 국내 대학농구코치들은 “학생 팀은 이래야 하는데…”라고 부러워하면서도 “우리 실정에선 불가능한 일”이라고 입을 모은다. 바른 길을 알면서도 ‘우리는 할 수 없다’는 자포자기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중앙일보 1995년 12월 4일자)

방열과 김인건의 사례를 통해 당시 운동을 하는 학생들이 아예 책을 놓아버리지는 않았으며, 그들 중 상당수는 학업 성적도 우수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김영기는 그 가운데서도 손에 꼽을 만큼 뛰어난 학생이었다. 『갈채와의 밀어』는 그가 고려대학교에 진학하는 과정에서 겪은 해프닝을 비교적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김영기의 고려대학교 진학에 얽힌 이야기는 따로 적어야 하겠지만, 입시 이야기는 여기서 하고 넘어가자. 김영기가 면접시험을 보던 날의 일이다.

“자네가 778번 김영기인가?”
“예!”
총장실에 앉은 시험관(試驗官)이 안경알을 번득이며 물었다. 다른 교수들도 매서운 눈초리로 김영기를 훑어보았다.
“자네가… 체육특기생으로 지원한 김영긴가?”
“예, 농구부에 지원했습니다.”
“그런데, 자네 성적이… 이게 아무래도 이상하단 말이야!”
김영기는 영문을 모르고 듣고만 있었다.
“자네, 고등학교 다닐 때 성적이 어땠어?”
“반에서 10등 이내는 들었습니다.”
“운동을 하면서 어떻게 성적이 그렇게 좋을 수 있지? 그때도 커닝 잘했는가 보군 그래.”
“예?”
김영기는 이때에야 시험관들이 무엇 때문에 이런 질문을 하는지 깨달았다.

“이상하단 말이야! 운동선수가 입학시험 성적이 이렇게 좋을 리는 없는 일이거든?”
김영기는 어이가 없어서 멍하니 듣고만 있었다. 어떤 교수가 김영기를 쏘아보며 말했다.
“이봐. 자네는 이미 체육특기생으로 입학이 허가된 거나 다름없단 말이야! 그러니, 이 필답고사 성적은 자네의 입학 여부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거니까… 솔직히 말해봐! 자네 필답고사 때 커닝했지?”
“예에?”
김영기는 정말 어이가 없었다. 성적이 얼마나 좋기에 이런 의심을 받는지 모르지만 여간 불쾌하지 않았다. 화가 치밀었다.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전 커닝을 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은 정직해야 하는 법이야!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학생! 정직하게 대답해보지 그래!”
“제가 왜 커닝을 했다는 의심을 받는지 잘 모르겠지만, 저는 운동하는 틈틈이 입시공부를 해왔습니다.”
“정말인가?”
“정말입니다. 저를 어떻게 보고 이런 의심을 하시는지 모르지만, 저는 절대 커닝을 하지 않았습니다.”
“흐음….”

김영기는 결국 필답고사 문제를 면접고사장에서 다시 풀어 보이고서야 풀려났다. 그는 지금도 그때 필답고사 성적이 얼마나 좋았는지 알지 못한다. 좋았는지 좋지 않았는지도. 분명한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운동선수는 으레 공부를 하지 않는 것으로 (혹은 안 해도 되는 것으로) 안다는 사실이다. 김영기는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운동을 하다 보면 책과 인연이 멀어지기 쉽지만, 책을 버림으로써 훌륭한 운동선수가 되지는 않는다. 그는 청소년기에도 그랬지만 고려대학교에 진학한 뒤에도, 대학을 마치고 사회인이 된 뒤에도 책을 멀리하지 않았다. 그는 늘 호기심이 충만했고, 배우고 익히려는 의지가 강했다. 새로운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런 점에서 그는 특별했고, 이 남다름이 그를 선수나 지도자로서 성공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허진석 한국체육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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