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유희형의 나의 삶 나의 농구⓽ 1971년 요요기 체육관에 흘러내린 눈물

민준구 / 기사승인 : 2021-07-05 16: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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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회 아시아 남자농구선수권대회가 1971년 10월 30일부터 11월 10일까지 일본 도쿄에 있는 요요기 체육관에서 열렸다. 1972년 뮌헨올림픽 출전권이 걸려있는 중요한 대회였다. 남자농구 대표팀이 불과 10개월 전 방콕 아시안게임에서 이스라엘을 꺾고 우승했기에 이번에도 모두 1위를 예상했다. 국내 언론에서도 우승은 떼어 놓은 당상이라고 떠들어댔다. 우리 대표단도 자신만만했다. 1970년 아시안게임 우승 멤버에서 은퇴 선언한 최고참 김영일 선수 한 명만 빠진 상태였다. 김영기 감독은 허리 디스크로 인해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대신 얼마 전까지 선수로 뛰었던 김영일 선배가 지휘봉을 잡았다. 선수단은 신동파, 이인표, 김인건, 신현수, 최종규, 박한, 곽현채, 유희형, 이자영, 강호석, 차성환, 최경덕이었다.

악재 겹친 대표팀, 도쿄에서 위용 잃다
호화 멤버에 탄탄한 전력을 가졌기에 우승의 꿈을 가지고 경기에 돌입했다. 초반부터 경기가 풀리지 않았다. 플레이에 자신이 없었다. 자만심 때문인가? 경기다운 경기를 하지 못했다. 필리핀에 80-88로 패했고, 최종전인 일본에도 68-76으로 졌다. 결과는 3위, 최악의 성적이었다. 뮌헨올림픽 출전도 좌절되었다. 그 후 남자농구의 올림픽 출전은 멕시코시티올림픽 이후 20년 만인 1988서울올림픽 때 이루어졌다. 주최국의 자동출전권 덕분이었다. 한국 최고의 명문 경기 중·고를 나온 농구계 최고 엘리트인 김영일 선배의 국가대표 감독 데뷔전은 실패로 끝났다. 불행하게도 그분은 5년 후 기차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대표팀이 일본으로 떠나기 전 국내훈련에서부터 악재가 많았다. 부상 선수가 속출했다. 나도 허벅지 근육 때문에 수술을 받았다. 불길한 징조가 현실로 나타났다. 일본, 필리핀에 이어 3위를 했다. 일본과의 최종전에서 이기면 1위를 할 수 있었다. 초반부터 리드를 당했고, 심판 판정도 편파적이었다. 외국에서 맞붙으면 우리와 20점 이상 차이가 났던 일본팀인데 홈코트에서 유독 강했다. 결국 8점 차로 패하고 말았다.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일본에 패하고 체육관 복도를 걸어 나오는데 비통한 광경이 기다리고 있었다. 교복을 입은 200여 명의 재일본 한국 여학생들이 우리 선수들을 보고 통곡을 하는 것이었다.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러내려 눈물바다를 이루었다. 이국땅 일본에서 한국 국적으로 살아가면서 얼마나 많은 설움과 괄시를 받았기에, 일본에 이겨주기를 그토록 염원했던가? 우리는 그들의 간절한 소망을 소홀히 했다. 부모님의 고집 때문에 한국인으로 살면서 보이지 않는 일본인의 멸시를 꾹 참고 살아온 울분을 풀어줄 줄 알았는데…. 귀화의 유혹을 뿌리치고 한국인으로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살아왔기에 일본의 콧대를 꺾어주기를 그들은 원했다. 복수해 주길 기대했다. 한국인의 우수성을 자랑하고 싶었다. 일본의 교만함을 농구코트에서 통쾌하게 눌러주길 바랐다. 흐르는 눈물을 흰색교복 옷고름으로 훔치는 학생들 모습에 가슴이 미어질 것 같았다. 우리 선수들은 고개를 떨구며 ‘미안하다, 미안하다’를 속으로 외쳤다. 용기를 잃지 말고 힘차게 살아다오. 다음에는 꼭 일본을 통쾌하게 이겨주겠다고 다짐했다.

일본전 패배로 눈물바다…재일교포 여학생에 “미안하다”

한 명의 공백이 그렇게 큰 것인가? 신동파, 김인건, 이인표, 등 주전선수가 건재했다. 센터인 김영일선수 자리는 박한, 최종규 등이 메웠다. 결과는 저조했다. 필리핀에도 패했다. 득점기계라는 별명까지 얻은 신동파 선배가 묶였다. 필리핀은 항상 전문 수비선수를 만들어낸다. 몇 년 전에는 ‘오캄포’ 이번에는 ‘프레디 웹 선수가 있었다. 웹은 손과 발이 무척 빠르고 민첩했다. 신동파에게 공을 주기가 힘들었다. 골게터가 막히니 고전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패했다. 웹은 그 후 필리핀에서 상원의원까지 했다.

대만에도 고전했다. 대만과의 시합 도중 심판이 부상으로 교체되는 일도 있었다. 선수 생활 중 처음 겪어보는 일이었다. 다리 근육이 손상되어 걷지 못했고, 다른 심판이 투입되었다. 두 차례 연장전을 했다. 첫 번째 연장전 마지막 2초 전 곽현채가 자유투를 얻었다. 2점을 지고 있어서 모두 넣어야 2차 연장전에 들어간다. 작전타임에 곽선수가 감독에게 얼굴이 하얗게 질린 모습으로 말했다. “자유투 하지 말고 스로인하면 안 되나요?” 당시에는 선택권이 있었다. 2초는 득점할 수 없는 시간이다. 감독이 다독였다. ‘안 들어가도 괜찮다. 마음 놓고 던지라’라고 했다. 두 개 모두 넣었다. 2차 연장전에서 여유 있게 승리하며 3위를 했다. 하마터면 4위로 추락할 뻔했다.

대회 뒷풀이 도중 “야쿠자가 떴어요”

대회가 끝났다. 선수단 모두 반성했고, 화가 났다. 푸는 방법은 술밖에 없다. 나와 박한 등 몇 명의 선수가 시내에 나갔다. 일본말 잘하는 교포 학생이 안내했다.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아 싸구려 술집에서 마셔댔다. 술을 들이부었다. 만취 상태에서 마지막으로 춤추는 장소에 들어갔다. 혼자 춤추는 일본 여자에게 접근해 추근거렸다. 분을 삭이기 위해서다. 교포 학생이 사색이 되어 외쳐댔다. ‘빨리 나가요. 큰일 났어요. 야쿠자가 떴어요!’ 정신이 번쩍 나 줄행랑을 쳤다. 계단을 3개씩 뛰어 올라갔다. 강훈련으로 단련된 순발력과 빠른 몸놀림으로 위기를 모면했다. 일본은 구역 담당 야쿠자가 유흥업소를 보호해 주고 정기적으로 상납을 받는다고 한다. 영업 방해자는 순식간에 칼로 허벅지를 찌른다고 하니 큰일을 당할 뻔했다.

한숨을 돌리고 나서 한 잔을 더 했다. 그 순간 붉은 것이 떠올랐다. 박한 선배가 물었다. ‘저것이 해냐? 달이냐?’ 아무도 대답을 못 했다. 자세히 보니 해였다. 술을 밤새껏 마신 것이다. 숙소에 돌아와 짐을 챙긴 후 귀국했다. 국민의 정서도 냉담했다. 일본은 무조건 이겨야 한다는 외침이 있었다.

승부의 세계는 냉정하고 냉혹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꼈다. 2년 전 방콕 아시아선수권에서 우승했을 때 극진하게 환대받았던 재일동포들을 볼 수가 없었다. 일본에 패했기 때문이다. 쓸쓸하고 외로웠다.

2년 후 필리핀에서 열린 아시아농구선수권대회에서 일본을 20점 차로 물리쳤다. 일본 교포 학생들의 한을 조금이나마 풀어주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50년 전 눈물을 흘렸던 학생들이 이제는 60이 넘은 할머니가 되어 있을 것이다. 인생무상을 느끼지만, 아직도 그들의 눈물을 잊을 수가 없다.

# 사진_ 본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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