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LEGENDS] (17) 'THE BEST EVER' 농구대통령 허재

정지욱 기자 / 기사승인 : 2022-05-06 11:4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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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구 역사를 말할 때 결코 빠져서는 안 될 이름 허재. 걷잡을 수 없는 폭발력과 완벽한 기량, 부상을 개의치 않는 투혼으로 많은 농구 팬들을 들끓게 한 농구 대통령. 그의 플레이를 보며 환호하고 희열을 느낄 수 있었다는 것은 그와 같은 시대를 살아온 농구팬들이 누린 최고의 행운일 것이다.
 


無敵 용산시대
허재가 농구를 처음 시작한 것은 197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동북초등학교 3학년 시절 허재는 특별활동을 통해 농구를 처음으로 접하게 됐다. 금세 농구에 재미를 붙인 허재는 동북초등학교 농구부가 해체되자 상명초등학교로 전학해 정식 농구선수로서 첫 발걸음을 내딛었다. 허재는 선수로서 치른 첫 대회부터 버저비터를 성공시키며 범상치 않은 기량을 발휘했다. 이후 용산중학교로 진학한 허재는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주전으로 도약하며 자신의 이름을 조금씩 알려나갔고, 용산고등학교에서부터 자신의 전성시대를 펼치기 시작했다. 허재는 이 시기를 자신의 실력이 가장 발전한 시기로 꼽는다. 그의 성장은 용산고의 승리와도 직결됐다. 허재의 입학 후, 용산고는 ‘무적’이라 불리고 ‘최고’라 읽혔다.

Q. 어릴 때부터 공이 찢어질 때까지 연습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동북초등학교 때 특별활동으로 농구부에 들어갔어. 동북초등학교 농구부가 해체되면서 상명 초등학교로 전학을 갔지. 공이 찢어질 때까지 연습했다는 건 그만큼 운동을 많이 했다는 이야기인데, 조금 부풀려진 것 같아. 어릴 때부터 남들보다 잘하려고 연습을 많이 했던 것은 사실이야.

Q. 생애 첫 버저비터를 기억하시나요?
내가 나간 첫 대회가 전농(전국초등학교 농구대회)대회였는데, 아마 불광동에 있는 소년의 집 체육관에서 벌어진 준결승이었을 거야. 그때는 뭐 어떤 기분인지도 몰랐어. 마냥 좋았던 거지.

Q. 1978년 용산중학교로 진학하셨어요. 1학년 때부터 바로 주전으로 뛰신 건가요?
선배였던 (유)재학이 형하고 (전)창진이 형이 주전이었고, 난 점수차가 벌어지면 나갔지. 주전으로 뛴 거는 2학년 때부터야.

Q. 용산 중, 고 시절 6년간 진 경기가 거의 없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내 기억에도 진 기억이 거의 없어. 중3때는 전승이었어. 고등학교 가서는 1학년 때부터 주전으로 뛰었는데, 1학년 때는 2관왕, 2~3학년 때는 3관왕 했었고 고등학교 때 제일 성적 안 났던 기록이 아마 4강이었을 거야. 그때는 지는 걸 몰랐지. 계속 이기다보니 져도 이긴 것 같고 그랬어.


Q. 고등학교 시절부터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슛, 드리블, 리바운드, 패스, 묘기 등 모든 면에서 찬사를 받았습니다. 하루아침에 이뤄진 결과가 아닐 것 같아요.
개인 운동을 많이 한 편이었어. 내가 운동한다는 걸 남들이 모르도록 늦은 밤이나 이른 아침에 혼자 운동하고, 팀 운동을 할 때는 운동 안한 척하고 그랬지. 무작정 운동하기보다는 내가 안 되는 부분을 집중적으로 했어.

Q. 어떤 부분이 부족했나요?
난 슛이 좋지 않았어. 득점을 대부분 돌파나 속공으로 했었지. 그래서 집중적으로 슛 연습을 했었어. 이충희 선수가 매일 1,000개씩 연습했다고 하던데, 난 1,000개까지는 아니었고 매일 300-400개 정도 던졌던 것 같아. 대학교 2학년 말 정도가 되니깐 그 때가 되서야 슛이 안정적으로 되더라고.

Q. 누님께서 미국에서 특수 안경을 선물하셨다는 얘기도 있었는데요.
누나가 미국으로 이민 갔을 때 사온 특수 안경이었어. 안경이 알은 없고 테가 두껍게 되어있어서 밑을 볼 수 없었어. 그 안경을 쓰고 드리블 연습을 많이 했어. 공을 안보고 앞만 보면서 드리블을 하니깐 도움이 되더라고….

Q. 고교 시절부터 몸이 굉장히 좋으셨어요. 어떻게 몸을 만드신 거죠?
중학교 2학년 때까지는 우리 애들(허웅, 허훈)처럼 호리호리 했어. 웨이트를 불리려고 음식도 많이 먹고 체력운동을 많이 했어. 중3때부터 몸이 좋아지기 시작하더라고.

농구는 허재하기 나름
용산고에서 초고교급 선수로 성장한 허재는 연세대, 고려대의 스카웃 제의를 뒤로 하고 중앙대 진학을 선택했다. 김유택-한기범의 더블 포스트를 보유했던 중앙대는 허재의 가세로 한층 강화된 전력을 구축, 실업팀을 위협할 정도에 이르렀다. 1990년대 중반에는 연세대가 농구대잔치 우승을 하는 등 대학세가 강세에 있었지만, 1980년대 만해도 대학 팀이 실업팀을 꺾는 일은 그리 흔한 일이 아니었다. 중앙대는 1984, 1985년 2년 연속으로 농구대잔치 준우승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중앙대 전성시대의 한 가운데에 있었던 허재는 중앙대 멤버들이 주축을 이룬 기아자동차(당시 기아 산업)로 진로를 결정했다. 1987년 김유택-한기범-유재학을 영입하면서 현대-삼성 2파전으로 흘렀던 실업 농구를 기아-삼성-현대의 3강구도로 바꿔놓은 기아는 허재의 입단으로 본격적인 독주 체제를 구축했다.

허재의 입단 후 기아는 농구대잔치 5연패라는 위업을 이룩하는 등 8시즌 동안 무려 7번의 우승을 차지하며 ‘기아왕조’를 열었다. 한국 농구는 물론, 한국 스포츠를 대표하는 거물로 자리 잡은 허재에게는 ‘농구 대통령’이라는 호칭이 붙기 시작했다. 오죽하면 ‘한국 농구는 허재 마음먹기 나름’이라는 말이 있었겠는가.

Q. 명문 대학들의 스카우트 제의를 뿌리치고 중앙대를 선택한 이유가 궁금합니다.
언론에 나갔던 내용이 정말 그대로야. 정봉섭 부장님이 6년 동안 아버님을 선배같이 모셨어. 원래 낚시를 할 줄 모르는 양반이었는데, 아버님이 낚시를 좋아하셔서 낚시를 배워서 같이 다닐 정도였거든. 대단한 정성이셨지. 아버님이 군인 출신이셔서 그런 의리도 중요하게 생각하셨어. 그래서 다른 학교에 간다는 생각은 안하고 빨리 진로를 결정했지.

Q. 용산 신화에 이어 중앙대 신화를 이어갔는데요. 강호 실업팀들을 격파하는 이변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습니다.
한기범, 김유택 선배가 있다 보니 경기가 수월했지. 중앙대도 내가 들어가면서 외곽에 균형이 맞춰졌고. 다들 젊다보니 한번 기세를 타면 무섭게 치고 올라갔어. 그러면서 자신감이 갈수록 좋아진 거지.

Q. 대학 연맹전에서 단국대를 상대로 75점이라는 경이로운 득점 기록도 있던데요. 전반전 팀 득점은 전부 다 넣으셨다고 들었어요.
정봉섭 부장님이 나한테 기록을 한번 세워보라고 말씀하셔서 후배들이 도와준 거야. 내 자랑 같지만 도와준다고 해도 그렇게 많이 넣기가 쉽지는 않거든. 체력이나 기술이 바탕이 되어야 하지. 정신 없이 계속 득점했지. 그 75점이 내가 농구하면서 가장 많이 넣은 점수야.

Q. 천재, 대통령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은 것도 이때부터였습니다.
그때도 수식어가 앞에 붙는 선수들은 많았는데 천재, 대통령이라는 수식어는 없었어. 어린 나이에 그런 말을 듣게 되니 기분 좋고 자랑스러웠지. 이왕 붙는 수식어인데 대통령이라니까 더 좋잖아. 지금도 ‘농구 대통령’이라는 말이 제일 마음에 들어.

Q. 현대와 삼성, 그리고 기아가 스카우트 전쟁을 벌였습니다. 당시 억대 스카우트 금액이 오고 갔었는데, 기아를 가게 된 결정적 이유가 있다면요?
중앙대도 그렇듯이 기아도 의리 때문에 가게 된 케이스지. 다른 팀에 갔다면 더 많은 돈을 받았겠지만 돈보다는 의리였어. 어떤 선수들은 헬기에 실어 나르고 그랬다던데 나는 처음부터 어느 팀으로 가겠다고 발표를 해서 파동 같은 것은 없었지. 내 진로에 대해 매스컴에서 다루기는 했지만 진로를 바로바로 결정해서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어. 매번 조용히 진로가 정해진 것도 어떻게 보면 복이라고 생각해.


Q. 실업 데뷔전서 27점 18리바운드를 기록하셨어요. 리바운드 기록이 놀랍습니다. 당시 최고기록이었던 21개에는 못 미쳤지만 가드, 포워드 포지션에서는 최고 기록이었어요
.
한기범, 김유택 선배가 있어서 상대편이 둘에게 리바운드를 안 주려고 박스아웃을 굉장히 강하게 했어. 그래서 그 틈을 타 내가 리바운드에 참여하면서 그런 기록이 나온 것 같아.

Q. 실업 첫 경기라는 긴장감이나 부담감은 느끼시지 않았나요?
긴장은 어릴 때부터 한 적이 없었어. 하하.

Q. 농구대잔치 5연패를 이룩하다가 1993년에 연세대에게 일격을 당했어요. 그 해에는 플레이오프에서도 중앙대에 패배하면서 8강에서 탈락했는데요. 대학세에 고전한 이유가 있었다면요?
그 경기는 아직도 기억이 나. 황당했지. 2초인가 3초가 남았었을 거야. 슛을 쏠 수 없는 상황인데 그게 들어가더라고. 그 때 버저가 좀 늦게 울린 부분도 있었어. 당황스러웠지. 진다고는 전혀 생각 안 했거든. 당시에는 한기범, 김유택 선배가 체력이 많이 떨어지고 있었어. 그 와중에 서장훈, 문경은, 이상민 같은 선수들이 치고 올라오면서 체력적인 면에서 뒤졌던 것이지. 내 체력에 대해서도 얘기가 나왔는데, 나는 체력에는 큰 문제는 없었어.

Q. 탈락 이후 이듬해 다시 2연패를 이뤄냈습니다. 8년 동안 7회에 걸쳐 우승을 이뤄내셨는데요.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는 언제였는지요.
몇 년도 인지 정확하게 기억이 안 나는데, 삼성하고 결승전을 치르는 해였어. 5분 동안이었나…. 혼자서 17점을 연속으로 넣었었는데 그 경기가 가장 기억에 남아. (※필자 주 - 허재는 94-95농구대잔치 삼성과의 결승 4차전에서 경기 막판 4분 30여초 동안 무려 17점을 연속으로 득점하며 기아를 우승으로 이끌었다. 허재는 41득점을 기록했다.)

Q. 저도 그 경기를 굉장히 인상 깊게 봤습니다. “내가 넣어야겠다”이런 마음을 먹고 득점을 올리신 건가요?

내가 어떻게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기보다 경기를 하다보면 자연스럽게 그런 흐름이 올 때가 있어. 득점 찬스가 계속 났고 수비에서도 인터셉트가 되면서 내가 분위기를 탄 거지. 경기 끝나고 삼성 선배들한테 ‘너 땜에 졌다’는 얘기도 많이 들었지.

투혼으로 차지한 MVP
농구대잔치를 통해 경기 수준을 향상시키고, 농구 붐까지 일어난 한국 농구는 1997년, 대망의 프로농구 시대를 열었다. 그러나, 농구대잔치를 평정했던 허재의 운명은 프로농구 출범과 함께 다른 국면으로 들어선다. 외국인선수들의 등장과 후배 강동희의 성장으로 입지가 흔들렸던 것이다.

결국, 프로원년, 기아는 우승의 영광을 차지했지만 허재는 벤치를 지켰다. 그러나 이대로 물러날 농구대통령이 아니었다. 그는 이듬해 대전 현대(현 전주 KCC)와의 챔피언결정전에서 부상 투혼을 발휘, 준우승 팀 소속임에도 불구하고 MVP를 수상하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겼다. 허재가 투혼을 발휘한 97-98 챔피언 결정전은 지금까지도 프로농구 최고의 명승부로 회자되고 있다.

팀에 준우승을 안긴 허재는 영원할 것만 같던 기아맨으로서의 생활을 청산하고 원주 나래(현 원주 동부)로 이적, 새로운 도전에 나선다. 비록 전성기를 지난 나이였지만 농구대통령의 열정은 나이를 극복하고도 남았다. 프로농구 최초의 2경기 연속 트리플-더블을 기록하기도 했으며 2002-2003시즌에는 TG를 우승으로 이끌었다. 한국 농구의 아이콘이자 투혼의 화신이기도 했던 허재는 2003-2004시즌을 끝으로 선수로서 농구대통령의 임기를 마감하고 지도자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Q. 33살 되던 해에 프로농구가 출범했습니다. 전성기를 지난 나이에서의 출범이라 아쉽지는 않았나요?
아쉬운 건 있지. 프로가 빨리 생겼다면 나에게도 좋았겠지만 ‘팬들에게 좀 더 좋은 모습 보여줬을 텐데’하는 아쉬움도 있어.

Q. 프로 원년에는 팀 성적과 별개로 고전을 했습니다. 원년에는 불미스러운 사건(무면허 음주운전)으로 인해 운동이 부족했던 면도 있지 않았나요?
맞아. 개막할 때쯤은 운동량이 부족해서 몸이 만들어지지 않은 상황이었어. 시즌을 치러나가면서 컨디션을 올리고 있었지. 2라운드쯤부터 기량이 나오기 시작했어. 몸이 처음부터 만들어진 상태였다면 더 좋은 시즌을 보낼 수 있었을 거야. 아쉽지.

Q. 원년에 기아의 우승을 코트가 아닌 벤치에서 바라보셨어요. 어떤 생각이 들었나요
프로가 되면서 (강)동희 기량이 절정에 올랐어. (김)영만이도 한창 좋았지. 정규리그때 내가 제 컨디션이 아니었는데도 동희랑 영만이가 팀을 잘 이끌었어. 챔피언결정전에서 벤치에 앉아 있으면서 이적을 결심했어. 이제는 내가 같이 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거든.

Q. 1997-1998시즌 현대와의 챔프전은 영원히 회자될 이야기입니다. 그때 어떤 심정으로 경기에 임하셨는지요?
부상이 많았기 때문에 정규리그였다면 쉬었을지도 몰라. 우승이 걸린 챔프전이기도 하고 단기전이다 보니 부상을 이겨낼 수 있다고 생각한 거지. 그해를 마지막으로 팀을 떠나겠다고 마음을 먹었던 것이라서 유종의 미를 거둬야겠다는 생각이었어. 마지막으로 우승하면서 좋은 선물을 남기려고 한 거야.


Q. 부상 상태가 정확히 어땠나요?
오른손 등이 골절됐고 발목 인대가 늘어나고 허벅지도 정상이 아니었지. 나중에는 눈도 찢어졌고…. 통증은 있었는데, 그렇게 많은 관중 앞에서 경기를 뛰다보면 다 잊혀져. 뛸 때만큼은 잊고 뛰는 거지. 그러고 경기 끝나면 다시 아프고….

Q. 당시 기아가 이길 전력도 아니었고 선수들의 체력도 떨어진 상황이었어요. 그래도 우승에 자신이 있었나요?
그때만이 아니라 항상 경기는 해봐야 한다고 생각해. 모자란 부분은 다른 것으로 메워 나가면서 최선을 다하면 누가 이길지 모르는 거야. 특히 단기전에는 더 그렇지.

Q. 외국선수인 저스틴 피닉스가 태업을 했었어요. 원망스럽지 않았나요? 피닉스가 제 기량을 발휘했다면 그나마 전력에 보탬이 됐을 텐데요.
왜 안 했겠어. 원망 많이 했지. 걔가 원래대로 뛰었으면 경기하기가 훨씬 수월했겠지. 클리프 리드가 (조니)맥도웰 하나 상대하기도 버거운 상황이었는데, 남은 한 명(제이 웹)까지 막아야 했어. 리드가 고생을 많이 했지. 나도 그렇고 걔(리드)도 그렇고 팀 전체가 지치고 많이 힘들었는데 이기겠다는 정신력으로 버틴 거지. 정말 힘들었어.

Q. MVP가 되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으셨나요? 워낙 활약이 뛰어났었는데.
졌는데 무슨 MVP야. 생각도 안하고 있었어. 경기 끝나고 라커룸으로 가고 있었는데 내가 MVP가 됐다고 경기장으로 가야된다 하더라고. 상을 받기는 했지만 경기에서 졌기 때문에 기분은 그리 좋지 않았어. 물론 기억은 남지. 진 팀에서 MVP가 나온 적이 지금껏 한 번도 없으니깐. 하지만 지금도 ‘팀이 우승하면서 받았으면 더 좋았을 텐데’라는 생각을 많이 해.

Q. 나래로 이적하게 된 정확한 이유가 궁금합니다.
나래가 프로 원년에 정규리그 1위도 했었고 괜찮은 팀이었는데, 포워드 라인이 좀 약했어. 그래서 내가 필요한 팀이라고 생각했어. 팀에 모자라는 부분을 내가 채우면서 팀을 한 단계 발전시키고 성적을 내보려고 한 거지.

Q. 나래 이적 후 1998-1999시즌, 현대전에서 4쿼터 15점차 역전시키신 적이 있어요. 기억하는지요.
언제인지는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데, 4쿼터에 뒤집은 것은 기억나. 그것도 5분 동안 17점 넣은 것이랑 같은 맥락이야. 경기하다가 흐름이 오면 그걸 놓치지 않는 거지. 물론, 그러기까지는 실수도 많이 하고 그래. 하지만 그런 실수를 하지 않고서는 그만한 자신감도 가질 수 없고 발전도 할 수 없어.

Q. 그 경기에서 38점 9어시스트 8리바운드 9스틸을 기록했습니다. 최초의 쿼드러플더블도 가능했는데, 기록을 의식하시지는 않았는지요.
프로에 와서 기록에 대한 욕심은 없었어. 득점을 하고 리바운드를 잡고 어시스트를 하지만 지금까지 경기 끝나고 내 기록이 어떤지 기록지를 본 적은 한 번도 없었어.

Q. 1999-2000시즌에는 새끼손가락 인대가 끊어지는 중상에도 불구하고 플레이오프 진출을 이루셨어요. 그때 후유증 때문에 왼손 새끼손가락 모양이 지금처럼 변하신 거죠? 부상투혼에 대해 후회하시지는 않나요?
영광의 상처인 거지, 후회하기는 뭘…. 그때는 손가락에 힘이 하나도 없는 상태에서 경기를 했어. 다 정신력이야. 지금 선수들한테도 정신력을 많이 강조하고 싶어.

Q. 이적 후 두 시즌 동안은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지만, 이후에는 하위권으로 쳐졌어요. 갈수록 팀 성적이 떨어져서 고민도 많으셨을듯해요.
그렇지는 않았어. 팀을 재정비하는 기간이었거든. 그때 성적이 떨어져서 (김)주성이를 데려왔고 우승도 한 거지.

Q. 2002-2003시즌 플레이오프에서 LG로 이적한 강동희와의 맞대결도 정말 멋졌습니다. 적으로서 플레이오프에서는 처음 만난 것인데, 어떤 생각이 들던가요?
별다른 감정은 없었어. 서로 이겨야 하는 상황이었고 선의의 경쟁이었지.


중국만큼은 꼭 이기고 싶었다
허재에게 있어서 대표팀 이야기 역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고교 2학년 때 처음 태극마크를 단 그는 서울 올림픽과 세계선수권대회 등에서 세계정상급의 선수들과 기량을 겨루며 자신의 이름을 알렸으며 한국 농구의 위상을 높였다. 신장과 기술을 겸비한 세계강국과의 대결에서 우리나라가 승리를 거두기에는 부족한 것이 사실이었지만, 허재는 자신감 넘치는 플레이로 장신 선수들을 넘어 득점을 올리고 종횡무진 코트를 누볐다.

1988년 서울올림픽과 1994년 캐나다 세계선수권에서의 활약은 지금도 세간에 오르내릴 만큼 강한 인상을 남겼으며 1990년 아르헨티나에서 열린 세계선수권 대회에서는 무려 62점을 퍼붓기도 했다. 그러나 수많은 우승을 차지한 국내에서와 달리 허재는 국제대회 우승과는 유독 인연이 없었다. 아시아 무대에서도 번번이 중국의 벽에 막혔다. 또한 음주 파동 등으로 물의를 일으키는 등 순탄치 만은 않은 대표팀 생활을 보냈다.

Q. 1982년 9월, 고등학교 2학년 때 첫 태극마크를 달게 됐습니다. 굉장히 어린 나이였어요.
자부심을 굉장히 많이 가졌어. 건방진 표현일지도 모르지만 대표팀에 빨리 발탁이 되면서 고등학교 때 다른 선수보다 더 좋은 기량을 가질 수 있었던 것 같아.

Q. 대표팀 생활을 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가 있다면요?
솔직히 말해서 없어. 중국한테 다 졌는데 뭐가 기억나겠어. 87년도에 방콕에서 대회가 있었는데, 그때 결승에서 중국이랑 만나서 연장까지 갔었어. 결과는 졌지.

Q. 이충희 선수와는 라이벌 구도가 있었어요. 그 때문인지 1986아시안게임 결승전에서는 패스가 이충희 선수에게 잘 가지 않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는데, 그런 생각 때문이었나요?
그렇지는 않아. 가드가 찬스가 났는데 안 준다는 건 말이 안 되지. 거기다 상대가 워낙 크고 강한데 그 상황에서 누구를 가려서 줄 수가 있나. 주위에서 그런 생각을 가지고 보니깐 그렇게 보이는 거지.


Q. 1988년 올림픽에서 소련(현 유고)와의 경기에서 활약상은 요즘도 동영상을 통해 농구팬들을 놀라게 하고 있습니다.(※필자 주-당시 허재는 블라디 디박, 토니 쿠코치 등 훗날 NBA에 진출한 소련을 상대로 24점 10스틸 8어시스트를 기록했다.)
기록은 좋았지만 정말 어려웠어. 실력차이가 많이 났었거든. 이기려고 이것저것 다해봤는데, 그래도 안되더라고….

Q. 1990년 아르헨티나 세계선수권대회 이집트전에서 62점을 올린 것을 기억하시는지요. 이 기록은 지금까지도 세계선수권 개인 최다득점기록으로 남아있습니다. 당시 대회에서 유일한 승리이기도 했고요.
개인적으로 세계대회에서 그런 기록을 가지고 있으니 좋기야 하지. 그런데 팀이 못이기는 데 무슨 소용 있겠어. 거기다 하위리그 경기에서 올린 것이라 막 자랑할 만큼 그런 거는 없어. 그 기록 트로피가 내 키 반만 했어. 동희랑 그거 가지고 돌아오느라고 고생 꽤나 했지.

Q. 토론토 세계선수권에서도 좋은 활약이 이어졌어요 해외 프로팀에서 러브콜이 온 것도 여기서의 활약 덕분 아니었나요? (※필자 주-허재는 94세계선수권에서 리바운드를 제외한 개인기록 전 부분에서 5위권 안에 들었다.)
몇 개 팀에서 캠프에 참가해보라는 얘기였어. 그런데 그때 내 나이가 30살이었거든. 테스트를 받기에는 너무 늦었다고 생각했어. 가려면 일찍 갔어야했는데…. 내가 (최)진수 나이 정도 됐으면 당장에 갔을 거야.

Q. 감독님에 대한 중국의 견제가 장난이 아니었다고 들었습니다.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에서는 중국이 일부러 부상을 당하게 하려고 했다던데요.
많이 의식했었지. 우연치 않게 후웨이동에게 두 번 정도 맞았는데, 고의성이 있었던 것 같아. 어떻게든 한번은 이겼어야 했는데, 지금도 그게 한이지 한.

Q. 1996년 애틀란타올림픽도 빼놓을 수 없는데요. 그때는 음주파문으로 인해서 이래저래 안 좋은 얘기가 많이 들렸습니다. 얘기를 듣고 싶어요. 오해도 있었다고 하던데….
(현)주엽이 생일 파티를 하겠다고 (이)상민이랑 (정)재근이랑 넷이서 케이크 하나 사서 간단하게 술을 몇 잔 했지. 그때 보도된 것만큼 크게 파문이 일 정도는 아니었는데, 당시 분위기가 안 좋았어. 농구팀도 계속 지고 있는데다가 우리나라 선수단이 전체적으로 생각했던 만큼 메달이 안 나오던 상황이었거든. 이래저래 신경이 날카로운 상황에서 우리가 거론이 된 거지. 결론적으로 잘못한 게 맞지.

Q. 그 일로 대표팀에서 영구제명 됐어요. 무면허 음주운전 사건도 터졌고요.
대표팀에서 제명을 당할 때는 정말 안타까웠지. 1996년은 이래저래 시련의 한해였어. 내가 잘못한 것이니 이래저래 변명하고 얘기하기보다는 그냥 조용히 있었어.

Q. 1999년에 다시 대표팀에 복귀했습니다. 기분이 남달랐을 것 같은데요.
정말 마지막이라는 생각이었어. 1년이 됐던, 2년이 됐던 어떻게든 중국을 이기고 대표팀을 끝내고 싶었던 것이 솔직한 마음이었는데, 결국은 그렇게 하지 못했어. 나중에 돼서야 후배들이 대신 이뤄줬지.

Q. 감독님이 보시기에 세계농구 수준과 현재 한국농구의 위치는 어떻다고 생각하시나요?
신장면이나 신체조건 면에서는 아직 부족하지만 그래도 많이 좋아졌다고 생각해. 개인 능력이나 기술면에서는 아직 떨어져. 아직까지 벽은 좀 있다고 봐야지.

Q. 천하의 농구 대통령인 감독님도 정말 강하다고 느낀 나라, 선수가 있다면요?
다 강했지. 그 키에 우리보다 더 잘 뛰어다니는걸. 축구는 월드컵에서 목표가 16강 이상이잖아. 근데 농구는 세계선수권이랑 올림픽 둘 다 16강안에 들어가 있는 상태에서 경기를 치르는 거야. 거기다 신체조건 차이도 많이 나는 팀들이야. 어떻게 강하지 않게 느껴지겠어.


허재의 호화 데뷔
1988년 12월 11일, 이충희가 홍익대학교 전에서 32점을 기록하며 팀을 99-66으로 승리로 이끈다. 팬들의 관심사는 과연 이충희가 그 다음 경기에서 3,000점을 넘기느냐에 쏠렸다. 그러나 이충희의 기록 달성만큼이나 큰 기대를 모았던 선수가 있으니 바로 그 해 기아에 입단한 허재였다. 이미 중앙대 재학시절 ‘형님’들을 괴롭힌 허재는 대학선수 중에선 단연 군계일학이었다.

대학교 4학년이었던 1987년. 득점과 리바운드, 어시스트, 스틸 부문에서 모두 1위에 이름이 올라 있었으니 말이다. 그런 허재는 1988년 12월 8일 국민대학교와의 데뷔전에서 27점, 18리바운드로 활약하며 팀의 96-57 완승을 끌어냈다.

방열 감독은 그에게 득점과 리바운드에 주력할 것을 주문했다고 하는데, 그 기대에 완전 부응하는 활약이었다. 당시 국내 최다 리바운드 기록이 21개였다. 비록 이 기록을 경신하진 못했지만 골밑 선수가 아닌 허재가 18개를 잡아낸 것은 사건이었다. 허재는 경기 후 “실업 첫 경기여서 다소 긴장했던 것 같다”는 말로 소감을 대신했다. 긴장했는데 27점과 18리바운드라니.

이러한 허재의 능력은 이미 고교시절부터 두각을 드러냈다. 그는 16살이었던 1981년 제7회 동국대 총장기 전국고교농구대회에서 득점, 어시스트 뿐 아니라 리바운드에서도 두각을 드러내며 용산고의 우승을 이끌어냈다. 양정고등학교와의 경기에서는 32점을 올렸다. 또 87년 10월7일, 단국대학교와의 대학농구연맹전 경기에서는 홀로 75점을 올리면서 단국대전 역전승(99-97)을 이끌었다. 허재는 전반에 중앙대가 올린 54점을 혼자 득점했다.

그의 득점력은 실업팀을 상대로도 유감 없이 드러났다. 허재와 이충희의 결승 첫 만남이었던 1986년. 비록 결승전에서 현대는 기아를 2승 1패로 꺾고 우승했지만, 허재는 89-87로 이긴 2차전에서 이충희보다도 많은 30득점을 기록해 모두를 놀라게 했다. 당시만 해도 현대와 삼성의 천하였던 농구대잔치가 단 한 명의 대학생에 의해 지배당한 순간이었다.

사실, 이때만 해도 언론이나 전문가들은 “아직 나이가 어려 쉽게 흥분하고 페이스 조절 능력이 떨어진다”는 평가를 보냈다. 취재 중 만난 한 농구인은 이런 말을 남겼다. “허재는 숫자로 말해선 얼마나 대단했는지 설명할 수 없는 선수”다. 그렇다. 농구대잔치에서 이충희나 김현준, 혹은 서장훈처럼 한 부문에서 특출난 기록을 남기지도 않았다.

그러나 허재는 해마다 기량이 일취월장했다. 그와 기아에서 영광을 함께 나눈 최인선 전 감독은 “이충희와 김현준은 슈터라 할 수 있지만, 허재는 아니다. 올 어라운드 플레이어라고 호칭을 붙여주는 게 더 나을 것 같다”라고 말한다.

실제로 대표팀이 리딩을 필요로 할 때는 기꺼이 그 역할을 소화했고, 팀이 위기에 처했을 때는 몇 점이든 몰아넣어 팀을 승리로 이끌었다. 최우수선수 타이틀은 두 번에 그쳤지만 팬들은 누가 최우수선수였는지 알 것이다.

허재는 이후 기아를 7번이나 우승시켰고, 프로에 데뷔해서도 노익장을 과시하며 부산 기아와 원주 TG삼보에서 한 차례씩 우승했다. 또 1990년 세계선수권대회 이집트와의 경기에서 기록한 62득점은 여전히 세계선수권대회 한 경기 최다 득점 기록으로 남아있다. 농구대잔치 통산 기록은 217경기, 5천407점(24.9점), 767어시스트였고, 3점슛은 533개로 최다 성공기록이다.
[글. 손대범 기자]

 

허재는…
1965년 9월 28일생인 허재는 용산고-중앙대를 거쳐 실업팀 기아에 입단, 팀에 무려 7번의 농구대잔치 우승을 선사했다. 97-98시즌 프로농구 현대와의 챔피언 결정전에서는 부상 투혼을 발휘하며 농구 팬들에게 감동을 안겼고, 준우승팀 챔프전 MVP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겼다. 국제대회에서도 역대 세계선수권 한 경기 개인 최다득점인 62점을 기록하는 등 인상적인 기록으로 NBA로부터 스카우트제의를 받기도 했다. 은퇴 후 KCC 감독으로서 2번 정상에 올랐으며, 2018년 자카르타 팔렘방 아시안게임 남자농구대표팀 지휘봉을 잡아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사진_본인 제공, 대한민국농구협회 제공, 한필상 기자

※ 이 글은 JUMPBALL 스페셜 에디션「TEAM KOREA」에서 발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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