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수의 농구人터뷰⑦] ‘스마일 슈터’ 김훈 “농구를 잘하는 것보다 즐기는 것이 먼저입니다”

점프볼 기자 / 기사승인 : 2021-10-12 00:5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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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없이 강한 남자! 한 시대를 풍미했던 꾸준함의 대명사 추승균 해설위원의 선수 시절 별명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추 위원과 별명은 그다지 어울리지 않게 됐다. 비록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인기 스타까지는 아니었지만 선수로서 통산 5회 우승을 경험한 것을 비롯해 오랜 시간 현역을 이어가며 누적기록까지 묵직하게 쌓았다. 최근에는 해설위원으로 입담까지 뽐내며 ‘소리 있는 남자(?)’가 되어가고 있다.

 

외려 ‘소리 없이 강한 남자‘에는 연세대 시절과 프로 초창기에 알토란 같은 활약을 펼쳤던 김훈(48‧190cm)도 곧잘 어울린다. 워낙 슈퍼스타들과 함께 한적이 많은지라 상대적으로 묻힌 감도 있지만 공수를 겸비한 포워드로서 묵묵히 제 몫을 해내며 팀에 없어서는 안될 살림꾼으로 불렸고 훈남 이미지로 인해 인기 또한 상당했다. 1인자만 아니었을 뿐 기량, 인기 등에서 꾸준한 존재감을 보여왔다.

 

김훈은 선수비‧후공격의 임무를 맡으면서도 준수한 프로 성적을 남겼다. 정규리그 12시즌 동안 382경기를 뛰며 평균 9점 1.7리바운드 1.3어시스트를 기록했다. 계속된 부상으로 말미암아 2003~2004시즌부터 4점 이하로 평균 기록이 곤두박질 친 것을 감안했을 때 조금만 더 건강했다면 두자릿수 득점도 충분히 가능했을 것이다는 평가다. 실제로 첫 다섯 시즌 동안 두자릿수 득점을 기록한 시즌이 4번이나 된다. 플레이오프에서는 평균 11.3점으로 큰 경기에 강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현역 시절 김훈은 쇼맨십이 좋거나 눈에 띄게 개성을 드러내는 선수는 아니었다. 말수도 많지 않고 감정 표현도 적극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늘 환한 얼굴로 미소를 짓는 모습에 그를 좋아하는 팬들도 상당했고 어느덧 ’스마일 슈터‘라는 별명까지 붙게 됐다. 최고는 아니었을지 몰라도 늘 최선을 다해 코트를 누볐던 꾸준한 존재감의 농구인 김훈, 그의 농구 이야기 속으로 <농구人터뷰>가 함께 들어가 보았다.

 

없어져야 될 체벌문화, 즐기면서 성장해야 한다

 

은퇴 후 어떻게 지내셨나요?

-창원 LG 세이커스에서 유소년 총감독을 했었고, 이후 2009년부터 수원에서 농구 교실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뛰었던 팀이 LG인데 발목부상으로 인해 계약 기간을 다 채우지 못했어요. 그런 가운데 기회가 닿아 겸사겸사 유소년 총감독을 하게 되었고 그때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기쁨을 알게 된 것 같아요.

 

처음에는 아이들을 가르치는데 크게 의지가 없었다고 들었어요.

-솔직히 말씀 드릴께요. 의지가 없었다기보다는 그래도 제가 프로선수였는데 초등학생 그것도 엘리트반도 아니고 일반 학생들을 가르친다는 것이 당시에는 큰 동기부여가 되지 못했어요. 다들 오해할 수도 있는 말 같은데요. 당시에는 프로 물을 먹은 선수는 그래도 선수를 목표로하는 엘리트반을 가르쳐야 된다는게 일반적인 인식이었어요. 때문에 저 역시 일반 학생들을 가르치게 될 줄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거든요. 뭐, 저 잘난 맛에 살았다고 할 수 있죠. 주변에서 들려오는 말도 솔직히 스트레스였어요. ‘왜 거기서 그러고 있냐? 감독, 코치를 해야지’ 등등 주변의 오지랖까지 더해지게 되니까, 생기려던 의욕도 뚝뚝 떨어지더라구요. 한편으로는 ‘내가 하는 일이 왜? 어때서?’라는 반발도 생겼지만, 어쨌거나 이래저래 스트레스로 작용 했던 것 같아요. 주변에서 ‘요즘 뭐하고 지내?’라는 말만 들어도 머리가 아플 정도였어요. 당시에는 프로 선수 출신이 그런 일을 한다는 것은 ‘오죽 할 것이 없으면 거기까지 떨어졌어’라고 생각하는 잘못된 인식들이 존재했던 것 같습니다. 물론 그런 말에 흔들렸던 저도 문제가 있었고 반성할 부분이죠.

 

지금은 만족하시죠?

-그럼요. 그렇게 잘못된 편견을 가지고 쭈욱 있었다면 아이들 가르치는 일은 할 수 없죠. 자격도 없구요. 지금은 엘리트 중심 운동 보다는 즐기면서 할 수 있는 스포츠 쪽으로 흐름이 바뀌어 가고 있잖아요. 사실 어린 학생들에게는 그게 맞는 것 같기도 해요. 일단 해당 종목에 애정이 생기려면 본인이 즐거워야 하잖아요. 초등학생 같은 경우 공부를 병행하면서 재능, 적성 등을 체크해 볼 수도 있구요. 무턱대고 선수부 운동 쪽으로 뛰어들다가는 자칫 생각대로 안되었을 때 곤란한 경우도 생깁니다. 다른 나라들 같은 경우 유소년, 생활체육 이런 쪽으로 많이 가잖아요.

승패에 관계 없이 즐길 수 있는 방향을 찾았던 것이 가장 큰 소득같아요. 저희 때는 즐길 수가 없었어요. 승패에 관한 스트레스, 넘치는 승부욕 이런 것은 제쳐두고서라도 체벌도 엄청 심했죠. 예전에 운동했던 분들 이야기 들어보면 ‘맞기 싫어서 도망갔다’, ‘운동보다 체벌이 더 힘들었다’는 말도 많이 하시잖아요. 그렇게 맞고 기합받고 그러다보니 해당 종목에 애정이 생기겠어요? 그냥 쭉 하던 것이고 여기서 그만두면 너무 억울해지니까 이를 악물고 버틸 때가 많았죠.

 

체벌문화에 아쉬움이 많으신 것 같아요.

-농구를 배울 때도 그랬지만 유소년을 가르치다 보니까 체벌문화는 정말 없어져야 하는 악습같아요. 지도자로서 잘되라는 마음으로 엄하게 가르칠 수는 있어요. 하지만 저희 때는 체벌을 위한 체벌이 존재했어요. ‘도대체 왜 맞아야되지?’하는 순간도 많았고, 나중에는 아예 무감각해져서 체벌을 가하는 사람이나 당하는 사람이나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가게 되는 당연함으로 쌓이게 된 것 같아요. 그렇게 성장한 선수가 진짜로 농구가 즐거울 수 있겠냐라는 생각도 들더라구요. 사실 저는 농구에 그렇게 재능이 많은 케이스는 아니었어요. 다행히 좋은 감독, 코치 선생님들 만나서 실력이 늘 수 있게 된거죠. 문제는 그렇게 되는 과정에서 맞기도 많이 맞고, 온갖 체벌을 다 당했어요. 프로농구에서는 체벌이 없었을 것 같죠? 초창기에는 있었어요. 외국인 선수들이 그것을 보고 엄청 놀랐어요. ‘왜 그러고 있냐?’, ‘경찰에 신고해라’는 등 본인들은 상상도 못할 문화(?)에 어찌할 줄을 모르더라구요. 정말 부끄러운 일이죠.

문제는 제가 그렇게 당하고 살아오다 보니 그런 것이 싫으면서도 마음 한구석에는 체벌카드라는 것이 존재하려고 하더라구요. 잠시 엘리트 선수들을 가르칠 기회도 있었는데 나도 모르게 말이 거칠어지고, 자꾸 체벌을 하려고 하는거에요. ‘때려서라도 조금만 다듬으면 더 잘할 수 있겠는데…’ 좋게 말하면 사랑의 매를 꺼내 들려고 하는건데 구차한 자기합리화 같아요. 그렇게 체벌을 해서 프로선수로 키워낸다 한들 과연 그 친구들이 ‘농구 자체를 얼마나 사랑할까’라는 생각도 들구요. 그 뒤로 저는 엘리트 감독, 코치를 하면 안되겠다는 확신이 서더라구요. 저희 세대는 정말 이를 악물고 체벌문화를 끊어내기 위한 노력을 해야하는 것이 당연하구요. 진정한 변화는 체벌을 받지 않고 농구를 즐기던 세대가 지도자로 올라설 때부터 시작될 것 같아요.

 

감독님에게 10분의 기적을 느끼게 해줬다던 그 학생은 이후 어떻게 됐나요?

-하핫, 그 에피소드인가 보군요. 제가 의욕 없이 앉아있다가 어떤 학생이 운동하는 것을 보고 잠깐 10분 정도 자세를 잡아줬더니 레이업슛을 성공시켰다는, 그것 맞죠? 뭐, 위인전기에 나오는 일화처럼 그 일 하나만으로 제가 각성했다 그런 것은 아니구요. 이렇게 해서는 안되겠구나 생각하고 있을 때 누군가 어깨를 탁 쳐준 정도가 아닐까 싶어요. 어쨌거나 제 생각에 변화를 줬던 것은 맞는 것 같아요. ‘가르치는 맛’이라고나 할까요. 그걸 느꼈어요. 그런데 그 친구가 이후에 어찌 지내는지는 잘 모르겠네요. 당시에는 유소년만 400명 정도 됐으니까요. 혹시라도 이글을 보게 되면 연락 한번 주면 반가울 것 같네요.(웃음)

 

송교창 선수한테도 ‘되도록 공부해라’ 그러셨다면서요?

-농구를 시작해서 선수가 된다는게 정말 힘든 길이고 가능성도 적기에 저는 많이 말리는 편이에요. 기억은 잘 안나는데 송교창 선수한테 제가 ‘늦게 농구를 시작하면 성공하기가 쉽지않으니 되도록 공부에 충실하는 쪽이 나을 수도 있다’는 식으로 얘기했다나 봐요. 솔직히 어지간히 돋보이는 재능이 아니면 유소년 시절부터 선수로서의 가능성을 판단하기는 매우 어렵죠. 공부나 다른 분야는 어느 정도 성적만 거둬도 충분히 원하는 길을 갈 수 있지만 농구는 다르잖아요. 적어도 자신의 포지션에서는 학교 1등, 지역 1등, 전국 1등 수준을 꾸준히 찍어가야 농구로 유명한 대학교도 갈 수 있고, 프로에 가기 위해서는 그러한 선수들이 모인 무대에서 다시 상위권을 차지해야 해요.

그렇게 해서 동학년 1위로 프로에 입성했다? 거기서는 실력뿐 아니라 운도 따라야 해요. 본인 포지션이 포인트가드인데 같은 팀에 이상민 선수가 있다. 정말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본인이 주전을 차지하기는 어렵겠죠. 설사 이상민 선수를 능가하는 잠재력이 있다해도 한정된 출장시간 속에서 그것을 보여주기는 힘들고, 발전 가능성도 더디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어려운 길을 보고 살았던지라 학부모들께서 ‘농구선수로 키우고 싶다’는 식으로 물어오면 다소 인색해질 수밖에 없더라구요.

 

해설위원 제의도 많이 들어왔을 것 같아요.

-네, 들어오기는 했어요. 하지만 타이밍도 조금씩 안 맞았고 무엇보다 ‘내가 이것이 어울릴까?’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운동하는 재능, 공부하는 재능 따로 있듯이 해설이라는 것도 또 다른 재능의 영역이라고 느껴지더라구요. 물론 ‘하다보면 늘어’라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있었어요. 실제로도 늘겠죠. 계속 하다보면요. 하지만 는다는 것과 잘한다는 것은 별개잖아요. 제가 팬으로서 프로야구를 좋아해요. 그런데 야구를 보다 보면 정말 이해가 잘가게끔 해설을 하시는 분이 계시는 반면 ‘왜 나오셨지?’라는 생각이 들 정도의 분도 계시더라구요. 그런 것을 보면서 단순히 돈을 준다고, 일이 들어왔다고 하는 것보다는 진짜로 잘할 수 있는지, 준비는 잘되어있는지를 파악하는 것도 중요한 것 같아요. 단순히 제의가 들어와서 욕심으로 하게 되면 더 잘할 수 있는 분의 기회를 빼앗는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들었어요.

 

만약 농구 교실을 안 하셨다면 어떤 일을 하고 계셨을 것 같나요?

-여행가요.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다녔던 곳에 대해 책도 쓰고, 제가 체험한 것에 대해 풀어서 다른 이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그런것요. 우리나라 사람들이 부지런하기도 하지만 너무 바쁘게 지내다보니 이른바 ‘짬’이 없잖아요. 언제부터인가, ‘나는 자연인이다’ 혹은 어디 여행가는 프로들이 시청률이 높다고 하더라구요. 재방 시청률이 특히 대단하다고 들었어요. 꼭 챙겨보지 않더라도 여기저기 채널 돌려보다가 나오게 되면 무심히 보게 되는 거죠. 때론 모든 것을 내려놓고 자연 속에서 살고 싶은 생각이 들 때도 있을 것이고, 생계 때문에 어디 여행가기도 쉽지 않고 그런 현실에서 대리만족을 하게 되는 것 같아요. 저 역시 여행경험이 풍부하다거나 외국어를 막 겸비하고 그런 사람은 아니에요. 하지만 그냥 무작정 여행을 떠나고 그런 과정에서 몸으로 부딪히고 쌓은 노하우를 아직 가보지 못한 분들에게 전해주는 것도 나름 의미있는 일 같더라구요. 오히려 저 같은 초보가 좌충우돌 겪는 상황들이 더 마음에 와닿지 않을까 싶어요.

 

소리 없이 강한 남자?

 

프로에서의 첫 다섯시즌간 두자릿수 득점이 4번이나 되네요. 그런데 2003~04시즌부터 기록이 급격하게 하락했어요.

-발목인대가 좋지 못해서 계속해서 주사를 맞으면서 뛰었어요. 사실 수술을 받는 쪽이 훨씬 나을텐데, FA 첫해잖아요. 아프다고 누울 수가 없는거에요. 주사도 맞고 이것저것 다 해봤지만 몸이 마음대로 안되더라구요. 단순히 억지로 고통만 참는다고 될 일이 아닌게, 경기력 자체가 나오지 않는데요. 감독님한테 ‘수술을 받고 제대로 다시 준비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하는게 정답이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질 않았어요. 그래서 ‘아직 젊으니까’하고 스스로를 위로하고 한 시즌만 꾹 참아보기로 했어요. 시즌 끝나고 바로 수술받으려구요. 그런데, 아뿔싸…, 감독님이 바뀌신거에요. 처음부터 다시 시작된 거죠.

 

아파도 아프다고 얘기를 하는게 그만큼 어려운 시절이었군요?

-새 감독님 입장에서는 저와 처음인거잖아요. 정말 어렵게 얘기를 꺼냈는데 ‘수술 말고 재활을 하면 안되겠냐?’고 말씀 하시더라구요. 결국 재활을 하느라 수술을 또 못하게 된거죠. 공익요원 때 트레이드로 팀을 옮겼다가 FA를 통해 다시 마음의 고향 인천으로 돌아오게 되었지만 정말 안 풀리더라구요. 수술받고 제대로 몸 만들어서 힘껏 한번 뛰어보는게 그렇게 어려웠어요. 아니 사실상 불가능했죠. 몸은 마음대로 안 움직이지, 구단과 팬들은 ‘왜 이렇게 못하냐, 잘 좀 해봐라’그러지. 정말 미치겠더라구요.

차라리 냉정하게 수술을 해야 되겠다고 고집을 부렸으면 결과는 더 좋았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저는 인천 원년 멤버로서 팀에 헌신하고 싶었어요. 그러던 중 오해가 생겨 LG로 트레이드되게 됐죠. 거기서도 수술하고 싶다는 의견을 냈지만 저를 데려온 감독님 입장에서는 또 그게 아니잖아요. ‘내가 너를 데려왔는데 써먹어야지 않겠냐’라는 상황이셨겠죠. 그래서 조금만 더 버티고 다음 해에는 꼭 수술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는데 이번에도 또 감독님이 바뀌신거에요. 역시 수술보다는 재활을 권유받았고 해당 시즌에는 최선을 다해서 뛰었지만 몸이 완전히 망가지며 이후 두 시즌은 평균 10경기도 못뛰게 되면서 결국 은퇴 수순을 밟을 수밖에 없었죠.

 

예전에 선수 수명이 길지 않았던 데에는 체계적이지 않은 몸 관리도 이유가 될 수 있었겠어요.

-컸죠. 지금처럼 스포츠 의학이 발달하지도 않은 상황에서 투지, 근성만 유달리 강요받았고 그러한 가운데 관리만 잘했으면 훨씬 더 길게 뛸 수 있는 많은 선수들이 일찍 날개를 접었습니다. 이해는 해요. 감독님들도 성적에 따라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잖아요. 한명 한명 상황을 봐주기는 어려우셨겠죠. 그분들 또한 선수 시절 그렇게 뛰셨으니까, 몸에 배인 것도 있을테구요. 지금이야 식단부터 트레이닝까지 정말 체계적으로 이뤄지지만 그때는 시스템, 마인드 등 여러 부분에서 많이 미흡했죠. 누구의 잘못을 따지기보다는 그런 시절이 있었으니 지금처럼 발전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순전히 당시 김훈 선수 입장에서만 생각해보겠습니다. 같은 슈터 스타일 우지원에, 공격형 가드 조성훈까지…, 뭔가 실컷 날개를 펴기에는 조합이 썩 좋지는 않으셨을 것 같아요.

-사실 전체적인 조합을 생각하면 신기성, 김승현같은 가드가 필요했죠. 만약 그런 전문적인 가드가 있었다면 팀 전체 시너지도 더 올라갔을 것 같아요. (조)성훈이가 고생 많았어요. 사실 성훈이도 저처럼 2번, 3번 자원인데 팀에 가드가 없다 보니 1번 포지션을 맡아서 힘겨웠을거에요. 상황에 따라 포지션도 왔다갔다 하구요. 아마 가드가 있었다면 성훈이가 동분서주하는 일도 없었을테고 부상도 안 당하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도 들어요. 저도 부상으로 고생을 많이 해본 입장에서 성훈이 상황이 공감이 많이가거든요. 이건 기량하고는 상관 없는 거에요. 다들 자신과 맞는 포지션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런 면에서 성훈이가 희생한 부분도 크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같으면 포지션이 안 맞으면 식스맨으로 뛰는 방법도 있지만 당시에는 로테이션이 활발한 시절도 아니고, 무조건 제일 잘하는 선수들 위주로 끼워맞췄던 거죠.

 

최근에서야 더 부각되고 있는데 NBA 클레이 탐슨 등 수비가 되는 슈터는 정말 가치가 높은 것 같습니다. 은근히 희소성도 높구요. KBL에서도 양경민, 김훈 등 극히 일부가 떠오를 뿐이죠. 슈터가 수비까지 힘을 기울이다 보면 여러모로 힘든 점이 많았을 것 같아요.

-어휴…, 많이 힘들었죠. 아무래도 (조)성원이형, 허재형 등 잘하는 선수들을 주로 맡았어요. 그런 상황에서 공격까지 하려니까 아무래도 힘들었습니다. 제가 기복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던게 공수에서 모두 힘을 쏟아야하는 상황도 영향이 있었어요. 수비가 잘 되는 날은 덩달아 슛도 잘 들어갔어요. 반면 수비를 열심히 함에도 매치업 상대에게 자꾸 득점을 허용하는 날은 제 슛감까지 떨어졌어요. 열 받아서(웃음), 자꾸 수비 쪽에 신경이 쓰였던 것이죠. 그리고 제가 수비를 완전 잘하는 선수는 아니었어요. 열심히 쫓아다닐 뿐이었죠.

 

요즘은 수비 잘하는 슈터가 떠오르질 않아요.

-그러게요. 저도 최근에 저랑 비슷했던 스타일의 선수가 있나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딱히 생각이 안나더라구요. 예나 지금이나 슈터에게는 수비 부담을 덜 주려고 하잖아요. 제때 제때 슛만 잘 넣어줘도 고마운 것이니까요. 야구로 따지면 유격수 같은? 한 가지를 잘하면 나머지는 어느 정도 감안해 주는 것이죠. 양희종, 신명호같은 선수도 수비로 팀공헌도가 엄청난 선수였지만 그때 그 시절 같았으면 지금같이 가치를 인정받기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함께 뛰어본 외국인 선수 중 기억에 남는 선수가 있으신가요?

-저는 무조건 카를로스 윌리엄스입니다. 정말 잘했어요. NBA선수로 뽑혔다가 얼굴이 못생겨서 경쟁자와 저울질하다가 탈락했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을 정도였어요. 그만큼 잘했으니까 나온 소리겠죠. 저희가 일본 전지 훈련을 갔었는데 첫해, 두 번째 해 기억이 납니다. 그쪽 일본 외국인 선수들이 저희 외국인 선수들에게 아는 체를 안해요. 본인들끼리도 급수가 있어서 자신들이 더 높다는 것이겠죠. 당시 국내에 오는 외국인 선수들 수준은 그들 사이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고 하더라구요. 처음에 윌리엄스가 왔을 때 저희는 첫인상만 보고 엄청 실망했어요. 키가 그렇게 큰 것도 아닌데다 삐쩍 말랐어요. ‘어휴, 저 친구가 어떻게 센터를 보냐’ 한마디로 망했다고 생각했어요.

윌리엄스가 출산 때문에 일본 전지훈련 전날 왔어요. 때문에 플레이하는 것을 보지 못했어요. 한데 일본전지 훈련에서부터 반전이 일어났어요. 그 콧대 높은 일본 외국인 선수들이 윌리엄스에게 막 아는 체를 하는거에요. ‘잉? 뭐야“했죠. 그리고 경기를 들어갔는데 막 붕붕 날라다니면서 백덩크하고 장난 아니더라구요. 정말 잘했어요. 다들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더라구요. 재능이 뛰어난 선수였죠. 다만 노는 것을 워낙 좋아하고, 여자친구도 많아서…, 노력하는 스타일이었다면 NBA에서도 무난히 활약했을 것 같아요. 자존심도 무지 강했어요. 한국에서 맥도웰이 그렇게 잘한다고 소문이 자자하니까 언젠가 경기에서 맥도웰을 뛰어넘어 강력한 슬램덩크를 성공시킨 적도 있어요. 저희 팀은 물론 상대팀 선수들까지 ’우와!‘하면서 탄성을 내질렀던 기억이 납니다. 아쉽게 하늘나라로 가지 않았다면 마르커스 힉스와의 대결도 재미있었을 것 같아요.

 

인천팀에 대한 애정이 유달리 강해 보였어요. 총 12시즌 동안 인천에서는 딱 절반인 6시즌 정도 밖에 뛰지 않으셨음에도 불구하구요.

-다른 팀들에게는 미안한데요. 인천팀 초창기 멤버로서 시작했던 것이 크게 작용한 듯 싶어요. 늘 인천이 내팀 같았던지라 트레이드 당시에도 ’언젠가는 돌아가야지‘라고 생각했었어요. 당시에는 프랜차이즈 개념이 강했던 선수들도 많았고 저도 그랬던 것 같아요. 첫사랑 같은 존재가 아닐까 싶습니다.

 

연세대 독수리 5형제의 일원

 

아무래도 선수 김훈을 말할 때 연세대 시절을 빼놓을 수 없겠죠. 당시 연세대에는 쟁쟁한 선수들이 많았는데 주전 경쟁이 무척 치열했을 것 같아요. 

- 아니요. 그렇지 않았어요. (문)경은형, (이)상민이형, (우)지원이, (서)장훈이까지는 고정이었죠. 딱 제가 경쟁했던 나머지 한자리만 치열했어요.(웃음)

 

자유로운 분위기와 달리 군기도 상당했다고 들었어요.

-저도 사실 놀랐어요. 제일 자유로운 대학으로 알고 있었기에 가고 싶었던 상황에서 마침 연락이 와서 무조건 갔죠. 그런데, 아뿔싸! 생각과는 조금 다르더라구요. 하아, 전통이라는게…, 가자마자 제일 처음 한 것 중 하나가 노래 외우기였어요. 예전부터 전해져오는 노래가 30곡 정도 있어요. 그것을 다 외우라는 거에요. 무슨 책이나 프린트물도 없어요. 그냥 선배들이 불러주는 것을 듣고 외워야 되는 상황이었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어려운데 설상가상으로 선배들마다 높낮이가 틀린거에요. 음은 대충 비슷한 것 같은데 각자의 스타일이 녹아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 상황에서 선배들이 제각각 불러서 ’왜 이렇게 부르는 것이냐?‘고 혼내는데, 우와 진짜 미치는거죠. 운동화 신는 것 하나까지도 규율이 존재하는 등 밖에서 볼 때는 자유로워 보였지만 전통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던지라 내부기강은 상당했어요.

 

무서운 선배가 있는 반면 친근한 선배도 있고, 스타일이 각자 달랐을 것 같아요.

-솔직히 진짜로 무서웠다고 느꼈던 선배는 딱히 없었던 것 같아요. 문제는 앞서 말했던 대대로 내려오는 군기 문화나 내부기강이죠. 각 학년 별로 지켜야 될 것이 있고, 혼내거나 지시할 때도 4학년이 3학년에게 말하면 그 밑으로 차례로 내려가는 등 그런 부분들이 처음에는 많이 힘들었어요. 특히 (이)상민이형이 고생이 많았어요. 상민이형이 동기가 없어요. 다들 농구를 그만둬버려서요. 결국 해당 학년이 해야 될 일을 상민이형이 홀로 감당해야 했죠. 윗 학년에 선배가 7명이었으니 심부름부터 빨래까지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거기다가 훈련하고 경기도 뛰었어야 되니까요. 그렇다고 누가 도와주기도 힘들어요. 학년별로 정해져 있는 일은 꼭 그 학년이 해야 되는거죠. 특히 기댈 동기가 없다는 점에서 많이 외롭고 힘들었을거에요. 그래서 상민이형이 본인이 고참이 되면 꼭 예전 전통을 고집하지 않고 서로 도울 것은 돕는 등 환경 자체를 자유롭게 만들어 보겠다고 말하고는 했어요.

 

최희암 감독님은 어떤 분이셨나요? 외모만 보면 한없이 자상해 보이셔서 슬램덩크 안감독님이 떠오른다는 말도 있거든요.

-그런 이미지에 안경이 95%는 영향을 끼쳤을 것 같아요. 안경 낀 분들 보면 벗었을 때하고 외모가 많이 달라지는 경우가 많잖아요. 감독님은 그중에서도 끝판왕급이었죠. 안경 쓰고 안쓰고가 너무 달라요. 뿔테안경으로 인해 중후하고 자상한 이미지가 만들어지지 않았나 싶어요. 갑자기 패션바람이 마음속에서부터 불어오셨는지 언젠가 감독님이 무테안경을 끼고 오신 적이 있었어요. 주변에서 좀 뭐라고 했나봐요. 바로 다음날인가 다시 뿔테안경을 끼고 오시더라구요. 이미지가 뿔테안경으로 많이 만들어지신 분이세요. 실상은 많이 엄하셨어요. 이전 질문에서도 언급한 말이지만 당시에는 체벌을 하는 사람이나 당하는 사람이나 그런가보다 하던 시절이었어요. 하지만 아무리 그러려니 해도 체벌을 받게 되면 몸과 마음에 상처가 남는 것은 사실이에요.

 

실업최강 기아자동차와의 일전에서 결승 레이업 슛을 성공시킨 적이 있으셨어요.

-그전에 제가 3점슛을 넣어서 동점이 됐어요. 그리고 역전 레이업 슛으로 마무리까지 짓게 된 것이죠. 본래는 경은이형이 3점슛을 던지기로 했는데 기아 (강)동희형이 그것을 눈치채고 앞을 막아버린 거에요. 결국 급하게 저에게 패스가 왔고 3점슛 라인 1m정도 밖에서 얼떨결에 슛을 던질 수밖에 없었어요. ’아, 졌구나‘라고 생각했는데 확 들어가버린거에요. 완전 열광의 분위기였죠. 그런 상황에서 허재형이 급하게 플레이하다가 실책을 하셔가지고, 경기 종료 1.9초인가 남겨놓고 레이업 슛을 시도했던 것 같아요. 그날 경기로 ’짜식, 처음으로 밥값했네‘라는 소리도 듣고 인터뷰도 처음으로 했던 것 같아요. 그날 연장전을 두 번이나 가서 주요 멤버들도 여러명 5반칙 퇴장당하고 패색이 짙어지던 상황이었는데 그런 식으로 역전승을 해버리니까 분위기 자체가 완전 축제였어요. 근데 사실 저는 담담했어요. 기쁘기는한데 감정을 막 드러내는 성격도 아니구, 마음으로만 웃고 있었죠. ’기아를 이긴 소감은 어떠세요?‘라는 질문에 침착하게 답변을 하니까, ’안 기뻐? 얼굴이나 말투를 보니 안 기쁜 것 같아‘ 그런 소리가 자꾸 나오는거에요. 결국 NG를 8~9번은 낸 것 같아요. 방송사가 원하는 들뜬 표정과 말투가 안 나와서 그랬던 것이겠죠. 어휴, 경기 뛰는 것보다 그게 더 힘들었어요.

 

스스로 생각했을 때 독수리 5형제 중 본인은 실력 적으로 몇 위 정도 되셨다고 보시나요? 

-당연히 꼴찌입니다. 아까도 말했듯이 주전 4자리는 정해져 있었다니까요. 한 자리 놓고 경쟁했던 인물이 저입니다.

 

문경은, 이상민, 서장훈 선수까지는 그렇다쳐도 우지원 선수와는 그래도 경합이 되었을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요?

-아니요. 지원이는 대단히 좋은 슈터였습니다. 간덩이가 커서 중요한 순간에도 클러치 슛같은 것을 잘 꽂아 넣었어요. 승부사 근성이 있는 친구였다고 기억되요.

 

그럼 인기로는 몇 번째라고 생각하실까요?

-하핫…, 늘상 얘기하지만 저는 3번째였죠. 지원이랑 상민이형이랑 박빙으로 1위 다툼하고 저는 단독 3위 그리고 경은이형이랑 장훈이랑 경합, 이렇게 되었던 것 같아요.

 

언젠가 다른 기자님이 쓰신 최희암 감독님 인터뷰를 보니까요. ’문경은은 미남이지만 상민이하고 지원이를 잘 생겼다고 하는 것은 이해가 잘 안간다‘라는 식의 말을 하셨던 기억이 나요.

-제 느낌대로 말해보자면 상민이형은 잘생긴 것은 아닌 듯 해요. 형은 비율이 좋은거에요. 얼굴도 작구요. 체구가 아이돌 느낌으로 쫙 빠졌어요. 하체도 길구요. 거기서 농구도 잘하니까 업그레이드되는 부분도 있었을 것이구요. 그냥 얼굴만 딱 보면 특별할 것 있을까요? 평범한 아저씨죠. 지원이같은 경우는 잘 생겼는데요. 볼살도 좀 붙고, 지금이 그때보다 더 나은 것 같아요. 어릴 때는 너무 말라서 빈티도 나고 베트남 사람같은 느낌도 있었어요. 경은이형은 사각턱이시고 턱도 좀 나오신 편이라…, 눈매가 좀 예쁘신 것 빼고는 별다른게 있을까 싶어요.”

 

너무 수위가 센데요. 혹시 그대로 기사로 나가도 되나요?

-네. 상관없습니다. 뭐 어때요. 제 입장에서 본 건데요. 최희암 감독님은 감독님 나름대로 경은이형이 잘 생겼다 그런거고, 다들 눈이 다르잖아요. 경은이형, 상민이형, 지원이 등이 이 얘기 듣고 ’훈이 너는…‘하면서 제 외모 품평할 수도 있는거구요. 경은이형 눈웃음 치는 것은 예술이죠. (웃음)

 

마지막으로 ‘스마일 슈터’를 기억해주시는 팬분들께 인사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아직도 저를 기억해주시는 분들께는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간혹 ‘예능 등에서 앞으로 본격적으로 볼 수 있냐?’고 물어보시는 분들도 계신데 제가 막 재미있고 그런 사람은 아닌지라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아요. 다만 농구 활성화를 위한 프로그램 등이 있으면 거기는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싶습니다. 저는 농구인이니까요. 이제 프로농구도 개막했는데 많은 관심과 사랑 부탁 드리겠습니다. 모두 모두 건강하세요.

 

#사진/본인 제공

 

◇ 필자는 농구대잔치 시절부터 농구를 사랑하던 오랜 팬으로 2002-2003년 본지에 농구 무협소설 '해동전설(海東傳說)''을 연재한 바 있으며 데일리안, 홀로스, 올레, 오마이뉴스 등 다양한 인터넷 매체에서 스포츠 객원기자로 활동한바 있다. [김종수의 농구人터뷰]를 통해 전현직 농구인들의 이야기를 다양한 시각으로 다룰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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