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대표팀 굴곡과 함께한 26년 세월, 문성은 대한민국농구협회 사무처장

민준구 기자 / 기사승인 : 2021-04-27 16: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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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프볼=민준구 기자] 농구전문잡지 점프볼이 2021년 창간 21주년을 맞았다. 점프볼은 오랜 세월 한국농구와 함께하며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농구매거진으로 자리 잡았다. 이에 본지는 창간 21주년을 기념하는 기획 시리즈로 자신의 자리에서 묵묵하게 농구 발전을 뒷받침해온 주인공을 소개하는 시간을 만들었다. 네 번째 주인공은 문성은 대한민국농구협회 사무처장이다. 열정 하나로 26년간 한국농구를 지킨 남자. 그는 한국농구의 기쁨과 슬픔의 순간을 함께한 역사다.

 

※본 기사는 점프볼 4월 호에 게재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운명처럼 다가온 농구


문성은 처장은 진정한 스포츠인이다. 학생 시절에는 육상, 축구선수로도 활동했다. 씨름 선수를 했던 형을 두었다. 그의 스포츠 DNA는 스포츠를 사랑했던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았다. 그런 그에게 농구는 운명처럼 다가왔다. 마치 사랑을 고백하는 날 아름다운 눈이 내리듯이.

Q. 어린 시절부터 스포츠를 사랑했다고 들었습니다.
초등학교, 그리고 중학교 시절에 육상이랑 축구를 했어요. 스포츠와 인연은 꽤 깊은 편이죠. 주변에 스포츠 선수들이 많아요. 태권도 선수는 물론 축구에선 김도훈 감독과 인연이 있죠. 아버지가 스포츠를 워낙 좋아하셨고 또 형은 씨름 선수를 했어요. 스포츠 집안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Q. 농구는 언제 처음 접했나요.
1991년에 현대산업개발 팀이 통영으로 전지훈련을 왔었어요. 아버지가 속한 동문회에서 팀을 초청해 별장에서 식사를 대접하기도 했죠. 그때 우연히 전주원 국가대표 감독을 봤어요. 완전히 팬이 되고 말았습니다. 정말 좋아했어요.
운명적인 첫 만남이 결국 직업으로 이어졌네요
.
Q. 당시 협회에서 직원을 채용하는 과정이 공채가 아니었어요.
추천에 따라 이력서를 넣고 또 면접을 보는 형식이었는데 운이 좋았어요. 여러 선배들이 이끌어줬죠. 사실 입사 전에 정호천 국장님이 농구를 좋아하면 오고 아니라면 오지 말라고 했어요. 박봉이었거든요. 그래도 농구를 좋아했기 때문에 입사했고 지금까지 오게 됐네요.

Q. 입사 후 처음 맡은 업무는 무엇이었나요.
국제업무 담당이었어요. 1996년에 입사했으니까 그때는 완전 옛날이었죠. 지금처럼 SNS나 이메일로 일을 하던 시대가 아니었습니다. 오로지 팩스로 메시지를 주고받았죠. 또 사수 개념이 없었어요. 누가 가르쳐주질 않으니 예전 서류를 보면서 하나씩 깨우쳤죠. 그래도 모르면 대한체육회에 가서 직접 물어보기도 했고요. 그때는 같은 건물에 있었습니다. 협회 직원이 5~6명밖에 없었던 시절이라 누가 누굴 가르쳐줄 여유가 없었어요. 힘든 시기였죠.

Q. 에피소드도 있을 것 같아요.
1996년 11월에 입사했는데 1997년 6월에 국가대표팀을 중국으로 보내야 했어요. 해본 적이 없잖아요. 국가대표 선발부터 항공권 예약, 또 여권 기간은 만료됐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다 관리해야 했죠. 다행히 대학생 시절에 호주에 다녀온 적이 있어서 그때 경험을 살려 겨우 해결했어요. 그렇게 10년 넘게 홀로 국제업무를 다 맡았던 것 같아요. 그래서인지 지금은 밑에 있는 후배들에게 내 노하우를 조금이라도 더 알려주려고 노력 중입니다. 내가 했던 고생을 물려주고 싶지 않으니까요.

Q. 밖에서 본 농구와 안에서 본 농구는 분명 달랐을 겁니다.
밖에서 볼 때는 굉장히 화려해 보일 거예요. 근데 막상 안으로 들어와보니 많이 열악했죠. 사실 지금도 돈 걱정을 안 하는 건 아니에요. 입사할 때부터 지금까지 매달 어떻게 운영해야 할지 걱정이 태산입니다. 또 업무 걱정도 많았어요. 언제 어떤 일이 터질지 몰랐으니까요. 그래서 주어진 시간을 철저히 사용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또 부담도 컸죠. 국제업무다 보니 내가 실수하면 국가 망신이란 생각이 있었거든요. 지금도 여권이란 단어만 들으면 머리가 아파요. 출국 당일에 여권이 없으면 모든 일정이 망가지잖아요. 그런 문제를 만들지 않기 위해 철저하게 관리했어요. 여권을 안고 잔 적도 많았죠. 지금이야 간소화됐지만 그때는 연대 보증까지 서야 할 정도로 철저했습니다. 정부에 고마울 뿐이죠.

Q. 힘든 시기를 극복한 지 벌써 26년이 됐습니다. 자부심이 클 것 같아요.
시간이 많이 흘렀네요. 김한별 선수의 특별 귀화 업무를 한 지 벌써 10년이 됐어요. 좋은 선수가 미국에 있다고 해서 정말 고생 끝에 귀화시킨 기억이 있죠. 런던올림픽을 대비한 일이었지만 결국 출전하지 못했던 일도 생각나고요. 문태영, 이승준, 전태풍, 문태종 등 다른 귀화 선수들의 업무도 추억이 됐네요. 시간이 금방 흐르는 것 같습니다. 사실 협회 직원으로서 자부심을 느낄 일이라면 아무래도 국가대표팀 성적이 좋을 때가 아닐까요. 대표적인 일이 1997년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에서 열린 아시아선수권대회 같아요. 정말 스트레스가 많았죠. 현주엽은 코뼈 부상이 있어서 출전하지 못했고 서장훈은 중이염 때문에 중심 잡기도 힘들었어요. 여기에 사우디아라비아 현지와 연락이 잘 안 되어서 소통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습니다. 그런데도 우승을 했어요. 한국 사람이라면, 그리고 애국심이 있다면 그 순간에 빠지면 못 헤어나와요. 협회에 있으면서 금전적으로 행복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내가 속한 집단에서 큰 성과를 얻었다는 것에 성취감을 느낍니다.

Q. 오랜 시간 함께한 동료도 있을까요.
지금은 퇴직했지만 정말 오랜 기간 함께한 전우가 있죠. 권순자 차장과 오랜 시간 함께 했어요. 나보다 6살 정도 많은데 11년 전인 1985년에 입사한 인재에요. 1997년에 출산 때문에 잠시 휴직했고 다시 복귀해서 2019년까지 동행했습니다. 원로급 인사죠. 건강이 좋지 않아 퇴직했는데 참 그립네요. 마음이 아프기도 하고요. 항상 “이곳에 오래 있는 것도 죄”라는 말을 마음속에 담고 있었어요. 그만큼 책임감이 있었죠. 기억이 나네요.

Q. 협회 역시 시간이 지나면서 인력이 늘었습니다. 어떤 과정을 거쳤나요.
국제업무는 혼자 2012년까지 했던 것 같아요. 상황이 열악하다 보니 어쩔 수 없었죠. 그러다가 2011년에 국제 전문 인력 양성제도를 통해 (곽)정미 씨를 뽑았습니다. 인재였죠. 내가 가진 노하우를 다 전수하려 했고 그렇게 2014 인천아시안게임까지 도맡아서 잘 마무리했습니다. 이후 체계적으로 직원을 채용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당시 방열 회장님에게 공개 채용을 통해 직원을 뽑아야 한다고 건의하기도 했죠. 그렇게 시스템을 만들고 업무 분담을 하다 보니 체계적으로 돌아가기 시작했어요.

Q. 오랜 시간 협회에 있었던 만큼 다양한 스타일의 회장을 보좌하기도 했습니다. 가장 합리적인 사람은 누구였나요.
농구인들 중에 꼽자면 방열 전 회장님을 먼저 떠올리게 됩니다. 처음에는 겁이 났어요. 과연 잘 버틸 수 있을지 걱정도 많았죠. 처음에 방열 회장님을 모시면서 5~6kg 정도가 빠졌던 것 같아요. 워낙 꼼꼼하고 지시하는 부분이 많아서 스트레스도 그만큼 늘었죠. 사실 재정적인 문제로인해 곱지 않은 시선이 있는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모든 책임이 그분에게 있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다른 스포츠를 보더라도 재정적으로 안정적인 곳이 몇 없죠. 또 돌이켜보면 김동욱 부회장님도 많이 의지했던사람이에요. 합리적인 분이죠. 김상웅 이사님도 생각나네요. 업무 스트레스를 주지 않고 많은 도움을 준 사람들입니다. 

국제업무의 빛과 그림자


화려할 것만 같은 국제업무.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문성은 처장은 극단적인 선택을 생각했다고 할 정도로 결코 아름답기만 한 일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는 좌절하지 않았다. 본인의 노력으로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다는 신념 아래 그렇게 한 발 더 뛰었다.

Q. 국제업무를 담당했지만 항상 역사의 현장에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아쉬웠을 것 같아요.
많지 않죠. 국제업무의 전체를 관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 곳에만 집중하기 힘들었습니다. 예를 들어 성인 남자농구 국가대표팀이 해외에 나갈 때 따라가면 성인 여자농구 국가대표팀의 관리가 불가능해요. 그리고 대학 선발, 청소년 대표, 최근에는 3x3까지 세세하게 분류되어 있는 만큼 집중적으로 관리하기가 어렵죠. 많은 분들처럼 뉴스를 통해 소식을 접할 때도 많았습니다. 다행히 국내에서 열린 대회는 파견을 통해 많이 경험했어요. 2002 부산아시안게임 때는 현장에 있었습니다. 원래 부산사직체육관에서 농구가 열리지 않을 뻔했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기장, 그리고 금정에서 일정이 치러질 예정이었습니다. 부산아시안게임의 피날레를 장식할 농구였는데 부산사직체육관을 사용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죠. 고생 끝에 당시 박종윤 부산시농구협회 이사가 발품을 팔아 준결승과 결승 장소를 부산사직체육관으로 변경했습니다. 고생이 많았죠.

Q. 국제업무를 담당하면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언제인가요.
2000 시드니올림픽, 그리고 2002 세계여자농구선수권대회가 기억에 남네요. 두 대회 모두 동메달을 목에 걸 수 있었는데 4위로 마감했습니다. 그럼에도 정말 대단한 성과였죠. 그때 주역이었던 전주원 감독과 이미선 코치가 이제는 지도자로서 2020 도쿄올림픽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걱정이 많을 텐데 부담 갖지 말고 잘 다녀왔으면 좋겠어요.

Q. 가장 행복한 순간이 있다면 가장 슬펐던 순간도 있었겠죠.

이종걸 회장님이 계실 때 집행부가 총사퇴한 적이 꽤 많아요. 도하 참사, 톈진 참사 등 여러 아쉬운 결과로 인해 나타난 비극이죠. 국제대회가 있으면 협회 직원들이 야근하는 경우가 많은데 성적이 좋지 않으면 팬분들로부터 협박(?) 전화를 자주 받았어요. 일단 욕부터 시작하시죠(웃음). 업무 문제로 급한 전화인 줄 받았다가 무방비 상태로 욕을 먹은적도 많아요. 열정이 너무 넘쳐서 그런 거겠죠. 사실 국제대회 성적이 좋지 않으면 협회 직원들도 침울해지는 건 사실입니다.

Q. 너무 힘들어서 극단적인 선택까지 생각한 적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2014 인천아시안게임 때였을 거예요. 그때 귀화선수가 큰 이슈였죠. 거의 모든 팀이 한 명씩 다 데리고 있었을 거예요. 우리도 무언가를 준비하려 했는데 그때 언급된 게 애런 헤인즈였습니다. 근데 FIBA(국제농구연맹) 규정과 OCA(아시아올림픽평의회) 규정이 다르다는 걸 숙지하지 못했어요. 또 OCA 규정에 중의적인 표현이 있어 애매한 부분이 많았죠. 결국 헤인즈의 귀화가 성사되지 못했고 언론을 통해 뭇매를 맞았습니다. 항의 전화도 엄청 받았어요. 스트레스 때문에 농구 기사는 한 달 동안 보지도 않았죠. 근데 필리핀은 안드레 블라체를 데려온다는 겁니다. 헤인즈가 안 된다면 블라체도 규정상 문제가 있을 것이란 생각에 대회 출전을 막으려고 정말 노력했습니다. 폭풍 같은 시간이 흘렀고 많이 힘들었어요. 극단적인 선택까지 생각할 정도로 말이죠. 연예인들이 왜 그런 선택을 하는지 이해가 안 갔는데 어느 정도 공감되더라고요. 결국 남녀 모두 금메달을 따내면서 해피 엔딩이 됐지만 그 과정은 너무도 힘들었습니다.

Q. 힘든 순간, 본인을 지탱해준 힘은 무엇이었나요.
곽정미(현 FIBA) 씨를 비롯해 공채로 입사한 직원들, 그리고 집행부 등 많은 사람들이 생각나네요. 돌아보면 힘든 일이었지만 정말 열심히 했다는 것에 후회는 없습니다. 또 사무처 직원들 역시 인천아시안게임의 성공을 위해 뒷바라지를 확실히 해줬고요. 그렇게 노력해도 결국 마무리는 선수들이 해줘야 하는데 결과도 좋았죠. 많이 힘들었지만 주변 사람들과 함께 극복해낸 것이 힘이 됐습니다. 

한국농구, 그리고 협회의 미래

“한국농구의 미래는 어둡다.” “협회는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누군가는 이런 평가를 서슴없이 한다. 모두 틀린 말은 아니다. 미래가 그리 밝지 않은 건 사실이다. 한국 농구는 국제 경쟁력이 떨어졌다. 그러나 문성은 처장은 바닥까지 내려갔기에 다시 올라갈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여전히 희망을 품고 있다.

Q. 협회의 재정난은 오래전부터 언급되어온 부분입니다. 무엇이 문제인가요.
입사했을 때도 재정적으로 풍족하지는 않았습니다. 농구대잔치 시절 수익금이 많을 때에는 괜찮았다고 하더라고요. 여유가 있을 때는 기술고문을 데려온 적도 있고요. 레니 윌킨스 고문이 대표적인 사례죠. KBL에서 노력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전지훈련을 간 기억도 있습니다. 하지만 재정적인 면을 봤을 때 긍정적인 면보다 부정적인 면이 많았던 건 사실입니다. 협회가 모두 세금으로 운영되는 건 아니에요. 협회 자체 내에서 돈을 벌어와야 하는 부분도 있습니다. 국가대표가 세분화되고 또 국제대회도 늘어나면서 재정적인 측면에서 어려움은 현재진행형입니다. 노력을 안 하고 있는 건 아니에요. 다른 곳도 쉽지는 않을 겁니다. 회장사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이뤄지는 곳이 아니라면 대부분 우리와 비슷한 환경입니다.

Q. 문제 해결을 위한 확실한 방법은 있을까요.
재정적인 측면만 고려하지 않고 전체를 바라봤으면 합니다. 일단 세 가지 측면의 문제가 있어요. 첫 번째는 농구 인프라가 열악하다는 겁니다. 직접 경험한 바로 농구 기반 자체가 무너져 있어요. 협회만 노력해서는 안 됩니다. 시, 도, 구 등 다양한 곳에 퍼져 있는 농구 단체가 힘을 내야해요. 두 번째는 전문 인력이 부족하다는 겁니다. FIBA 경기 교본을 번역해서 지방에 보냈지만 아직 확실한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어요. 환경이 열악하다 보니 하려는 사람도 없죠. 세 번째가 바로 재정입니다. 협회가 힘들면 그 밑에 있는 산하 단체는 더 힘들 거예요. 그래서 지금이 중요합니다. 권혁운 신임 회장님이 오시는 현 시점에서 농구인들부터 달라져야 해요. 앞으로 4년 동안 무언가 이루지 않으면 안 됩니다. 사람이 확 바뀔 수는 없지만 마음가짐은 바꿀 수 있어요. 농구는 바닥을 쳤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시 일어설 수 있어요. 희망은 있습니다.

Q. 스타 발굴을 통한 스포츠 흥행 사례는 많습니다. 농구도 불가능한 일은아닐 거라고 생각합니다.
축구가 그런 사례가 많죠. 솔직히 부러워요. 하지만 농구는 축구만큼 해외 진출에 대한 길이 넓지 않습니다. 그래도 협회 차원에서 적극적인 지원을 해야 한다는 건 동의하는 부분입니다. KBL에서 이번에 이주영, 구민교 선수를 미국에 보냈죠. 이정대 총재님께서 정말 많은 힘을 쓰신 것 같습니다. 협회 역시 고민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유명 지도자를 한국으로 데려와 많은 사람들이 혜택을 누릴 수 있는 방법을 찾을 겁니다. 이현중 선수의 근황도 계속 체크하고 있어요. 지원에 대한 생각도 하고 있습니다.

Q. 문성은 사무처장이 직접 그리고 있는 한국농구의 미래는 무엇인가요.
힘들고 또 위기인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농구를 사랑하는 사람은 많다고 봐요. 그 부분을이제 협회가 어떻게 접근할 것인지가 중요하죠. 권혁운 회장님이 당선되시고 나서 대의원님들과 많은 대화를 나눴어요. 옛날 방식을 버리고 새로운 방식을 통해 발전해야 한다고 말이죠. 한국농구에 대한 희망, 잃지 않았습니다. 당장 확실한 해결책을 제시할 수는 없지만 여러 부분을 개선한다면 분명 발전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Q. 오랜 시간 농구협회에 몸담고 한국농구를 지켜왔습니다. 먼 훗날, 한국농구가 본인을 어떻게 기억해줬으면 좋을까요.
한 평생 농구에 미쳤다가 홀연히 떠난 반농구인으로 기억됐으면 합니다. 한국농구를 위해 많은 사람들이 일을 하고 있는데 그 분들이 나중에 조금이나마 긍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봐줬으면 하는 바람도 있고요. 내 바람은 예전 잠실1체육관에서 열렸던 정기전과 같이 많은 사람들이 열광하는 농구 경기가 열렸으면 하는 것입니다. 그때의 흥분, 그리고 열정을 다시 한 번 느껴보고 싶네요.

문성은 처장은...
1970년 7월 10일생이다. 1996년 11월 대한민국농구협회에 입사해 26년간 한국농구의 발전을 위해 뛰어왔다. 2014년 사무국장, 2016년 사무처장으로 승진하여 능력을 인정받기도 했다. 이후 2018년 남북통일농구경기 업무를 총괄했으며 남북 단일팀 구성에 큰 역할을 했다. 한국농구의 부흥을 위해 젊음을 바쳤으며 밝은 미래를 꿈꾸고 있다.

#사진_박상혁 기자

 

점프볼 / 민준구 기자 minjungu@jumpbal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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