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LEGENDS] (16) 영원한 전자슈터 김현준

서민교 / 기사승인 : 2022-04-29 11: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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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준의 짧은 농구 인생은 한편의 단편 영화였다. 불운한 ‘노력파’ 천재의 이야기. 그는 한국 농구에 잊지 못할 기억을 남긴 채 서른 아홉의 나이로 짧은 농구인생을 마감했다. 그러나 그에 대한 기억은 영원했다.
 


1999년 10월 1일 새벽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당시 삼성 코치를 맡고 있던 김현준은 1999-2000시즌을 앞둔 9월 마지막 날 대학팀과 연습경기를 가졌다. 그날따라 유난히 많은 기자들이 수지체육관을 찾았다. 김현준은 기자들과 함께 늘 가던 고기 집에서 평소 즐기던 소주 한 잔을 들었다. 승용차로 출근했던 김현준은 술 한 잔을 기울인 터라 차를 수지에 두고 서울로 올라와 이성훈(전 KBL 사무총장, 삼성 농구단 사무국장)과 가볍게 한 잔을 더 마셨다. 모두가 잠든 새벽. 김현준은 두고 온 승용차 대신 택시를 타고 언제나 그랬듯 다시 수지체육관으로 향했다.

너무나도 다를 바 없는 일상이었지만, 이성훈은 그 날을 잊을 수가 없었다. “(내가) 술 한 잔 더 하자고 하지 말았어야 했어. 10시 30분부터 훈련이 시작인데 출근을 안 했다는 거야. 매니저가 출발은 했다는데….”

이성훈은 여기저기 수소문을 하면서도 불길한 느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울먹이는 목소리의 한 통의 전화. 그에게 전화를 건 것은 김현준과 친하게 지냈던 연세대 축구부 1년 선배였다. “현준이 사고났다.” 수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음성을 믿기 힘들었지만, 거짓말처럼 눈앞에 놓여진 TV 화면에서 「YTN」 뉴스 속보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김현준 삼성 코치 교통사고로 사망

대학 시절 동고동락하며 형제처럼 지냈던 박종천(현 전자랜드 코치)도 그 날 기억은 생생했다. 박종천은 공항에서 친구한테 전화를 받았다. 병원에서 김현준의 지갑 속 명함을 보고 친구한테 처음 연락을 했던 것. 충격적인 전화에 박종천은 “정말 죽은 게 맞냐?”고 고함을 질러보기도 했지만, 이미 김현준의 싸늘한 주검이 병원에 안치된 후였다.

이날 김현준은 방이동 자택에서 용인시 수지체육관으로 택시를 타고 출근하던 중 중앙선을 넘어온 차와 충돌, 서른 아홉 아까운 젊은 나이에 짧은 삶을 마감했다.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었다. 1999년 10월 1일 새벽. 갑작스런 김현준 사망 소식에 많은 농구인들과 팬들은 충격에 빠졌다. 이날 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달려간 강을준(현 오리온 감독)도 흘러내리는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빈소를 지키던 전창진(현 KCC 감독)은 강을준을 다그쳤다. “네가 그렇게 울면 어쩌냐? 우리는 울 줄 몰라서 참고 있는 줄 아냐?” 하지만, 강을준은 주위의 어떤 소리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강을준은 그 날이 더 후회스럽기만 했다. 자기 탓인 것 같아 눈물이 더 났다. 당시 감독 대행을 맡고 있던 김현준이 강을준에게 코치를 제의를 했었기 때문이다. “지나고 나서 이야기지만, 그때 내가 코치를 맡았다면, 형님이 그렇게 가시지는 않았을 것 같아 너무 후회스럽고 미안하다.” 많은 농구인들의 기억 한 곳에 안타까운 기억으로 남아 있는 김현준. 삼성에서 영원할 것만 같았던 ‘전자슈터’ 김현준은 그렇게 허망하게도 쓸쓸히 우리 곁을 떠났다.

핸디캡
김현준은 농구선수로서 특출 날 것이 하나 없었다. 180cm가 조금 넘는 신장에 뛰어나지 않은 운동능력, 농구선수로서 가장 큰 핸디캡이 될 수 있는 두꺼운 발목(강을준에 따르면, 김현준의 발목은 보통 농구선수의 1.5~2배가량 두꺼워 ‘어떻게 그 발목으로 농구를 하냐?’고 물었을 정도라고)까지 김현준은 농구선수라고 보기 힘든 신체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서울 금성초등학교 5학년 때 처음 농구를 시작한 김현준은 뛰어난 선수가 아니었다. 광신중학교 시절도 그랬고, 광신상고 시절도 마찬가지였다. 그냥 슛이 좀 정확한 그런 선수였다. 어렸을 때부터 한 가지 돋보인 것이 있었다면, 두둑한 배짱에서 나오는 과감한 슛이었다. 워낙 공격적인 성향이 강했던 김현준은 자신감 하나로 팀의 활력소 역할을 하는 ‘보통 슛쟁이’에 불과했다. 김현준이 달라지기 시작한 것은 1979년 연세대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다. 팔방미인으로 기억되는 김현준의 대학 등장은 화려했다. 농구가 아닌 외모에서부터다. 연세대 1년 선배인 박종천은 김현준의 첫 인상을 지울 수가 없나보다. “백구두에 노란 양복을 입고, 장발 머리에 앞가르마를 탄 김현준을 어떻게 잊나?” 날 티 나는 옷에 잘생긴 얼굴. 그 당시 김현준의 별명이 ‘백제비’라고 말하는 박종천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대학 입학부터 독특했던 김현준은 대학 1학년 때 연고전에 첫 출전했다. 주전이 아닌 김남기의 부상에 의한 대타였다. 단 30초의 출전이 전부였지만, 이때부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김현준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를 두고 천재와 노력파로 양분된다. 타고난 슛 감각과 개인 1대1 능력을 두고 천재라고 표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타고난 핸디캡을 딛고 일어선 ‘노력파’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 김현준의 선수 시절을 들여다보면 그런 다양한 시선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 대학 시절 김현준은 유독 체력이 약했다. 철분이 부족한 악성 빈혈로 인해 다른 선수들이 2바퀴 뛸 때 1바퀴 밖에 못 뛸 정도였다. 그런 몸 상태로 운동을 계속했다가는 생명에 지장이 있다는 진단도 받았다.

그러나 김현준은 훈련으로 모든 걸 극복했다. 김진은 ‘김현준을 지독한 노력파’라고 표현했다. “신장과 운동능력이 부족한 핸디캡을 보완하기 위해 김현준만의 특징을 살리는 노력이 남달랐던 선수였다.” 또 이성훈은 “김현준은 하루에도 3~4번씩 3~4시간의 운동을 반복했다”고 전했고, 박종천은 “연세대 뒤에 있는 무악산에 손을 잡고 데리고 가서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죽기 살기로 함께 뛰었다”고 회상했다. 그에게 핸디캡은 단점이 아닌 극복의 대상에 불과했다.

반면, 강을준은 김현준의 타고난 천재성에 무게를 뒀다. “슈팅과 1대1 능력은 타고나지 않고서는 그렇게 잘 할 수 없는 것이다. 삼성전자에 와서 술, 담배를 즐기면서도 체력적으로 문제가 없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개인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성훈은 삼성전자 시절 우연히 발견한 김현준의 일기장을 보고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선수인지 새삼 느꼈다고. “항상 자신이 가진 단점을 극복하기 위한 반성의 글귀가 대부분이었다. 일종의 훈련 일지와 같았다. 그 일기장을 보고 오히려 나를 되돌아보게 되는 계기가 됐다.”


승부욕이 만든 전자슈터
김현준이 뛰고 또 뛰었던 이유는 하나다. 지기 싫어하는 승부욕 때문이다. 술 좋아하고 노는 것 좋아하는 김현준도 코트 위에서만은 무섭게 돌변했다. 공격에 대한 욕심은 고스란히 득점으로 이어졌다. 강을준은 김현준을 욕심이 많은 선수로 기억했다. “자기관리가 워낙 투철했다. 승부욕이 강해 공격에 대한 욕심은 굉장히 많았다. 이충희와 허재를 능가할 수 있는 유일한 선수였다.”

고려대-현대전자에 이충희, 중앙대-기아자동차에 허재가 있었다면 연세대-삼성전자에는 김현준이 있었다. 김현준은 이충희와 허재에 가려진 불운의 스타다. 하지만 김현준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들과 비교할 수 없는 ‘김현준만의 스타일’이 있었다고 말한다.

김현준은 1983년 삼성전자에 입단하자마자 주전 스타팅 멤버로 뛰며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김현준의 전매특허는 예측불허의 ‘뱅크슛’이다. 이때부터 김현준은 삼성전자의 기업 이미지와 맞물려 ‘전자슈터’라는 애칭을 얻게 된다. 튼튼한 하체 힘에서 나오는 흔들림 없는 신체 밸런스는 그를 최고의 슈터로 만드는 원천이 됐다. 그가 슛을 던질 때는 온전한 자세가 거의 없었다. 몸은 항상 좌우로 기울어진 채 이상한 각도에서 슛이 이뤄졌다. 핸디캡을 딛고 살아남기 위해 그가 터득한 자세다. 안준호는 “슛 하나는 예전부터 좋았다. 하체가 워낙 발달 돼 언제 어느 때나 슛을 자유롭게 던졌던 선수”라고 격찬했다. 이성훈도 “두꺼운 발목에서부터 나오는 하체의 힘은 어느 자세에서도 안정된 슛을 쏠 수 있게 했다”고 말했다.

김현준은 수비를 따돌리는 1대1 능력도 뛰어났다. 득점에 대한 욕심이 많았지만, 경기를 읽는 눈도 뛰어났다. “기본기 삼박자가 잘 갖춰져 있어 이충희와 달리 어시스트도 할 줄 아는 선수였다.” 이성훈의 말이다.

키 작고 탄력 없는 선수였던 김현준은 슛으로 모든 것을 대신했다. 농구대잔치 원년인 1983년부터 삼성의 주포로 활약하며 통산 238게임에 출전해 6,063점(게임당 평균 25.5점) 712어시스트(평균 3.0개) 등 득점과 어시스트 부문에서 농구대잔치 개인최고기록을 새웠다. 3점슛 규정이 마련된 1985년부터 김현준은 통산 1,407개 3점슛으로 게임당 평균 5.9개의 경이로운 3점슛 성공 기록을 수립했다.

1985년 첫 득점왕에 오른 김현준은 1988년 최우수선수상 수상에 이어 1989년부터 1992년까지 4년 연속 득점왕 타이틀을 놓치지 않았다. 결국 김현준은 1992년 이충희가 갖고 있던 농구대잔치 통산 최다득점(4,412점)을 넘어섰고, 1993년 농구대잔치 최초로 통산 5천 득점 돌파, 1995년 통산 6천 득점을 돌파하고 농구 인생 23년을 마감, 35세의 나이에 은퇴를 선언했다.


인간미
코트 밖 김현준은 인간미가 철철 넘쳤다. 개성 강하고 승부욕 넘치던 농구스타일과 정반대로 김현준은 자상하고 다정다감한 친형 같은 선수로 기억된다. 코트 위에서도 언제나 모범적인 선수로 통했다. 당시 폭력이 난무했던 라이벌전에서도 폭력 사태에 휘말린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좀처럼 흥분을 하지 않는 성격 탓에 나이가 한참 어린 후배에게 심한 욕설을 들어도 교체를 자청해 벤치로 나가 마음을 진정시킬 정도였다. 당시 인터뷰에서 김현준은 ??순간순간 화는 나지만, 어차피 흥분하면 그 경기는 망친다는 것이 내 철칙이다. 스스로 삭이는 것도 실력??이라고 말한 바 있다. 코트 위에서 지독하리만큼 냉철한 카리스마를 보이는 김현준은 코트 밖만 나가면 180도 달라진다.

“운동도 열심히 하고, 술도 열심히 먹고, 나이트도 열심히 가고, 연애도 열심히 하고.” 김현준과 형제처럼 지냈던 박종천의 말이다. 대학 시절 김현준은 선배들과도 잘 어울렸다. 박종천, 이성훈, 김현준 등은 단돈 5백 원이 없어 나이트 갔다 화장실에 숨어 가며 춤추고 술을 먹기도 했고, 선배들과 미팅을 하기도 했다. 김현준의 지금 아내를 연결해 준 것은 이성훈이었다.

민박집에서 우연히 만난 여학생과 연애편지로 사랑을 키운 뒤 결국 1984년 결혼에 성공했다. 선배 박종천과는 선수 시절 장난도 많이 쳤다. 박종천과 김현준은 한겨울 체육관에서 동고동락하면서 난로에 라면을 자주 끓여 먹곤 했다. 라면 부스러기를 먹으려고 쥐 두 마리가 체육관에 밤마다 들어오곤 했는데, 하루는 둘이서 체육관 문을 다 막고 쥐를 잡기로 마음먹었다. 결국 두 마리 쥐를 다 잡아 한 마리는 통째로 난로에 넣었다가 쥐 타는 냄새에 밤새 잠을 한 숨도 못 잤고, 한 마리는 박종천이 끈으로 문에 매달아 김현준이 들어오면 얼굴에 부딪혀 놀라자빠지기도 했다. 박종천은 그날 기억을 떠올리며 순수한 청년으로서 김현준을 기억했다.

김현준은 후배들에게 편하면서도 존경받는 선배였다. 김현준은 강한 카리스마로 후배들을 대하지 않았다. 대신 술자리에서 후배들과 대화를 통해 편하게 이해를 서로 구하는 일이 많았다. 김진은 “워낙 팀에 헌신적인 선수였고, 자기 역할은 다 하는 솔선수범이 몸에 밴 선수이다 보니까 후배들이 잘 따를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김현준이 유난히 잘 챙기던 후배 문경은(현 SK 감독)도 김현준에 대한 기억은 생생했다. “중고등학교 선배인데다 포지션이 같아 걸어온 길도 비슷해 경험에서 나오는 노하우를 많이 얘기해주셨고, 삼성 입단했을 때 눈치를 많이 보지 않도록 힘도 많이 실어주셨다.”

문경은의 자유투 뱅크슛도 김현준에게 배운 노하우였다. “3점슛을 멀리서 쏘다 자유투에 서면 가깝게 느껴지니까, 공에 스핀을 많이 줘서 백보드를 맞춰 봐라.” 그 말을 듣고 난 후 문경은은 자유투 100개를 던지면 99개는 꾸준히 성공했다고. 또 하나 덤으로 배운 노하우가 있다. 할리우드 액션이다. 상대에게 너무 파울을 많이 당하는 김현준의 비책이었다. “상대 파울 때문에 고민을 하니까, 형이 ‘그럼 니가 먼저 팔을 걸고 빼면서 소리를 질러. 그러면 이제 못 할 거야’라고 가르쳐줬다.”

열심히 따라 다녔던 문경은은 김현준에게 불만도 많았다. 한창 혈기왕성한 시기에 김현준에게 밤마다 잡혀 아무 것도 못했다. “술을 먹어도 꼭 2, 3차는 현준이 형 댁으로 가서 먹었다. 형은 잠도 없어서 밤마다 불려 나가면 함께 골프, 당구, 카드 등 안 해 본 게 없다. 24살 때부터 골프를 쳤으니까 무슨 재미가 있었겠나? 그래도 생각해보면 형 덕분에 일찍 잘 배운 것 같다.”

지도자
김현준은 팔방미인이었다. 둥글게 생긴 것은 다 잘해 축구, 골프, 당구, 탁구, 바둑, 장기, 카드… 할 것 없이 아마 수준을 넘을 정도로 못 하는 게 없는 온갖 잡기에 만능이었다. 김현준의 타고난 순발력과 번득이는 재치 덕분이었다. 김현준의 이런 능력을 잘 알고 있는 이성훈은 그를 ‘지장’이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운동 센스와 감각이 뛰어나 지도자로 최고의 주가를 올릴 수 있었을 것이다. 머리가 비상해서 농구를 샤프하게 하는 스타일이었기 때문에 뛰어난 지장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안준호도 김현준에 대해 지도자로서 성공 가능성을 확신했다. “지도자로서 김현준은 ‘멀티’였을 것이다. 지장, 덕장, 맹장을 모두 아우르는 모범적인 미래형 ‘멀티’ 감독이 됐을 텐데 먼저 가서 안타깝다. 농구계의 큰 손실이다.”

김현준은 1995년 현역에서 은퇴 후 미국 유학을 거쳐 이듬해인 1996년부터 삼성 코치를 맡았다. 1997-1998시즌 최경덕 감독이 중도하차하면서 그 뒤를 이어 감독 대행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삼성의 프랜차이즈 스타인 김현준의 지도자로서 길이 순탄하게 열렸던 것이다. 향후 2, 3년 안에 삼성의 감독을 맡을 것이라는 것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그의 아쉬운 지도력은 안타까운 사고 후 여러 다른 방면으로 진행됐다. 김현준이 아닌 김현준을 사랑한 주변인들에 의해서다.

삼성은 1999년 11월 9일, 수원에서 열린 신세기와 홈 개막전에 앞서 김현준의 추모식과 백넘버 10번의 영구결번식을 가진 뒤 왼쪽 어깨 부분에 검은 상장이 인쇄된 유니폼을 입고 나서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그 후 삼성농구OB회(삼농회)에서는 2000년부터 해마다 팀 승리 당 일정금액을 적립하여 농구유망주 25명에게 고인의 이름을 딴 ‘김현준 농구 장학금’을 전달해 오고 있다.

현재 프로선수로 활약 중인 양희종(KGC인삼공사), 이관희(LG), 양홍석(KT) 등이 김현준 장학금의 수혜자들이다. 김현준은 고인이 되어서도 또 다른 방법으로 모범적인 지도자로서의 방향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삼성은 2009년, 잠실실내체육관에서 김현준 유고 10주기를 맞아 고인을 추억할 수 있는 ‘유품전시회’를 열어 그를 기억하는 팬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기도 했다. 이날 유품 전시회에는 김현준이 대기록을 수립했던 신문기사 스크랩부터 그의 일대기, 유니폼, 팬레터, 트로피, 메달, 사진 앨범 등 다양한 고인의 생전유품들로 그를 다시 한 번 추억했다. 이성훈은 삼성의 이 같은 모든 노력에 대해 김현준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오히려 감사의 뜻을 전했다. “폭 넓게 사랑을 받았던 스타 선수였고, 삼성에 기여한 바가 많아 오래 동안 기억에 남았으면 하는 마음이 담겨져 있었다. 지금까지 많은 분들이 추억하고 있어 동료로서 감사한 마음뿐이다.” 김현준의 흉상 건립까지 계획할 정도였으니까, 그에 대한 삼성의 애도의 마음은 상상 이상이었다.

1995년 3월 3일. 94-95 농구대잔치를 끝으로 23년간의 선수 생활을 마쳤다. 현역 마지막 경기에서 삼성은 졌지만, 김현준의 농구 인생은 ‘인간 승리’였다. 이날 은퇴식에서 그가 던진 현역 선수로서의 마지막 인터뷰다.
“농구 코트에서 영원히 잊혀지지 않는 김현준이 되고 싶다.”



전자슈터 김현준의 기록들
농구대잔치 무대에 이충희의 호적수가 있었다면 그는 바로 김현준일 것이다. 현대와 삼성의 라이벌 관계를 떠나 두 선수의 득점 경쟁 역시 농구대잔치의 볼거리였다.  광신중, 고를 나와 연세대를 졸업, 1983년 삼성전자에 입단한 김현준은 원년대회부터 줄곧 이충희를 추격했다. 그러나 득점 경쟁에서는 매년 이충희에 한발씩 뒤져 계속 2위만 해왔다.

1988년 농구대잔치에서도 1차 대회에서 이충희보다 22점이 더 많은 279점을 올려 생애 첫 득점왕에 희망을 가져봤지만 3차 대회에서 추월 당하면서 아쉽게 자리를 놓쳐야 했다.

김현준이 이충희를 제치고 첫 득점왕에 오른 것은 1990년이 돼서였다. 그러나 초창기 김현준의 옆에는 농구대잔치 출범 이전 연세대학교에서 57점을 올린 적이 있는 박인규나, 진효준, 신동찬 등 득점에 더 소질이 있는 선수들이 현대에 비해 많았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또, 김현준 역시 득점력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올라가면서 던지는 슈팅은 누구보다 정확해 ‘전자슈터’라는 별명을 안겨줬고, 그 역시 1987년 2월 25일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현대전에서 50득점을 폭발시켰다. 당시 삼성전자는 현대에 109-83으로 승리했고, 이충희는 13개의 3점슛 중 10개를 놓치는 등 20점에 그쳐 화제가 됐다. 그 해 삼성은 농구대잔치 3, 4차 대회에서 우승했고 김현준은 생애 첫 최우수선수상을 수상했다.

2년 뒤인 1989년 1월 22일 국민대학교와의 경기에서도 57점을 폭발시켜 팀의 119-82 승리를 끌어냈고, 1991년 1월 18일 고려대학교전에서 41득점을 올리고, 1992년 1월 25일 연세대학교전에서는 42점을 폭발시키는 등 서른을 넘겨서도 변함 없는 감각을 과시했다.

김현준은 이충희만큼이나 빠른 페이스로 통산 3천 득점 기록에 성큼성큼 다가갔고, 좀 더 오랫동안 그 득점의 위력을 이어갔다. 그는 1991년 12월 13일, 고려대학교와의 경기에서 전반에 16점을 올리면서 이충희에 이어 통산 두 번째 4천 득점을 돌파했다. 당시 그는 4천 점까지 14점이 모자랐는데, 전반 종료 58초전 이 기록을 달성했다. 총 28점을 올린 그의 활약에 힘입어 삼성전자는 86-67로 승리했다.

김현준은 이어 1992년 12월 20일 상무전에서는 40점을 추가하면서 4,440점을 돌파했다. 이충희의 종전 기록을 뛰어 넘어 농구대잔치 사상 가장 많은 점수를 올린 선수가 된 것이다. 174경기, 25.28점씩 올린 쾌거였다. 김현준은 1993년에 5천 점을 돌파했고, 5,638점을 남긴 채 코트를 떠났다.

한편, 김현준이 더 대단한 이유는 득점만큼이나 어시스트에서도 출중했다는 것이다. 1988년과 1989년에 어시스트 상을 수상하기도 했던 그의 어시스트 646개 역시 농구대잔치 통산 최고 기록이다. [글. 손대범 기자]

김현준은…
1960년 6월 3일 태생인 김현준은 타고난 슈터로 광신중학교와 광신상고를 거쳐 연세대학교에서 타고난 슈터로 활약했다. 청소년 대표와 국가대표를 지낸 김현준은 삼성전자 입단해 득점왕과 최우수선수상 등을 휩쓸며 삼성을 명문 구단의 반열에 올려놨다. 현역 은퇴 후 김현준은 삼성 코치와 감독대행을 역임하다 1999년 10월 1일 불의의 교통사고로 39세의 젊은 나이에 삶을 마감했다.

사진_삼성농구단, 소재웅 작가 제공
 

※ 이 글은 JUMPBALL 스페셜 에디션「TEAM KOREA」에서 발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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