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평생 농구를 위한 조력자로 남고 싶다” 최남식 한국중고농구연맹 사무국장

김용호 기자 / 기사승인 : 2021-05-11 15: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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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프볼=김용호 기자] 농구전문잡지 점프볼이 2021년 창간 21주년을 맞았다. 점프볼은 오랜 세월 한국농구와 함께하며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농구매거진으로 자리 잡았다. 이에 본지는 창간 21주년을 기념하는 기획 시리즈로 자신의 자리에서 묵묵하게 농구 발전을 뒷받침해온 주인공을 소개하는 시간을 만들었다. 다섯 번째 주인공으로 점프볼이 찾아간 사람은 한국중고농구연맹의 최남식 사무국장이다. 한국농구의 미래들이 발굴되는 중고농구 무대에서 그 누구보다 많은 땀을 흘리고 있는 한 사람. 최남식 사무국장은 마음만큼은 농구인이라며 앞으로도 한국농구를 위한 서포팅을 멈추지 않으리라고 외쳤다.

▲ 본 기사는 점프볼 5월호에 게재되었습니다.

걷고 싶었던 스포츠의 길
최남식 사무국장은 처음 스포츠와 관련 없는 곳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그가 인생행로에 변화를 주지 않았다면 지금의 최 국장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어찌 됐든 그는 꽤나 우연찮게 농구와 인연을 맺게 됐다. 그 인연은 질겼다. 한국농구의 산실로 불리는 중고농구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켜봤던 그는 그렇게 자신의 땀을 농구 코트에 흘리기 시작했다.

Q. 만나서 반갑습니다. 젊은 사무국장을 만나는 일이 신선하기도 한데, 먼저 중고농구연맹에 입사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원래는 사회에 나와 무역회사를 다녔습니다. 회사 생활을 하다 보니 제 적성에 맞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죠. 20대 때 거의 7년간 아르바이트를 했던 곳이 있는데, 거기 사장님께서 하고 싶었던 일에 대해 고민하며 진로를 다시 생각해보라는 조언을 해주셨어요. 생각해보니 스포츠에 대한 갈망이 가장 크더라고요. 그날부터 대한체육회 산하 모든 기관 사이트를 다 뒤졌던 기억이 나요. 몇 군데 지원했는데, 중고농구연맹에서 연락이 왔던 거죠. 그렇게 2013년에 신입사원으로 입사했습니다.

Q. 그럼 원래 스포츠를 좋아했던 건가요.
어렸을 때 축구를 굉장히 좋아해서 선수에 대한 꿈을 갖기도 했어요. 살던 동네가 수원이라 수원 삼성 축구단의 영향을 크게 받기도 했어요. 중학교 때는 입단 테스트를 받아 선수를 하기로 결정도 했죠. 그런데 아버지께서 형제가 모두 운동을 하는 건 반대하셨어요. 동생이 이미 태권도를 하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운동을 포기하고 일반 학교로 진학했던 거죠.

Q. 축구계로 나아가는 길도 있었을 텐데, 농구도 좋아했나보네요.
제 누나들이 농구대잔치 시절의 엄청난 팬이었어요. 누나들 덕분에 어렸을 때부터 농구를 많이 봤죠. 사실 그때 선수로 봤던 분들을 지금 농구계 현장에서 보고 있으면 신기하기도 해요. 직접 하는 건 아니어도 농구를 본 건 정말 오래됐어요. 개인적으로는 2002년에 축구 월드컵이 붐일 때 아시안게임에서 남자농구가 금메달을 따는 경기를 생중계로 지켜본 건 지금도 잘 챙겨봤다는 생각이 들 정도예요. 농구를 보는 재미는 그렇게 항상 갖고 있었던 것 같아요.

Q. 사실 스포츠 쪽으로 진로를 재설정했다면, 연맹 외에도 나아갈 길은 많았을 텐데요. 많은 선택지 중에 연맹이라는 기관을 선택한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친척 중에 국제축구연맹(FIFA)에서 에이전트를 했던 분이 많은 얘기를 해주셨는데, 국내에서는 에이전트로서 나아가는 게 쉽지 않다고 하시더라고요. 선수들에 대한 육성을 바라보더라도 에이전트보다는 연맹 같은 기관이 더 주축이 될 수 있는 곳이라고 하셨죠. 관심이 적을수록 하는 일도 많을 거고, 페이도 적을 거라는 말을 들었지만, 선수 육성이라는 키워드에 연맹을 선택했어요. 그래서 중고농구연맹에 입사하자마자 룰부터 알아야겠다는 생각에 3개월 동안 심판자격증을 취득하려고 공부도 열심히 했어요. 또, 중고농구연맹이 종목을 통틀어 연간에 하는 행사가 가장 많거든요. 그렇게 많은 일을 소화하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됐어요.

Q. 완전히 새로운 길을 걷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신입사원 시절에 느꼈던 고충도 있었겠죠.
제가 신입사원 때 모시던 분이 박안준 전 사무국장님이었는데, 굉장히 꼼꼼하고 원리원칙을 철저히 지키셨던 분이라고 하죠. 고충이라 하기 뭐하지만, 그분에게 일을 배우면서 혼도 정말 많이 났어요. 지금 돌아보면 어떻게 참고 버텼나 싶을 정도로 엄하셨죠. 하하. 사실 원칙에서 어긋나기 시작하면 연맹은 신뢰를 잃고 제 역할을 다 못하게 돼요. 그런 면에서 박안준 국장님께 원칙을 지키는 건 잘 배웠다고 생각해요. 단순히 직장 상사였다고 하기보단 저에게는 은사님같은 분이죠. 아직도 종종 연락을 드리는데, 제 인생에 있어 좋은 분을 만났다고 생각해요.

Q. 상사가 아닌 은사라고 표현하는 걸 보면, 그분에게서 얻은 게 많았다는 뜻처럼 느껴져요.
은사님이 2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연맹에 계셨어요. 한국 중고농구의 근대화에 굉장히 큰 역할을 하셨다고 생각해요. 어느 단체를 살펴봐도 저희 연맹처럼 여러 가지 제도를 선제적으로 시행한 경우가 없더라고요. 학생선수들의 학습 문제와 관련된 최저학력제 전에 박안준 국장님은 한국사, 한자 자격증에 대한 제도도 만드셨고, 지도자들을 위해 영어교육에 대한 프로그램도 운영하셨어요. 또, 지도자연수회도 매년 개최하는데, 사실 연수회를 매년 개최하는 기관은 거의 없어요. 중고농구를 한국농구의 요람이라고 표현하는데, 그 기틀을 은사님이 다져오셨다고 생각해요. 덕분에 제가 지금 수월하게 일을 하고 있는 것 같고요. 그래서 감사하죠. 저는 이제 큰 틀 안에서 세밀한 부분들을 메워나가는 역할을 해야 하지 않나 싶어요.

Q. 배움도 있었지만, 신입사원 시절 스스로 세운 목표도 있을 텐데요.
솔직히 매 분기 때마다 퇴사 욕구를 느꼈어요(웃음). 대회가 사실상 매달 개최되고, 1년 12달 출장이 정말 많았거든요. 연맹에 입사한 이후로 굉장히 오래 만났던 여자친구와 헤어졌는데, 지금까지 제대로 된 연애를 못 했어요. 하하. 사실 현장에서 느끼는 고충이 많았어요. 중고농구는 체육 단체의 말단인 연맹과 교육 단체의 산하인 학교가 상충되는 곳이거든요. 학교와 체육계의 행정 사이에서 트러블이 생기는 경우가 많았죠. 현장의 개선점을 분명히 알고 있으면서도 해결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렸기에 민원도 정말 많았는데, 그걸 견뎌내는 게 쉽지 않았어요. 그러다 보니 직원들도 스트레스로 인해 1~2년이면 떠났고요. 제가 제일 오래 버틴 케이스거든요. 그러면서 생긴 목표가 직원들에게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 사무국을 만들자는 거였어요. 그래야 연맹이 학생선수들이 좀 더 안정적으로 대회를 치를 수 있게 무대를 만들어줄 수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Q. 그런 목표였다면, 개인적인 고충이 신입사원 시절 이후로도 끊이질 않았겠네요.
개인적으로는 제대로 된 휴가를 가지 못한 게 4년이 넘은 것 같아요. 퇴근도 밤 12시가 넘어야 하는 날이 숱했고요. 특히, 올해는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연맹이 항상 스탠바이되어 있어야 했잖아요. 최대한 직원들에게는 부담을 덜 주고, 제 선에서 일을 해결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직원들에게 비전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는 목표 때문에 개인적으로 실천하고 있는 부분인 거죠.

Q. 아무나 감당할 수 없는 힘듦인 것 같은데, 8년이라는 시간을 꿋꿋하게 연맹에서 보낸 특별한 이유라도 있었던 건가요.
시간이 지나다 보니 이 일에 대한 욕심이 생기더라고요. 2015년에 U16 남자청소년대표팀이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우승을 한 적이 있어요. 그 당시에 연맹에서 트레이너가 한 명만 파견될 예정이었는데, 한 명을 더 지원했죠. 원래 없던 전력분석관도 추가로 합류시켰고요. 있는 돈, 없는 돈을 다 끌어 모아서 전폭적인 지원을 했던 기억이 나요. 그런데 우승까지 하는 걸 보면서 조금만 더 행정적으로 지원이 되면 이렇게 확연히 다른 효과를 볼 수 있다는 게 실감나더라고요. 그 순간부터 항상 의견을 제시할 준비를 했던 것 같아요. 스포츠 선진화를 위해서 더 많은 고민을 하게 되고 공부도 하면서 이 자리에 대한 책임감을 갖게 된 거죠.

절망 속에서 피어난 희망

여전히 전 세계를 덮치고 있는 코로나19. 지난해 중고농구는 코로나19로 인한 직격탄을 맞았다. 한 번 대회가 열리면 수많은 학생선수들이 집결하는 만큼 대회 개최 여건 자체가 녹록지 않았다. 결국 2020년에는 11월이 돼서야 중고농구 주말리그를 개최할 수 있었는데, 이마저도 코로나19의 재확산으로 약 2주 만에 막을 내리고 말았다. 중고농구 대회를 주최하는 연맹, 그리고 그 실무의 중심인 최남식 국장에게는 절망 그 자체였다. 하지만 오랜 시간 꾸준히 고민하고 노력해온 덕분일까. 절망 속에서도 찾아갈 희망은 있었다.

Q. 코로나19로 인해 지난 2020년 한 해가 정말 힘드셨을 것 같아요.
대회를 열지 못해서 그 어느 해보다 많이 사무실에 있었죠. 솔직히 그래서 한가할 줄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 못했어요. 그 와중에 대회를 개최하지 못하는 스트레스 때문에 두 달 반 정도 만에 20kg이 넘게 살이 빠지더라고요. 아무래도 저는 학생선수들이 대회에 나서지 못하면 상급학교 입시에 피해를 입는다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그 피해를 최대한 줄일 방법을 찾아야 했으니까요.

Q. 대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지자체, 학교 등과 협력 과정도 녹록치 못했다고 들었어요.
맞아요. 대회를 우리 연맹의 의지만으로 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개최지 지자체를 설득하는 과정도 있어야 했고, 여러 여건을 맞추기가 쉽지 않았는데, 결국 작년에는 고등학교 3학년 선수들이 1,2학년의 실적만으로 대학 입시를 치르는 상황이 발생한 거죠. 10년 정도의 세월 동안 운동을 해온 선수들이 그런 식으로 매듭을 짓고 떠났다는 건 정말 미안하게 생각해요.

Q. 다행히 올해는 첫 일정인 춘계연맹전이 성공적으로 개최됐어요.
지난해에 스트레스가 굉장히 컸어요. 선수들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요. 그래서 올해는 박소흠 회장님도 춘계연맹전을 무조건 개최해야한다고 지침을 주셨어요. 이를 위해 중고연맹이 최초로 대회 참가자 및 방문자에게 코로나19 사전 검사를 의무화시킨거고요. 적어도 1년에 3~4개 정도의 대회는 치러야 선수들이 제대로 된 평가를 받고 입시를 치를 수 있어요. 중고연맹이 대회를 개최하지 못하면, 작년과 똑같은 상황이 발생하기 때문에 춘계연맹전에 온갖 노력을 쏟을 수밖에 없었죠.

Q. 학생선수들의 입장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모습이 당연하면서도 정말 대단해보입니다.
춘계연맹전을 진행하면서 결국 한 선수의 코로나19 확진 소식을 접하고 말았어요. 불행 중 다행으로 경기를 하러 오기 전에 확인이 되면서 대회 중단은 방지할 수 있었죠. 이를 계기로 교육부 차원에서 운동 선수들에 대한 코로나19 전수 검사가 시행됐다고 하더라고요. 또 이제 전국적으로 코로나19 검사를 무료로 시행하기 때문에 지방의 농구부들도 부담 없이 검사를 받고 안전하게 대회를 치를 환경이 갖춰진 것 같아요. 올해는 반드시 예정된 대회들을 다 개최해서 선수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해야죠.

Q. 이 정도면 농구인이라는 자부심을 충분히 가져도 될 것 같아요.

사실 제가 신입사원 시절에 사무국 사정상 팀장이라는 직책을 달고 연맹 생활을 시작했어요. 그때 우연히 한 코치님을 만나게 됐죠. 제가 입사하기 전에 제 자리에 있던 분은 흔히 말하는 농구인 출신이었거든요. 그래서인지 그 코치님이 제가 농구인이 아닌 사람이라 자리를 하나 뺏는 것 같아 기분이 좀 나쁘다고 하시더라고요.

Q. 어렵게 선택한 길이었는데, 상처가 되지는 않았나요. 아니면 오히려 동기부여가 됐던 걸까요.
그 말을 듣고 술도 잘하지 못하는 제가 그 코치님과 술잔을 주고받으며 잘하겠다는 다짐을 했던 기억이 나요. 실제로 일을 잘한다는 말을 들으려고 정말 열심히 노력했고요. 이제는 전 스스로 농구인이라고 생각해요. 어떤 농구인보다 농구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한다고 자부할 수 있어요. 이론적인 부분에서는 겉핥기 수준일지 몰라도, 애정하는 마음만큼은 농구인으로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자부심이 있어요.

Q. 멋있는 자부심이네요. 그렇다면 사무국장의 자리에 오를 거란 예상은 했나요.
솔직히 사무국장이라는 타이틀 자체는 생각도 못 한 일이었어요. 연맹 회장님이 기업을 운영하셔서인지 사고방식이 파격적일 때가 있으시거든요. 제가 열심히 일하는 직원이라고 생각하셔서 파격적인 인사를 결정하셨던 것 같아요. 지금까지 중고농구연맹 사무국장을 지내셨던 분들을 보면 은퇴하신 농구인들이 하는 경우가 대다수였거든요. 저같이 젊은 사무국장은 거의 없었죠. 그래서 어리다는 이유로 무시당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그러다 보니 더 악착같이 일을 했어요. 빈틈이 생기지 않도록 노력했고, 이 인사를 결정하신 회장님께 누가 되지 않기 위해 또 노력했죠.

Q. 사무국장이 되고 나서 새롭게 생긴 목표도 있을 것 같아요.
앞서 말했듯 안정된 직장의 시스템을 만들고 싶어요. 중고농구연맹이 한국농구의 요람으로서 학생선수들을 도와야 하는데, 그러려면 서포트하는 사람들부터 안정적인 시스템 안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제가 사무국장으로 있는 동안에 그 체계를 구축하려고 노력 중이죠. 사무국장으로서 부담이 굉장히 커요. 여전히 현장에서 전광판을 들고 뛰어다니고, 농구공에 바람을 넣는데 그렇게 노력하는 걸 많은 분들이 알아주시고 도와주시기 때문에 보답을 하고 싶어요.

Q. 개인을 떠나 중고농구연맹의 방향성에 대해서도 목표하는 바가 있을 텐데요.
중고농구연맹은 그간 KBL, WKBL 등과 긴밀하게 협력하며 허브 역할을 해왔어요. 농구협회는 저희가 산하단체니까 물론이고, 실업연맹이나 초등농구연맹까지 중고농구연맹으로서 중심축이 되려는 노력이 많았죠. 앞으로도 그 역할은 점점 커질 거라고 생각해요. 선수 육성을 시작으로 지도자 교육, 지도서 번역 및 발간, 청소년대표팀 전력분석관 파견 등등 협회에서 다하지 못하는 일들을 저희가 하는 거죠. 그렇게 중고연맹이 선제적으로 필요한 일들을 해나가면 시스템의 안정화가 찾아오지 않을까 해요. 앞으로도 중고농구연맹은 필요한 제도를 먼저 도입해서 시행할 수 있는 단체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요. 그 과정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더 노력할 거고요.

Q. 이미 많은 노력의 결과를 낳은 걸로 알고 있는데, 인터뷰 자리를 빌어 최남식 사무국장의 구슬땀도 돌아볼까 해요.
개인적으로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건 가장 현실적인 문제인 예산확보죠. 문체부의 지원금을 받기 위해 열과 성을 다해서 사업계획서를 쓰거든요. 이를 위해 문체부가 어떤 의지를 가지고 어떤 방향의 정책을 제시하는 지 파악하는 것도 중요하고요. 그렇게 해서 많은 예산을 확보하고, 결국 학생선수들에게 돌려줘야 하니까요. 그렇게 예산 확보를 할 때마다 뿌듯함을 느끼곤 해요.

Q. 오랜 시간 현장에서 중고농구와 함께하면서, 코트에 준 변화도 있죠.
예전에는 대회를 개최하다 보면 마핑 요원이 없었어요. 마핑 요원을 운영하는 게 큰일이 아닌 것 같지만, 선수들의 부상과 직결되는 문제거든요. 그래서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예산 협의를 했고, 지금은 무조건 마핑 요원들을 대회에 배치하고 있죠.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제가 현장 가까이에서 바라봤을 때 무조건 필요한 요소였어요.

Q. 기자가 아니라 농구팬의 입장에서 볼 땐 중고농구연맹이 유튜브로 전 경기 중계를 시행하는 것도 눈에 띄었거든요.
맞아요. 그것도 중고연맹이 최초인 걸로 알고 있어요. 기록지 전산화도 그렇고요. 전 경기 중계는 에피소드가 있어요. 원래는 한 대회의 100여 경기 중에 10경기 정도만 중계할 수 있는 예산을 갖고 있었는데, 한 학부모님이 전화를 하셨어요. 새벽이었는데, 그분이 체육관에 직접 찾아가지 못했는데 딸의 경기가 보고 싶으시다며 술을 드시고 전화를 하셨죠. 새벽에 그 전화를 받고 한참을 생각했어요. 그리고 결국 전 경기 유튜브 중계를 시행하게 됐죠. 사실 이건 다른 명분도 많아요. 모든 학생선수들이 프로에 가는 것도 아닌데, 언젠가는 내가 뛰었던 경기를 돌아볼 수도 있잖아요. 입시에도 큰 역할을 할 테고요. 무료로 모든 영상 소스를 오픈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요.

Q. 앞으로 중고농구연맹에게 더 기대해볼 수 있는 행보는 어떤 게 있을까요.
세세한 부분들을 계속 채워나갈 거에요. 체육관 시설을 보완해나가면서 대회 개최 여건도 확보할 생각이에요. 전국팔도 어디든 급하게 경기 일정을 잡아도 선수들이 뛸 수 있도록 저변을 확대시키고 싶어요. 또, 지금 연맹 자체적으로 선수들이 고등학교 졸업 이후에 진로가 어떻게 되는지 데이터를 수집하고 있어요. 최근에 국정감사에서 이에 대한 질문이 나왔는데 아직 어떤 단체도 실행하고 있지 않더라고요. 이 데이터를 토대로 선수들이 엘리트 농구를 떠난 뒤에도 농구계와 유기적으로 지낼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고 싶어요.

Q. 최남식 사무국장의 끊임없는 노력이 더욱 큰 결실을 맺길 응원하겠습니다. 마지막 질문인데, 앞으로 어떤 농구인으로 남고 싶나요.
마음속으로 만큼은 전 정말 농구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 자부심을 가지고 평생 농구를 위한 조력자로 남고 싶습니다.

최남식 사무국장은…
1984년 6월 15일생. 최남식 한국중고농구연맹 사무국장은 무역회사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한 비스포츠인이었다. 진로에 대한 고민을 하던 끝에 우연히 중고농구연맹과 연을 맺게 됐고, 2013년 입사 이후 빠른 시간 안에 사무국장이라는 무거운 자리까지 올랐다. 그리고 그 자리의 무게를 최남식 국장은 누구보다 많은 구슬땀을 흘리며 견뎌내고 있다.

# 사진_점프볼 DB(유용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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