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수의 농구人터뷰⑩] ‘천장군’ 천은숙 “제가 어떤 스타일의 가드였냐고요?”

김종수 칼럼니스트 / 기사승인 : 2021-11-02 09:0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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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소녀가 있었다. 방과 후 집에 와서도 농구공을 가져와 드리블 연습을 하는 언니가 신기했고 호기심 어린 눈을 반짝이며 관심을 보였다. ‘너도 해볼래?’ 싱긋 웃는 얼굴로 언니가 농구공을 내밀자 소녀는 무심결에 덥석 손을 내밀었다. 농구와 소녀의 인연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소녀와 농구의 만남은 운명이었다. 소녀는 또래들보다 키가 컸고 운동에도 관심이 많았다. 거기에 지기 싫어하는 승부 근성까지 갖추고 있었다. 무엇보다 집에 돌아오면 함께 농구를 즐길 수 있는 언니가 있다는 것이 너무 좋았다. ‘친구들부터 싹 이긴 다음 언니도 이기고, 그다음에는 누굴 이기지….’ 열정을 가지고 임할수록 실력은 늘어만 갔고 매일 매일 이기는 상상을 했다.

그렇게 소녀는 중학생, 고등학생이 되어갔으며 실력을 인정받아 성인 무대에서 선수로 뛰게 됐다. 또래 그룹에서 잘한다는 소리를 들어 왔지만, 성인이 되어서도 제 자리에 안주하지 않았다. 늘 진지하게 훈련에 임했으며 경기에 들어서면 이를 악물고 상대 에이스와 격돌했다. 지는 게 정말 싫었던지라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싸웠으며 결과에 따라 동료들과 울고 웃었다.

모두에게 인정받는 실력과 커리어를 쌓아갈 때 쯤에도 그녀는 뛰고 또 뛰었다. ‘세상에는 정말 농구를 잘하는 사람이 많다.’ 그녀는 앞서나갔던 선배들처럼 자신도 그렇게 되고 싶었다. 선두에서 후배들을 끌어주던 멋진 선배들의 등을 보고 농구에 대한 열정을 더욱 키워나갔던 기억을 잊지 않고, 언젠가는 자신도 누군가의 등이 되고 싶었다. 선수 생명을 위협할 만큼 큰 부상을 입었을 때도 농구를 포기하지 않고 재활에 대한 의지를 불태웠던 이유다.

부상 후유증 등으로 프로 무대에서의 활약은 짧고 미비했지만 한창 때를 보냈던 농구대잔치 시절 그리고 국가대표로서 오랜 시간 동안 활약해온 그녀의 커리어를 낮게 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대한민국 여자농구 역사의 레전드 중 한 명으로 인정받기 시작한 것을 비롯 자신이 예전에 그랬듯 많은 후배들이 그녀의 등을 보며 꿈을 키워나가기 시작했다. 그녀의 유니폼 뒷부분에는 ‘천은숙’이라는 이름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항상 즐거웠던 것만은 아닌 시련과 아픔도 많았지만 그녀에게 농구와의 만남은 운명 그 자체였다. 농구를 떠나서는 삶을 논할 수 없는 천상 농구인 ‘천장군’ 천은숙의 농구 인생을 <농구人터뷰>가 함께 따라 가보았다.

Q.어떻게 지내십니까?
현재 국가대표선수협회 사무처장 겸 상임이사로 활동하고 있고요. 농구 교실도 하고 있는데 코로나19 때문에 쉬고 있다가 다시 문을 열었습니다. 마스크를 쓰고 방역지침도 잘 지키고는 있으니 걱정 안하셔도 될 것 같아요.

Q.농구 교실, 동호인농구, 심판 활동 등 은퇴 후에도 꾸준하게 농구공을 잡으신 것으로 알고 있어요.
심판활동은 현재는 하지 않고 있고요. 농구는 본래 저의 분신 같은 존재니까 승패에 관계 없이 즐기는 형식으로 계속했었죠. 하지만 역시 코로나19로 인해 거의 못하고 있다고 보면 돼요. 개인적으로 코로나19로 인해 가장 힘든 것 중 하나가 농구를 하기가 어려워졌다는 것도 포함될 것 같아요.

Q.은퇴 후에 대불대학교에 입학하여 선수로 뛰기까지 하셨어요.
원래는 예정에 없었어요. 아마도 그 학교 농구부가 창단을 했던 것 같아요. 어느 날 선배 언니한테 연락이 왔더라고요. 제가 사는 곳과 거리도 있고 해서 처음에는 거절을 했어요. 하지만 언니가 일부러 저를 찾아오기도 하는 등 너무 마음을 써주셔서 결국은 가게 되었죠. 공부도 할 겸 겸사겸사 가게 된 거죠.

Q.아무리 은퇴를 했다 해도 선수로 뛰셨으면 생태계 파괴급이었을 것 같아요.
아니에요. 그때는 현역 때와는 몸 상태도 다르고 부상 후유증으로 운동능력도 많이 줄어든 상태라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어요. 다만 오랫동안 농구를 해온 경험과 기술이 있으니 함께 뛰던 선수들보다 살짝은 나았겠죠(웃음).

Q.운동선수들이 은퇴 후에 살이 찌는 경우가 많은데 현역 때와 큰 차이가 없는 몸을 유지하는 데는 여전히 운동을 하고 있는 영향이 크겠죠?
글쎄요. 은퇴한 선수 중 살이 찐 케이스가 많을까요? 주변에서는 많이 못 본 것 같아요. 몇 명 생각나는 사람도 있기는 한데(웃음), 일반적으로는 특별히 살이 쪘다 싶은 경우는 많지 않아 보여요. 아무래도 현역 때와 비교하기는 그렇지만 다들 크게 차이는 안나더라고요. 은퇴 후에도 사회활동을 많이 하니까 기본적으로 몸 관리들을 많이 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

Q.인맥이 넓으신 것 같아요. 같은 농구인은 물론 타 종목 선수들과도 교류가 많으신 것 같아요.
아무래도 국가대표 선수협회에 있던 영향이 크겠죠. 이런저런 일을 많이 보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알 수밖에 없죠. 현역 때 선수촌에서 알게 된 선수들도 많고요. 국가대표 선수들끼리는 종목을 떠나서 많이 알고 있기도 해요.

무산된 한국인 최초 WNBA 리거


Q.농구를 시작하시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셨는데 언니의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언니가 농구를 해서 저에게 집에서 드리블도 쳐보라고 권유하고 그랬어요. 해보니까 재미있더라고요. 그래서 따라다니면서 시작하게 됐죠. 언니는 빈혈도 심하고 전반적으로 몸이 너무 약해서 고등학교 2학년 정도까지밖에 못했어요.

Q.장신 포인트가드로 명성을 날리셨어요. 어떤 스타일의 가드였나요?
글쎄요. 저도 아리송해요. 퓨어가드다, 듀얼가드다 구분하기가 쉽지 않은 스타일? 제 입으로 말하기는 부끄럽지만 공격형도 되고 운영형으로 봐도 되지 않을까 싶어요. 1번으로서 시야가 넓은 편이라 리딩을 하면서 필요하다 싶으면 외곽슛도 던지고, 골밑으로 들어가서 포스트업도 하고 팀 패턴에 따라 부지런히 움직였던 것 같아요. 공격참여는 많이 했지만 1차적으로 동료들을 많이 봐주려고 했기 때문에 공격형 가드라 말하기도 그렇고, 정통파 포인트가드라고 하기에도 그렇고…, 나중에 누가 저 대신 평가 좀 해줬으면 좋겠네요.

Q.수비를 잘하셨던 기억이 나요.
엇! 제가 수비를 잘했나요?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구멍까지는 아니었지만 수비를 막 잘한다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아요. 다만 열심히 뛰어다니면서 상대팀 패스를 끊어먹고 열심히 손질을 해서 스틸을 노리기는 했어요. 하지만 종합적으로 두루두루 평가해보면 수비를 잘했다고 자평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Q.역시 장신 포인트가드인 전주원 선수와 라이벌 매치가 치열했던 것 같아요.
아무래도 (전)주원이 역시 본인의 팀에서 에이스 역할을 하다 보니까 맞붙게 되면 치열할 수밖에 없었죠. 주원이가 마음대로 활개 치도록 놓아두면 우리 팀이 힘들어지니까요. 주원이가 공격력이 좋아서 학창시절에는 1~2번을 오갔어요. 그러다가 프로에 오면서 좀 더 경기운영 등에 집중하는 형태로 바뀐 것 같아요. 그렇게 할 수 있다는 자체가 대단한 재능이죠.

Q.‘불사조’, ‘천장군’ 등 여성스러운 외모와 달리 다부진 별명이 따라다녔어요.
하하핫…, 불사조는 제가 부상을 크게 당한 후에도 재기해서 다시 뛰고 그래서 그렇게 별명이 붙은 것 같고요. 천장군은 장군처럼 박진감 있게 힘껏 휘젓고 다녀서 그러지 않았을까요(웃음).

Q.고등학교 때까지는 센터도 보셨을 정도로 다양한 포지션을 오갔다고 들었어요.
당시 기준으로 신장이 좋았던지라 포워드, 센터 등 상황에 따라 이것저것 다 봤죠. 초등학교 때 농구를 시작할 무렵에도 키는 큰 편이었는데 1번 가드를 봤어요. 그러다가 중학교에 올라갔는데, 주전 포인트가드 선배가 있었어요. 저도 경기를 뛰어야 되는데요. 그래서 당시 감독님이 저를 2번 슈팅가드로 자주 기용하셨어요. 그러면서 공격에 대해 더 눈을 뜨게 된 거죠. 중학교 3학년 때는 팀 내에 키 큰 선수가 많지 않아서 센터까지 볼 때도 있었고요. 고등학교 때도 중학교 멤버 그대로 가니까 포지션을 오가는 일이 여전히 많아질 수밖에 없었죠. 가드는 링을 등지고 하는 게 아니라 전체를 보면서 플레이를 하거든요. 이것저것 눈에 다 들어오고 흐름을 읽을 수가 있어요. 그러다 보니 경기를 읽는 눈과 시야가 좋아지면서 다른 포지션을 볼 때도 도움이 많이 되었던 것 같아요.

Q.1990 베이징, 1994 히로시마아시안게임에서 연달아 금메달을 따셨어요. 선수 생활 중 가장 영광의 순간이었을 것 같아요.
그렇죠. 정말 영광의 순간이었죠. 다들 알다시피 중국이 원체 강하잖아요. 당시에는 204cm의 정하이샤 선수도 있었고, 전체적으로 신장이 워낙 좋았어요. 저희는 조직력이 탄탄했고요. 때문에 한국하고 경기를 치르면 어느 쪽이 이기든 점수 차이가 크지 않았어요. 정말 치열했죠. 더욱이 베이징 때는 적지에서 그런 강호를 누르게 된 거라 정말 감동이었어요. 주축으로 뛰었던 히로시마도 물론 기억에 남지만 베이징 때는 막내급으로 참여해서 그런지 지금까지도 당시의 격렬했던 순간들이 머리에 강렬하게 남아있어요.

Q.1996년 겨울 농구대잔치에서 아킬레스건이 끊어지는 부상을 당하셨어요. 그로 인해 한국인 1호 WNBA 진출도 물거품이 됐습니다.
당시 미국 농구인들과 교류를 하면서 아카데미 같은 것을 코오롱에서 개최를 하고 그랬어요. 그중 나이 지긋하신 유명한 미국 지도자분들께서 제가 플레이하는 것을 보고 ‘가드로서의 움직임이나 패스 감각 등이 좋다. 미국에서도 충분히 통할 것 같다’고 칭찬을 많이 해주셨어요. 정주현 코오롱 감독님이 미국을 오가면서 WNBA 진출이 구체화됐고, 1996시즌이 끝나고 미국으로 건너가 WNBA 입단 테스트를 받을 예정이었어요. 그런데 시즌 중에 덜컥 아킬레스건이 끊어져 버리면서 모든 게 물거품이 되고 말았죠. 사실 이전부터 아킬레스건 쪽이 좋지는 않았어요. 염증이 생기고 부어오르고 종아리가 뻑뻑한 느낌이 들고요. 지금 생각해보면 절대적으로 휴식이 필요했는데 시즌은 시즌대로 치르면서 온갖 국제경기를 다 소화하다 보니까 쉬질 못했죠. 하지만 아주 심각하게는 생각 안 했는데 염증은 점점 커지고, 어느 순간 과부하가 걸리니까 경기중에 끊어져 버렸어요.

Q.WNBA 진출 무산은 물론 다음 해에는 코오롱 유니폼까지 벗었습니다. 상실감이 굉장히 컸을 것 같아요.
아킬레스건이 끊어지고 수술한 이후 일본에 가서 재활을 했었거든요. 코치 경험도 쌓고요. 이후 한국에 돌아왔는데 IMF도 터지고, 이래저래 시기적으로 뭔가 좀 안 맞았던 것 같기는 해요. 새로운 단장께서 코오롱에 오셨는데 정주현 감독님을 내보내려고 하셨던 것 같아요. 그 과정에서 저랑 일부 고참급 선수랑 해서 같이 묶어서 쫓아낸 거죠. 당시 저는 아무것도 몰랐어요. 깁스를 한 채 집에서 쉬고 있는데 어느 날 스포츠 일간지에 제가 은퇴하고 새로운 인생을 산다는 식으로 기사를 냈던 것 같아요. 너무 어이가 없어서 기사를 쓴 기자님에게 전화를 드리니 답변하기가 곤란하다고 회사로 알아보라는 거에요. 그래서 확인해보니 새로운 단장과 감독이 계획 하에 그렇게 일을 진행했더라고요. 제가 정주현 감독님 라인이라서 그랬다는 것 같은데 저는 일개 선수일 뿐인데 무슨 라인이 있었겠어요. 설사 조금 불편하게 느껴졌다 해도 과정을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니지 싶어요. 최소한의 예의라는 것이 필요하잖아요. 본인도 모르는 은퇴가 어디 있습니까. 깁스를 하고 목발을 짚고 회사 본사로 쳐들어갔어요. 무교동에 있었거든요. 많이 다퉜죠. 매일같이 가서 싸우다시피 하니까 기사에도 상황이 나오고 좀 시끄러웠습니다. 이렇게 된 것 동의서라도 해달라고 했죠. 사실 당시에는 동의서라는 개념이 없었거든요. 결국 동의서를 해주겠다고 해서 받고 나와 일본으로 가버렸어요. 재활도 하면서 독자노선을 가게 된 거죠. 상황이 그렇게 복잡하고 힘들었어요. 배신감도 많이 느꼈고요.

Q.프로 생활을 길게 가져가지 못한 배경에는 부상의 영향도 있었을까요?
그게 제일 컸죠. 부상만 없었다면 WNBA 가서 테스트도 받았을 것이고, 기량도 유지했던지라 팀 내에서의 대우도 달랐을 것 같아요. 사실 이전부터 코오롱에서 코치 이야기도 있었거든요. 결국 부상으로 인해 모든 것이 단절되고 힘들어졌던 것이죠.

Q.선수 천은숙에게 가드란 어떤 의미일까요?
사령관이죠. 어떤 면에서는 안방마님 같은 개념이에요. 전체를 돌아보면서 나로 인해 다른 선수가 득점을 하게 만들어주고 상황에 따라서는 직접 나서기도 하는!? 어릴 때부터 많은 포지션을 오가기는 했지만, 지금의 저를 만들어준 자리이기도 하고 어느 포지션보다도 애착이 많이 가는 것 같아요. 기량뿐 아니고 성격적으로도 담대해야 돼요. 경기를 하다 보면 실책도 하게 될 때가 있는데 마음은 복잡해지지만 빨리 털어낼 필요가 있어요. 괜히 담아두고 있다가 다음 플레이에 영향을 주면 팀원들에게 두 번 미안해지는 것이죠. 농구는 흐름에 민감한 스포츠잖아요. 가드가 그런 조절을 잘해줄 필요가 있어요.

여자 프로야구가 존재했다면?


Q_2015년 당시 ‘한스타 여자 연예인 야구단’이 만들어졌고, 거기에서 맏언니로 리더 역할을 맡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야구라는 종목 자체를 좋아했어요. 보는 것도 즐겼고요. 당시에는 여자 야구에 대한 개념 자체가 거의 없던 시기잖아요. 그러던 중 여자 연예인 야구단을 한다고 해서 재미있을 것 같아서 참여하게 되었죠. 농구는 실내 스포츠잖아요. 반면 야구는 실외에서 하는 것인지라 그러한 차이점도 직접 느껴보고 싶었어요. 실제로 해보니 무척 재미있기도 했어요. 배우, 모델, 가수, 개그맨, 치어리더 등 다양한 분들과 함께했었죠. 이후 그 팀은 없어지고 따로 나와서 새로운 팀에서 야구를 이어갔는데 코로나19가 터지면서 잠정휴업 중이네요.

Q.야구는 처음 해봤던 것인가요?
그렇죠. 팬으로서 좋아하긴 했지만 경험해보지 못한 스포츠라는 게 당시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가장 큰 이유였고요. 타격이 쉽지 않더라고요. 각자 자신에게 맞는 타격폼이나 자세 등이 있잖아요. 그게 단시간에 만들어지기는 어렵죠. 단 수비는 공을 받고 그런 부분에서 아무래도 제가 나은 부분이 있는지라 1루수를 봤었습니다.

Q.아, 의외네요. 아무래도 운동감각이나 경험 등에서 많이 앞서는지라 유격수 등 좀 더 어려운 포지션을 봤을 것 같았거든요.
당시 야구단은 저를 포함해서 야구를 해본 경험이 거의 없는 사람들이잖아요. 운동 자체가 익숙하지 않은 분들도 있었고요. 그런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공을 던지고 받는 것이에요. 화려한 유격수 수비가 필요한 것이 아니죠. 공을 안정적으로 받아줄 수 있는 역할이 우선이었던지라 1루수를 권유받았어요. 사실 투수 얘기도 있기는 했었는데, 선수 때 워낙 어깨를 혹사시키고 다친 경력도 있는지라 힘들다고 말씀드렸어요.

Q.직접 몸으로 느낀 야구와 농구의 차이점이 궁금합니다.
공의 크기는 다르지만 둥근 공을 가지고 하는 스포츠잖아요. 다만 농구는 공을 던져야 하는 것이고, 야구는 쳐서 멀리 보낼수록 좋잖아요. 농구는 끊임없이 움직여야 하고 야구는 멈춰있다가 순간적으로 힘을 쏟아 부어야 되는 상황이 많고요. 같은 구기 종목이지만 힘과 기술을 소모하는 방향이 각각 다른 스포츠죠. 농구선수나 야구선수 보면 체형도 다르잖아요. 각자의 특성에 맞게 만들어진 거죠.

Q.여자 프로야구가 존재했다면 야구선수로서도 성공했을 것 같은가요?
종목 자체에서는 차이가 있겠지만 당시 농구를 하던 근성이라면 어느 정도는 했을 것 같아요. 운동은 재능도 중요하지만 정말 독하게 훈련하고 견디어내는 끈기가 있어야 해요. 버티고 또 버티면서 자신의 한계를 넘어가는 과정을 거쳐봐야 재능이 있는지 발전 가능성이 있는지 등을 알 수 있다고 봐요. 그렇게 하기까지가 정말 어렵죠.

“독신주의자는 아니고요”


Q.현재 솔로이신 것으로 알고 있어요. 어쩌면 지겹도록 들으셨을지 몰라서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이유를 물어봐도 될까요? 저는 자상한 부분들이 느껴지거든요.
자상한 부분도 있겠지만 결단력도 강하고 잘못된 부분에 대해서는 맞다, 아니다가 너무 확실해요. 정직하지 못한 것도 매우 싫어하고요. 아니다 싶을 때는 저보다 연세가 한참 많으신 분들에게도 할 말은 하는 편인지라 호불호가 갈리는 성격 같기는 해요(웃음). 제가 지켜줘야 하는 사람들은 책임감을 가져서라도 지켜주려 하는데 잘못된 부분에 대해서는 두고 보지를 못해요. 다소 욕을 먹더라도 감수하고 맞서는 성향이 있어요. 아마도 맞다, 아니다가 분명한 성격도 영향을 끼치지 않았나 싶습니다. 제가 솔로로 있는 것은 독신주의자라 그런 것은 아니고, 아직 결혼하고 싶다고 생각한 사람을 못 만난 부분이 크겠죠. 사람을 만나도 마음 깊은 곳까지 이어져 결혼을 약속하거나 그런 쪽으로 되지 않았어요.

Q.언젠가 어머니 농구대회에도 출전하셨어요. 어떻게 된 일이죠?
원래는 대불대학교에 있을 때라 어머니 농구대회 등이 있다는 것도 몰랐어요. 그러던 중 부산에 있던 선배님에게서 연락이 왔어요. 어머니 농구대회가 있는데 출전할 생각이 있냐고요. 그때 제가 30대 후반이어서 나이상으로는 별문제가 없었거든요. 다만 문제는 어머니 농구대회는 말 그대로 어머니만 나가야 되는 거잖아요. ‘결혼을 안 했는데 어떻게 나가요?’라고 물어봤어요. 그 결과 저를 비롯한 일부 사람들 때문에 룰이 바뀌게 되었어요. 결혼 유무로 출전자격을 부여하는 것이 아닌 30대 중반을 지난 사람은 출전할 수 있게 나이로 끊어버린 것이죠. 어찌 보면 이것이 더 공평한 것 같기도 하고요. 20대들이 출전하셔서 30~40대랑 경기를 하면 차이가 좀 커질 수도 있겠죠. 결국 그래서 제가 합류하게 되었는데 당시에 반대 의견도 좀 있었던 것 같아요. 결혼 유무가 아닌 천은숙의 합류가요. 선수 출신이 많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국가대표까지 했던 사람이 들어온다는 것이 살짝 부담스러웠던 것 같아요. 하지만 참가인원도 많지 않고 그래서 경기를 뛸 수 있었어요.

Q.왕년에 따라다녔던 남성들도 좀 있으셨을 것 같은데, ‘에이, 그냥 모르는 척 받아줄걸’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나요?
아니요. 그렇지 않았어요(웃음). 지금은 사회생활도 하고 노력도 하면서 성격이 좀 바뀌었지만, 당시에는 단호하고 확실하면서 내성적이기까지 했어요. 좋다, 나쁘다가 지금보다도 더 분명했던 때죠. 거기에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을 부담스러워할 정도로 낯을 많이 가렸어요. 남녀를 떠나서 익숙하지 않은 사람과 쉽게 친해지질 못했던 거죠.

Q.선호하는 남성상이 궁금합니다.
대화가 잘 통하고, 운동도 좋아해서 같이 즐길 수 있으면 좋겠죠. 특별히 무슨 조건을 따지기보다는 그런 면에서 맞았으면 해요.

해보고 싶은 꿈, 농구 감독

Q.최근 가장 즐기는 취미생활은 무엇일까요?
요즘 같은 시대에 즐길 수 있는 취미생활이 있을까요(웃음). 주로 이런저런 운동을 즐겼지만 야외 활동 자체가 쉽지 않은지라 꽤 오랫동안 못하다시피하고 있죠. 그나마 등산을 해보려고 하는데 이런저런 일 때문에 그마저도 못간지 좀 됐어요. 최근에는 있던 취미생활도 없어지게 된 것 같아요.

Q.다부진 일면 뒤에 여성스러움도 많으실 것 같아요. 요리 솜씨는 어떠실까요?
솔직하게 얘기하면 아무래도 혼자 있고 집에 있는 시간보다는 밖에 있는 시간이 많다 보니까 요리를 거의 하지 못하게 되는 것 같아요. 많이 해보지도 못했고 잘하는 편도 아니에요. 구태여 꼽아보라면 해신탕 있잖아요. 닭에 해산물, 전복 등을 넣어서 끓이는 것, 그건 맛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그 외에도 국거리 같은 것은 그런대로 할 수 있어요. 하지만 많은 경험이 필요한 반찬류는 서툴러요.

Q.코로나19로 인해 예전만큼 바깥 활동을 못하실 것 같아요.
일 때문에도 그렇고 사람을 많이 만나야 맞지만 현 상황에서는 그렇게 하기 힘들잖아요. 일적으로 만나더라도 예전처럼 식사를 하는 것은 다들 자제하는 분위기고요. 인간관계의 상당 부분이 단절된 것 같은 느낌이에요. 하지만 모두가 고생하고 있는 시기니까 함께 감수해야죠. 나 하나 편하자고 막 함부로 행동하고 그러면 안 될 것 같아요.

Q.여러 가지를 하고 계신데, 앞으로 일정이 궁금합니다.
현재 체육회 쪽에서 일을 하고 있기는 한데 저도 농구인이니까 농구 감독을 한번 해보고 싶은 꿈은 있어요. 그간 머릿속에서 그려왔던 이런 저런 것들을 한번 펼쳐보고 싶은 거죠. 물론 그런 기회가 올지는 미지수겠지만요. 더불어 몸 닿는 데까지 체육 쪽으로 보탬이 되는 일을 하고 싶어요. 일단 떠오르는 것은 그 두 가지 뿐이네요.

Q.마지막으로 선수 천은숙을 기억하고 여전히 응원해주는 팬들에게 인사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저도 가끔 선수 시절의 천은숙이 그립거든요(웃음). 제가 정말 저렇게 열정적으로 코트를 뛰었나 싶어요. 지금도 저를 기억해주시는 분들께는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아무래도 현재 체육회 쪽 일을 하고 있다 보니 선수 천은숙과 오버랩해서 보시는 분들도 많으세요. 선수 시절의 좋은 기억이 망가지지 않도록 최대한 성실하게 일을 하도록 노력할게요. 농구선수 천은숙 뿐 아니라 행정가로서의 천은숙도 지켜봐 주세요. 운동 쪽의 부조리나 잘못된 점을 고칠 수 있는데 조금이라도 힘을 보태고 싶습니다. 체육발전을 위해 늘 노력할게요. 우리 모두 힘든 시기지만 함께 힘내요.

#글 / 김종수 칼럼니스트
#사진/ 본인 제공

◇ 필자는 농구대잔치 시절부터 농구를 사랑하던 오랜 팬으로 2002-2003년 본지에 농구 무협소설 '해동전설(海東傳說)''을 연재한 바 있으며 데일리안, 홀로스, 올레, 오마이뉴스 등 다양한 인터넷 매체에서 스포츠 객원기자로 활동한바 있다. [김종수의 농구人터뷰]를 통해 전현직 농구인들의 이야기를 다양한 시각으로 다룰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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