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진석의 농담(籠談)]박신자컵 서머리그

기자 / 기사승인 : 2021-07-15 16:0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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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엔 통제사(統制使)가 있었다는 낡은 항구(港口)의 처녀들에겐 옛날이 가지 않은 천희(千姬)라는 이름이 많다/미역오리 같이 말라서 굴껍질처럼 말없이 사랑하다 죽는다는/이 천희(千姬)의 하나를 나는 어느 오랜 객주(客主)집의 생선 가시가 있는 마루방에서 만났다/저문 유월(六月)의 바닷가에선 조개도 울을 저녁 소라방등이 붉으레한 마당에 김냄새 나는 비가 나렸다


백석 시인이 쓴 시 〈통영〉이다. 통영에는 그가 짝사랑한 처녀가 살았다. 1935년 젊은 백석은 친구의 결혼식에 갔다가 우연히 만난 통영 처녀에게 첫눈에 반했다. 처녀의 나이 열여덟, 이화여고에 다녔다고 한다. 백석은 처녀를 짝사랑하여 세 번이나 통영에 가지만 매번 만나지 못했다. 낙담한 시인은 낮술을 마시고 충렬사 계단에서 〈통영〉이라는 제목으로 한 번 더 시를 쓴다. 요즘 나오는 시집에는 대개 〈통영2〉로 표기한다.

구마산(舊馬山)의 선창에선 좋아하는 사람이 울며 나리는 배에 올라서 오는 물길이 반날/갓 나는 고당은 가깝기도 하다/바람맛도 짭짤한 물맛도 짭짤한/전복에 해삼에 도미 가재미의 생선이 좋고/파래에 아개미에 호루기의 젓갈이 좋고/새벽녘의 거리엔 쾅쾅 북이 울고/밤새껏 바다에선 뿡뿡 배가 울고/자다가도 일어나 바다로 가고 싶은 곳이다/집집이 아이만한 피도 안 간 대구를 말리는 곳/황화장사 영감이 일본말을 잘도 하는 곳/처녀들은 모두 어장주(漁場主)한테 시집을 가고 싶어 한다는 곳/ 산 너머로 가는 길 돌각담에 갸웃하는 처녀는 금(錦)이라는 이 같고 내가 들은 마산(馬山) 객주(客主)집의 어린 딸은 난(蘭)이라는 이 같고/난(蘭)이라는 이는 명정(明井)골에 산다든데/명정(明井)골은 산을 넘어 동백(冬栢)나무 푸르른 감로(甘露)같은 물이 솟는 명정(明井)샘이 있는 마을인데/샘터엔 오구작작 물을 긷는 처녀며 새악시들 가운데 내가 좋아하는 그이가 있을 것만 같고/내가 좋아하는 그이는 푸른 가지 붉게붉게 동백꽃 피는 철엔 타관 시집을 갈 것만 같은데/긴 토시 끼고 큰머리 얹고 오불고불 넘엣거리로 가는 여인은 평안도(平安道)서 오신 듯한데 동백(冬栢)꽃 피는 철이 그 언제요/옛 장수 모신 낡은 사당의 돌층계에 주저앉어서 나는 이 저녁 울 듯 울 듯 한산도(閑山島) 바다에 뱃사공이 되어가며/녕 낮은 집 담 낮은 집 마당만 높은 집에서 열나흘 달을 업고 손방아만 찧는 내 사람을 생각한다

시인의 사랑이 깃든 그곳, 통영은 예술의 도시다. 통영에서 태어난 소설가 박경리(1926~2008)는 “통영 사람에게는 예술가의 DNA가 흐른다. 이순신과 300년 통제영 역사가 통영 문화에 오래도록 영향을 미쳤다”고 했다. 그의 대하소설 〈토지〉를 비롯해 〈김약국의 딸들〉 〈파시〉 등에는 어김없이 고향땅 통영이 등장한다. 소설가 박경리, 극작가 유치진, 시인 유치환·김춘수, 시조시인 김상옥, 작곡가 윤이상, 화가 전혁림 등 이름만으로도 묵직한 문화계 거장들이 통영에서 태어나 창작 혼을 불태웠다. 시인 정지용은 1950년 통영기행문에서 “금수강산 중에도 모란꽃 한 송이인 통영과 한산도 일대의 풍경, 자연미를 나는 문필로 묘사할 능력이 없다”고 했다. 점점이 떠 있는 570개 섬들이 작가들의 감성에 불을 지핀 것일까, 부드러운 산세와 호젓한 항구가 무한한 상상력을 키워준 것일까.(『경향신문』 정유미 기자, 〈도시를 읽다 22〉)
 


이 아름다운 도시에서 박신자컵 서머리그가 열리고 있다. 박신자컵 서머리그는 한국여자농구연맹(WKBL)이 주관하는 대회로 2015년에 시작되었다. 대회 명칭이 말해주듯 우리 여자농구의 전설 박신자 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창설되었다. 박 선생은 우리 농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여성 선수다. 나는 우리나라 남자농구 역사상 가장 뛰어난 선수를 꼽으라는 질문 앞에서 오래 고민해야 한다. 김영기, 신동파, 이충희, 허재…. 그러나 여자농구 부문에서는 고민할 여지가 없다. 오래 생각할 필요도 없이 박신자 선생이다. 1984년 LA올림픽 은메달리스 박찬숙 선수의 업적이 눈부시지만 박신자 선생의 광휘를 덮을 수는 없다.

박신자 선생은 숙명여자중고등학교를 거쳐 숙명여대영문학과, 이화여대 대학원 체육학과, 미국 매사추세츠 주 스프링필드대학 대학원 체육학과를 졸업했다. 숙명여자 중학시절부터 ‘백 년에 한 사람 날까 말까 한 천재’라는 평가를 받았다. 1963년 한국 여자 농구의 첫 세계무대인 제4회 세계여자농구선수권대회(페루)에서 대표팀이 8위를 차지하는데 기여했다. 경기당 20.6점을 올리며 평균 득점 1위를 차지해 대회 베스트5에 이름을 올렸다. 1967년 제5회 세계선수권(체코)에서 한국이 준우승할 때 평균 19.2점을 기록하며 대회 최우수선수(MVP)를 수상했다. 준우승 팀 MVP는 당시에도 이례적이었다. 1965년 아시아농구선수권대회(ABC) 우승, 1967년 도쿄유니버시아드 우승 등, 우리 여자농구가 세계 정상급으로 성장하는 데 주역이 된 인물이다. 이러한 공적으로 국민훈장 석류장, 5·16 민족문화상을 받았다. 박 선생은 또 1999년 설립된 여자농구 명예의 전당에 초대 헌액자로 이름을 올렸다. 동양인으로는 유일했다. 2015년에는 대한체육회 선정 스포츠영웅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 (이태신, 『체육학대사전』·박지혁, 『뉴시스』)

나는 도쿄유니버시아드 우승을 우리 농구사에 빛나는 한 장면으로 인식하고 있다. 비록 대학생의 대회지만 대단한 의미가 있다. 우리 농구가 세계 최고를 의식하면서 도전하고 성취한 역사이기 때문이다. 유니버시아드(Universiade)는 대학(University)과 올림피아드(Olympiad)의 합성어다. 국제대학스포츠연맹(FISU)이 주관하는 대학생 종합경기대회다. 우리나라는 제1회 대회(1959년 이탈리아 토리노)부터 참가했다. 주요 외신은 유니버시아드를 흔히 학생경기대회(Student Game)로 표기하며 크게 보도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중요한 국제종합경기대회다. 대한체육회의 기준에 따르면 유니버시아드에서 따낸 금메달에는 연금점수 10점, 은메달엔 2점, 동메달엔 1점을 부여한다. 아시안게임과 똑같다. 올림픽은 금ㆍ은ㆍ동 각각 90, 30, 20점이다. 올림픽과 아시안게임은 4년마다 열리지만 유니버시아드는 2년에 한 번씩 열린다. 유니버시아드에 참가하는 외국 선수 가운데 상당수가 아마추어들이다. 그래서 한국 선수들은 올림픽이나 아시안게임에 비해 좋은 성적을 내는 편이다. 1967년 일본 도쿄유니버시아드에 참가한 한국 남녀농구가 좋은 예다. 남자는 미국에 이어 준우승, 여자는 일본을 누르고 우승했다. 한국은 박신자 선생을 비롯, 김추자ㆍ주희봉 등 세계선수권 준우승 멤버를 모두 보냈다. 박 선생은 네 경기에서 111점을 넣어 득점왕을 했다.

나는 박신자 선생의 전성기를 보지 못했다. 그가 세계를 누빌 때는 코흘리개에 불과했다. 1991년 겨울, 아마추어대회인 ‘농구대잔치’ 시절에 박 선생을 자주 만났다. 농구 관전평을 부탁하자 그는 흔쾌히 승낙했다. 관전평을 쓴 한 시즌 동안 그는 매 순간을 즐겼다. 주요 경기는 오후 두 시 전후에 열렸다. 박 선생은 일찍 잠실학생체육관에 나가 일정을 확인한 다음 천천히 걸어 아시아선수촌아파트 근처 골목 안에 있는 설렁탕집에 가서 혼자 점심을 들었다. 그 모습이 평화롭고 아름다워서 박 선생을 발견했을 때도 부르지 않고 먼발치에서 지켜보곤 했다. 그의 글은 남달랐다. 경험을 녹여 쉽게 썼는데 후배 선수들에 대한 애정이 넘쳐흘렀다. 그를 정말 가까이서 볼 기회도 있었다. 1992년 6월 스페인의 비고에서 프레올림픽이 열렸을 때다. 바르셀로나올림픽 예선이었다. 박신자 선생은 그곳에서 열리는 국제회의에 한국대표로 참석했다. 시간이 날 때마다 우리 대표선수들을 뒷바라지했다. 통역과 응원단장을 자처했다. 우리 대표 팀은 세대교체기를 맞고 있었다. 1990년 아시안게임 우승 멤버인 조문주, 최경희, 정은순과 신세대 스타 유영주, 전주원이 분전했지만 성적은 좋지 않았다. 선수들은 풀이 죽었고, 식탁은 늘 고요했다. 박 선생은 손으로 김치를 찢어 선수들의 수저에 얹어 주었다.

“많이 먹어. 힘을 내야 끝까지 싸울 수 있어.”

그 뒤 오랫동안 박신자 선생을 보지 못했다. 그러다 2015년 7월 3일 신선우 씨가 WKBL의 새 총재가 되어 취임식을 하는 자리에서 박 선생을 만났다. 내가 인사를 하자 박 선생은 허리를 굽히며 “오랜만입니다, 반갑습니다.”라고 했다. 변함이 없었다. 강원도 속초에서 첫 ‘박신자컵 서머리그’가 열릴 때, 그는 주인공으로서 시구(始球)를 했다. 나는 몇 가지 이유 때문에 못마땅했다. 첫째는 만시지탄(晩時之歎). 이 위대한 인물을 기리는 대회가 왜 이제야 열리는가. 둘째, 비주전선수들이 주로 참가하는 이 대회가 얼마나 오래 유지될까. 셋째, 그러므로 차라리 여자프로농구 우승컵을 ‘박신자컵’이라고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아니면 뛰어난 선수들이 모두 출전하는 제3의 대회를 창설하든가. 우리 스포츠는 역사를 거듭하면서 수많은 전설을 낳아왔다. 축구의 차범근, 야구의 박찬호, 골프의 박세리, 권투의 홍수환…. ‘살아있는 전설’들이 제대로 된 대접을 받고 있다고 확언하기 어려운 이 시대에 어찌됐든 박신자 선생을 기리는 대회가 있음은 위안거리일까. 

허진석 한국체육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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