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건이 처음 쥔 공은 야구공이었다. 초등학교 3학년 시절 야구선수인 형을 따라 입었던 유니폼은 어색한 옷 같았고 찾아온 부상과 함께 벗게 됐다. 그 비워진 자리에 농구가 스며든 건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친구들의 농구 클럽 소식에 가슴속 열망이 먼저 움직였다. 틈을 비집고 들어가기 힘들 거란 지레짐작을 넘어선 건 농구를 향한 당찬 용기였다. 그렇게 시작된 농구의 첫 페이지에는 꼭 쥔 5만 원과 함께, 코트로 향한 소년의 단단한 결의가 담겨 있었다.
“원래 못 가는 곳이거든요. 너무 가고 싶어서 친구들한테 얘기했더니 와도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처음에 5만 원이 필요하다고 하더라고요. 초등학생이니까 5만 원이 없잖아요. 엄마한테 전화했는데 안 받으셔서 이모한테 전화했어요. 그렇게 이모한테 받은 5만 원을 챙겨서 갔죠. 그런데 알고 보니 계좌이체도 되는 거였어요(웃음). 코치님이 ‘이걸 왜 가져왔냐’고 하셔서 그 돈을 그대로 챙겨서 집에 갔어요.”
'145cm'의 키. 코트 위 작은 묘목 같던 초등학교 6학년 원건이었지만, 클럽 코치는 그 안의 원석을 알아보며 선수의 길을 권했다. 추천을 받아 찾아간 곳은 집 근처 배재중이었다. 작은 키라는 한계가 차가운 현실로 다가왔으나 따뜻한 손을 내밀어 준 김동환 코치(현 홍대부중)가 있었다. 그 손길이 지금의 ‘선수 원건’으로 향하는 문을 열어준 것이다.
“그때 김동환 코치님이 정말 조그마한 애를 받아주신 거죠. 솔직히 작아서 안 받아주셔도 됐거든요. 동계 훈련 기간에 같이 훈련하면서 테스트를 받았는데 제가 열심히 하는 모습을 지켜봐 주시고 저를 데리고 가주셨어요. 그렇게 농구를 시작하게 됐습니다.”
그러나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또다시 키가 발목을 잡았다. 중학교 1학년 때 148cm였던 키는 3학년이 되어도 158cm에 머물렀고 받아주는 팀조차 드물었다. 그럼에도 농구를 그만둘 생각은 없었다. 막막한 갈림길에 서 있던 원건에게 당시 광주고 천정열 코치가 깊은 믿음으로 또 한 번의 기회를 안겨주었다.
“광주고에서 제가 왔으면 좋겠다고 하더라고요. 저에게 손을 내밀어준 ‘처음이자 마지막’ 학교였어요. 딱 한 곳이요. 마침 이모도 광주고 근처에 살고 계셔서 타이밍도 맞았죠. 정말 제 은인이에요. 조금도 고민하지 않고 다다음 날 짐을 싸서 바로 갔어요.”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던가. 이모 집에서 생활을 시작한 뒤 거짓말처럼 기적이 찾아왔다. 1년 사이 키가 무려 20cm나 폭풍 성장한 것이다. 새벽 5시마다 보약을 챙겨주고 따뜻한 아침밥을 차려주던 이모의 정성은 그 시절 가장 따스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한창 자랄 때 듬뿍 받은 그 사랑을 영양분 삼은 덕분일까. 키가 크고 몸에 힘이 붙기 시작하면서 코트 위 원건의 플레이에도 비로소 폭이 넓어졌다.

팀의 성장도 조금씩 눈에 띄기 시작했다. 40~50점 차 대패가 일상이었던 광주고는 우승연 코치 부임 이후 격차를 30점, 20점으로 점차 줄여나갔다. 까마득하게만 느껴졌던 승리도 어느덧 손에 잡힐 듯 가까워졌다. 3학년 선배들의 마지막 무대였던 송도고전에서는 치열한 연장 혈투를 펼쳤다. 비록 패배로 끝났지만 끝까지 승리를 다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값진 성장의 궤적을 실감했다.
3학년 당시 구력이 짧은 선수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이후로 광주고는 당당히 16강 본선 무대에 올랐고 승리의 단맛도 차곡차곡 맛보았다. 코트 위에서 함께 땀 흘리며 ‘이기는 법’을 터득했던 시간은 끈끈한 유대감이 되어 이들을 하나로 묶어주었다.
그 중심에는 코치들이 하나같이 “가장 열심히 하는 선수”로 입을 모을 만큼 서슬 서린 성실함을 지닌 원건이 있었다. 비록 팀 전력이 약해 묵묵히 그늘에 가려져 있었을지라도, 뛰어난 공격력으로 팀의 가장 확실한 해결사이자 주득점원 노릇을 해냈다. 특히 원건이 동기들과 함께 일궈낸 원팀의 문화는 지금까지도 광주고 농구부의 단단한 뿌리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동기였던 최규정, 강건우가 있었기 때문에 제가 지금까지 농구를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꼭 성공해서 잘된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는 마음에 그만두지 않은 것도 있거든요. 새벽 운동도 많이 같이 했고 함께 꿈을 키우며 노력했던 친구들이에요. 농구를 계속하는 저에게 자신들의 몫까지 더 열심히 해달라고 했거든요. 그래서 힘들 때마다 그 친구들이 생각나요.”

“저는 대학을 못 갈 뻔했어요.”
수많은 대학 선수들을 만나온 취재진에게도 원건의 첫 마디는 꽤나 생소했다. 당당히 선택을 받으며 미래를 그려가는 다른 선수 이야기와 달리, 그가 던진 한마디는 확연히 결이 달랐기 때문이다.
팀 성적에 가려 지원할 수 있는 학교조차 손에 꼽혔던 상황. 매 순간 농구 인생의 마지막 줄을 잡는 심정으로 실기 시험장에 섰지만 앞선 학교들에서는 제 기량을 다 보여주지 못한 채 돌아서야 했다. 그렇게 벼랑 끝에 서서 마지막으로 다다른 목적지가 바로 중앙대였다.
“중앙대 실기 때 ‘여기서 떨어지면 끝이다’라는 생각으로 미친 사람처럼 뛰어다녔어요. 예비 2번을 받고 결국 합격하게 됐죠. 너무 기뻐서 울면서 들어왔어요. 농구를 계속할 수 있다는 게 꿈만 같았거든요.”
늘 그래왔듯 가까스로 진학의 문턱을 넘어선 원건에게 중앙대는 예비 합격이라는 마지막 줄을 내어주었다. 꿈만 같은 반전이었으나 현실은 냉혹했다. 그 안에서 견뎌내야 하는 공기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앞에 놓인 현실 앞에서 그는 처음으로 농구의 마지막을 떠올렸다.
“‘여긴 내가 있을 곳이 아니다’라는 생각에 그만두려고 했어요. 왠지 모르겠지만 하루하루가 너무 힘들었어요. 솔직히 그때도 루저 마인드가 남아 있어서 이 경쟁에서 이길 수 없다는 생각이 강했거든요. 동기들도 너무 잘하고 선배들도 너무 잘하니까요. 신입생이 9명이었는데 연습경기를 하면 제가 아홉 번째로 가장 마지막에 들어갔어요.”
첫 전지훈련에서 원건은 코트 위에서 마치 투명인간처럼 희미한 존재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대로 조용히 사라지고 싶지는 않았다. 그만두는 한이 있더라도 적어도 자신의 이름 두 자만큼은 코트 위에 확실하게 각인시키겠다는 오기가 발동했다.
“그때부터 저는 농구를 하러 코트에 들어간 게 아니에요. 슬라이딩하러 들어갔어요. 그래도 ‘나는 이런 선수다’라는 걸 알리고 싶었거든요. 투지 넘치는 모습을요. 연습경기에서 4쿼터마저 뛰지도 못하고 5쿼터 막바지에 3분 정도 주어졌어요. 그 3분 동안 슬라이딩만 7~8번 했죠. 정말 그런 것만 하다 나왔어요.”
그 투지와 희생을 눈여겨본 지도자는 원건에게 엔트리 한 자리를 내어주었다. 전체 20명 중 12명 안에 드는 일은 누군가에게는 당연한 일상이었을지 몰라도 원건에게는 피땀 어린 노력으로 올려놓은 소중한 한 계단이었다. 엔트리 스무 번째에서 열두 번째, 그리고 다시 열한 번째로. 조금씩 코트 위 자신의 자리를 넓혀가는 그 작은 전진이야말로 원건에게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기쁨이었다.

벤치에 앉아 바라보기만 했던 대학리그의 뜨거운 열기를 이제는 코트 위에서 직접 느껴보고 싶었다. 2학년을 앞둔 그 겨울은 원건의 농구 인생을 통틀어 가장 간절했던 시기였다. 경기에 뛰고 싶다는 절박한 바람은 새벽마다 체육관의 불을 밝히는 부지런한 발걸음으로 이어졌다.
쉬는 날에도 운동하고 동기부여가 되는 노래를 틀어놓고 체육관에서 밤을 새웠다. 코트에 설 시간은 짧았지만 그 시간을 얻기 위해 보내는 밤은 길었다. 간절함을 실제 출전 기회로 바꾸기 위해서는 자신만의 명확한 무기가 필요했다. 고민 끝에 원건이 팀 안에서 찾은 해답은, 자신의 장점인 스피드를 극대화한 속공이었다.
“2학년이 되면서 ‘내가 뭘 해야 뛸 수 있을까’를 많이 고민했어요. 팀에 저처럼 빠르게 속공을 뛰는 선수가 없더라고요. 그 장점을 보여드렸더니 필요한 상황에 저를 기용해 주셨어요. ‘팀에서 나만 할 수 있는 게 뭘까’를 찾은 게 제가 경기를 뛸 수 있었던 이유 같아요.”

하지만 반전을 만들어냈던 2학년과 달리, 3학년이 되자 ‘더 잘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오히려 발목을 잡았다.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려는 의욕이 앞선 탓에 힘이 들어갔고, 잘하던 플레이마저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치고 올라오는 후배들 사이에서 출전 시간은 점차 줄어들었고 원건은 또다시 벤치를 지키는 시간이 길어졌다.
지난해, 15년 만에 MBC배 정상에 올라선 팀이 환호하던 영광의 순간에도 원건은 벤치에 머물렀다. 비록 코트 밖이었지만 그 시간 속에서 얻어낸 또 한 번의 깨달음은 스스로를 더욱 단단하게 다지는 계기가 됐다.
“그때 벤치에 앉아 있으면서 많은 생각을 했어요. ‘내가 정신을 더 차렸다면 경기를 뛰면서 이 행복을 누릴 수 있지 않았을까’ 싶더라고요. 벤치에서 느끼는 행복과 직접 뛰면서 느끼는 행복은 다르니까요. 결국 운동선수는 경기를 뛰어야 행복하잖아요. 그 일을 계기로 4학년을 더 잘 준비했던 것 같아요.”
대학이라는 코트에서 보낼 마지막 계절을 앞두고 원건의 목표는 한층 더 선명해졌다. 새로 부임한 윤호영 감독의 농구에 빠르게 적응하는 것이었다. 4학년이라는 이름표를 달고서도 벤치에 남을 수는 없었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동계훈련을 견디게 한 가장 강력한 채찍질은, 또다시 코트 밖에서 경기를 바라만 보고 있을 자신의 모습이었다.
“힘들 때마다 ‘여기서 놓으면 또 벤치에 앉아 있을 거다’라고 스스로에게 말했어요. 그러면서 많이 단단해진 것 같아요. 다시 오지 않을 시간이니까 웃으면서 대학 생활을 마무리하고 싶어서 더 열심히 준비했죠.”
시즌을 준비하는 태도 역시 한층 깊어졌다. 저학년 시절은 악바리처럼 버텨왔다면, 이젠 상황을 읽고 판단하는 여유를 더해갔다. 원건은 세심한 가르침을 스펀지처럼 흡수하는 한편, 약속된 수비 전술을 잊지 않으려 휴대전화 메모장에 적어가며 복습을 거듭했다.
단 한 순간도 놓치지 않으려는 철저함 속에서 그는 감독이 코트 위에 믿고 투입할 수 있는 선수로 거듭나고 있었다.
“저는 열심히만 하면 되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윤호영 감독님은 ‘열심히 하는 건 운동선수에게 당연한 거다’라고 하시더라고요. ‘상황에 맞게 어떻게 센스 있게 움직이느냐가 운동선수가 해야 할 일’이라고 가르쳐주셨어요. 그때 농구를 더 깊이 배운 것 같아요.”
한때 패배가 더 익숙했던 원건. 크고 작은 시련을 겪기도 했지만 ‘포기하지 않으면 기회는 온다’는 그의 좌우명처럼 매번 다시 일어나 코트로 향했다. 중앙대에서 그는 좌절에 머물지 않고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하는 길을 택했다.
그리고 중앙대가 16년 만에 정규리그 정상에 올라선 영광의 순간, 그 역시 핵심 멤버로 자리를 지켰다. 이번 시즌 19경기 평균 10.1점 1.3어시스트 2.6리바운드로 팀 내 득점 3위를 기록하는 등 눈부신 기량 성장을 이루며 완벽한 도약을 이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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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건은 KT 김선형의 ‘찐팬’이다. 처음 농구를 보러 간 SK 홈경기에서 3층 관중석에 앉았지만 코트를 누비고 덩크를 꽂는 김선형의 모습만큼은 선명하게 남았다. 그날부터 초등학생 원건은 매일 밤 김선형의 하이라이트를 보다 잠들었다.
“김선형 선수는 보폭이 되게 길잖아요. 아무나 할 수 없는 스텝인데 저는 그때 팔다리가 짧았거든요. 그래도 매일 보다 보니 저도 모르게 학습이 됐나 봐요. 계속 따라 하니까 어느 순간 되더라고요.”
좋아하는 선수의 플레이를 눈으로 보고 몸으로 따라 하면서 자신만의 농구를 만들어갔다. 고등학교 때 덩크에 대한 열망으로 김선형처럼 탁월한 점프력을 키우겠다고 다짐한 것 역시 그런 노력의 일환이었다.
“그때부터 발목에 모래주머니를 차고 다녔어요. 지금 제 점프력의 80% 이상은 그때 노력으로 만들어진 것 같아요. 점프 훈련 영상을 보고 저녁에도 운동했고 어디를 가든 모래주머니를 차고 다녔어요. 샤워할 때도, 밥 먹을 때도 정말 한순간도 빼놓지 않았어요. 계단 운동이나 런지처럼 점프에 좋은 운동도 매일 1년동안 했고요. 그러니까 점프력이 정말 많이 늘더라고요. 원래는 백보드 아래쪽에만 손이 닿았는데 어느 순간 림에 닿고 그보다 더 높이 올라가더니 덩크까지 되더라고요.”

“남들은 타고났다고 생각하는데 타고난 게 아니에요. 학창 시절에 저를 봤던 사람들은 알 거예요. 저는 재능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100% 노력이었어요. 원래는 점프력이 좋지 않았거든요.”
드래프트는 지금까지 쌓아온 시간을 평가받는 자리인 동시에, 앞으로의 가능성을 직접 설명해야 하는 무대이기도 하다. 수많은 후보 가운데 자신의 이름을 남기기 위해서는 무엇을 잘하는 선수인지, 어떤 모습으로 팀에 보탬이 될 수 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 줄 필요가 있다.
“저는 어떻게 해야 팀에 도움이 될지 스스로 많이 연구하는 스타일이에요. 지금까지 그렇게 기회를 잡아왔고요. 열심히 뛰고 투지 있게 팀의 에너지를 높이는 선수예요. 모두가 지쳐 있을 때 들어가서 한 방을 보여줄 수 있는 선수, 언제든 준비된 선수라고 생각해요. 몸을 아끼지 않습니다.”

스스로 다짐한 목표는 바로 ‘코리안 아반도’다. 압도적인 탄력과 놀라운 운동신경을 바탕으로 꽂아 넣는 덩크슛과 블록슛은 렌즈 아반도(정관장)의 전매특허이자 늘 탄성을 자아내는 명장면이다. 국내 선수로서 코트 위에서 바로 그 폭발적인 플레이를 증명해 보이겠다는 것이 원건의 당찬 각오다.
“아반도 선수는 올라운더라고 해도 될 만큼 다재다능하잖아요. 센터들이 당연히 잡겠다고 생각한 리바운드도 혼자 2m 넘는 선수들 사이에서 다 잡아내고요. 저도 점프력을 덩크뿐 아니라 그런 상황에서도 쓰고 싶어요. 아반도 선수를 보면서 ‘내 점프력을 수비에 쓰면 큰 효과를 볼 수 있겠구나. 내 가치를 더 높일 수 있겠구나’ 싶었어요. 저도 남들이 못 잡는 리바운드를 더 높은 곳에서 낚아채고 싶어요.”
누구에게나 한번쯤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먼저 그려보는 순간이 있다. KBL 입성을 꿈꾸는 드래프트 참가자들에게도 ‘프로 선수가 된 나’는 오래 품어온 가장 선명한 상상일 터다. 원건 역시 그 장면의 끝에 한 가지 목표를 분명하게 적어 뒀다.
“제가 경기를 보러 가던 그 경기장에서 뛴다는 것만으로도 믿기지 않을 것 같아요. 팬들이 농구를 보는 시선도 다양하잖아요. 제가 코트에 들어갔을 때 한 번쯤 환호하고 웃으면서 ‘오늘 농구장에 오길 잘했다’고 느끼셨으면 좋겠고요. 또 그렇게 느낄 수 있도록 보여드릴게요. 팬들의 하루에 깊은 인상을 남기는 선수가 되고 싶어요.”
‘칠전팔기’로 스스로 자리를 증명해낸 원건이 이제 프로 무대를 바라본다. 긴 팔을 활용해 상대 공격을 끊어내고 곧바로 폭발적인 스피드로 코트를 질주해 림을 가르는 모습은 그 자체로 팀에 뜨거운 에너지를 불어넣는다. 그러나 그를 진짜 빛나게 만드는 바탕은 늘 벼랑 끝에서도 포기하지 않았던 집념이다. 매 순간 기회를 낚아챘던 원건이 프로 무대에서 그려낼 '코리안 아반도'의 모습에 기대를 모으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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