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진석의 농담(籠談)] 원 핸드 슛

기자 / 기사승인 : 2022-05-18 17: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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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기의 『갈채와의 밀어』 다시 읽기㉗
▲김영기의 자유투.

김영기가 고려대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원 핸드 슛을 던지는 선수는 흔하지 않았다. 그때까지 국내 선수들은 남녀 불문하고 대개 투 핸드 슛을 했다. 요즘도 여자농구 경기에서 흔히 보는 슛 동작을 남자농구 경기에서도 볼 수 있었다. 유수한 실업 팀 선수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김영기는 언제 어떻게 원 핸드 슛을 던지기로 결심하게 됐을까. 그는 『갈채와의 밀어』 83쪽에서 시작하는 ‘나와 원 핸드 슛’이라는 글에서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마닐라에서 열린 제2회 아시아경기대회에 다녀온 선배 김영수가 외국 선수들의 슛 성공률을 이야기하면서 원 핸드 슛에 대해서도 말했다는 것이다. 제2회 아시아경기대회는 1954년에 열렸으므로 김영기가 배재고등학교 3학년일 때다. 김영수의 이야기를 들은 김영기는 호기심을 느낀 것 같다. 그는 이렇게 기록했다.


"이 슛의 정확성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 없었지만 나로서는 그래도 투 핸드 슛보다는 이로운 점이 많을 것 같았다. 첫째, 러닝 슛에 이로울 것 같았고 둘째, 골과의 각도를 가리지 않고 슛을 시도할 수 있을 것 같았고 셋째, 슛 모션을 자유자재로 변화시키기 쉬울 것 같았다."

김영기는 행동하는 사나이. 곧 원 핸드 슛을 익히기 시작했다. 처음 해보는 동작, 아무도 도와줄 수 없는 훈련이었다. 처음에는 공이 흔들리면서 날아가 림을 맞고 떨어졌다. 슛이 정확할 리 없었다. 그러나 김영기는 쉽게 단념하는 성격이 아니다. 고집스럽게 훈련했다. 그렇게 훈련을 거듭하자 차차 자신감이 붙었다. 김영기는 농구부원들에게도 원 핸드 슛을 권했다. 그러나 금방 익히기 어려운 원 핸드 슛, 정확하지 않은 (정확하지 않을 것 같은) 슛 기술을 아무도 익히려 들지 않았다. 농구부원들은 도리어 김영기를 말렸다. 그들은 김영기가 정확하지 않은 슛 기술을 사용하는 바람에 득점력이 떨어진다고 보았다. 원 핸드 슛을 둘러싼 논쟁 때문에 동료와 말다툼을 하고 끝내 화해하지 못한 경우도 있다.

김영기는 계속해서 원 핸드 슛 다듬기에 전념했다. 당장에야 투 핸드 슛에 비해 부정확했지만 언젠가는 원 핸드 슛이 자신의 기량과 기록 향상에 도움이 될 것으로 확신했다. 김영기가 원 핸드 슛 훈련에 몰두할 때 배재고 농구부는 앞서 소개한 ‘봄에 열리는 춘계 학생농구 리그’와 ‘초여름에 열리는 종별선수권대회’에 참가했다. 이때만 해도 김영기의 원 핸드 슛은 성공적이라고도, 실패했다고도 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김영기는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외국 선수들이 성공적으로 구사하는 기술을 우리라고 못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김영기의 훈련은 쉼 없이 계속됐다. 훈련을 하면서 겪는 고통은 원 핸드 슛에 편견을 가지고 반대하는 사람들과 싸우느라 겪는 괴로움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원 핸드 슛에 대한 김영기의 관심은 우리 농구의 역사를 살필 때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가 열어젖힌 원 핸드 슛의 세계를 다음 세대의 스타들이 완성하면서 아시아 정상으로 가는 길을 개척한다. 그 중심에 선 인물이 신동파다. 신동파가 뛰어난 농구선수로서 성장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전기가 되는 몇 장면은 김영기와 무관하지 않다. 첫째는 신동파가 휘문중학교 3학년이던 1959년 5월 국내에서 최강 팀으로 꼽히던 공군 팀이 휘문중학교로 훈련을 하러 왔을 때다. 신동파는 당대 최고의 스타로서 탁월한 기술을 구사하는 선수였던 김영기의 움직임을 지켜보고 그를 모범삼기로 작정했다. 그는 “김영기 씨의 유연한 몸매와 폼에 반하게 되었다.”(일간스포츠 1974년 1월 9일자)라고 고백하면서 김영기의 경기 모습을 흉내 내기 위해 노력했다는 사실도 숨기지 않았다. 당대 최고의 기술을 구사하는 선수로 평가되던 김영기를 모범으로 삼았다는 사실은 농구선수로서 신동파의 지향점이 그만큼 높았다는 반증이 된다.

신동파가 흉내를 낸 김영기의 동작 가운데는 원 핸드 점프 슛도 있다. 신동파가 회고록에 ‘김 씨가 쉽게 묘기를 부리던 원 핸드 슛’(일간스포츠 1974년 1월 9일자)이라고 쓴 데서 보듯 이 기술은 아직 농구 선수들 사이에 대중화되지 않아 ‘묘기’에 속했다. 신동파의 성장에 결정적인 전기를 이룬 두 번째 시기는 바로 이 원 핸드 점프 슛을 익혀 특기로 삼게 되는, 휘문중학교 3학년에서 휘문고등학교 신입생으로 넘어가는 과도기다. 신동파는 신봉호 코치의 조언을 받아들여 원 핸드 점프 슛을 연마하기 시작하였다. 신 코치는 신동파에게 “원 핸드 슛을 던지지 못하면 너는 선수로서 성공하기 어렵고 선수 생명도 길지 않을 것”이라며 강하게 권했다(신동파 면담, 2012년 5월 10일). 신동파는 신 코치의 조언을 듣는 동안 머릿속에서 김영기의 원 핸드 슛 폼을 떠올렸다고 한다. 그러므로 신동파는 이 시기에 장차 국내는 물론 아시아와 세계를 통틀어 손꼽히는 득점 전문 선수로 이름을 떨칠 기반을 마련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원 핸드 점프 슛은 오늘날 가장 자주 사용되는 공격 기술이다. ①공을 잡고 빠른 동작으로 멈추어서 ②무릎을 구부렸다가 뛰어오르며 공을 머리 위로 들어 올린 다음 ③팔을 쭉 뻗으면서 손목과 손가락의 유연성을 이용해 공을 날려 보내는 방법이다. 투 핸드 점프 슛에 비해 준비동작의 시간이 짧고 드리블 및 패스에 의한 빠른 슛 동작이 가능하다. 이런 이유로 현대 농구에서 매우 선호하는 슛 기술이다. 경기 상황에 따라 머리 위에서 공을 던지기 때문에 슛의 타이밍을 예측하기 힘들어 수비수의 방해를 받지 않는 가장 효과적인 슛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중장거리에서 시도할 경우 정확성이 떨어지는 단점도 있다(김형수·박제영).

농구 역사상 누가 가장 먼저 원 핸드 점프 슛 기술을 사용했느냐는 의문은 오랫동안 논쟁거리로 이어져오고 있다. 원 핸드는 고사하고 점프 슛을 누가 가장 먼저 시도했는지도 불분명하다. 점프 슛의 기원(The Origins of the Jump Shot)을 쓴 존 크리스트거(John Christgau)는 다양한 문서와 레이 메이어(Ray Meyer) 등 저명한 대학 코치들의 구술 기록을 종합해 유력한 후보로 케니 세일러스(Kenny Sailors)를 지목하고 그가 1934년 5월 점프 슛을 시도한 사례를 제시하였다. 증언에 의하면 세일러스는 점프를 한 다음 오래 체공하며 공을 던지는 기술을 사용했다. 그러나 크리스트거는 점프슛의 개척자를 거론하면서 글렌 로버츠(Glenn Roberts)·마이어 스쿠그(Myer Skoog)·존 곤살레스(John Gonzales)·버드 파머(Bud Palmer)·대비지 마이너(Davage Minor)·조 풀크스(Joe Fulks)·조니 애덤스(Johnny Adams)·밸러스 밴 스멀리(Belus Van Smawley) 등의 이름을 제시하였다.

안젤로 루이세티(Angelo Luicetti)가 가장 먼저 원 핸드 점프 슛을 쏘았다는 주장이 있으나 크리스트거는 루이세티를 면담하는 자리에서 “나는 결코 점프 슛을 던지지 않았다. 나는 단지 골 가까운데서 한 손을 이용한 러닝 슛 같은 것을 던졌을 따름이다.”라는 증언을 듣고 점프 슛을 던진, 혹은 던진 것으로 알려진 선수들의 명단에 루이세티의 이름을 올리지 않았다. 한편 미국의 대학체육협회(NCAA)는 1931~1934년 미주리대학교에서 선수로 활동한 존 밀러 쿠퍼(John Miller Cooper)를 가장 먼저 점프 슛을 던진 선수로 기록하고 있다(The New York Times 2011년 3월 2일자). 그러나 그의 슛 동작은 두 손으로 공을 잡고 두 다리를 모두 이용해 점프한 다음 슛을 던지는 형태여서 원 핸드 점프 슛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국에 원 핸드 점프 슛 기술이 알려진 시기는 불분명하다. 한국농구80년사에 보이는 정상윤의 증언에 따르면 1955년 8월 미국인 코치 존 번이 한국을 방문하여 대학 선수들을 지도할 때 이전까지 일반적으로 사용되지 않았던 원 핸드 슛 기술을 집중적으로 훈련했다. 이전까지는 선수들 대부분이 투 핸드 세트 슛을 구사하였으며, 원 핸드 점프 슛 기술이 전래된 다음에도 투 핸드 세트 슛을 구사하는 선수가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일례로 1955년 7월 15일자 대한뉴스는 한국의 남자 팀과 미국 빅토리 팀의 친선경기를 보도하였는데 이 경기에서 한국 팀의 한 선수가 골 정면 자유투 라인의 뒤쪽에서 두 손으로 슛하는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이 경기는 1955년 서울 장충동 육군체육관(훗날 장충체육관)의 개장을 기념하여 열렸다. 빅토리 팀은 기독교 선교를 목적으로 조직된 팀이다. 빅토리 팀은 1955년 6월 24일부터 29일까지 육군체육관에서 고려대·산업은행(24일), 홍익대(25일), 연세대(27일), 공군(28일), 서울선발팀(29일) 등과 여섯 경기를 하고 돌아갔다. 대한뉴스의 동영상은 이들 경기 가운데 하나일 것으로 추정된다. 최근의 한국 농구 경기에서 투 핸드 세트 슛을 구사하는 남자 선수는 찾기 어렵지만 여자농구에서는 여전히 기본기로 사용되고 있으며 원 핸드 슛을 던지는 선수가 오히려 드문 것이 현실이다.

"내가 선수생활을 할 때에도 투 핸드 슛을 던지는 선수가 적지 않았고 흠으로 생각하지도 않았다. 당시 남자 농구 선수 가운데 투 핸드 슛을 던지는 선수와 원 핸드 슛을 던지는 선수의 비율은 비슷하거나 원 핸드가 조금 많았다. 김평옥·조충원 선배처럼 실업무대에서 이름을 날리던 선수들도 투 핸드 슛을 던졌다. 나도 반드시 원 핸드 슛을 던져야 훌륭한 선수가 될 수 있다는 신봉호 선생님의 말씀을 완전히 이해하고 슛 폼을 바꾼 것은 아니다. 선생님의 가르침이기에 당연히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러나 고등학교 2, 3학년이 되었을 때 비로소 ‘아, 이래서 선생님이 원 핸드 슛을 가르치셨구나.’하고 깨닫게 되었다. 내가 회고록에 원 핸드 슛이라고 기록한 슛 기술은 요즘 선수들이 사용하는 기술과 똑같은, 완전한 ‘원핸드 점프 슛’이었다."(신동파 면담 2012년 8월 30일)


허진석 한국체육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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