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풍과의 경쟁요? 다른 곳에서 해법을 찾았죠”

김종수 칼럼니스트 / 기사승인 : 2022-01-25 00:5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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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수의 농구人터뷰(21)] '임내쉬' 임재현

 

’극과 극을 달렸던 남자!‘ KBL의 한시대를 풍미한 가드 임재현(45‧182cm)에게 종종 붙는 평가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농구선수로서 천당과 지옥(?)을 모두 맛본 남자 중 하나다. 부진한 경기력으로 인해 한창 슬럼프에 빠져 있을 때는 그야말로 엄청난 비난에 시달려야 했으며, 이후 언제 그랬냐는 듯 자신만의 확실한 플레이 스타일로 재도약에 성공하자 이전의 이미지는 온데간데없이 이른바 ’완소남‘으로 거듭났다. 그에게 따라붙었던 ’임봉사‘와 ’임내쉬‘라는 완전히 다른 뜻의 두 별명이 이를 입증한다.


정규리그 통산 625경기 출전, 평균 7.5득점, 2.4리바운드, 3.5어시스트, 1.3스틸의 성적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는 늘 꾸준했다. 이른바 기록표를 두껍게 가져가는 선수는 아니었지만 안정된 공수밸런스를 바탕으로 언제나 자신의 몫 이상을 해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때 과한 비난이 쏟아졌던 배경에는 이른바 ’맞지 않는 옷‘의 영향이 컸다는 분석이다.


농구의 5개 포지션 중 신장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는 쪽을 물어보면 센터라고 답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아무리 기량이 좋아도 사이즈가 일정 수준 이상 되지 않으면 빅맨 포지션을 맡을 수 없다. 어떤 면에서는 포인트가드 역시 그런 성향이 강하다. 1번 포지션은 주전 중 가장 신장이 작은 선수가 맡는 경우가 많다.


각종 테크닉을 갖춘 상태에서 볼 컨트롤이 우수하고 시야까지 넓은 선수가 적임자지만 이른바 신장 문제로 포인트가드를 덥석 맡아버리게 된 선수도 적지 않다. 갈수록 포지션별로 장신화가 이뤄지는 시점에서 180cm 안팎의 선수가 맡을 수 있는 자리는 사실상 1번 외에는 없다. 정통포인트가드가 적어지고 공격형 듀얼가드가 많아지는 추세에는 이런 영향도 없지 않다는 평가다.


임재현도 신장만 놓고 봤을 때는 딱 1번이 맞는 선수다. 그리고 실제로 대학 때까지 포인트가드로 또래 중 랭킹 1, 2위를 다퉜다. 적어도 맞지 않는 옷의 영향이 아마 때까지는 드러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프로에서는 약점이 많이 드러났다. 스피드, 체력, 슈팅, 패싱능력 등 하나하나 따지고 보면 나쁘지 않았지만 시야, 볼간수 능력 등 단점이 더 두드러졌고 본의 아니게 혼자 팀 리딩을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 자주 발생하며 비난의 표적이 되고말았다. 그러한 상황이 반복되다보니 심리적으로 흔들리며 잘하는 부분까지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진작부터 ’신장과 관계없이 2번으로 쓰면 더 잘할 선수다‘는 평가도 있었지만 주전급 1번 이미지가 강한 임재현을 2번으로 쓰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한 임재현의 사용법을 과감하게 바꾼 감독이 있었으니 당시 KCC 허재 감독이었다. 허감독은 임재현을 주전급 식스맨으로 보직변경을 했고 리딩보다는 단순하게 수비와 슛에 집중시켰다.


이는 결과적으로 신의 한수가 됐다. 리딩부담을 벗어버린 임재현은 수비시에는 신명호, 강병현 등과 함께 KCC의 앞선 질식수비를 책임졌고 공격에서는 내외곽을 오가며 순도 높은 결정력을 보여줬다. 1번 출신 답게 보조리딩도 우수했다. 베테랑으로서의 풍부한 경험을 앞세워 매 순간 자신이 무엇을 해야할지 잘 알았고 젊은 선수 위주였던 팀에 2% 부족했던 관록을 책임졌다.


어쨌거나 임재현은 중앙대 무적시대를 이끌던 당시 쏟아졌던 ’제2의 이상민‘이라는 평가에는 살짝 못미쳤지만, 선수로서 2회 우승을 이끌고 코치로서도 1회 우승을 경험하는 등 성공적으로 선수 커리어를 마쳤다. 현재는 선수 시절의 다양한 경험을 살려 모교인 배재고등학교에서 후배들을 가르치고 있다.
 

 

Q.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오리온에서 나와서 현재는 배재고등학교에서 코치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 횟수로 2년 정도 된 것 같아요. 예전에는 아마추어 농구는 생각하지 못했었는데 후원회, 동문회 등에서 모교출신이 맡아주면 좋겠다는 말이 나와서 맡게 되었습니다. 한참동안 성적이 많이 안좋았어요. 배재 출신으로서 아무래도 신경이 쓰이더라고요. 저 이후로는 배재 출신 중에 팬들이 이름을 많이 들어본 듯한 선수가 전혀 배출되지 못했거든요.

Q.부임전 모교 성적이 어느 정도로 안좋았나요?
제가 오기전에 5년 동안 매년 1승을 올리기도 쉽지않았어요. 심각한 일이죠. 오죽하면 대회 대진표 같은 것 짜게되면 상대팀에서 ’배재걸려라, 배재걸려라’그랬다고 하더라고요. 웃픈현실이죠. 처음 부임하자마자 고3 올라가는 선수를 만났는데 1학년때부터 16강 기록이 없어요. 대학원서를 써야하는데 팀성적 기록이 없으니까 매우 어려웠던 기억이 납니다. 최종적으로 명지대, 조선대에 한명씩은 갔지만 이래저래 아쉬움이 남았어요. 코로나까지 터져서 시합도 확 줄어버리니까 뭔가를 보여줘야 했던 선수들 입장에서는 난감하게 된거죠. 다행히 지난해 대회가 열려서 16강도 2번 들었고, 조금씩 변화가 생기고 있습니다. 지난 것은 잊고 제가 열심히 가르쳐서 더 나은 방향으로 가는 수 밖에 없겠죠.

Q.제자들에게 가장 강조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처음에는 농구만 가르치면 되는줄 알았는데요. 그게 아니더라고요. 생각했던 것과 달라서 처음에는 살짝 당황스럽기도 했어요. 컴퓨터, 행정일, 예산안 짜는 것은 물론 아이들이 수업을 제대로 들어가고 있나? 확인하기 등 외적으로 할 일이 정말 많아요. 농구코치+체육 선생님인거죠. 아이들 등교부터 하교하는 것까지 책임져야 되요. 그러다보니 선생님 입장에서 예의범절, 인성교육 등에도 신경을 많이 쓰고 있습니다. 일단 농구 못하는 것은 크게 터치하지 않아요. 농구에 임하는 태도, 훈련 자세 등을 먼저보죠. 학생마다 적응기간, 재능 등이 다른데 단순히 잘한다 못한다로 평가는 못하잖아요. 단 열심히 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엄하게 하려고해요. 더불어 학교생활도 잘해야 농구도 할 수 있다고 강조하고 있어요. 어찌보면 농구선수 이전에 일반 학생이잖아요. 수업도 잘 안들어가고 거칠고 등등 운동하는 친구들에 대해서 좋지않은 선입견이 있는데 그런 부분을 많이 뜯어고쳤어요. 내신이 중요하기 때문에 이제는 공부도 어느정도 해야 되고 출석도 중요해요.

Q.오리온 시절 추일승 전감독과 함께하며 지도자로서의 자세나 방향 등에 대해 많이 배우고 영향을 받았다고 들었습니다.
정말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당시 3년동안 추감독님과 함께하면서 쌓은 경험이나 공부 등이 없었으면 여러 가지로 미숙했을거에요. 현재 모교에서 지도자 생활을 하면서도 더 힘들었을 것 같고요. 추감독님께 지도자로서의 자세, 제자들을 바라보는 시선과 마인드 등을 많이 배울 수 있었어요. 농구선수 경력과 별개로 선생님 입장에서 제자들을 가르키는 것은 또 다른 영역이거든요. 눈높이도 맞춰야되고 아이들 마음도 어루만질줄 알아야되고요. 당시 추감독님의 기록하는 습관이 참 인상적이었어요. 저한테 시키지는 않았지만 저도 옆에서 보고 따라서 일지도 적고 이것저것 기록하고 했던 것이 큰 자양분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습관은 배워야죠.

 

 

“어릴때부터 뛰는 것 하나는 잘했습니다. 브레이크가 안걸릴 만큼”

Q.농구를 시작하게 된 동기가 궁금합니다.

어릴때부터 운동 자체를 좋아했어요. 동네에서 친구들이랑 야구, 축구같은 것을 해도 잘하는 편이었고요. 학교에서도 체육대회 같은 것하면 선두에서 함께 했고 그랬어요. 지금이야 재능있는 선수들을 일찍 발굴하는 편이지만 당시에는 정보망이 좁아서 어떤 쪽에 소질이 있어도 쉬이 알려지거나 키워내기가 쉽지 않았어요. 저같은 경우는 운이 좋았죠. 마침 제가 다니던 초등학교에 농구부가 있었어요. 특별활동인줄 알고 5학년때 무심하게 들어갔는데 알고보니 전문적으로 엘리트농구를 하던 곳이었던거죠. 사실 당시에 농구가 인기가 없었어요. 많이 접해보지않아서 더 호기심이 끌렸고 운동장이 아닌 마루바닥에서 하는 것도 신기하더라고요. 일차적으로 거기서 매력을 느꼈죠. 처음에는 기본기 잡는다고 혼도 많이 나고 했는데 농구가 싫다거나, 그만해야겠다는 생각은 안했던 같아요.

Q.처음부터 가드 포지션을 맡으셨나요?
저야 처음부터 작은 편이었어요. 신장빨은 기대하기 어려운 대신 볼재간이나 순발력 등이 있으니까 자의반타의반으로 쭉 가드를 할 수 밖에 없었죠. 지금 생각해도 뛰어다니는 것 하나는 잘했던 것 같아요. 사실상 유일한 경쟁력이었으니까요.

Q.신기성 해설위원도 학창시절부터 발이 무척 빨랐다고 하던데 코치님도 또래 중에서 스피드가 돋보였을 것 같아요.
선수생활 내내 뛰는 것 하나는 자신이 있었는데 나중에 커서 프로에 가서보니 빠르다고 다 좋은 것은 아니더라고요.(웃음) 빨리 할 때와 느리게 할 때를 구분해서 템포 조절도 하고 그래야했는데 한동안은 야생마처럼 그냥 주구장창 뛰어만다녔죠. (신)기성이형 같은 경우 워낙 유명했어요. 송도고등학교 시절부터 잘한다고 소문이 나서 저에게는 ‘아, 나도 저형같이 되고싶다’고 느끼게한 동경하는 그런 대상이었죠. 2년 선배였으니까요.

Q.조우현, 황진원, 송영진, 김주성 등과 함께 중앙대 전성시대를 열었습니다. 당시 멤버들은 지금봐도 정말 역대급으로 빨랐던 것 같아요.
그렇죠. 멤버가 완전히 갖춰진 다음에는 전관왕도 하는등 패하는게 낯설었을 정도니까요. 물론 저야 잘하는 선수들한테 묻어갔지만요.(웃음) 제가 동료복이 많았죠. 지금 생각해도 그 정도 선수들이 한꺼번에 모이기는 정말 쉽지 않아보이거든요. 지난번 송영진 선수 인터뷰 글도 봤는데, 거기서도 나와있다시피 당시 송영진, 김주성의 트윈타워는 높이도 높이지만 정말 빨랐거든요. 스피드만 놓고보면 그보다 더 빠른 토종 트윈타워가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요. 거기에 저나 (조)우현이형 (황)진원이 등도 각자의 포지션에서 빠른축에 속했죠. 속공상황에서 굉장한 위력을 발휘했던 것 같아요.

 

 

“(김)승현이의 대범함이 부러웠어요”

Q.2000년 드래프트에서 전체 2번으로 SK에 입단했습니다. 1순위에 대한 아쉬움은 없었을까요?

프로에 오는 선수라면 누구나 마찬가지였을거에요. 전체 1순위라는 타이틀이 얼마나 영광이에요. 속으로는 전체 1순위를 하고싶은 마음도 솔직히 있었죠. 하지만 삼성에는 주희정이라는 걸출한 가드가 있었으니까 어렵겠다고 생각했어요. 드래프트 현장에서도 그런 분위기를 느꼈고요. 만약 SK에 1순위가 걸렸다면 제가 전체 1번을 차지할 가능성도 있었겠죠. 인생은 타이밍이라는 말이 딱 맞는 것 같아요. 어쨌든 그런 아쉬움은 있었지만 2순위만해도 얼마나 대단해요. 지금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쟁쟁한 동기들 사이에서 1, 2순위를 다퉜다는 것은 가문의 영광아닐까요.(웃음)

Q.농구선수로서의 임재현은 어떤 성향이었을까요?
지난 시절을 돌이켜 생각해보면 제가 고참때 잘하는 스타일이더라고요. 성격이 내성적이고 소심한 부분도 있고 그러다보니까 선배들을 막 뿌리치면서 전체를 지휘하고 그런 성향은 못되요. 제가 고참이 되면 그런 부담도 어느 정도는 사라지니까 적응을 해가면서 완숙한 플레이가 나오는 것 같아요. SK때도 생각해보면, 딱 팀에 입단하니까 서장훈, 조상현, 로데릭 하니발, 재키 존스 등 쟁쟁한 멤버들이 버티고있는거에요. 신인 입장에서 주눅이 들더라고요. 제 컬러를 많이 가지고 나가야 되는데 형들 입맛에 맞게 플레이하다 보니까 발전이 더디었지않나 싶어요. 사실 1번이라면 그런 것들을 이겨내고 과감하게 하는 모습도 필요했는데 아무래도 개인적인 성향이 그러지를 못했던 것 같아요. 대학교 때부터 워낙 잘하는 선수들이 많으니까 맞춰줄 수밖에 없었어요. 혹시 다른 팀에 가서 제 위주로 했다면 상황이 달랐을 수도 있었겠죠. 하지만 제가 그 선수들을 뛰어넘거나 장악을 할 수 있던 능력이 부족했다고 보는게 맞을거에요. 포인트가드가 착하다는 소리를 많이 들으면 안되는데 본의 아니게 착하다는 소리만 많이 들어버렸네요.(웃음)

Q.포인트가드는 뻔뻔한 필요도 있을 것 같아요.
맞습니다. 1번은 뻔뻔할 필요가 있어요. 아무리 대선배가 공을 달라고해도 스스로 판단해서 아니다싶으면 안줄 수도 있는거죠. 끝나고나서 ‘죄송합니다’라면 되는데, 저는 그런 부분이 부족했던 것 같아요. 장악력이 필요하죠. 1년 후배 (김)승현이가 그런 플레이를 참 잘했어요. 스스로 판단해서 과감하게 판단하고 결정하는. 대학교 때까지는 개인적으로 승현이에게 밀린다거나 졌던 기억이 안나거든요. 하지만 프로에 와서는 선배도 많고, 외국인 선수도 있고…, 그런 환경을 승현이가 훨씬 더 잘 이용하고 적응도 잘했어요. 승현이의 그런 대담함, 자신감 그런 부분이 참 부러웠어요. 프로에 와서는 격차가 확 벌어져버렸죠.

Q.특유의 스피드는 프로에서도 통했습니다. 신기성에게 공을 빼앗기고 다시 쫓아가서 빼앗아오던 장면이 생각납니다.
그런 일이 있었나요? 저는 기억은 잘나지 않습니다. 제 플레이 스타일상 뺐고 빼앗는 경기가 워낙 많았잖아요. 아마도 그런 그림은 기성이형 뿐만아니라 다른 선수들에게도 종종 보여줬던 것 같아요. 제가 좀 스피드를 제어못하고 우당탕탕 했죠.

Q.1번으로서 아쉬움의 목소리도 많았는데요. 기본적으로 탄탄한 체력과 빠른 스피드에 수비도 나쁘지 않았고 슛까지 좋았는데, 무엇이 문제였을까요?
사실 제가 정통포인트가드가 아니었어요. ‘제2의 이상민’이라는 평가(기대치?) 혹은 일부의 모습만 보고 당연히 정통 포인트가드로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았는데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사실상 공격적인 농구를 즐겼어요. 코트에 나서면 슛쏘고 돌파하고 거의 그런 플레이였어요. 슈팅가드는 물론이거니와 3번에 가까운 스윙맨 플레이도 했으니까요. 그러다가 중앙대에 와서 포인트가드로 정착한거죠. 선택의 여지도 없었어요. 워낙에 해당 포지션에 좋은 선수들이 탄탄하니까, 저는 1번을 해야했던거죠. 대학교 때도 빠른 농구에 익숙하다보니 프로에 와서는 독이된 부분도 있어요. 잘달리고 빠르기는 했지만 스톱을 잘못하던 스타일?(웃음) 나중에 알았죠. 멈추거나 속도를 줄이는 것도 기술이라는것을요. 그래도 해왔던게 그러다보니까 조절이 힘들더라고요. 고등학교 때까지 리딩, 패싱플레이 등에 좀 더 신경을 쓰고 배웠어야하는데 그렇지 못했어요. 당시에는 구태여 그런 것 신경쓰지 않고 공잡고 직접 득점해버리면 됐으니까요.

 

 

Q.압박 수비에 약한 모습을 자주 노출했습니다. 평소에는 잘하다가도 상대가 강하게 붙으면 실책을 저지르거나 공을 빼앗겼어요. 심리적인 문제였을까요? 아니면 드리블이 불안정해서였을까요?
예전부터 인터뷰를 종종하기는 했지만, 확실히 이번 인터뷰는 재미있습니다. 저의 플레이 스타일에 대해 이렇게 집요하게 파고드는 인터뷰는 처음입니다. 거기까지는 생각을 안했거나 아니면 제 눈치를 봐서 그랬을지는 모르겠지만 기자님 인터뷰는 좀 신선하기는 하네요.(웃음) 압박수비가 강하게 붙다보면 공을 빼앗기는 경우가 자주 있기는 했어요. 드리블 문제는 아니었을거에요. 젊고 체력까지 좋고 가드로서 쭉 뛰어왔는데 드리블 미숙으로 공을 빼앗기겠어요. 순간 순간의 판단 미스라던지 자세가 높아서 중심이 무너져서 뺏긴다던지 그런 경우가 있었어요. 더불어 쉽게 농구하면 되는데 그런게 좀 부족했던 것 같아요. 솔직히 말해서 어떤 선수도 강하게 압박이 들어오면 공을 간수하기가 쉽지않아요. 그럴 경우 일단 동료에게 패스를 하고 다시 받아서 플레이하면 되는데 고집스럽게 혼자 몰고가다가 자초한 부분도 있었죠. 좀 영리하게 플레이해야 되는데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왜 그랬나 싶기도 해요. 저돌적인 성향은 있었는데, 너무 한가지만 봤지않나 싶어요. 하나의 임무를 맡으면 우직스럽게 끝까지 수행하려는 성향이 강했죠. 압박수비 등에 대해 더 생각을 많이하고 조절이 필요했는데…, 그건 인정합니다. 그런 부분이 많이 부족했어요.

Q.진작에 초월하셨겠지만 ‘임봉사‘라는 별명이 붙었을 무렵에는 심리적으로 많이 힘들었을 것 같아요.
거기에 대해 별다른 감정은 지금은 없어요. 전현직 잘나가는 가드 중에서도 변변한 별명 하나없이 은퇴한 선수도 수두룩하지 않나요. 어쨌거나 저는 그런 별명이라도 있었다는 점에서 만족해요. 다른 선수들은 그런 별명을 못붙여봤잖아요.(웃음) 그것도 팬분들 입장에서는 관심의 표현이었겠지요. 솔직히 지금이야 좋게 생각할 수 있지만 그때는 살짝 마음이 아픈 부분도 분명히 있었죠. 전날 경기를 이겼는데도 와이프가 ‘오빠, 뉴스에 있는 댓글창 보지마’라고 말할 때도 적지 않았으니까요. 저보다는 가까운 이들에게 상처를 주는게 아닌가 싶어서 미안할 때도 있었어요. 하지만 저를 진짜 아끼고 응원해주시는 팬분들은 그렇게 하지않으셨어요. 소속팀 팬들이 많이 감싸주셨죠. 다른팀 팬분들께서, 제가 좀 얄밉게 잘하고 그럴 때도 있으니까 그런 반응도 나오지 않았을까 싶어요. SK시절에 멤버에 비해 좀처럼 성적이 안나던 시절이 있었거든요. 그러다보니 선수들에 대해서 온갖 안좋은 별명이 쏟아졌어요. 예를 들면 방성윤은 ‘방난사’라고 불렸잖아요. 저만 특별했던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해요.

“이제 나의 시대다 생각했는데 전태풍이 팀에 들어왔어요”

Q.FA때 전주 KCC로 갔는데 그때 이상민 선배가 팀을 떠나야 되는 상황이 발생해버려 본의 아니게 비난의 화살을 받기도 했어요.

솔직히 억울한 부분도 있었죠. 트레이드도 아니고 FA자격을 얻고 KCC로 오고 싶어서 온 것인데 너무 많은 비난이 쏟아져서 적지않게 당황했어요. 이상민 선배는 (서)장훈이형이 오는 과정에서 삼성과 관련해서 보상선수가 간 것이잖아요. 그런데 역풍은 제가 다 맞았죠. 이상민 선배의 팬들이 워낙 많았잖아요. 프랜차이즈를 떠나보내야하는 여러 가지 아쉬움이 저에게 쏟아진 듯 싶어요. 오죽하면 KCC팬들 조차 제가 볼을 잡으면 ‘우~’하고 야유를 보낼 정도였으니까요. 한 일년 정도는 계속해서 시달렸던 것 같아요. 스트레스도 많이 받고 이래저래 힘들었습니다. KCC가 전시즌에 최하위 성적을 거뒀어요. 그러다가 저랑 장훈이형이랑 오고나서 준우승을 했어요. 그런데도 팬분들께서 만족을 못하시더라고요. ‘아, 이렇게해도 미움을 받는다면 나는 어쩌면 좋지’하는 생각에 한참 동안은 멘붕에 빠졌던 것 같아요. 그래도 어쩌겠어요. 마냥 넋놓고 있으면 안되잖아요.

Q.실력으로 비난을 이겨내셨어요.
어떻게하면 명예회복을 할까 고민하는 것도 사치일 것 같아서 일단 체력을 기르려고 이후 1시즌 동안 정말 열심히 운동했던 것 같아요. 당시 집이 분당이었는데 KCC체육관까지 4~5개월동안 자전거를 타고 이동했고 신혼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개인훈련까지 죽어라 했어요. 그러다보니 자신감이 생기고 예전에 좋았을 때의 폼도 올라오더라고요. 결국 제 개인적으로도 좋은 성적이 났고 KCC도 우승을 했잖아요. 최상의 결과가 났던거죠. ‘이제는 내 시대가 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변수가 생겼어요. 전태풍이라는 걸출한 선수가 팀에 들어온거죠.

Q.적지않게 당황스러웠을 것 같아요. 당시 전태풍은 국내최고 1번들도 떨게 만들었던 거물 가드였잖아요.
팀을 위해서는 잘된 일이지만 개인적으로는 당황스러운 부분도 있었죠. 1년 동안 마음고생하다가 성적도 내고 팬 분들도 이제는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봐주시더라고요. 봉사 이미지도 다 털어낸 상태에서 ‘이제 꽃길만 걷자’ 했는데 국가대표급 기량을 가진 가드가 떡하니 팀에 합류한거죠. ‘내가 설자리가 어디있을까’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경쟁을 하면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당시 전태풍의 개인 능력은 더 이상 설명이 필요없는 수준이었잖아요. 명성도 명성이지만 팀에서 함께 훈련하면서 보니까 놀라운 개인기에 저 스스로부터가 인정하고 들어가게 되더라고요. 파워풀하고 현란한 드리블만 보더라도 국내 선수와는 또다른 스타일의 강자라고 바로 알 수 있었죠. 달리 ‘앵클 브레이커’라는 말이 붙었겠어요.


Q.그래도 방법은 있었던거죠?
그렇죠.(웃음) 언제나 그렇지만 베테랑이 달리 베테랑이겠습니까. 베테랑은 늘 살길을 찾아내는 습성이 있죠. 결혼한지도 얼마 안되었고 스스로도 제2의 전성기를 달리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리 대단한 선수가 들어왔다고 하지만 제가 설자리가 없었겠습니까. 어떤 자리에서, 어떤 방식으로 색깔을 드러내느냐가 문제였을 뿐이죠.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전태풍도 약점이 있더라고요. 아니 본인이 하던 스타일의 농구와 KCC의 팀농구와 잘 안맞다고 할까요. 개인기는 탁월한데 (추)승균이형이나 (강)병현이, (하)승진이를 잘 못살려주더라고요. 흥이 날 때 혼자서 신나게 휘젓고 다니지만 자꾸 겉도는 느낌이 들었어요. 5대 5농구를 해야되는데 1대 5농구를 한다는 느낌? 그때 생각했죠. 나는 개인적인 욕심은 버리고 팀동료들에게 많이 맞춰줘야겠구나. 더불어 노장이라는 생각을 버리고 신인의 마음으로 궂은 일도 열심히 해야지 하고 결심하게된거죠. 개인기량으로 전태풍과 경쟁할 수는 없으니 다른 식으로 팀에 공헌하는게 맞다고 생각했어요. 

 

 

Q.그제야 몸에 맞는 옷을 입었던 것일까요?
몸에 맞는 옷이라고 하기에는 변화해야 될 것이 너무 많았죠. 단지 나를 위해 팀을 위해, 함께 해야 되는 농구를 해야 된다고 생각했던거죠. 수비도 그때 많이 늘었어요. 본래부터 못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신)명호가 워낙 당시 수비를 잘했잖아요. 명호와 함께 하면서 수비에 대해 많이 배우게되었어요. 그때 나이가 33~34살때에요. 그때부터는 미친놈처럼 뛰어다녔죠.(웃음) 주전 욕심낼 것도 없더라고요. 어차피 전태풍은 못 잡아먹지만 주전 선수들도 쉬워야 될 때가 있을 것 아니에요. 그렇게 비게 된 시간대에 제가 들어가면 되는것이죠. 1~3번을 모두 백업한다는 마음가짐을 먹었어요. 강병현 백업, 추승균 백업 그리고 전태풍도 풀타임을 뛸수는 없으니까 상황에 따라서 전태풍 백업까지, 그러면 얼마에요. 20여분 가량은 뛸 수 있겠더라고요. 물론 제가 그 시간을 잘 채워줄 수 있다는 전제가 깔려있어야겠지만요. 기껏 그 시간에 백업으로 들어갔다가 어버버해버리면 망하는거죠.

Q.보직변경은 직접 요청하신 것인가요?
딱히 요청한 것도, 감독님께서 그렇게하자고 한것도 아니에요. 자연스럽게 상황이 그렇게 흘러간거죠. 주전이 정해져 가는 상황에서 그 외 선수들 중에 공헌도가 높은 선수가 백업으로서 출장시간을 많이 가져갈 것 아니에요. 열심히 부지런히 하면서 눈도장을 찍었던거죠. 일단 제가 살아남으려면 1, 2, 3번을 모두 해야겠더라고요. 거기에 수비는 기본으로 잘해야하고요. 쓰임새가 많아야 중용받을 것 아니에요. 어쨌든 열심히, 부지런히 이런 쪽은 학창 시절부터 단련이 잘 되어있던 부분인지라 생소하지도 않았어요. 금새 몸에 장착되더라고요. 그렇게함으로서 저한테도 좋은 부분이 많았어요. 포인트가드를 맡아서 치고 넘어오고 볼간수하고 그런 부담이 한결 줄어들었으니까요. 어쨌거나 그렇게 플레이하니까 허재 감독님이나 코치님들도 환영하셨어요. ‘무리 안하지, 실책 적지, 노마크 찬스 오면 꼬박꼬박 슛 넣어주지. 디펜스에서 뚫리지않지’ 어떻게보면 조커가 되어버린거죠. 제가 지도자라고해도 백업이 그렇게하면 더 이상 할말이 없었을 것 같아요.

Q.팬들 사이에서의 이미지도 확 바뀌었을 것 같아요.
그럼요. 그렇게 플레이하니까 전주 팬들도 너무너무 사랑해 주시더라고요. KCC에서 뛰는 7년동안 챔피언결정전을 4번 올라가서 우승을 2번 차지했어요. 저도 거기에 일조했다고 생각하니까 더없이 뿌듯하고 기분좋았죠. 한번은 부상 때문에 두달만에 돌아온 적이 있었는데 복귀 무대에서 보여준 그 함성소리를 지금까지도 잊을 수가 없어요. 잘해도 욕먹고 못하면 더 욕먹던 시절의 부정적인 이미지들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점에서 기쁜마음도 컸어요. 그때 느꼈죠. 팬들은 다소 아쉬운게 있더라도 내가 열심히하면 다시 마음을 주는구나 하는 것을요. 정말 팬들의 성원은 어떤 팀과 비교해도 안꿀리는게 전주 팬들인 것 같아요.

Q.당시 플레이를 보고 있노라니, 신장이 10cm정도만 더 커서 처음부터 2번으로 플레이했더라면 역대급 슈팅가드도 가능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하핫…, 그러면 많이 달라졌을 것 같기도 해요. 어릴 때부터 성향이 2~3번이었는데 더 신바람나서 뛰어다녔겠죠. 하지만 신장도 재능이라고 하잖아요. 키작은 것은 어떻게 늘릴 수도 없는 것이고 주어진 여건에서 롱런했다는 사실에 만족해야죠.

Q.고참임에도 불구하고 출전시간 욕심 없이 궂은일 열심히 하시면서 2차례나 KCC의 우승을 이끌었습니다. 후배들도 잘 다독였다고 들었는데, 당시 ‘KCC의 이모님’으로 불렸던 것 알고 계셨나요?
아, 그랬나요? 잘은 몰랐고요. 간혹 플랭카드 같은 것에서 ‘재현 이모’라는 문구는 봤던 것 같아요. 사실 선수도 사람인지라 출장시간 등에 민감할 수밖에 없잖아요. 특히 한창때 경기도 많이 뛰고 그랬던 고참급 선수들은 후배들에게 밀려 출장시간도 줄고 그러면 우울한 기분도 들고 그렇죠. 하지만 그렇게만 생각하고 있으면 안되죠. 기분 나쁜 표정 짓고 그러면 후배들도 선배 눈치가 보일 것 아니에요. 오히려 고참이 나서서 작전타임 때도 옆에서 경청하고 좋은 플레이 나오면 벤치에서 함께 환호해주고 선수들 들어오면 잘했다고 엉덩이 쳐주고 그러면 팀 분위기가 좋아져요. 팀 경기잖아요. 팀이 이긴다는 것에 기쁜 마음을 가져야죠.

Q.결정적인 상황에서 빅샷도 잘 넣으셨고 자세가 무너진 상태에서도 곧잘 공격을 성공시켰어요. 비결은 무엇이었을까요?
집중력도 있었고요. 이미지 트레이닝도 꾸준히 했던게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싶어요. 예를 들면 자기 전에 ‘이런 상황이 오면 나는 이렇게 해야지’라는 등의 그림을 머릿 속으로 종종 그려봐요. 갑자기 들이닥치는 것보다는 한번씩 생각을 해보는 쪽이 같은 상황이 왔을 때 플레이에 영향도 주거든요. 평상시 습관들이 좋은 쪽으로 작용한 케이스 같아요. 더불어 중고등학교때 에이스 역할을 많이 해봐서, 중요한 순간에 해결사로 나서고 그런 플레이가 낯설지 않았던 부분도 있었죠. 몸으로 경험한 것+이미지 트레이닝을 통한 간접 경험의 결과가 아닐까 싶어요. 클러치 상황에서는 실력도 중요하지만 배포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성향상 팀을 장악하는 배포는 없었지만 결정적인 순간 쫄지않고 넣는 것은 자신이 있었거든요.

Q.함께 해본 허재 감독님은 어떤 분이셨나요?
굵직굵직하게 큰틀을 잘 잡아주세요. 감독님께서 뼈대를 잡아주시면 저나 추승균 선배, 병현이 등이 디테일하게 거기에 살도 붙여가면서 플레이했죠. 고참선수들에게는 특별한 것 아니면 많이 풀어주시고 유하게 대해주세요. 대신 신인급이나 젊은 선수들에게는 엄하실 때도 종종 있으셨어요. 한데 잘 생각해야 될 것이, 감독님이 일명 레이저 쏜다고 하잖아요. 그 눈빛 맞을때가 좋은거에요. 잘 알려진 것처럼 감독님은 본인이 키워보고 싶은 선수에게 유독 레이저를 많이 발사하세요. 감독님께 많이 혼난다는 것은 그만큼 신뢰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면 맞는 것이죠. 그래서 후배들한테도 그런 얘기를 종종 했어요. ‘감독님이 너 혼내는 것은 그만큼 관심이 있어서 그러는 것이니까, 지금이 기회야. 열심히 해봐’라고요.

Q.함께 뛰었던 외국인선수 중에서 기억에 남는 선수로는 누가 있을까요?
SK시절에 2번째 시즌을 함께 했던 에릭 마틴이라는 선수가 가장 기억에 많이 남아요. 당시에 제가 감독, 코치님에 선배님들에게까지 이른바 꾸사리를 좀 먹었는데 그럴 때마다 마틴이 다가와 격려도 해주는 등 마음을 많이 다독여줬어요. ‘걱정하지 말고 픽앤롤이든 뭐든 하고싶은 것 해봐. 내가 다 받아줄께’라고 말해주는데 얼마나 고마워요. 외국인 선수가 팀내 신인급 선수를 케어해준 것이죠. 따뜻한 형님같은 느낌도 들고 든든했어요. 내향적인 성향인데다 나이도 어려서 감정표출도 제대로 못하던 시절, 정말 큰힘이 되어준 고마운 선수입니다.

 


“러브스토리는 지금도 진행 중입니다“

Q.2007년 6월에 결혼한 아내 분과의 비하인드 스토리가 당시 유명했어요. 호감을 가지고 다가가기 시작할 무렵 두달동안 무려 30회 이상 차였다면서요?

하핫…, 지인을 통해서 알게 된 친구인데 처음부터 사귈 수는 없잖아요. 연애도 아닌 오빠 동생으로 지내다가 장난스레 ‘너 나랑 사귈래’ 던져봤더니 아니라 다를까 ‘뭔 소리야?’라고 반응하더라고요. 그것부터 해서 중간중간 진심을 담아서도 말해봤는데 쉽지 않더라고요. 그게 횟수로 두달 동안 30번은 됐던 것 같아요. 이틀에 한번은 말을 했으니까요. 그러다가 한번은 전화를 해서 농구선수 임재현이 아닌 인간 임재현으로서의 이런저런 얘기를 털어놓았어요. 어떻게 성장했고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고 등등 제가 할 수 있는 진심은 다 털어놓았죠. 그랬더니 그때 마음을 받아주더라고요. 그렇게 3년을 연애하고 결혼까지 가게 됐죠. 어릴 때라 그런지 당시에는 술도 잘먹고 노는 것도 좋아했어요. 그런 저의 모습이 처음에는 다소 못미더웠을거에요. 진심을 털어놓은 것이 터닝 포인트였죠.

Q.이후에는 둘도 없는 잉꼬부부가 되셨어요. 지금도 여전히 러브스토리는 진행중이시죠?
그렇죠. 이제 결혼한지 15년차에 접어드는데 지금도 서로 아끼고 잘 지내고 있어요. 제가 운동에만 집중할 수 있게 내조도 잘해줬고 덕분에 늦게까지 선수생활이 가능했던 것 같아요. 늘 마음 편하게 해줬던 친구같고 연인같고 그런 소중한 사람이에요.

Q.자녀는 어떻게되며, 운동을 하고 있는지도 궁금합니다.
아들만 둘이고요. 첫째는 중학교 2학년 올라가고 둘째는 초등학교 2학년 올라가요. 첫째는 배재중학교에서 야구를 하고 있어요. 운동 자체를 좋아해서 유소년 야구 좀 하다가 의욕을 더 보이기에 엘리트 야구 쪽에 발은 들여놓은 상태에요. 스트레스 안받고 즐겁게 했으면 좋겠어요. 잘되면 그 길로 가는 것이고요. 안되면 플랜B로 가면되죠. 운동을 하는 자체가 곤욕이 아닌 행복이 되었으면 하는게 아빠로서의 바램이에요. 둘째 같은 경우는 특별한 계기? 그런 것이 없다면 어지간하면 운동을 안시키려고해요. 너무 힘든 길이라는 것을 제가 많이 느끼고 살았으니까요.

Q.마지막으로 여전히 선수 임재현을 기억하고 사랑해주시는 팬분들에게 인사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팬분들 생각하면 감사하다는 생각 밖에 들지않습니다. 선수 생활을 하면서 느끼는 행복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팬들의 사랑도 빼놓을 수 없겠죠. 제가 농구를 안했으면 어디가서 그런 큰 사랑을 받고 환호를 들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렇게 만들어주셨던 존재가 바로 팬분들이시고, 지금까지도 좋은 추억 속에서 살고있습니다. 기대치만큼 많이 잘하지는 못했지만 늘 성실하고 꾸준했던 선수로 기억해주세요. 앞으로도 그런 자세로 살아가겠습니다.

#글_김종수 칼럼니스트

​#사진_본인, KBL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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