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유희형이 쓰는 나의 삶 나의 농구⑫1975년 방콕아시아농구선수권대회

점프볼 / 기사승인 : 2021-10-06 11:5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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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프볼이 유희형 전 KBL 심판위원장이 쓰는 <나의 삶 나의 농구>를 연재합니다.
 

1960~1970년대 남자농구 국가대표를 지낸 유희형 전 위원장은 이번 연재를 통해 송도중에서 농구를 시작한 이래 실업선수와 국가대표로 활약하며 살아온 농구인생을 독자들에게 담담하게 전달할 예정입니다.

*본 기사는 점프볼 10월호에 연재된 글입니다.

난장판이 된 코트
제8회 아시아농구선수권대회가 1975년 11월 15일부터 26일까지 태국 방콕에서 개최됐다. 방콕은 6년 전 우승을 경험했던 곳이다. 김영기 감독, 이인표 코치에 곽현채, 유희형, 이자영, 강호석, 황재환, 이광준, 김인진, 김동광, 이보선, 신선우, 박형철, 김형년으로 구성되었다. 1년 전 테헤란 아시안게임 멤버와 함께 김형년과 신선우가 새로 발탁됐다. 세 번째 아시아 정상 도전이었지만, 중국의 벽은 너무 높았다. 평균신장이 커졌고, 2m대의 선수가 외곽 슛까지 겸비했다. 190cm의 우리 팀 센터진이 2m 10cm가 넘는 중국팀 장신선수의 골 밑 플레이를 막아낼 수가 없었다. 외곽슛 공세도 무서웠다. 중국에 많은 점수 차로 패했다. 1974년 아시아 무대에 처음 등장한 중국 농구가 아시아를 제패하기 시작한 대회였다. 

경기 중 불미스러운 일도 발생했다. 나 때문에 사달이 났다. 내가 화를 참지 못해 벌어진 일이다. 후반전 막판, 20점 이상 리드 당하고 있어 포기한 상태인데, 중국 골게터 쟝 선수가 계속 시비를 거는 것이다. 2년 전 테헤란 아시안게임에서 중국을 물리칠 때 나에게 얻어맞은 선수다. 내 팔꿈치에 눈퉁이가 밤탱이가 되었는데, 그것에 대한 보복을 감행한 것이다. 공격할 때 턱을 치고 얼굴을 밀어내고 팔꿈치로 옆구리를 가격한다. 가는 길을 막아서기 때문에 앞으로 갈 수도 없었다. 그 순간, 참고 참았던 것이 폭발했다. 내 오른손 주먹이 얼굴을 향해 날아갔다. 전광석화 같은 펀치였다. 나는 아차! 하며 후회했다. 꽉 들어찬 관중석에서 물병이 쏟아져 날아오고 관중 일부는 코트 안까지 난입했다. 경기가 중단되고 경기장은 난장판이 되었다. 심판은 그 장면을 보질 못했다. 중국을 응원하던 관중들이 본 것이다. 방콕은 그 당시 차이나타운이 있었고, 중국인이 많이 살고 있었다. 관중석을 꽉 메운 중국 응원단이 폭발한 것이다. 20여 분간 경기가 중단되었다가 경찰 도움으로 재개되었다. 결국, 78-97로 대패했다.
 

중국의 에이스 쟝 선수는 나에게 똑같은 부위를 두 번이나 얻어맞은 것이다. 두 번 모두 사과할 겨를이 없었다. 요즘 같으면 중징계를 당할 사안인데, 당시 비디오판독 시스템이 없어 그냥 넘어갔지만, 진심으로 뉘우치고 후회했다. 다시는 그런 행동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도 했다. 국내 경기에서는 어떤 상황에서도 화를 내거나 보복한 적이 없다. 항상 웃으며 경기에 임했다. 새까만 후배가 가격해도 참아냈지만, 국제경기에서는 자제를 못 한다. 한 대 맞으면 두 대를 때려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다.
 

결국, 일본에도 패하며(102-106) 3위를 했다. 최악의 성적이었다. 고참인 내가 부진했기 때문이다. 우리와 항상 우승을 다투던 필리핀도 중위권으로 밀려났다. 이유는 아시아 최초로 프로농구가 출범했기 때문이다. 우수한 선수는 모두 프로로 전향했고, 대학선수들이 출전했다.
 

당시, 프로선수는 국제대회에 출전할 수 없었다. 프로선수의 국제대회 출전은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때부터 허용됐다.

속상하고 야속했던 방콕의 나날
경기가 끝난 후 필리핀 프로팀의 스카우트 제안이 있었다. 국내 언론에 크게 보도되었다. 그쪽에서 제안한 조건이 실망스러웠다. 제시한 연봉이 기대 이하로 적었다. 결국, 포기했다.
 

변명 같지만, 이 대회에서 성적이 저조한 원인도 있었다. 선수단 단장이 농구협회 부회장이었다. 그분은 다혈질이며 독재자였다. 타협이 없는 분이었다. 1968년, 사소한 사유로 당시 주장, 김영일 씨를 대표팀에서 탈락시킨 분이다. 대표팀의 좌장이며 최고참인 그분은 미국 전지훈련단에서 제외되는 수모를 격었다.  

경기가 있는 날은 훈련이 없다. 몸 관리를 위해 휴식도 중요하지만, 방에만 있으면 몸이 나른해지고 무거워진다. 경기가 저녁이어서 오전에 산책도 하고 자유시간을 갖는 것이 관례인데, 호랑이 단장이 외출을 금지했다. 선수들 방 입구에 단장 방이 있었다. 문을 열어놓고 선수들을 감시했다. 꼼짝없이 방에만 있어야 했고, 침대에서 뒹굴며 잠만 잤다. 낮잠을 많이 자면 컨디션 조절이 되지 않는다.
 

일본에 패할 때가 최악이었다. 멍하고 몸이 둥둥 떠다니는 것 같았다. 1971년 도쿄 ABC(아시아 남자농구선수권대회)에서 홈 텃세 때문에 일본에 패한 후 처음으로 진 것이다. 화도 나고 자신에게 너무 실망했다. 선수단에도 미안한 마음에 얼굴을 들지 못했다.
역대 대회 중 나의 활약이 가장 저조했다. 귀국 후 언론에서 B모 씨의 말을 인용, ‘유희형이 대회를 망쳤다.’라고 비난했다. 필리핀 프로농구 출범도 불똥이 튀었다. 필리핀에 진출하려고 고의로 부진했다고 보도했다. 속상했다. 나 혼자 뛴 것도 아닌데, 야속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만큼 내게 거는 기대나 비중이 컸다는 의미로 받아들여 다음 경기를 위한 훈련에 매진했다.
 

사진 | 본인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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