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LEGENDS] ② 한국농구의 ‘어머니’윤덕주를 기억하다

손대범 / 기사승인 : 2022-01-14 15:3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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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사님께서 세상을 떠나셨을 때 그 슬픔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서울 도곡동에 위치한 숙명여고 체육관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길이 가는 곳이 있다. 고(故) 윤덕주 여사의 생전 모습과 기념패. 숙명여고는 1967년 세계선수권대회 MVP 박신자를 배출한 농구명문학교이지만, 이에 앞서 여자농구의 ‘어머니’라 불렸던 윤덕주 여사(전 대한민국농구협회 명예회장)의 모교이기도 했다. 
 


‘마지막 순간까지 농구를 생각했던 농구인.’

모든 농구인들이 ‘윤덕주’ 이름 세 글자를 말할 때면 가장 먼저 꺼내는 말이다.

2007년 농구 100주년을 넘어선 우리 농구에 특정인 이름을 빌린 대회와 상은 모두 다섯 개가 있다. 먼저 대회로는 한일대학농구 교류의 장인 「이상백배 한일대학농구」와 2015년부터 한국여자농구연맹이 주최하고 있는 「박신자컵 서머리그」, 그리고 「윤덕주배 연맹회장기 전국남녀초등학교농구대회」가 있다. 윤덕주 여사를 추모하기 위해 만들어진 「윤덕주배 전국남녀초등학교농구대회」는 2006년 9월 1일 강원도 양구에서 시작돼 지금까지 계속 이어져오고 있다.

또 상으로는 이성구 페어플레이상(KBL), 윤덕주상(WKBL)이 있다. ‘페어플레이’상은 2002년 작고한 이성구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이성구 선생은 초창기 한국농구가 형태를 갖추는데 있어 큰 역할을 한 인물이다. ‘윤덕주상’은 공헌도를 바탕으로 수여된다. 정선민(부산 MBC 해설위원), 이미선(삼성생명 코치), 박혜진(우리은행), 박지수(KB스타즈) 등이 이 상을 수상했다. 이처럼 프로와 아마 농구계 곳곳에 남아있는 윤덕주 여사의 흔적을 생각해보면, 농구인과 농구계가 그녀에게 얼마나 고마워했는지를 짐작케 해준다.

숙명여고 우승 이끈 ‘불멸의 현역’
1921년 대구에서 태어난 윤덕주 여사가 농구를 했던 시기는 1930년대였다. 이제 윤덕주 여사의 경기를 기억하는 농구인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달리기와 높이뛰기에서 장점을 보였던 윤덕주 여사는 1934년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현 숙명여중고)에 입학하며 농구와 연을 맺었다. 육상을 하기에는 운동장이 좁았기 때문이었다. 윤덕주 여사의 당시 키는 164cm로 그 시기를 감안하면 대단히 큰 키였다. 농구원로이자 농구대잔치 시절 장내 아나운서를 지냈던 염철호 선생은 “내 기억에 그 시절 여자농구선수 중에서는 키가 크신 편이셨다”고 회고한다.

지금도 그렇지만 농구는 키가 크면 유리한 종목이다. 특히 1930년대만 해도 득점이 인정되면 엔드라인에서 공격이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중앙에 와서 점프볼로 공, 수를 가렸다. 즉, 점프볼에서 밀리면 경기 내내 공 한 번 못 잡아보고 끝날 수도 있었다는 의미다. 염철호 선생은 “실제로도 10-0, 17-0 이런 식으로 끝난 경기가 있었다”라고 귀띔했다. 1936년 베를린올림픽 이후 이 규칙은 이상백 박사의 건의에 의해 국제농구연맹(FIBA) 기술위원회를 거쳐 개정되었다. 그러나 농구 변방이었던 한국에서는 이 규칙이 개정 이후에도 한동안 계속 존재했다. 윤덕주 여사의 큰 키는 이런 면에 있어서도 상당히 유리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1926년 설립된 숙명은 1937년 전일본종합농구선수권대회 여자부에서 윤덕주 여사와 함께 우승을 맛봤다. 당시 주장이었던 그녀는 졸업 후 교사(대구 수창초등학교) 생활을 하던 중에 학교로 돌아와 일본 원정에 나서기도 했다. (숙명여고는 경기여고와 함께 여자농구 발전의 선도적 역할을 해온 학교로 꼽힌다. 1926년 조선신궁경기대회에 출전한 것이 여자농구의 원년으로 여겨지고 있다.)

「한국농구 100년사」를 펴낸 조동표 선생은 인터뷰에서 그 시기 스포츠 분위기를 이렇게 회고했다. “지금으로 따지면 내가 초등학교 5학년 정도 됐을 것이다. 당시만 해도 우리 국민들은 일제 억압에 눌려 갖은 굴욕을 당하며 살아왔다. 때문에 ‘조선 사람이 왜놈에게 승리했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감동을 받았다. 손기정 씨가 올림픽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땄을 때 전 국민이 느낀 감동은 어디에도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해방 후 윤덕주 여사는 코치의 제안으로 선수로 돌아왔다. 때는 1947년. 이미 두 딸의 어머니가 된 뒤였다.

조동표 선생은 이런 말도 했다. “예전만 해도 여자선수는 24~25살이 한계였다. 하나, 지금은 서른이 넘어도 선수생활을 하고 있다. 격세지감이라 할 수 있다. 그때는 생각도 못했다. 20대 중반이면 오래 뛰었다는 말이 나왔다.”

이 말에 비추어보면 윤덕주 여사는 그 시기에 정말 오랫동안 선수로서 좋은 기량을 발휘했음을 유추할 수 있다. 26살, 두 딸의 어머니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필요로 하고, 찾아주는 팀이 있었으니 말이다. 결승전 하프타임 동안 관중석에 가서 둘째 딸 젖을 먹이고 다시 경기를 뛴 일화는 윤 여사 ‘전설’을 말할 때 빠지지 않는 내용이다. 1950년에는 넷째 딸을 임신한 채 경기를 뛰기도 했다.

윤 여사를 기억하는 이들은 ‘승부욕이 굉장히 강했던 분’이라는 말도 빼놓지 않는다. “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셨다. 몸이 좀 불편하셨을 때도 팀이 지면 화를 주체하지 못하셨다”는 농구관계자들 증언이다. 은퇴 후에도 우리 대표팀이 지면 하염없이 울 정도로 아쉬워했다는 후문이다.
그런 윤 여사가 공을 내려놓은 건 1950년 4월, 종별선수권대회 이후였다. 1934년 처음 농구선수로 이름을 알린 지 16년 만이었다.


‘마담 윤’의 전설
‘정말 고마우신 분이다.’ 윤덕주 여사 이야기를 쓰던 중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다. 사실 이런 게 있다. 꼭 칭찬이 나오다가도 “그런데 말이지…”라는 반전과 함께 어두운 면, 섭섭했던 일화도 소개되는 분들도 있다. ‘정말 훌륭한 농구인이었다. 그런데 말이지…’ 하면서 다른 비판적인 이야기가 나올 때도 있었다는 말. 그런데 윤덕주 여사에 대해서만큼은 그런 부분이 없었다. 이토록 농구계가 한 목소리로 ‘고마우신 분’이라고 말한 농구인이 없었다는 의미다. 윤덕주 여사의 선수 이후 행보 덕분이었다.

1954년, 한국 여자국가대표팀 최초의 주무를 거쳐 대한농구협회(현 대한민국농구협회) 부회장, 대한농구협회 이사, 대한체육회 부회장, FIBA 집행위원,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 선수단 부단장에 이르기까지, 윤덕주 여사는 농구계에 투신하여 행정가로서 농구발전을 도왔다.

아시아뿐 아니라 세계를 누볐다. FIBA 인사들도 ‘마담 윤’이라면 엄지손가락을 치켜들 정도였다. 지금도 FIBA 원로 인사 중에서는 ‘한국 농구’의 이미지를 ‘마담 윤’으로 기억하는 이들이 있다. 대한민국 체육훈장 맹호장, 대한올림픽위원회 공로상, 국제올림픽위원회 공로훈장 등도 받았다. 2007년, FIBA가 창립 75주년을 맞아 세운 명예의 전당에 ‘공로자(contributor)’ 자격으로 헌액 되는 영예도 누렸다. 이때 농구 창시자인 네이스미스 박사도 함께 이름을 올렸다. FIBA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한국인은 2007년 공로자 부문에 뽑힌 윤덕주 여사와 2021년 선수 부문에 이름을 올린 박신자 등 둘 뿐이다.
 


윤덕주 여사의 스포츠 외교는 우리농구 위상뿐 아니라 국가대표 선수들의 사기에도 큰 도움이 됐다. 풍족치 않던 그 시절, 대표팀 해외 전지훈련을 돕는가 하면, 현지에서는 구하기 힘든 한국음식도 제공하며 선수들을 격려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선수들의 언행을 조심시키는가 하면, 고급 단복도 제공했다. 본인 역시 중요한 자리에서는 한복을 입고 등장해 한국을 알리는데 앞장섰다. 전 국가대표 강현숙(현 여자농구연맹 재정위원)은 “국제대회에 출전하면 늘 선수들 사기를 북돋워주셨다. 말 그대로 ‘물심양면’이었다. 통이 정말 크셨다. 선수들이 현지에 적응하지 못할까봐 한국음식을 싸들고 오셔서 배불리 먹게 해주셨던 기억도 난다”라고 돌아본다.

1984년 LA올림픽에서 한국여자농구를 은메달로 이끌었던 조승연(전 KBL 패밀리 회장)도 같은 기억을 공유하고 있었다.

“우리나라 농구의 ‘대모’와도 같았다. 동기부여를 잘 해주셨다. 올림픽 중공(중국)전이 기억난다. 승리해서 한참 감격에 겨워하고 있는데, 여사님께서 코트로 뛰어 내려오셨다. 그때는 코칭스태프와 선수단 외에는 코트 출입이 통제된 상황이었는데, 인파를 뚫고 달려오시더니 경기장 입장권에 연락처를 적어서 주시더라. 선수단에게 축하한다고 코리안타운으로 초대해 힘을 실어주셨다. 그 외에도 태릉에서 훈련이 열리면 수시로 와서 격려해주셨던 기억이 난다. 누구보다도 선수들이 잘 되는 걸 본인의 기쁨이자 자랑처럼 여기셨던 분이다.”
그 사랑은 비단 여자대표팀 만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윤 여사님께서 많이 아껴주셨다. 남자대표팀도 격려를 많이 해주셨다. 활발하고 호탕하신 여장부셨다. 우리 남자대표팀이 승전보를 올리고 돌아올 때면 거하게 축하해주셨다. 그 당시 댁이 북아현동이었는데, 대표선수단 모두 초대를 받아 갔던 기억이 생생하다.” 한국 남자농구 사상 첫 아시안게임과 아시아선수권대회 우승 주역이었던 김인건(전 태릉선수촌장) 선생의 회고다.



윤 여사의 헌신 뒤에는 남편 서정귀(1974년 작고) 씨의 도움도 있었다. 1960년대 재무부 정무차관을 역임했으며, 정계를 떠난 뒤에는 호남정유 사장을 지내는 등 1970년대 정유업계의 중진으로 활약했다. 남편 역시 농구 후배들을 친자식처럼 생각한 윤 여사의 마음을 알고 보필하고, 때로는 농구장에도 함께 나섰던 것으로 알려졌다. (윤덕주 여사의 장녀 서경자 씨 역시 1967년 체코 프라하에서 열린 세계선수권대회 대표선수였다.)

한편 윤덕주 여사는 1981년 어머니농구회를 설립해 어머니농구대회가 정착하는데도 힘썼다. 초대 회장을 맡아 18년간 단체를 이끌었다. 올해로 36회째를 맞은 어머니농구대회는 지난 5월에도 성공적으로 개최됐다. 대회가 개최된 숙명여고 체육관 역시 1981년, 윤덕주 여사의 기부로 완공됐다.

대모, 세상을 떠나다
윤덕주 여사는 2005년 7월 8일 오전 9시, 급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84세. 장충체육관에서 여자프로농구 여름리그 개막식이 열린지 하루도 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식전 행사 때 주희봉 씨와 여사님을 안내해드린 기억이 있다. 식사를 하고 들어가셨다고 들었는데, 그게 마지막 모습이었다.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나셨다. 지금 생각해도 너무 아쉽다.” 김인건 선생의 말이다. 조승연 회장은 여전히 그 때를 생각하며 아쉬움을 금치 못했다. “내가 WKBL 전무를 맡던 시절이었다. 개막을 기뻐하시고, 후배들과 식사를 드시고 들어갔다. 혈압이 높으셨던 것으로 알고 있다. 작고하셨을 때의 그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산소가 충무에 있다. 10주기를 맞아 작년에도 다 같이 산소를 찾기도 했다.”

18년간 윤덕주 여사를 도와 어머니농구회 수석 부회장을 맡았던 박정숙 원로는 그때 분위기를 이렇게 설명했다. “인간적으로 고마웠던 부분도 있었기에 다들 슬퍼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이제 한국 농구는 어떻게 해야 하나…’하는 걱정도 앞섰다. 모두가 그랬을 것이다.”

박정숙 원로의 말처럼 농구계는 큰 슬픔에 빠졌다. FIBA는 “한국농구의 큰 별이 졌다”며 탄식했다. 긴급이사회가 열렸고, 장례식을 농구협회장으로 치르기로 결정했다. 정상윤, 조동재, 이성구 이후 4번째 농구협회장이었다. 김인건 선생이 당시 여사를 위한 추모사를 맡았다. 여름리그 경기에 앞서 선수들은 묵념을 통해 여사에 대한 애도를 표했다.

한 농구 원로는 여자농구가 밑바닥으로 떨어져 존폐위기에 놓여있던 1998년의 일을 기억하기도 했다. 그 당시 윤덕주 여사는 호소문을 하나 발표했다. 농구인과 관계자들을 향한 호소문이었다.

‘여자농구단 해체 상황을 보며’라는 주제였다. IMF와 경제 위기가 찾아오며 우승팀도 해체를 고려하던 시기였다. 윤 여사는 여자농구 살리기에 동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자농구가 쌓아올린 그 영광의 순간들을 지켜야 한다며 말이다. 세상을 떠나던 날까지 윤 여사는 농구만 생각했던 농구인이었다. 건강이 안 좋았지만 우리농구의 중요한 순간만큼은 함께 했다. 1남 7녀의 어머니였지만, 농구인들에게는 ‘여걸’이자, ‘한국농구 대모’였다.

“우리 여자농구가 동양에서만 파닥 걸릴 것이 아니라, 국제대회에서도 실력을 과시해야 할 터인데….” 1960년대 윤덕주의 여사의 꿈은 1967년 체코 프라하와 1984년 미국 로스엔젤레스, 그리고 2000년 호주 시드니에서 이뤄졌다.

윤덕주 여사가 떠난 지 16년이 지났다. 1980년대, 1990년대를 거쳐 쌓아온 영광의 시대는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있다. 중심을 잡지 못한 채 스스로 무너뜨렸다. 몇몇 농구인들은 “우리가 너무 건방졌다. 인기에 취해있었다”라고 자책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여전히 환경 탓을 하는 이들도 있다.

취재를 마칠 무렵, 어쩌면 농구계를 이끌어줄 ‘큰 어른’의 ‘부재’가 지금의 결과를 낳은 것은 아닐까 생각해봤다. 그렇다면 과연 그 큰 어른은 언제쯤, 어디서 나타날까. 혹은 누가 될까. 학연지연을 너무나도 잘 따지는 농구계에서 모두에게 ‘고마운 분’이라는 칭송을 듣던 그런 인물을 과연 우리 농구팬들과 농구인들은 또 만나볼 수 있을까.

윤덕주는...
1921년 6월 23일 경북 대구에서 태어난 윤덕주는 1934년 숙명여고보에서 농구를 시작해 1950년까지 네 딸을 가진 엄마농구선수로서 활약했다. 은퇴 이후에도 여자농구대표팀 단장을 비롯해 대한농구협회 이사 및 부회장, 대한체육회 부회장 등을 역임하며 한국농구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1990년 대한민국 체육훈장 맹호장, 대한 올림픽 위원회 공로상 및 국제올림픽 위원회 공로 훈장을 수상했고, 2007년 국제농구연맹 명예의 전당-공로자 부문에 유일한 여성으로 이름을 올렸다. 2005년 7월 8일 자택에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떴다.

※ 이 글은 JUMPBALL 스페셜 에디션「TEAM KOREA」책에서 발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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