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수의 농구人터뷰⑬] 유영주 전 감독 “영화 록키 보며 한 손 푸쉬업 따라 했죠”

김종수 칼럼니스트 / 기사승인 : 2021-11-23 09:0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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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구대잔치, 여자프로농구를 통틀어 역대 최고의 4번은?’이라는 질문을 누군가 던지면 여러 선수의 이름이 오를 것이다. 여자농구 역시 만만치 않은 역사가 쌓인 만큼 그간 뛰어난 선수가 상당수 배출되었다. 하지만 질문을 살짝 바꿔 ‘파워포워드가 가장 잘 어울렸던 선수’하면 답안지는 확 좁혀질 가능성이 높다. 유영주(50, 178cm)라는 파워포워드의 교과서 같은 선수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저보다 힘센 국내선수는 기억나지 않습니다”라는 자신감 넘치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유영주는 파워풀 그 자체였다. 파워포워드라는 개념 자체가 약했던 당시 여자농구에서 내외곽을 오가며 스몰포워드와 센터의 지원군이자 보디가드로 활약했던 그의 등장은 팬과 관계자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기에 충분했다.

골밑에서 상대 빅맨들과 치열하게 리바운드, 몸싸움 경합을 하다가도 빈틈이 생기면 외곽까지 나가서 3점슛을 성공시키는 그야말로 올어라운드 플레이어였다. 공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쳐들어가 우당탕탕 몸을 사리지 않고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던 모습은 흡사 만화 ‘슬램덩크’의 강백호 여자 버전 같았다. 여자농구의 찰스 바클리라는 별명도 있었다.

보통 이러한 거친 스타일은 남성 팬들에게 인기가 없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하지만 유영주는 달랐다. 매력적인 외모에 늘 환한 미소를 띠고 있는지라 리그에서 손에 꼽힐만한 인기를 누렸다. 남녀노소 모두에게 큰 사랑을 받았다.

프로리그에서의 경기만 본 팬들은 준수한 4번 정도로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그녀의 전성기는 실업 시절이었다. 신흥 강호로 실업무대를 호령했던 SK증권 당시 김지윤, 정선민 등 쟁쟁한 선수들 사이에서도 간판스타는 유영주였다. 기량은 물론 팀을 하나로 뭉치게 하는 특유의 리더십이 있었던지라 그가 함께한다는 자체만으로도 동료들은 든든함을 느꼈다는 후문이다.

그러한 미친 존재감은 국가대표팀에서도 변하지 않았다. 1997년에 아시아선수권대회 우승을 이끌고 MVP까지 차지하는 등 어디에서도 자신이 속한 팀을 스텝업 시켜주는 존재였다. 스스로도 얘기하듯 지금은 큰 언니나 옆집 아줌마 같은 포근함과 편안함이 느껴지지만, 선수 시절 유영주는 ‘파워포워드는 바로 이런 것이다’라는 것을 온몸으로 보여준 레전드 4번이었다는 평가다.

Q.어떻게 지내십니까?
연맹에서 농구 활성화를 위해서 학교 체육 시간에 들어가서 농구를 가르치는 재능기부를 하고있는데 저도 참여하고 있어요. 제주도에서 3개월 정도 있으면서 아이들과 함께했고요. 지금은 농구를 하고 있는 쌍둥이(아들) 대회가 있어서 그것 봐주려고 집에 잠시 들어와 있어요. 근데 12월초 정도 되면 일정이 대부분 마무리되는지라 다시 집이 있는 인천에서 생활할 것 같아요.

Q.인터넷에 ‘등산 마니아’라는 글이 있더라고요. 등산의 매력이 뭘까요?
등산은 안 다녀요. 아니 못 다닌다고 보는 게 맞죠. 무릎 연골이 다 닳아서 은퇴한 선수 중 1명이어서 등산 같은 것 다니기에는 벅차요. 산책 삼아 올랫길 같은 곳 가볍게 왔다 갔다 하는 정도죠. 제주도 있을 때는 수목원 같은 곳 걷고 그랬습니다. 인터넷에 왜 그런 글들이 있는지 몰라도 등산은 현실적으로 힘든 상황이죠.

Q.은퇴 후에 살이 좀 찌신 것 같아요.
하하…. 그게 사람 좋아하고 술 좋아해서 그래요. 그냥 좋은 사람들 만나서 한잔하면서 얘기하고 웃고 그러다 보니까 살이 좀 붙었죠. 이제는 좀 자제하려고 합니다. 코로나 시국이라 술자리도 자제하는 게 맞고요. 근데 사실 운동선수 출신들이 현역 시절에 자주 다쳐서 고질적인 부상을 안고 사는 경우가 많아서 은퇴 후에는 오히려 운동을 격하게 하진 못해요. 그러다 보니 운동량이 급감하면서 살이 붙게 되는 경우도 많은 것 같아요.

Q.은퇴 후 지도자 생활은 물론 공백 기간에도 WKBL 해설위원, KBL 기록판정원 등 이런저런 일을 하는 등 쉬지 않으셨어요. 다양한 경험을 하셨다는 생각이 들어요.
KBL 기록판정원은 한 적이 없는데 인터넷에 적혀있더라고요. 그래서 사실 의아했어요. 더군다나 WKBL도 아니고 KBL은 좀 뜬금없잖아요. 인터넷에 좋은 정보도 있지만 다 믿으면 안 된다니까요. 아무튼 많은 분들이 좋게 봐주시고 기회도 주시고 그래서 나름대로 열심히 바쁘게 살았던 것 같아요. 선수 은퇴하고 한 달 만에 코치를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코치보다는 언니 개념이 던 것 같아요. 열정은 끝내주는데 어설픈 것도 많았죠. 그렇게 저렇게 배워가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직도 배울 게 많고요.

Q.쌍둥이 아이들은 어디에서 농구를 하고 있나요?

송도중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에요. 요즘 아이들이 워낙 커서 얼마나 더 성장할지는 일단 지켜봐야 될 것 같고요. 운동 자체는 크게 뒤지진 않는 것 같아요. 작은 아이는 이번에 40명 정도 참가한 엘리트캠프에서 MVP를 받았고 큰 아이도 나날이 성장하고 있어요. 둘 다 잘 크고 있는 것 같아요. 큰 아이는 슈팅가드를 주로 하고 있고요. 작은 아이는 여러 포지션을 소화하면서 올어라운드로 가고 있는 듯 보여요. 아직은 중학생인지라 앞으로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 일이죠. 운동선수의 길이 쉽지 않겠지만 그래도 즐겁게 농구를 했으면 좋겠다는 바람만 가져봅니다.

Q.어머니가 워낙 잘하셔서 웬만해서는 성에 안 차실 것 같아요.
아직은 어리니까 즐기라고 말하고 있어요. 잘한다 못한다도 쉽게 평가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기술은 나중에라도 배울 수 있으니 기본기에 충실하라며 의지나 적극성 등을 강조하고 있어요. 어느 지도자든 마찬가지겠지만 적극적으로 골밑에 들어가 리바운드 쟁탈전을 벌이고 몸싸움 열심히 하는 스타일은 다 좋아해요. 팀원들이나 지도자가 좋아하는 그런 유형의 마인드를 갖추면 서로에게 플러스 되는 게 많죠. 가끔 “슛 타이밍을 그렇게 가져가지 말고 이렇게 쏘면 어떨까?” 등 가벼운 조언 정도는 해주는 편이에요. 하지만 남자농구와 여자농구는 다른 부분이 많으니까 간섭은 되도록 적게 하려고 해요.

Q.운동선수 출신 중에는 ‘힘든 과정을 자녀에게 겪게 하고 싶지 않다’며 2세가 운동하는 것을 반대한 케이스가 많더라고요.
저도 그랬어요. 엄청 반대했죠. 절대 안 시키려고 했습니다. 한 1년 정도 싸웠을까요. 그런데 본인들이 워낙 좋다고 하니까 어쩔 수 없이 허락했죠.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시작했어요. 이왕 할 거면 빨리 시작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요. 6~7살 그 어린 나이에 농구를 하고 싶다고 하니까 처음에는 참 난감했어요. 사실 선수를 하라고 한 것이 아닌 즐겁게 농구하라고 강동희 선배님이 하셨던 농구교실에 보냈는데 “형들이 너무 못해서 재미없어” 막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어쩌지 고민을 많이 했어요. 아이 아빠랑도 오랫동안 상의하고 그랬는데 결국 조건을 내걸었어요. “나 농구 하기 싫어”라는 말이 딱 3번만 나오면 절대 볼 안 만지게 할 거라고 했어요. 그런데 아직까지 단 한 번도 그런 소리는 안 하네요. “농구는 너희들 몫이다. 농구 잘하면 너희들이 좋은 것이지 다른 사람이 좋은 것 아니지 않냐”는 말은 종종 해요.

Q.요새 그래도 시간이 조금 나실 것 같은데, 남편은 좋아하실 것 같아요.
아유, 저희처럼 결혼한 지 22년 정도 된 부부는 떨어져 있는 게 애틋한 거예요(웃음). 같이 있어서 좋은 점은 아이들 케어할 때 서로 도움 되고 그런 정도? 제가 제주도에 있을 때 아이 아빠가 집에서 역할을 많이 해줬죠. 저는 그 말을 믿어요. ‘신랑을 위해 목숨을 내줄 수 있다’고 하지만 그건 전우애예요. 하하. 20년 넘으면 그렇게 돼요.

“지도자의 자리는 끝없는 공부가 필요한 것 같아요”

Q.현역 시절부터 리더십이 뛰어났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어쩌면 지도자의 길은 당연한 수순 같이 느껴지는데요. 천안 국민은행 세이버스에서 잠깐의 코치 생활을 거쳐 WKBL 선수 출신으로서는 최초로 감독대행에 오르셨어요.
글쎄요. 운이 좋았던 것 같아요. 말씀하신 대로 현역 시절의 모습을 보고 좋게 봐주시고 기회를 주신 경향이 컸죠. 다소 빨리 감독대행을 하면서 ‘감독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구나. 운동 경험만 가지고는 안되는구나. 다른 쪽에서의 많은 공부가 필요하구나’ 등을 느꼈어요. 최초라는 타이틀을 많이 달게 됐는데 책임감도 많이 느껴지고, 그 과정에서 이런저런 것을 배우기도 하고 그랬죠.

Q.여전히 WKBL에는 여성 감독의 숫자가 적은 것 같아요. 남성 감독, 여성 감독의 차이점 혹은 장단점이 궁금합니다.
현재 여성 감독으로는 박정은 감독만 있는데, 그렇지 않아도 많은 분들이 여성리그인데 여성 감독이 너무 적은 것 아니냐는 말씀도 하세요. 그래서 저도 BNK에 있을 때 거기에 대한 책임감도 함께 느끼면서 잘해보려고 노력한 것도 많았고요. 하지만 유리로 된 천장을 깨기는 쉽지 않아요.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이게 한순간에 바뀔 부분은 아니거든요. 어쨌든 제가 잘해야 후배들에게도 길을 터준다고 생각했는데 결과가 썩 좋지 못해서 미안한 마음도 들고 그래요. 여성 감독과 남성 감독의 차이점 중 디테일이라는 부분도 큰 것 같아요. 상대적으로 여성 감독은 꼼꼼하게 조목조목 알려주는 편이에요. 반대로 그런 부분이 장점이자 단점이 될 수도 있어요. 남성 감독 같으면 그냥 넘어갈 수 있는 부분도 여성 감독은 하나하나 다 짚고 가니까요. 함께 목욕탕도 가는 등 친밀감에서는 여성 감독이 좋은 부분이 있겠지만 남성 감독은 한걸음 떨어져 있는 편인데 그게 장점이자 단점이 되기도 해요. 그래서 남성 감독이 있는 팀에는 여성 코치가 가교역할을 맡는 경우가 많아요. 하지만 코치 위치에서 하는 역할과 감독 위치에서 하는 역할은 차이가 클 수밖에 없겠죠.

Q.2019년 부산 BNK의 초대 감독으로 선임되셨어요. 프로화 이후 WKBL 은퇴선수로는 최초의 여성 감독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깨가 무거우셨을 것 같아요.

아무래도 창단팀의 감독이 된다는 것은 향후 그 팀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늘 이름이 따라붙을 수밖에 없는 것이라 영광이면서도 어깨가 무거운 부분도 컸죠. 책임의 크기가 큰 만큼 주어진 상황에서 열심히 했지만 가르치면서 이끈다는 것은 역시 어렵더라고요. 늘 배우려는 마음 자세로 임했지만 여전히 배울 게 많았고요. 시행착오도 겪고 ‘아, 그때 이렇게 했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이 지금도 들어요. 만에 하나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때 그런 부분을 고쳐서 더 나아진 모습으로 할 것 같은 자신감은 있어요. 어쨌든 시작을 함께한 팀이라 친정팀 같고 첫사랑 같은 아련한 느낌도 강해요. 그래서 여전히 각별한 감정이 들고 박정은 감독이 정말 잘해서 좋은 결과가 나왔으면 좋겠어요. 이제는 한 발 떨어져 있지만 늘 응원하고 있답니다.

Q.당시 WKBL 사상 첫 전원 여성 코칭스태프를 구성하면서 파격적인 모습도 보여주셨어요. 아마조네스 군단으로 불렸던 기억도 납니다.
제가 10년 대표팀 생활을 하면서 해외 전지훈련을 가거나 경기를 나가보면 전원 여성으로 이뤄진 해외 코칭스태프가 되게 신기했어요. 당시 우리에게는 생소한 광경이었거든요. 그 당시만 해도 실업팀 시절이라 여성 지도자와 스태프가 팀을 이끈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었어요. 그런데 해외 팀들의 그러한 모습은 신선한 충격이었죠. 감독, 코치는 물론 매니저까지 여성인 것을 보면서 ‘우와! 되게 멋있다. 나도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저렇게 하고 싶다’는 생각을 종종 했었습니다. 그래서 감독이 되었을 때 각 포지션별로 적임자들을 불러들였고 여자프로농구에 좀 더 많은 여성 농구인들을 녹아들게 하고 싶었죠. 어차피 프로의 세계는 결과로 말하는 것인지라 아쉬움도 크지만 적어도 인식 자체에 변화를 주고 싶었던 마음은 컸습니다.

Q.감독님과 이야기를 하다 보니 그런 생각도 듭니다. 여성 농구인들에게 지도자 기회는 이제 조금씩 주어지고 있는 것이잖아요.

경험치가 매우 얕죠. 그런 상황에서 한 두 번 기회 주고 결과가 안 좋으면 ‘봐봐, 너희들 그럴 줄 알았어. 역시 안 되잖아’ 그럴 게 아니라 좋은 자원들을 지켜주면서 꾸준히 육성시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남자농구인들 역시 하루아침에 그렇게 된 것은 아니잖아요. 오랜 기간 수없이 많은 실패를 경험했죠. 아직까지 여성 지도자, 코칭스태프들은 숫자도 적고 경험도 부족한 것이 사실이죠. 더 많은 이들이 기회를 받고 경험을 쌓아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Q.지도자 유영주는 어떤 스타일이셨나요?
저는 감독, 코치, 선수간 동등한 관계를 강조했어요. 직책과 하는 일에서는 차이가 있겠지만 어차피 같은 프로잖아요. 서로가 책임 의식을 가지고 스스로 열심히 해야 한다는 맥락은 변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코치로 있을 때 느꼈던 아쉬움도 큰지라 감독이 된 후에는 코치들이 가지고 있는 역량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해주고 싶었어요. 개인적으로 ‘같이’라는 단어를 참 좋아해요. 감독과 코치, 선수가 따로가 아닌 하나가 되어서 같이 가는…. 남자농구를 보면 ‘형님 리더십’이라는 말이 있는데 저 역시 큰언니나 옆집 아줌마 같은 느낌으로 가고 싶었죠.

Q.성적 부진으로 BNK 사령탑에서 물러나셨어요. 아쉬움이 컸을 것 같아요.
감독이라는 위치는 자신이 한 것에 대해서는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당시 성적이 너무 저조해서 일단 팀에 너무 미안했고 그것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습니다. 오히려 한발 물러나서 현재의 시선으로 돌아보니 아쉬운 것도 너무 많습니다. ‘아…, 그때는 왜 그랬지. 이렇게 해야 했는데’ 등등 저도 모르게 무릎을 치거나 할 때가 있어요. 그래서 사람은 죽을 때까지 배워도 모자란 것 같아요. 더불어 느끼고 반성한 부분에 대해서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아쉬움이라는 단어가 저에게는 한 단계 올라서고 발전할 수 있는 무언가를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몸에 딱 달라붙는 쫄쫄이 유니폼, 문제 많았어요”

Q.인간 유영주에 대해 여쭤보고 싶습니다. 선수 시절부터 팬이 많으셨어요. 이유도 여러 가지죠. ‘여성스럽고 귀엽다’부터 ‘센언니로서의 매력이 넘친다’ 등 주로 남성 팬들은 전자, 여성 팬들은 후자 같아요. 본인은 어느 쪽이 맞다고 생각하세요?
개인적으로 체육관에서만큼은 승부욕이 매우 뜨거웠어요. 승부의 세계라는 정글 속에서 강하게 경쟁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만큼은 확고했죠. 강해지기 위해서 훈련도 혹독하게 하고 경기장에서도 뜨겁게 뛰어다녔던 기억이 납니다. 여성 팬들은 그러한 중성적인 매력 때문에 좋아해주셨고 남성분들은 음…, 프로 초창기 저희가 딱 달라붙는 유니폼을 입었잖아요. 글래머스러운 몸매가 드러나서 그런 부분도 있지 않았을까요? 특히 군인들이 되게 좋아했던 기억이 나요. 으하하핫…. 제가 말해놓고도 민망합니다. 반은 농담인 것 아시죠? 경기장에서 잘 웃는 모습을 좋아해 주시는 팬들도 있었던 것 같고요. 이유는 다 각양각색이지 않았을까요.

Q.일명 ‘쫄쫄이 유니폼’ 기억납니다. 말이 참 많았어요.
맞습니다. 이게 운동적인 부분에 꼭 필요하다면 모르겠는데 여성 선수들에게는 되게 불편했어요. 거창하게 ‘성의 상품화’ 그런 부분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일단 몸매가 확연히 드러나다 보니 다이어트를 하는 선수들이 많았어요. 농구라는 종목이 워낙 몸싸움도 많이 하고 거칠어서 한창 시즌 중에는 잘 먹고 훈련량도 많이 가져가야 하거든요. 하지만 아무래도 여성 선수들이다 보니 뱃살이라도 보일까봐 신경 쓸 수밖에 없었고, 잘 먹지 않는 경우까지 생긴 거죠. 이건 직접적으로 경기력에 관련이 된 것이라 문제가 됐었다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이건 아니다 싶어 앞장서서 폐지를 주장했던 기억이 납니다.

Q.제가 기억하기로는 ‘유영주는 예뻐서 좋다’는 남성 팬들도 많았어요.
아니에요. 제가 당시 빅3 전주원, 정은순, 유영주 중에서 제일 외모가 떨어져요. 그래서 맨날 “이놈의 외모지상주의”라 외치고 다녔어요.

Q.너무 겸손하세요. 솔직히 전주원 코치는 모르겠지만 그 외에는 딱히 누구에게도 안 밀렸던 것 같아요.
하하…. 감사합니다. 사실 그런 이야기는 처음 들어보는데 그래도 기분은 좋네요. 그냥 농구선수는 실력으로 말하는 것이니까 당시에는 밝은 모습으로 열심히 뛰어다니려 했고 그래서 좋게 봐주신 분들도 많다고 생각해요.

Q.1998년에 강석이 진행하는 ‘아이러브스포츠’에 출연하셨던 것 기억나세요? 그때 우승을 하고 방송에 출연하셨는데 단아한 복장으로 나와서 여성스러운 말투로 임했던 기억이 납니다. 사실 그때 내숭 좀 살짝 떨지 않으셨나요? 마치 연예인 이영애를 보는 것 같았어요.
아쿠, 저 욕 먹어요. 너무 엄청난 분을 가져다 붙이시면 후폭풍이…, 유튜브에 영상이 있더라고요. 근데 제가 선천적으로 밝고 애교가 좀 있는 편이기는 한데 단아하지는 않아요. 내숭은 원래 못 떨고요. 당시 그냥 편하게 얘기했던 것 같아요. 다만 평상시처럼 막 그러지는 않고 예의는 조금 지켜가면서 하려고 했겠죠.

Q.그때 방송에서 휘어진 손가락을 보여주셨어요. 그 상태로 경기를 뛰신 건가요?
사실 2015년에 손가락 수술을 했어요. 저 자신에게도 콤플렉스가 되더라고요. 휘어진 손가락을 최대한 일자로 피려고 하는 수술을 했죠. 그래도 완전히 펴지지는 않았어요. 게임을 하다가 손가락이 부러지면서 인대까지 다쳤는데 시즌 중이라 제대로 치료를 못 했어요. 시즌 치르기 바빠서 그냥저냥 참고 뛰었는데 나중에 치료하려니 힘들더라고요. 아이 낳고 살면서도 훈장 같다는 느낌이 들면서도 콤플렉스로 작용하고요. 특히 키보드 칠 때 불편했죠.

Q.경기할 때는 불편하지 않으셨나요?
좋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아주 크게 불편하지는 않았어요. 새끼손가락 부분인지라 그냥 뛸만했어요. 다만 너무 신경을 못 써서 나중에 일상생활 할 때 불편함이 있었죠. 미관으로도 그렇고요.

Q.확실히 시대가 변했다고 느껴지는 게 당시 방송을 보면 강석 님께서 감독님 휘어진 손가락도 만져보셨어요. 친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옆에 있던 기자가 감독님을 가볍게 툭툭 치듯 터치하면서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지금 그러면 난리 날 것 같아요.
그렇죠. 당시와 지금은 분위기가 많이 바뀐 것이 사실입니다. 지금 그랬다면 난리 나죠. 그런 부분에서도 ‘과거와 지금이 달라졌구나’라고 느껴요.

Q.별명이 ‘유진실’이었어요.
한창 현역으로 뛸 때 스포츠서울의 어떤 기자님께서 붙여주셨어요. 당시 연예계에서 고 최진실 님의 인기가 뜨거웠는데 제가 경기장에서 싱글싱글 웃고 그러니까 보기 좋다고 유진실이라고 불러주셨어요. 그런 별명 싫어할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너무 대단한 사람과 비교해주시고 뜻도 좋아서 마음에 든다고 했고, 그 다음부터 많은 분들이 불러주시더라고요. 최진실 님의 팬들에게는 죄송하지만 큰 뜻은 없고 그냥 좋게 봐주신 분들께서 좋은 의미로 붙여주신 거예요. 그 다음부터는 누가 별명 물어보면 ‘저 유진실이에요. 어떤 기자님께서 붙여주셨어요’ 그렇게 대답하면서 밀어붙였던 기억도 나네요(웃음). 근데 그 외에 플레이 스타일이나 캐릭터 때문에 생긴 별명도 많았어요. 불곰, 핵탄두, 선머슴 등등 장난 아니었죠.

Q.해설위원 시절 경기 도중 국민은행 김수연을 폭행한 우리은행의 김은경에게 인터뷰를 하러 찾아가 혼내시는 모습이 방송되어서 ‘속시원하다’는 팬들의 반응을 얻기도 했어요.
아무래도 대놓고 폭행하는 모습은 쉽게 찾아보기 힘들고 프로농구의 이미지까지 걱정됐어요. 당연히 큰 잘못을 했고 반성해야죠. 그렇게 해서 본인 이미지에도 치명타가 된다는 것을 자각 시켜야 할 것 같았어요. 선수 생활이 창창한데 그런 잘못을 해서 팬들이 등을 돌려버리게 되면 모두에게 손해죠. 더불어 다른 선수들에게도 ‘절대 해선 안 될 행동이다’라는 경각심을 주고 싶었어요.

Q.농구는 어떻게 시작하시게 된 것인지 궁금합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저희 언니가 농구선배였어요. 당시 엄마가 언니에게 캠퍼스화 같은 것을 사주길래 “나는 왜 안 사줘?”라고 물었더니 “언니는 농구부잖아”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럼 나도 농구할래” 그렇게 된 거죠. 그런데 언니는 금세 그만두고 저는 쭉 농구를 하게 됐어요. 사실 초등학교 때는 그냥 즐기는 수준이었고, 본격적인 농구선수로서의 훈련은 중학교 때부터 했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아요.

Q.그 당시 농구선수를 할 정도로 키가 클 줄은 모르셨을 것 같아요.
아뇨. 아빠가 178cm, 엄마가 168cm 정도 되시는지라 그 당시 기준으로는 큰 편이었죠. 많이는 안 크더라도 엄마, 아빠를 닮았으면 기본적으로 어느 정도 신장은 될 것 같았어요. 아빠가 배구선수 출신이세요.

“영화 록키보면서 한 손 푸쉬업 따라 했습니다”


Q.유영주하면 파워포워드, 파워포워드하면 유영주입니다. 언제부터 파워포워드를 하셨나요?
중학교 때부터 (정)은순이가 센터를 보고 제가 파워포워드를 맡았어요. 제가 힘이 센 편이고 활발하게 내외곽을 오가는 편이라 잘 맞는 포지션 같아요. 이후 실업팀에 가서도 제가 하는 플레이를 보고 선배 언니들이 파워포워드를 별명처럼 불러주셨어요. 당시에는 파워포워드라는 포지션 개념이 적었는데 저로 인해서 부각 된 것 같아 기분이 좋았어요. 학창 시절에도 4번을 보긴 했지만 제대로 파워포워드로 활약한 것은 실업팀 입단 이후인 것 같아요.

Q.한창 때 플레이를 보면 그야말로 파워포워드의 전형이었습니다. 전투적으로 골밑에서 몸싸움하고 상대 센터를 상대로도 적극적으로 공격을 시도했던 모습을 많이 봤어요. 뭔가 ‘WKBL의 찰스 바클리’ 같은 느낌도 들었습니다.
슛 자신 있게 쏘고 몸싸움도 자신 있던 시절이라 내외곽을 오가며 활발하게 플레이했던 것 같아요. 골밑에서 빅맨과 몸싸움하다가도 외곽을 돌면서 3점슛도 쏘고 정말 신바람 나는 시절이었죠. 당시 NBA가 한창 인기 있었는데 말씀하신 대로 찰스 바클리와 비교가 많이 돼 ‘여자농구 바클리’로도 종종 불리곤 했어요. 팬들이 플랜카드도 그렇게 써서 응원해주고 그랬던 기억이 납니다.

Q.입단 전까지 우승이 없었던 SK증권에 농구대잔치 우승을 3회나 안겨줬어요. 그때 멤버가 포지션별로 굉장히 탄탄했던 것 같아요.
가드에 김지윤, 제가 윙을 맡고 있었고 골밑에는 정선민이 있었으니 포지션 배분도 좋고 시너지효과도 잘 나왔죠. 전문 슈터, 수비수 등 적재적소에서 활용할 수 있는 선수들이 전체적으로 많았어요.

Q.굉장히 파워풀하셨어요. 힘이 셌던 분으로서 ‘아, 이 친구도 힘은 정말 장난 아니다’라고 느낀 선수가 있을까요? 센터 정은순은 어땠나요?
아, 제가 힘이 좀 좋았죠. 힘에서 밀리는 것을 되게 자존심 상해했어요. 제가 통뼈라서 타고난 힘이 좀 세요. 훈련도 많이 했고요. 힘에서만큼은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가지고 살았죠. 고2 때부터 ‘강한 것은 아름답다’라는 생각을 가슴에 품었어요. 당시에 영화 ‘록키’를 보면서 한 손 푸쉬업을 따라 했던 기억이 납니다. 연습경기하러 가면 감독님이 자랑을 하셨어요. “유영주, 쟤 한 손 푸쉬업 한다고”면서 막 시키셨죠. 그래서 힘부심은 있었어요. (정)은순이가 힘이 나쁜 편은 아니지만 저한테는 안됐죠.

Q.국가대표팀에서도 오랫동안 활약하셨는데 WNBA 등에서 제의 같은 건 없었나요?
있었어요. 1997년도에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하고 MVP까지 받고 나서 제의가 들어왔어요. 당시 기사로도 나왔었죠. 하지만 제 마인드는 우물 안의 개구리였던 것 같아요. 당시는 낯선 곳으로 가는 게 두려웠지 않나 싶어요. 지금 마음 같으면 무조건 갔어야 된다고 생각하지만 당시에는 용기를 내지 못했어요.

Q.감독님의 파워가 서양 선수들을 상대로도 통할 수 있었을지 너무 궁금해지네요.
그러니까요. 저도 두고두고 아쉽습니다.

Q.1997~1998시즌 우승을 차지하기 무섭게 SK증권이 해체되었어요. 충격이 크셨죠?
그때 정확히 기억하는 게 제가 경기를 하다가 코뼈가 부러졌었거든요. 트레이너한테 응급처치받고 연장까지 가서 우승을 차지했어요. 뒤풀이하고 인하대학교 병원에서 수술을 받았어요. 그리고 회복실에 누워있다가 해체 소식을 듣게 되었죠. 허무했어요. ‘코뼈까지 부러지면서 우승을 했는데 돌아오는 것은 해체구나.’ 어른들의 세계가 이해 안 됐고 참 싫었죠. ‘이렇게까지 해서 농구를 하면 뭐하나?’ 싶은 생각에 3개월 정도 방황을 했던 것 같아요. 지금은 팀을 옮겨 다니는게 크게 이상하지 않지만 당시에는 ‘나의 팀’이라는 개념이 정말 강했어요.

Q.드래프트를 거쳐 삼성생명으로 가기는 했지만 모든 게 낯설고 동기부여도 조금 떨어졌지 않나 싶어요.
학교 은사님이 잡아주셔서 드래프트를 거쳐 삼성으로 가게 됐어요. 생소했죠. 라이벌이었던 팀이라 선뜻 발걸음이 안 옮겨지더라고요. 은사님께서 “최대한 하는 데까지 하고 미련 없을 때 은퇴하라”고 말씀해주셔서 용기를 냈죠. 저희 해체하고 남자농구팀 SK를 창단했잖아요. 배신감이 많이 느껴졌어요. 더불어 저야 학창 시절에 함께한 은순이가 있어서 팀 적응에는 큰 문제가 없었지만 드래프트에서 탈락한 이전 소속팀 선수들에게 많이 미안했어요. 그 선수들은 졸지에 농구를 그만 둬야 되는 상황에 몰린 거잖아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함께 뛰었던 선수들이 울고불고하는 것을 보니 정말 마음이 아프고 속상했습니다. 동기부여야 개인적으로 마음을 다 잡아야 될 부분이고, 프로라면 어느 팀이든 열심히 뛰는 게 맞죠. 그런 부분보다는 전 소속팀에 대한 배신감과 이전 동료들에 대한 미안함 그런 게 컸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만요.

Q.2001년에 현역 은퇴를 선언하셨어요. 다소 빨랐다는 얘기도 많았어요.
저는 훈련량, 운동량을 많이 가져가는 선수 중 1명이었던지라 몸이 많이 망가져 있던 상태였어요. 플레이 스타일이 워낙 와일드해서 고장난 곳이 참 많았어요. 무릎, 발목, 코뼈 등 수술만 한 7번은 한 것 같아요.

Q.앞으로 계획이 궁금합니다.
비록 BNK에서는 아쉽게 사퇴를 했지만 지도자로서의 열정은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이전에 모자랐던 부분을 복기하고 이것저것 공부하면서 더 나아지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죠. 여전히 WKBL에는 여자 지도자가 더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준비를 더 잘해서 거기에 일조하고 싶습니다.

Q.마지막으로 여전히 선수 유영주를 기억하고 사랑해주시는 팬들에게 인사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많은 인터뷰를 해봤지만 어린 시절부터 선수, 감독 시기까지 아울러 인터뷰한 것은 무척 오랜만이었던 것 같아요. 당시를 회상하는 시간을 가지게 되어서 정말 반갑고 좋았습니다. 지금 선수들처럼 돈은 많이 못 받았지만, 한창 농구 인기가 뜨거웠던 1990년대에 선수로 뛰게 되어서 큰 사랑도 많았고 정말 행복한 시절이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 시절을 함께 해주고 기억해주시는 팬들에게 너무너무 감사한 마음뿐이죠. 지금도 농구 수업하러 가면 부모님들이 알아보세요. 길거리에서 아는 척해주시는 분들도 계시고요. 하나하나가 저에게 큰 축복이라는 것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여전히 저는 농구인인지라 지도자 유영주로서도 열심히 노력할 예정입니다. 지켜봐 주시고 응원해주시면 힘껏 달려보겠습니다. 모두 건강하세요. 사랑합니다.

#글_김종수 칼럼니스트
#사진_점프볼DB, 본인, WKBL 제공

◇ 필자는 농구대잔치 시절부터 농구를 사랑하던 오랜 팬으로 2002-2003년 본지에 농구 무협소설 '해동전설(海東傳說)'을 연재한 바 있으며 데일리안, 홀로스, 올레, 오마이뉴스 등 다양한 인터넷 매체에서 스포츠 객원기자로 활동한바 있다. [김종수의 농구人터뷰]를 통해 전현직 농구인들의 이야기를 다양한 시각으로 다룰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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