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진석의 농담(籠談)] 영원한 스승 조득준

기자 / 기사승인 : 2022-01-26 16:5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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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기의 『갈채와의 밀어』 다시 읽기⑧
▲KBL 전무 시절의 김영기

존 번을 만날 무렵, 김영기는 심한 성장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자신감과 야심에 불타는 그에게 한국 농구 무대는 비좁게만 느껴졌다. 그는 이 시절 자신의 모습을 “점점 건방져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피나는 연습을 계속하는 김영기의 실력은 한국 최상의 급에 이르렀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심지어 ‘기술적인 면에서는 고려대 감독 조득준의 지도를 더 받을 게 없다.’고까지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조득준은 역사적인 인물이다. “연전은 이성구요 보전은 조득준”이라는 말이 있다. 보성전문에서 고려대로 이어지는 농구의 전통에서 조득준의 위상이 어떠한지를 보여준다. 조득준이 활약한 시대는 일제강점기 말에서 광복 이후로 이어진다. 그의 농구는 식민지 조선 청년의 테두리를 넘어 제국주의 일본, 나아가 동아시아를 호령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조득준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조득준은 1915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1930년 평양숭인상업학교에 입학해 농구를 시작했다. 보성전문학교와 일본 릿쿄대학에서 센터로 활약했다. 1934년에 만주, 봉천, 선양 등지를 원정했고, 1935년 전일본실업학교농구대회에 출전했다. 1937년 9월에 열린 전조선학생농구대회에 보성전문학교 대표로 나가 우승에 기여했다. 릿쿄대학에 다니던 1941년에는 전일본농구단의 센터로 필리핀 원정에 참가했다.

광복 이후에는 우리나라 농구재건에 앞장섰다. 1948년 현역에 복귀해 런던올림픽에 참가하였다. 고려대, 경희대, 이화여고, 경복고 등에서 코치와 강사로 일했다. 1958년 한국여자농구팀 코치로서 대만에 원정하였고, 대한농구협회 기술지도위원 겸 이사를 지냈다. 1958년 2월 4일 밤 서울 충정로에서 교통사고를 당해 적십자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이튿날 숨을 거뒀다. 유족과 대한농구협회는 그의 업적과 스포츠정신을 기리기 위해 ‘조득준장학금’을 마련했다. (이학래 정리)

김영기는 2004년 6월 중앙일보에 기고한 회고록에 조득준을 “내 농구 인생을 결정해준 정신적 지주”, “나의 가능성을 인정하고 믿어준 분”이라고 적었다. 그는 배재고 졸업반이던 1954년 고려대의 전주 합숙훈련에 고교 유망선수로서 참여했을 때 조득준을 처음 만났다고 한다. 당시 그는 연세대 진학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조득준을 만난 뒤 진로를 고려대로 정했다. 『갈채와의 밀어』에 자세한 이야기가 실렸다.

“코치는 조득준 씨였다. 평안도 분이었다. 훤칠한 키에 콧날이 서 있었다. 눈은 언뜻 보기에는 부드러우면서 볼수록 은근한 매서움이 있었다. 또 어떤 때는 이 은근한 매서움이 어느 사이엔가 부드러움으로 변하기도 하였다. 시원스러운 이마만이 아니고 그 굵직한 목소리에 그의 커다란 사내다움이 역력히 보였다. 자질구레한 것 따위 쳐다보지도 않는 그의 스케일은 어떤 압박하는 것을 나에게 안겨다 주었다.”

“조 코치의 지도는 친절하였다. 고대 농구부의 부원이나 된 것처럼 조금도 손님 대접을 하지 않고 열의 있는 지도를 해주었다. 다른 선배들도 친절히 보살펴 주었다. 우리는 이렇게 안온한 분위기에서 약 한 달 동안의 훈련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왔다. 이 한 달. 비록 한 달이지만 이 한 달은 나의 농구생활을 크게 좌우하는 결정적인 모멘트가 되었다. 그것은 조득준 코치를 만났기 때문이다.”

김영기는 조득준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쳐 대성하고야 말리라.”고 굳게 다짐했다. 그는 중앙일보 기고문에 ‘영원한 스승’ 조득준과 공유한 몇 가지 기억을 소개하였다. 김영기가 묘사한 조득준은 자상하면서도 엄격하고 농구 면에서는 기본기와 정신자세를 중시하며 인간적으로는 예의와 도리를 강조하고 있다. 조득준이 김영기를 꾸짖는 장면은 대부분 이러한 기준에서 제자가 이탈했을 경우다.

“입학 직후 어느 화창한 봄날 실업팀 왕자 산업은행과의 연습경기가 있었다. 내가 레이업슛을 하기 위해 점프한 순간 산업은행 안영식 선수가 어깨로 내 다리를 밀었다. 나는 거꾸로 넘어지면서 오른팔이 부러졌다. 다분히 고의적인 파울이었다. 고통으로 울상이 된 나는 그에게 대들었다. 나의 거친 언행에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이때 조 코치가 나를 불렀다. ‘너 어디서 배운 버르장머리냐? 경기장에선 선후배 간 예의가 있는 거야. 당장 가서 사과하고 와.’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묵묵히 따랐다. 경기가 끝나고 나서야 조 코치는 내 팔을 주물러 주며 주무와 함께 병원에 가보라고 했다.”

“조 코치는 항상 팀 훈련이 끝난 뒤 나를 따로 훈련시켰다. 하루는 비가 왔다. 훈련이 없을 줄 알고 그냥 집에 갔다. 다음날 조 코치가 ‘영기, 어제 안 나왔더군.’하고 중얼거리듯 말했다. 내가 죄송하다고 사과했더니 ‘괜찮다’며 물통에 물을 떠오라고 했다. 그리곤 공을 물에 적시더니 그 공으로 자유투 연습을 시켰다. 공은 무겁고 미끄러워 다루기 쉽지 않았다. 이어 물 먹은 공으로 러닝슛과 패스 연습을 반복했다. 그가 패스한 공을 받다 손가락이 퉁퉁 부었다. 나중엔 손의 통증이 심해 손목으로 볼을 잡았다. 내가 비명을 지르면 그는 ‘고등학교 때 패스 연습을 안했군.’하며 냉정하게 쏘아붙였다. 그날 다섯 번째 물통을 비우고서야 훈련을 끝낸 그는 ‘이것은 어제 했어야 할 연습이었어.’라며 내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나는 이 연습을 통해 공 핸들링에 자신감을 갖게 됐다.”

“어느 겨울 첫눈이 내렸다. 눈 때문에 훈련을 못할 것으로 짐작하고 숙소에서 쉬고 있었다. 어느 선수가 ‘선생님 혼자 운동장에서 눈을 쓸고 계신다.’고 고함쳤다. 모두 달려 나갔다. ‘눈도 오는데 오늘은 쉬는 게….’ 주장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는 들은 척도 않고 ‘연습을 시작해볼까? 우선 눈부터 쓸고.’라며 빗자루를 구해오라고 지시했다. 이날 훈련은 결국 세 시간 동안 눈과 씨름하는 것으로 끝났다. 선수들은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선생님은 ‘기술을 익히기 전에 갖춰야 할 것이 농구를 하겠다는 의욕’이라며 태연했다.”

“그는 또 ‘림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으면 림의 둘레가 자연스럽게 커 보인다.’며 그럴 때 슛을 쏘면 백발백중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선후배 간 위계질서를 강조했다. 그 무렵 농구공은 가죽 속에 튜브를 집어넣고 바람을 채운 다음 꼭지를 가죽끈 밑으로 밀어 넣어야 했다. 늘 가죽에 기름칠을 해야 하고, 공이 터지면 꿰매야 하는 등 귀찮은 일이 많았다. 이런 일은 막내 몫이었다.”

허진석 한국체육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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