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cm 단신가드…, 딱히 불편했던 적은 없습니다”

김종수 칼럼니스트 / 기사승인 : 2022-05-10 06:4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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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수의 농구人터뷰(35)] '옥뱀' 옥범준

 

 

농구는 신장의 스포츠다. 아무리 운동신경이 뛰어나고 기술적으로 완성도가 높아도 기본적인 신장이 받쳐주지 않으면 살아남기 쉽지않다. 이를 입증하듯 국내농구계 또한 사이즈적인 부분에서 꾸준하게 상승 그래프를 그려왔다. 자원 자체가 워낙 적은 빅맨을 제외한 나머지 포지션의 평균신장은 현격하게 커졌다. 송교창, 최준용, 김상규 등 2m전후의 스윙맨들이 심심치않게 등장하고있고 190cm가 넘는 장신가드는 이제 흔한 존재가 됐다.


이렇듯 사이즈가 곧 경쟁력인 농구라는 스포츠에서 약 20여년전 174cm의 단신가드가 상당한주목을 받으며 프로 무대에 입성했다면 선뜻 믿겠는가. 혹자는 ‘예전이니까 그랬겠지’라고 말할수도 있다. 시간이 상당히 지난 것은 사실이지만 예전이라고 해봤자 같은 21세기다. 또한 그정도 신장은 농구리그가 있던 어느 시대로 가도 작은 사이즈다. 농구선수가 아닌 일반인 사이에서도 큰키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당 선수는 2003년 KBL 신인드래프트에 얼리 엔트리로 참가해서 무려 1라운드 2순위로 뽑혔다. 최대어로 꼽혔던 연세대 김동우 바로 다음이었다. 그정도 신장으로 드래프트에서 뽑힌 것만도 대단하거늘 한술 더 떠 최고순번을 다퉜던 것이다. 당시 코리아텐더 감독대행으로서 그를 지명했던 이상윤 SPOTV 해설위원은 “신장 등 신체조건을 안볼수는 없었겠지만 그러한 불리함을 상쇄시킬 장점이 너무 많았다. 시야가 넓고 센스가 좋으며 기술적으로 다양하게 완성된 선수였다. 양질의 패스로 외국인선수는 물론 국내선수까지 잘 살려줄 것으로 판단됐다. 코리아텐더를 떠나 다른팀 감독을 하게되는 바람에 정작 뽑아놓고 함께 하지는 못했지만 충분히 2순위 지명권을 사용할만한 재목임은 분명했다”고 말했다.


다름아닌 아마시절 ‘천재가드’로 불렸던 옥범준(41)의 이야기다. 옥범준은 작은 키가 무색할만큼 대학무대에서 맹활약을 펼쳤다. 성균관대 시절 이한권, 정훈, 진경석 등의 쟁쟁한 선배들을 리드하며 대학리그 우승을 만들어낸 것을 비롯 정통파 1번답게 어시스트상도 여러차례 수상했다. 그중에는 수비상도 있었다. 신장이 작으면 가장 어려움을 느끼는 부분이 수비라는 것을 감안했을 때 매우 놀라운 수상 기록이다.


팬들과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단신 중에서도 단신인 옥범준이 프로에서 어떤 결과물을 낼지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다. 아쉽게도 그는 당초 기대에 많이 미치지 못하는 성적으로 길지않은 프로생활을 마칠 수밖에 없었다. 정규시즌 164경기에서 경기당 8분 32초를 뛰며 평균 1.9득점, 0.8어시스트, 1.3어시스트, 0.4스틸에 그쳤다.


그렇다면 옥범준은 신체조건의 한계를 넘지못한 과대평가된 2순위 선수였을까? 그것은 아니다. 신인 시절의 그는 종종 인상적인 경기력도 선보이며 감독들의 기대를 불러일으키던 선수였다. 문제는 부상이었다. 크고 작은 부상이 지독할 정도로 반복해서 이어지며 어느덧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되어버렸고 결국 단한시즌도 건강하게 뛰지못한채 커리어를 마감하고 말았다. 스포츠에 만약은 없다지만 ‘건강한 옥범준이었다면 어느 정도의 성적을 올렸을까?’라고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스킬트레이닝에 유투브까지…, 재미있게 지내고 있습니다”

Q.요새 어떻게 지내세요?

처가가 있는 충북 제천에서 농구교실을 운영하고 있고요. 경기도 오산과 부천을 오가며 스킬트레이너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엘리트선수, 일반인분들 가리지않고 맞춤형 트레이닝을 제공하려고 노력중이에요. 더불어 ‘닥터 OBJ’라는 유투브채널도 찍고 있어요. 영상 업체에서 제의가 들어와서 시작하게 됐는데 하다보니 굉장히 재미있습니다. 제가 의사 가운을 입고 나와서 농구에 관심있는 분들의 증상과 고민을 듣고 상담, 솔루션까지 제공하는 컨텐츠에요.(웃음) 기술강좌, 잡담, 꽁트 등 폭넓은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여기저기 오가면서 이것저것 하다보니 은근히 바쁘네요. 하지만 모두 농구에 관한것이라 지금 생활이 너무 즐겁고 만족스럽습니다.

Q.엘리트선수와 일반부의 지도방향은 서로 다를 것 같아요.
그럼요. 차이가 있습니다. 일단 목적과 목표가 다르니까요. 일단 일반인분들을 가르칠 때는 최대한 부드럽고 자상하게(?) 하려고 노력합니다. 일반인 분들이 농구를 배우려는 목적이 무엇이겠어요? 그냥 농구가 좋으니까 배우는거에요. 그런 즐거운 마음의 연장선에서 함께 하려고 하죠. 다행인 것은 스킬트레이너를 하기 전에 농구교실을 운영한 적이 있어서 눈높이 교육이 된다는거에요. 사실 선수 생활 하신 분들은 어지간해서는 일반인 분들을 가르치기가 쉽지않아요. 자신이 배워온 과정이 있으니까 거기에 맞춰져서 자꾸 답답해하고 마음이 급해지는거죠. 하지만 저같은 경우는 초등학생, 중학생, 고등학생은 물론 일반부까지 지도해봤던지라 다 이해가 되고 적응이 되었다고 볼 수 있죠. 다만 엘리트부는 살짝 달라요. 일부러 엄하게 할 생각은 없으나 하다보면 저도 모르게 강하게 할 때가 종종 있어요. 엘리트 농구를 하는 이들은 그쪽으로 잘 되고 싶어서 하는거잖아요. 선수를 꿈꾸고 또 선수가 되어서도 엄청난 경쟁 속에서 살아남아야해요. 실력을 떠나 어지간한 마음가짐으로는 안되죠. 신체조건, 재능, 노력 어느한부분 치열하지 않은 쪽이 없어요. 정말 강하게 자신을 담금질하지 않는 이상 생존 자체가 쉽지않죠. 그러다보니 가르치다가 마음에 안들면 ‘이렇게 할거면 하지 말자’라든가 ‘여기서 멈추고 다음에 다시 하자’는 등 극단적으로 갈 때도 간혹있어요. 이것도 생업이잖아요. 어찌보면 고객한테 그렇게하면 안되는건데…, 그것 때문에 아내한테 종종 깨진 적도 있답니다.

Q.자꾸 엄하게 하시면 엘리트쪽 고객이 줄어들 수도 있을 듯 싶어요.
아무래도요. 하지만 그것 때문이 아니라 어느날 문득 제가 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개개인의 성향은 다 다를 수밖에 없는데 그걸 간과한거죠. 저는 작은 신장에서 오는 불리함을 극복하려고 선수시절 무조건 열심히만 했어요. 이른바 ‘독기’하나로 전진을 거듭했어요. 하지만 이건 저의 성향이고 스타일이잖아요. 모든 선수가 다 저 같지는 않아요. 기본적으로 ‘열심히’라는 부분에서는 궤를 같이 하겠지만 저처럼 미친 듯이 달리는 유형이 있는 반면 한번씩 여유가 필요한 스타일도 있는 것 아니겠어요. 재능은 넘치지만 마음이 약한 케이스도 있어요. 그런 경우에는 지나치게 밀어붙이면 안되겠더라고요. 저는 의욕을 심어주겠다고 더 다그치지만 정작 당사자는 거기서 열정이 꺾여버릴 수도 있거든요. 스킬 트레이닝이라는 것은 단순히 기술만 알려주는게 아닌 마음까지도 다독여줄 필요가 있더라고요. 지금은 각자의 성향에 맞춰서 지도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멘탈 스포츠의 개념까지도 다시금 느끼고 있는 중이고요.

Q.현재 하고 계신 일들은 선수 시절부터 생각하고 있었던 방향인가요?
아니요. 전혀요. 그냥 물 흘러가듯이 하다보니까 여기까지 왔을 뿐이에요. 선수 시절에는 예상치못한 방향이었죠. 무엇무엇을 해야겠다는 것보다는 버티기 바빴고 건강한 몸으로 실컷 한번 뛰어보는게 소원이었던지라 이것저것 다른 생각을 할 여유 자체가 없었어요. 제가 자존심이 강한 편이에요. 거듭된 부상으로 인해 당초 계획했던 만큼 선수 생활을 마치지 못해서 스스로에게 너무 화도 나고 자존심도 상해서 은퇴후 농구 쪽은 안 쳐다보고 싶더라고요. 친구나 지인들 보기도 민망했고요. 정작 주변에서는 크게 신경쓰지 않았겠지만 혼자 괜스레 의식되어서 그랬던 것이죠.(웃음) 어쨌든 당시에는 지금과 달리 자존감이 바닥을 치던 시절인지라 서울을 떠나서 처가가 있는 제천으로 아예 이사가버렸습니다. 서울에 남아있는 것 자체가 싫더라고요. 지금 생각해보면 ‘멘탈이 너무 약했나?’싶기도 하지만 앞만보고 너무 달리기만 했던 것 같아서, 한번 멈춰서서 숨을 고를 계기는 필요했던 듯 싶어요. 사람이 너무 여유가 없어도 전진이 안되거든요.

 

 

 

 

Q.혹시나 그 기간 중 농구 외에 다른 일을 하셨나요?
아니요…, 그럴 시간도 없이 농구쪽으로 가게되더라고요. 개인적으로 참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제천에서 6개월 정도 재활하면서 쉬고나니까 다시 농구 생각이 났어요. 그래서 공원이나 대학교 코트 등에서 농구를 했는데 저를 알아보는 분들이 있었고 주변으로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둘 늘어나더니 나중에는 60명 정도까지 됐고 결국 동호인팀이 결성됐고 창단1년만에 전국대회에서 우승까지 차지했죠. 농구에 대한 열정이 살아나니까 무기력했던 일상도 달라졌어요. 얼리 드래프트로 인해 미처 마치지 못했던 대학도 졸업하게 됐고 대학원에서 학업도 이어나갔고 제천 생활체육회 농구지도자, 스포츠 강사 등도 겸하면서 조금씩 할 수 있는 일이 늘어나게 됐습니다. 막혔던 혈이 확 뚫리는 느낌이랄까요.

Q.여러가지 일을 했던터라 수입도 괜찮았을 것 같아요.
그건 아니었어요.(웃음) 제천 생활체육회에서 일하는게 정식 직업이고 나머지는 재능기부의 성격이 강했던지라 바쁜 것과 별개로 돈은 별로 안됐습니다. 당시 월급이 137만원인가 되었을거에요. 하지만 저에게는 그게 중요한게 아니었죠. 무기력한 일상을 깨고 내가 다시 뭔가를 할수 있다는 것, 그것도 농구나 운동 관련해서 한다는 것 자체가 활력소였죠. 하지만 처자식도 있고해서 가슴 한켠에 불안한 마음은 조금 들더라고요. 그러던중 제천에 농구인이 거의 없다는 것을 알게 됐고 저에 대한 소문이 나면서 주변으로 사람이 많이 몰려들었어요. 앞서 말씀드린 동호인팀도 그렇게해서 만들어진 것이고 본격적으로 가르치는 일을 해보자는 뜻으로 제천시 생활체육회를 그만두고 농구교실을 오픈하게되었어요.


“저 원래 말 잘 못했어요. 해야만 되는 상황이 와서 늘게 되었습니다”

Q.농구 쪽으로 할 일을 늘려가시게 됐네요?

그렇죠. 그런 가운데 제천시 농구 활성화를 위해 농구협회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조금 무모했죠. 변변한 지원을 따낸 것도 없이 개인적으로 벌린 일이니까 체육관도 없이 야외에서 스타트를 끊었어요. 당시 300여명 이상이 모인 가운데 회장, 부회장을 초빙하고 이사진까지 꾸려진 상태서 저는 초대 전무이사를 맡게 됐죠. 잘한 일이기는했지만 금전적으로 저에게 아무런 이익이 없는 상황이었던지라 역시나 생계를 생각하지 않을수가 없더라고요. 농구에 대한 열정과 가장으로서의 역할에 대해서 고민이 들던 시기였습니다.

Q.스킬 트레이너도 그렇게해서 시작하시게 된 것인가요?
연장선이죠. 협회를 만들고 그럴 때까지만 해도 스킬 트레이너에 대한 생각은 없었어요. 아니 못했다고 보는게 정확하겠죠. 그러다가 문득 제가 못다 펼친 농구기술을 다른 엘리트 선수들을 통해서 구현해보고 싶은 욕심이 들더라고요. 열심히하면 직업적으로도 괜찮을 것 같기도했고요. 농구협회같은 경우 할 것은 다했어요. 대회도 참가하고 구성원들도 탄탄하고요. 지금은 제가 없어도 잘 돌아가고 있습니다. 직원들과 함께했던 농구교실 역시 안정세에 접어들었고요. 어쨌든 제천에서 하남을 오가며 스킬 트레이닝을 배우고 미국 연수도 다녀오는 등 정말 죽기 살기로 도전했습니다. 적지않은 나이였지만 제가 하고싶은 분야인지라 선수시절 못지않게 열정이 샘솟더라고요. 이일을 시작한 것은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계속해서 무엇인가를 배우게되요. 인생도 배우고, 농구도 리와인드해서 다시 배우게 되고 정말 행복합니다. 

 

 

 

 

Q.말씀을 정말 잘하시는 것 같아요. 길게 말씀하시는데도 전혀 지루하지않고 쏙쏙 들어와요.
하핫…, 아닙니다. 저는 원래 낯도 많이 가리고 말 주변이 없었어요. 다만 이일을 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늘게된 것 같습니다. 농구교실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가르치게 된 것도 그렇고 농구협회를 만드는 과정에서 성장한 부분도 있을 듯 싶어요. 이런 말씀드리는게 맞을까 싶은데, 제천도 만만치 않은 도시거든요. 이른바 깡패들도 있고 기센 분들도 적지않아요. 어느 곳이나 마찬가지겠지만 이곳 만의 텃세도 없다고는 말할 수 없겠죠. 여기 토박이가 아닌 제가 갑자기 농구협회를 만든다고 했으니 마냥 순탄치만은 않았습니다. 일단 제 진심을 표현하려면 말을 해야 할 것 아닙니까. 만든다고 끝이 아니고 뜻이 안맞는 이들을 설득하고 또 이후에 협회분들을 리드하고 끌고나가야 되는 부분도 있고요. 일단 제가 만들자고 했으니까 책임은 져야하는 거잖아요. 다행히 시간이 지나면서 다들 저의 마음을 알아주셨고 또 처음에는 어려웠던 분들도 서로 속내를 털어놓고 지내다보니 실상은 정말 따뜻한 경우가 많더라고요.

Q.포인트가드 출신이잖아요. 가드외 포워드, 센터도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스킬 트레이닝을 하는데 있어서 포지션으로 인한 어려움은 한번도 겪어보지 못했습니다. 다른 분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저같은 경우는 포인트가드 출신이라는 부분이 큰 장점으로 작용한 듯 싶어요. 포인트가드는 말 그대로 팀원들을 지휘하는 자리잖아요. 단순히 나만 잘해서 되는 것이 아닌 함께 뛰는 동료들을 살려줘야하는 책임이 있단말이에요. 그러다보니 다른 포지션에 대한 이해도도 자연스레 높아지게 되었어요. 알아야 그 선수를 활용하고 끌어 올릴 수 있으니까요.

Q.아들이 둘있는 것으로 알고있는데 운동은 하고있나요? 아버지 운동신경 닮았으면 되게 잘할 것 같아요.
운동은 하지 않고 있습니다. 아쉽게도 저를 아예 안닮은 것 같더라고요.(웃음) 관심도 크게 없고 소질도 뛰어난 편은 아닌 듯 싶어요. 운동신경이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선수를 할 만큼은 아니에요. 역시 제일 큰 것은 본인들이 그 쪽으로 가고싶은 생각이 없다는 것이겠죠. 농구교실에서 취미로 하는 정도에요. 사람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해야 행복하잖아요. ‘아빠, 저 진심으로 이것 하고 싶어요’라는 것 있으면 힘껏 밀어줄 생각입니다.

“작은 키보다는 부상 때문에 너무 힘들었습니다”

Q.농구는 어떤 계기로 시작하시게 된 것인가요?

제가 어린 시절에도 키가 작은 편이었지만 운동신경은 상당히 좋았어요. 축구, 야구 등 무슨운동을 해도 잘했던 것 같아요. 친구들끼리 모여서 놀거나, 학교에서 운동시합 등을 해도 돋보였죠. 운동을 많이 좋아하기도 했고요. 농구의 길에 들어서게 된데에는 형의 영향이 컸습니다. 형이 당시 서울 개포동에 있는 개원 초등학교를 다니고 있었는데 당시 거기에 농구부가 있었어요. 프로농구 선수 출신 임재현 코치님이랑 형이 당시 동기였고요. 형같은 경우는 그때 사이즈가 좋았어요. 초등학생이 177cm이면 상당히 괜찮았죠. 어쨌든 형을 따라다니면서 저도 흥미가 생겨서 조금 해봤더니 재미있더라고요. 당시 농구부 코치님께서도 ‘키는 작지만 볼 재간도 있고 소질이 있어보이는데 농구 한번 해봐라’고 권유해주셨습니다. 그때가 초등학교 4학년 때였어요. 그렇게 결심을 하고 나니까 부모님께서도 ‘이왕 할거면 제대로 해봐라’하면서 아예 이사를 가셨어요. 물론 저 때문이라기보다는 삼선중학교 입학 예정인 형을 배려한 것이었지만요. 아이러니하게도 형은 중학교에 올라간 후 농구를 그만둬버렸어요. 저는 대방초등학교로 전학가서 농구를 시작한 후 삼선중학교를 갔고 쭉 이어서 농구의 길을 갔지만요.

Q.자꾸 언급해서 죄송하지만 키 얘기를 안할 수가 없어요. 자라나지않는 신장 때문에 스트레스를 좀 받았을 듯 싶어요.
받았습니다. 키가 작아도 너무 작으니까 할 수 있는 포지션도 포인트가드 밖에 없었고 그중에서도 단신으로 분류됐죠. 농구는 신장의 스포츠라고 하잖아요. 그런 부분을 고려하면 저는 정말 최악의 신체조건을 가지고 약점 하나를 달고 지냈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도 어쩌겠습니까. 농구는 시작했고 또 저도 농구가 너무 좋았으니까요. 남들보다 키가 작으니 할 수 있는 것은 노력 밖에 없었어요. 운동신경, 재능 이런 것은 보통학생들 사이에서나 돋보였던 것이지 선수들 사이에서는 크게 내세울 무기도 아니었고요. 똑같이 운동하면 뒤쳐질 것이 뻔한지라 그야말로 미친 듯이 연습하고 또 연습했어요. 팀훈련은 물론이거니와 개인훈련에도 정말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당시 저희 집이 좀 많이 안좋았어요. 경제적인 부분도 그렇지만 부모님도 어릴 때 이혼을 하셔서 아버지랑 단둘이 살았던지라 꼭 농구로 성공하고 말겠다는 의지가 컸어요.


 

 

 

Q.남보다 불리한 신체조건에 확실한 목표와 동기부여까지 있었던지라 얼마나 노력했을지 새삼 짐작이 갑니다.
그때는 지금같은 디테일한 스킬 트레이닝 그런 것은 없었어요. 그냥 무조건 훈련 열심히하고 그런 시절이었죠. 저같은 경우 훈련은 당연히 열심히 했고 개인적으로도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않았어요. 체육관 불을 끄고 어둠 속에서 연습하고 수건으로 눈을 가린채 드리블을 치는 등 생각나는 훈련 방법이 있으면 다 시도해봤습니다. 정말 그때는 머릿속에 온통 농구 생각 밖에 없었는데 지금 스킬트레이닝을 하면서도 그때의 경험이 큰 도움이 되고 있어요.

Q.신장이 작으면 제일 불리한 것이 무엇일까요?
사실 초중고 시절에는 키가 작아서 불리하다? 그런 느낌은 거의 받지 못했어요. 설사 상대 신장이 2m라고 해도 맞상대 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요. 키는 작았지만 초등학교 때 농구를 시작하면서부터 스타트는 좋은 편이었어요. SBS 전국 초등학교 농구대회에서 우승도 하고 대회 MVP도 받으면서 꽤 주목을 받기도 했으니까요. 자신감도 충만했죠. 그런 자신감을 바탕으로 또 죽어라 연습했고요. 신체조건이 불리함에도 성공 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졌던 이유에요. 몸도 탄탄해서 저보다 훨씬 큰 선수들이랑 부딪혀도 쉽게 밀리지 않았고 림도 점프해서 양손으로 잡았을 정도로 탄력 또한 좋았어요.

Q.키를 다른 쪽으로 극복해버리셨네요.
그랬죠. 신장말고는 딱히 밀린다고 생각하는 부분이 없었고, 그 신장의 열세마저도 크게 어려움으로 다가오지는 않았으니까요. 사실 저의 농구인생에서 시련은 신장이 아니라 부상이에요. 키작은 것? 저만의 방식으로 충분히 커버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부상은 답이 없죠. 일단 한번 크게 당하게 되면 당시는 물론 이후에까지 악영향을 끼치는 경우가 적지않아요. 고등학교 1학년때 발목수술을 한적이 있어요. 그 전부터 유독 발목을 많이 다쳐서 수술을 하게 된거죠. 당시에는 수술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몸이 올라올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오산이었습니다. 좀처럼 회복이 안되는거에요. 그때는 재활이라는 개념이 제대로 정립이 되지않았던 시기에요. 수술하고 냉찜질, 온찜질하고 수건 등으로 기본적인 스트레칭 정도하고…, 정말 그게 다였어요. 저뿐 아니라 다들 그랬다니까요. 각도? 수건 잡아당기고 그런 정도가 고작이었으니 좀처럼 잡히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몸도 완전히 회복이 되지않고 밸런스도 돌아오지 않은 상태로 운동을 하니 다친데 또 다치고, 거기 때문에 무릎, 어깨 등 다른 곳까지 무리가 가서 다치는 등 부상이 도미노처럼 시작되더라고요.


 

 

 

Q.지독한 부상의 악령이 그렇게 따라다니게 된거네요.
맞습니다. 정말 지독하다는 말이 딱이었겠네요. 제가 주변에서 노력으로 지독하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이 부상이라는 녀석도 저 못지 않은 독종이었습니다. 정말 선수생활 내내 끊이질 않고 따라다녔습니다. 고등학교를 마치고 성균관대학교에 입학했는데 얼마 지나지않아 발목을 또 다치고 십자인대까지 파열됐어요. 더불어 확실히 대학무대는 이전 고등학교 때까지와 다르더라고요. 워낙 큰 선수들이 많으니 높이에서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고 그러한 단점을 몸을 키워서 대적하려다보니 움직임이 굼떠지더라고요. 이래저래 벅차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때 제대로 느꼈죠. 농구에서 신장은 이렇게 중요한 것이구나.

Q.성균관대 시절 유명했던 3인방 이한권, 정훈, 진경석 등과 함께 대학리그 우승을 이끌어냈습니다.
정말 기쁜 순간이었습니다. 당시 성대에 가드가 없다고해서 거기로 갔는데 결과도 좋게 나와서 좋았습니다. 당시 무적을 달리던 김주성 선배의 중앙대 연승기록까지 막아섰고 성대 역사상 처음으로 우승을 차지한 기록적인 순간이었어요. 그결과 3인방 모두가 유명해졌고 드래프트에서도 다들 좋은 순위에 지명되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Q.초반 페이스는 매우 좋았네요.
그럼요. 우승도 해보고 참 기뻤던 순간이죠. 하지만 이후에는 좀 안풀렸어요. 앞에서 말했다시피 십자인대가 파열되는 부상을 당했었다고 했잖아요. 그런 상태로 경기를 뛰었어요. 그러다보니 부상이 연달아 겹치고 몸이 완전히 망가지더라고요. 더불어 집안 상황도 좋지않았고 심리적으로 도저히 못견디겠더라고요. 안되겠다 싶어서 농구를 그만둬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때 박성근 감독님께서 제의를 하셨어요. 여러 가지로 힘든 것 잘 알고있는데 다시 재활해서 한시즌만 제대로 한번 뛰어보고 프로 조기진출을 해보라고요. 저도 마지막 기회라 생각하고 간절하게 운동에 매진하고 다행히 성적까지 잘나와서 3학년을 마치고 프로에 도전하게 됐습니다.

 

 

 

 

“빚더미에 가정사까지, 정말이지 죽고싶었습니다”

Q.작은 신장, 얼리 드래프트 등 여러 가지 핸디캡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전체 2순위로 지명되었어요.

대학무대에서 보여준 저의 모습을 좋게 봐주시고 앞으로도 발전 가능성이 있다고 믿어주셨다는 점에서 매우 감사한 일이죠. 어찌보면 거기서 계속 앞으로 나아갔어야 했는데 살짝 일탈도 했어요. 어린 나이에 갑자기 큰돈을 만지고 환경도 자유롭게 바뀌다보니 뒤늦은 방황을 했던 것이죠. 이른바 학창시절에는 안했던 생활을 하게됐어요. 술도 마시고 사람들하고 어울려서 놀고 그랬습니다. 그동안 정말 농구 밖에 모르던 삶을 살아오다가 잠깐 삐딱선을 탔다고 볼수있는데 그러다보니 살도 좀 찌고 몸 상태가 안좋아지더라고요. 안되겠다 싶어서 마음을 다잡았고 다시금 훈련에 매진했습니다. 당시 추일승 감독님께서도 격려를 많이 해주셨던 기억이 납니다. 주변의 기대도 컸던만큼 전체 2순위로 뽑힌게 거품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 제가 결정적으로 큰 실수를 해버렸습니다.

Q.실수요?
후아…, 지금 생각해도 후회막심합니다. 왜 그랬는지…, 정말이지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니까요. 이제야 말씀 드리는 흑역사 내용입니다. 당시 팀 훈련도 착실하게 소화하는 등 나름 몸이 잘 만들어진 상태였어요. 시즌 개막도 얼마 남겨놓지 않은 상태에서 팀에서도 며칠 휴식을 줬죠. 그냥 잘쉬고 데뷔전을 치르면 됐었는데 쓸데없는 짓을 했습니다. 몸도 근질근질하고 그래서 나름 땀 좀 빼야겠다는 생각에 길거리농구를 하게 됐는데 거기서 발목을 다쳐버렸어요. 그냥 다친 정도가 아니라 발목 인대가 앞쪽 옆쪽 모두 나가버릴 정도로 소위 작살이 났어요. 발등도 크게 부어올랐거든요. 팀에서는 난리가 났죠.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어보는데 어린나이에 도저히 사실대로 말하지 못하겠더라고요. 그래서 ‘모교인 성균관대에 가서 선수들과 일대일을 하다가 다쳤어요’라고 거짓말을 했어요. 하지만 나중에 보니까 다들 아시더라고요. 조사하면 다 나오잖아요. 정말이지 제 인생의 가장 큰 실수 중 하나입니다. 첫 단추를 그렇게 잘못 끼워버렸으니.

Q.그래도 해당 시즌에 경기를 뛰기는 하셨더라고요.
그렇죠. 몸상태는 경기를 뛰면 안되었지만 그렇게되면 연봉이고 뭐고 금전적 손해가 엄청났거든요. 괜찮다고 하고 뛸 수 있다고 했죠. 교체 멤버로라도 일단 코트에 나서는게 목표였습니다. 하지만 그냥 무대도 아니고 최고들만 모인 프로무대에서 제대로 실력 발휘가 됐겠어요. 팀에서 기대한 만큼 활약해주지 못했고 결국 한시즌만 뛰고 상무로 가게 됐습니다. 누구를 원망하겠습니까. 팀과 감독님께는 그저 죄송한 마음 뿐이었죠.

Q.어쩌면 상무행은 재충전을 위한 기회가 될 수도 있었을 듯 싶어요.
그렇죠. 구단에서도 배려를 해준 것이고 저에게도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었죠. 어차피 당시에도 발목이 회복된 상태가 아닌지라 제대로 팀에 기여하기는 힘든 상황이었어요. 하지만 진짜 불행은 그때 찾아오더라고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제가 평탄한 삶을 살아오지는 않았잖아요. 그런데 상무시절에 찾아온 일은 정말 말도 못하게 힘들었습니다. 군입대를 한지 1년이 조금 안된 시점이었어요. 직급은 상병이었죠. 발목이 좋지않아 재수술을 받은 상태인지라 목발을 짚고 다녔어요. 그런 상황에서 청천벽력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입단하면서 2억이라는 큰돈을 받았는데 그돈으로 아버지께서 사업을 하셨거든요. 재혼도 한 상태셨고요. 그대로만 가면 무난하게 살 것 같았는데 불운하게도 아버지께서 사업에 실패하셔서 그 돈을 다 날리고 빚까지 져버렸습니다. 재혼한 분과도 이혼하게 됐고요. 목발을 짚고 휴가를 나가면 빚쟁이들이 부대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거에요. ‘돈 갚아라’며 협박을 하기 일쑤였어요. 그러던 어느날 부대에서 호출을 하더라고요. 가봤더니 아버지가 쓰러지셨다는거에요. 사업에 실패하시고 이혼까지 하시면서 충격을 받고 뇌졸중이 오신거래요. 중풍이라고 하죠. 휴가를 가서 목발을 짚은 상태로 아버지 병간호를 하는데 정말 앞이 캄캄하더라고요. 벌어놓은 돈은 온데간데없이 빚만 가득하지. 아버지는 쓰러지셨지. 살던 집도 날아간 상태에서 재혼하셨던 분과 이혼소송 까지 진행되고 있었어요. 정말이지 죽고 싶었습니다.


 

 

 

Q.선수생활이 문제가 아니라 삶 자체가 막막한 상황이었겠어요.
그렇죠. 도대체가 앞이 안보였습니다. 그래도 어쩌겠습니까. 그대로 죽을 수는 없으니 전역후 다시 팀에 들어가서 열심히 훈련 했습니다. 다행히 벤치멤버로나마 꾸준히 경기를 뛸 수 있었고 열심히 모은 돈으로 빚을 청산했어요. 지난 일이지만 거기서 포기하지않고 악착같이 해나간 것에 대해서는 스스로도 잘했다고 칭찬하고 싶습니다. 그러다가 트레이드를 통해 KT&G(현 KGC)로 가게됐어요. 안 중요한 시즌은 없겠지만 그래도 트레이드되었으니까 해당 시즌에는 더더욱 잘해야하잖아요. 저도 의욕이 넘쳤죠. 하지만 휴우…, 또 발목을 다쳤고 그냥 시즌아웃이 되고말았죠. 다음 시즌 돌아왔지만 이미 연봉은 반토막이 된상태였습니다.

Q.그쯤되면 몸이 문제가 아니라 마음이 버티기 힘들었을 듯 싶어요.
많이 힘들었습니다. 그나마 그런 상황에서 종교가 힘이 되어줬어요. 원래도 기독교였지만 당시는 기댈 때가 거기 밖에 없어서 더 간절했던 것 같아요. 거기서 아내를 만났고 많은 위로를 받았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제편이 되어줄 사람이 생긴 것이죠. 정확하게 말하면 상무시절에 처음 알게되어서 차츰차츰 마음을 키워나가게 됐어요. 하나님께서 보내준 천사같은 사람입니다. 아내 덕분에 다시금 힘을 낼 수 있었습니다.

Q.재기에 대한 의욕도 강했을 것 같아요.
강했죠. 매번 무슨 일이 생겨서 제대로 뛰어본 적이 한번도 없었으니까 뭐라도 좀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그러다가 KT&G에서의 3년차 시즌때 기회가 찾아왔어요. 주전 포인트가드였던 주희정 선배가 SK로 트레이드 되어서 가고 (김)태술이가 저희 팀으로 왔습니다. 태술이는 오자마자 군입대를 선택했고 1번 포지션이 텅빈 상태에서 저의 역할이 커지게 된거죠. 당시 유도훈 감독님께서도 전폭적으로 저를 밀어주신다면서 열심히 해보라고 하셨어요. 본인이 펼칠 농구에서 저의 역할을 주요 플랜으로 삼고 시즌을 준비하셨죠. 연습 경기 대부분을 주전으로 뛰었습니다. 이런 기회가 어디 있겠습니까. 정말이지 모든 것을 다 걸어야겠다고 입술을 깨물었습니다. 하지만 시즌 개막을 얼마 앞두고 예상치 못한 일이 있어났어요. 유감독님이 갑자기 그만두셨어요. 지금도 저는 이유를 몰라요. 결국 사령탑이 바뀌었고 저의 역할도 축소 될 수밖에 없었죠. 여기서 오해가 생길지 몰라서 한가지 짚고 넘어갈께요. 당시의 저는 어차피 이전에 보여준 것도 적었고 주전급으로는 많이 부족한 선수였습니다. 감독님에 따라 쓰임새의 비중이 달라 질 수밖에 없는 유형이었죠. 유감독님은 우선 저에게 기회를 좀 더 줘보실 생각이셨던 것이고, 새로오신 감독님께서는 본인의 플랜에 맞는 선수들을 좀 더 쓰셨던 것 뿐이죠. 어떤 상황에서도 중용되었을 정도로 확실하게 기량을 보여주지 못한게 아쉬울 뿐입니다.

Q.그래도 FA자격을 얻어서 SK로 가게됐어요.
천만다행이었죠. 크게 보여준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신선우 감독님께서 좋게 보고 불러주셨습니다. 당시 팀에 주희정, 황성인 선배님들이 계셨기에 큰 욕심을 부리기보다는 어떻게든 팀에 도움이 되는 선수가 되어보자는 마음가짐으로 시즌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의욕이 넘쳤던 것일까요. 합류하고 딱 3일째 되던 날이었어요. 연습경기에서 수비를 하다가 상대선수 옷에 손가락이 걸리면서 골절이 되고 말았습니다. 진짜 그런 식으로도 다치는구나 싶더라고요. 그래도 재기를 포기할 수 없어서 다친 곳을 빼고 모든 부분에 대해 운동을 열심히 했는데 이번에는 허리까지 다쳤어요. 하도 많이 다치고 나이까지 조금씩 먹어서인지 회복력도 예전같지는 않았습니다. 여차저차 힘겹게 재활을 마치고 돌아갔을 때 문경은 코치님이 감독대행으로 오셨어요. 기회를 주시겠다고 열심히 해보라고 하셨는데 연습 중에 허리를 또 다쳤습니다. 이제는 정말 안되겠다 싶은 생각이 들더라고요. 계약기간이 남았지만 은퇴를 마음먹었고 결국 선수생활을 마치게 되었습니다. 구단에서 배려를 해줘서 유소년클럽에서 일할 수 있게 제의를 주셨지만 당시에는 이래저래 마음도 무너지고 자존심도 상하고해서 그대로 떠나게 됐죠.

Q.마지막으로 여전히 농구인 옥범준을 응원해주는 팬들에게 인사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주저리 주저리 변명만 길게 늘어놓은 것은 아닌가싶어요. 부족함이 많았던 프로생활이지만 궁금해하시는 팬분들도 계실 것 같아서 부끄러운 모습까지도 있는 그대로 솔직히 다 털어놓아 보았습니다. 우여곡절이 다소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프로는 결과로 말하는 세계고 그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이런저런 것을 떠나 농구에 대한 마음만큼은 지금도 진심입니다. 열과 성을 다해 기대주들을 가르치며 한국농구발전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자 뒤에서라도 노력하겠습니다. 늘 감사드리고요. 다들 마음에 품고 계신 꿈을 이루시길 기원드릴께요.

#글_김종수 칼럼니스트

​#사진_본인제공, KBL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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