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최창환 기자의 바스켓볼 슈가맨 - 김일두가 달리는 인생 2막

최창환 기자 / 기사승인 : 2021-11-22 12:5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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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프볼=최창환 기자] 스스로는 “결이 달라요”라며 부인하지만, 농구계 관계자들에 따르면 김일두는 서장훈의 뒤를 잇는 ‘깔끔남’ 가운데 1명이다. 손님이 떠나면, 머문 자리를 곧바로 청소해야 직성이 풀리는 스타일이다. 그런 김일두가 먼지, 톱밥이 흩날리는 공방을 운영한다고? 지인들도 우려를 했단다. 하지만 김일두에게 ‘소년공방’은 어느덧 떼려야 뗄 수 없는 삶의 일부분이 됐다. “‘그 마인드면 농구교실을 해도 잘 되겠다’라는 제안도 있었지만, 이미 농구계 선후배들이 많이 하고 있잖아요. 남들이 걷지 않은 길을 걷고 싶더라고요”라고 말한 김일두에겐 자부심과 철학이 있었다. 

 

※본 기사는 농구전문매거진 점프볼 11월 호에 게재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신데렐라 스토리 쓰나 싶었는데…
신인이 점프볼 표지를 장식한다는 건 둘 중 하나다. 그만큼 기대치가 크거나, 시즌 개막 후 대단한 활약상을 펼치고 있다는 의미다. 11월호 표지 모델 중 1명인 두경민은 심지어 한국가스공사로 이적한 후에야 프로 데뷔 첫 점프볼 표지 촬영을 할 수 있었다. 신인의 점프볼 표지 장식. 그 어려운 일을 해낸 선수 가운데 1명이 김일두였다. 2005 신인 드래프트 전체 6순위로 창원 LG에 지명된 직후 지명권 양도에 의해 서울 SK로 트레이드된 김일두는 2005-2006시즌 개막을 앞둔 2005년 10월에 전희철, 조상현, 임재현 등 쟁쟁한 스타들과 함께 점프볼 표지를 장식했다. 김일두는 브루나이 전지훈련에서 경쟁력을 보여줘 김태환 당시 SK 감독의 눈도장을 받았고, 명예 회복을 노리는 SK의 미래로도 평가받았다. “신인 연봉 상한선이 9000만 원이었는데 제가 8000만 원을 받았어요. 당시 6순위 역대 최고 연봉이었을 거예요. 팀에서도 ‘한상웅을 3순위로 뽑았지만, 장기적으로 봤을 땐 네가 3순위다’라고 말씀해주셔서 고마웠죠. 어릴 때부터 우러러본 전희철, 조상현, 임재현 선배와 함께 표지라니…. 그 책은 여전히 잘 간직하고 있어요. SK 숙소도 10개 팀 가운데 가장 좋은 수준이었기 때문에 매일 매일 꿈을 꾸는 듯한 기분이었죠.”


프로선수로서 김일두의 출발은 순조로웠다. 데뷔 2경기만이었던 2005년 10월 23일 KTF(현 KT)와의 홈 개막전에서 3점슛 5개 포함 19점을 올리며 강렬한 인상을 심어줬다. SK도 개막 2연승으로 시즌을 출발했다. 하지만 SK는 개막 5경기 만에 암초를 만났다. 평균 27.2점으로 활약했던 게이브 미나케가 불의의 무릎부상 이후 수술대에 올라 시즌아웃된 것. 에이스를 잃은 SK는 이후 패배에 익숙한 예년과 같은 전철을 반복했고, 김일두도 발목부상을 입었다. 2001-2002시즌 챔피언결정전 준우승 후 3시즌 연속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 명예 회복을 내걸었던 SK는 재빨리 승부수를 띄웠다. KTF와의 빅딜을 통해 NBA 무대에 도전 중이었던 방성윤을 영입했고 이후 약 2개월 만에 문경은까지 손에 넣으며 쌍포를 구축했다. 김일두는 SK가 문경은을 영입하기 위해 전자랜드에 트레이드 카드로 넘겨준 선수 가운데 1명이었다. 김일두는 임효성과 함께 전자랜드로 향했다. 

 

“전자랜드전에서 발목을 다쳤는데, 그때 레이업슛 이후 착지 과정에서 충돌했던 선수가 (문)경은이 형이었어요. 공교롭게 그 대상과 트레이드된 거죠. 휴대폰이 고장 나서 A/S 맡긴 후 켜보니 부재중 전화가 엄청 와있더라고요. 그날이 트레이드된 날이었죠.” 문경은은 김일두와 트레이드된 후 2009-2010시즌까지 현역으로 뛰었고, 2군 감독과 감독대행을 거쳐 2020년까지 SK의 감독을 맡았다. 반면, 김일두에게 데뷔 첫 트레이드는 좌충우돌 커리어의 시작점이 됐다. 김일두는 전자랜드 합류 후 발목수술을 받으며 시즌아웃 됐다. 집도의는 미국, 독일에서 명성이 자자했던 토파스 파이퍼였다. 재활을 거치며 재기를 다짐했지만, 김일두의 행선지는 인천이 아닌 안양이었다. 최희암 감독이 새롭게 지휘봉을 잡은 전자랜드는 신예가 아닌 검증된 중고참급의 선수들을 원했고, 일련의 과정을 통해 황성인-조우현-김성철이 가세하며 전혀 다른 팀이 됐다. 안양 KT&G(현 KGC인삼공사)에서 FA 자격을 취득, 전자랜드에서 새출발하게 된 김성철의 보상선수로 지목된 선수가 바로 김일두였다.

‘달리고 달리고’ 런&건의 조각이 되다


데뷔 2년차 시즌에 성장통을 겪었던 김일두는 유도훈 감독 체제로 본격적인 출발을 알린 KT&G에서 2007-2008시즌 전환점을 맞았다. 주희정과 황진원, 양희종을 주축으로 팀을 개편한 유도훈 감독은 런&건을 팀 컬러로 내세웠고, 슈팅능력에 골밑수비력을 두루 갖춘 김일두는 빅맨이 부족한 KT&G에 없어선 안 될 조각이었다. 마퀸 챈들러의 화력을 더해 ‘육상농구’의 진수를 보여준 KT&G는 4강에 진출했고 김일두는 식스맨상을 수상하며 농구인생의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그때가 최전성기였던 것 같아요. 챈들러 효과를 많이 봤죠. 2년차 시즌에 못했던 부분을 만회하기 위해 정말 열심히 준비했어요. 유도훈 감독님의 훈련이 너무 힘들었지만, (주)희정이 형이 잘 챙겨주신 덕분에 버틸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유도훈 감독님이 2007-2008시즌 개막 전 공식 인터뷰에서 ‘김일두를 주목해야 한다’라는 말씀도 하셨었죠. 그 시즌은 달력 보면서 하루하루에 대해 다 얘기할 수 있을 정도로 뇌리에 깊이 남아있어요.” 

 

김일두에게 ‘해머’라는 별명이 생긴 것도 이때쯤이었다. 블루워커로 살아남는 법을 터득한 김일두는 2008-2009시즌에도 이현호와 역할을 분담하며 KT&G 특유의 런&건에 활력을 더했고, 공익근무로 군 복무를 대체한 후에는 우승반지까지 손에 넣었다. 간판을 바꾼 KGC는 2011-2012시즌을 마지막 퍼즐인 오세근의 합류로 이른바 ‘인삼신기’를 결성한 터였다. KGC는 2011-2012시즌 정규리그 2위에 이어 챔피언결정전에서 난공불락으로 여겨졌던 동부(현DB)를 4승 2패로 제압, 새로운 챔피언의 탄생을 알렸다. “높이에 약점을 갖고 있는 팀이었는데 (오)세근이가 입단해서 전력이 더 탄탄해졌죠. 저는 원래 주전이 아니었기 때문에 별다른 문제가 없었고요. 세근이가 프로에 적응한 후에는 없던 출전시간마저 반토막 났지만, 그래도 우승반지 따낸 걸로 보상받았다고 생각해요.”

위기는 소리 없이 찾아온다


2011-2012시즌 종료 후 FA 자격을 취득, KGC와 2억5000만 원에 재계약한 김일두는 2012-2013시즌에 예상치 못한 주전으로 올라선다. 발목수술을 받은 후 회복세가 더뎠던 오세근이 시즌아웃 판정을 받게 된 것. 하루아침에 주전 센터를 잃은 KGC에 큰 위기가 찾아왔지만, 위기 뒤엔 곧 기회가 찾아오는 법. 김일두는 동부를 상대로 치른 2012-2013시즌 개막전에서 승부처인 4쿼터에 10점을 몰아넣는 등 15점으로 활약, KGC에 시즌 첫 승을 선사하며 경기 MVP로 선정됐다. 

 

“오프시즌 때 치른 연습경기에서 제가 그렇게 못할 수가 없었어요. 이상범 감독님께 ‘큰 돈 만지게 됐다고 이제 열심히 안 하냐’고 엄청 혼났죠. 개막전 때 주전으로 투입될 거란 얘기를 들었는데, 그때부터 자신이 있었어요. (김)주성이 형이 저를 버리고 헬프디펜스한다는 걸 예상하고 있었거든요. 개막전 날 오전운동이 없었는데, 혼자 나와서 슛 연습 진짜 많이 했습니다. 그게 4쿼터에 좋은 슛 감각으로 이어졌던 거죠.” 

 

하지만 갑자기 기회가 찾아왔듯, 위기 역시 예고 없이 찾아왔다. 김일두는 2012-2013시즌이 한창이던 2012년 12월 반월판 손상 판정을 받았고, 또 다시 수술대에 올랐다. 김일두의 농구 인생이 또 한 번 꼬이게 된 결정적 순간이었다. 김일두는 재활을 거쳐 2013-2014시즌에 돌아왔지만, 20경기 평균 5분7초를 소화하는 데에 그쳤다. 이상범 감독마저 시즌 도중 지휘봉을 내려놓는 등 KGC도 팀 안팎에서 소용돌이가 몰아친 시기였다. 김일두는 2013-2014시즌 종료 후 새 출발을 위해 연봉 1억 원 삭감이라는 막대한 손해를 감수하며 KCC 이적을 받아들였지만, 우승후보로 꼽혔던 KCC는 플레이오프조차 못 오르는 수모를 겪었다. 

 

“(김)태술이가 사인&트레이드를 통해 KCC로 간 후 연락이 왔어요. ‘팀이 식스맨을 구하고 있다’라고 해서 ‘나야 가면 좋지’라고 했는데 그게 선수 마음대로 되겠습니까. 그런데 곧바로 천정열 코치님에게서 연락이 왔고, 그날 오후에 트레이드가 확정됐어요. (하)승진이, 태술이랑 같이 뛰면 우승반지 하나 더 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뜻대로 되진 않았어요. 생각지도 못한 (김)민구의 교통사고가 터졌죠. 허재 감독님도 결국 시즌 도중 사퇴하셨고요.”

“눈물 많은 제가 눈물도 안 나오더라고요”


김일두에게 찾아온 시련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KCC가 추승균 감독 체제로 새출발한 2015년 오프시즌. 김일두는 훈련 도중 여태 경험해보지 못했던 골반통증을 느꼈다. 상태는 예상보다 심각했다. 많은 병원에서 검진을 거듭했지만, 골반 괴사라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만 반복해서 들릴 뿐이었다. “인공관절이 들어가면 양쪽 다리 길이가 달라진다고 하더라고요. 원래 눈물이 많은 편인데 그 말 들었을 땐 눈물도 안 나왔어요. 그야말로 준비 없는 이별처럼 은퇴를 결심했죠. 그날 집 근처를 2시간 동안 빙빙 돌다 겨우 집에 들어갔어요.” 끝내 재기에 실패했지만, 김일두에겐 이후 인생 2막이 펼쳐졌다. 김일두는 공익근무 시절 객원으로 올스타게임 해설위원을 맡으며 인연이 닿았던 MBC 스포츠플러스에서 연예인 농구대회 특별 해설위원 제의가 들어오며 다시 마이크를 잡았다. MBC 스포츠플러스와의 인연이 이어진 김일두는 이후 중계방송사가 바뀌기 전까지 KBL 중계를 맡으며 농구 팬들과 호흡했다. 

 

“중계방송사가 바뀐 후 고민을 많이 했는데, 저는 의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공익근무할 때부터 알고 지낸 사이라 MBC 스포츠플러스 PD, 아나운서들을 보면 다 가족, 형님 같아요. 예능 프로그램 섭외도 들어오긴 했는데 전 유명인도 아니고, 제가 실수하면 농구에 대한 이미지가 잘못 심어질 수도 있잖아요. 그래서 농구와 관련된 방송만 나갔었죠.” MBC 스포츠플러스와의 의리를 지킨 김일두는 2021-2022시즌을 맞아 WKBL 해설위원으로 다시 마이크를 잡는다. “KBL 중계할 때 팬 못지않게 안티도 많았어요. 정보 전달뿐만 아니라 재미도 주기 위해 농담도 가미된 해설을 했는데, ‘제멋대로다’라는 얘기를 들었죠. 평가는 겸허히 받아들였어요. 안티도 팬이라 생각했고, 더 공부할 수 있는 계기도 됐고요. WKBL 해설도 했었던 경험을 살려 올 시즌에는 시청자들이 편하게 농구를 이해하고, 안정감을 줄 수 있는 해설을 하고 싶어요.”

‘해머’가 그리는 인생 2막


해설위원으로 다시 농구 팬들을 찾아가게 됐지만, 사실 김일두가 가장 많은 에너지를 쏟고 있는 업무는 따로 있다. 아이들이 사용할 수 있는 특수기계와 도구를 사용한 목공 만들기 작업 공간인 ‘소년공방’의 대표. 김일두에게 가장 중요한 직함이다. “은퇴 후 중국에 가서 교육 관련 사업을 추진했는데, 그때 사드가 터졌죠. 롯데 다음으로 큰 피해를 입은 게 저입니다(웃음). 한국에 돌아왔는데, ‘소년공방’을 운영 중인 고려대 동기에게서 연락이 왔어요. ‘같이 해보자’고요. 제가 목공 관련 일을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어 즉답을 못했어요. 강사 체험한다는 마음으로 시작했는데, 너무 재밌는 거예요. 제가 꼼꼼한 편인 데다 아이들을 좋아하다 보니 생각지도 못한 일이 저에게 딱 맞게 된 거죠. 시간제 강사를 하다 공동대표가 됐고, 이제는 대표까지 맡게 됐어요. ‘소년공방’이 어디까지 확장될지 모르지만, 끝까지 해보려고요.” 김일두가 꼽은 공방의 매력은 아이들과의 소통이다. 

 

“나무가 주재료인 수업이 진행되는데 종이는 잘못 자르면 다시 할 수 있지만, 나무는 되돌릴 수가 없죠. 게다가 아이들이 만들기의 주체가 되다 보니 더 소통을 해야 하고요. 아이들의 상상력은 어른들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풍부해요. 그래서 예상치 못한 작품도 나오고, 치열한 사회와 달리 아이들과 계속 소통할 수 있다 보니 ‘이거구나’ 싶더라고요. ‘그 마인드면 농구교실을 해도 잘 되겠다’라는 제안도 있었지만, 이미 농구계 선후배들이 많이 하고 있잖아요. 남들이 걷지 않은 길을 걷고 싶더라고요.”


‘소년공방’은 코로나19 확산 이후에도 꾸준히 가맹점이 생기고 있다. 어느덧 전국에 18개 지점을 두고 있는 대형 사업체로 성장했다. 김일두가 매일 같이 출석 도장을 찍고 있는 본점은 약 80명의 아이들이 찾고 있으며, 2019년에는 서울 삼성의 도움을 받아 잠실체육관에서 프로모션을 진행하기도 했다. ‘소년공방’이 입소문을 탄 이후, 김일두에게 심심치 않게 전해지는 질문이 있다. “농구 관련된 일을 주업으로 하고 싶진 않으세요?” 사실 기자가 궁금한 바이기도 했다. 

 

“언젠가 농구계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다만 평생 농구를 했다고 은퇴 후에도 꼭 농구와 관련된 일만 할 수 있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은퇴 후 곧바로 지도자가 되는 게 최고의 시나리오지만, 그건 정말 극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일이잖아요. 지금 제가 하고 있는 일이 농구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건 아니지만, ‘소년공방’이 나중에 어떤 방식으로 농구와 연이 닿을지는 모를 일이라고 생각해요. 절대 제가 잘났다는 말은 아닌데요. 은퇴 후 고삐 풀리고, ‘지금까지 치열하게 살아왔으니 이제 좀 게을러져도 돼’라고 생각하는 운동선수들을 보면 너무 안타까워요. 사업, 자영업 하는 분들도 평생을 운동선수처럼 치열하게 살고 있거든요. 누구든 농구를 했던 것만큼 노력하면 무슨 일이라도 새로 출발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깊은 울림을 주는 김일두의 한마디였다.


냉정히 말해 김일두는 고려대 시절, 그리고 신인상 후보로 부상했던 데뷔 초기에 받았던 기대치만큼 화려한 커리어를 쌓진 못했다. 하지만 팀 승리를 위해 자신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인지하고, 이를 코트에서 보여주기 위해 모든 힘을 쏟은 선수였던 것만큼은 분명하다. 취재진을 향해 항상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 풍성한 이야기보따리를 풀어줬던 면모는 ‘소년공방’ 대표가 된 이후에도 변함없었다. “전성기, 식스맨상을 수상할 때에 비하면 마무리가 안 좋았어요. 공익근무 전후의 경기력 차이도 컸고요. 경기력 안 좋을 때 ‘사이클선수’라는 비아냥도 들었고, 잠시 유튜브 활동할 땐 ‘자전거 리뷰나 한 번 해봐’라는 말에 진짜 해볼 생각도 했었어요(웃음). 그래도 KT&G의 런&건 멤버로 기억해주시고, 종종 농구선수였다는 걸 알아보는 분들도 있어서 감사드리죠. 팬들에게 농구를 꾸준히 잘했던 건 아니지만 항상 경기에 열심히 임했던 밝은 선수로 기억됐으면 좋겠어요.” 

BOX_“지도자가 된다면 저도…” 이상범 감독이 풍긴 ‘쿨워터’


김일두는 프로 데뷔 후 김태환, 유도훈, 허재 등 다양한 감독 밑에서 커리어를 쌓았다. 감독을 보좌하는 코치진, 학창시절 스승까지 포함하면 수십명의 지도자들과 인연을 맺었을 터. 이 가운데 김일두가 ‘가장 기억에 남는 지도자’라는 질문에 망설임 없이 꺼낸 이름은 이상범 감독이었다. 김일두는 이상범 감독이 KT&G 코치 시절 처음 사제지간으로 만났고, 이후 감독대행-감독을 거쳐 2011-2012시즌에는 KGC의 창단 첫 우승을 함께 만끽했다. “연락을 자주 드리진 못하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감독님이에요. 코치 시절부터 식스맨들을 세세하게 챙겨준 분이셨죠. 지금의 DB도 그때 그 방식대로 재건하신 것 같아요.” 김일두는 이어 이상범 감독과 관련된 일화도 전했다. 

 

“주말에 백투백, 수요일 부산 원정경기를 가는 일정이었어요. 백투백에서 다 지면, 대부분의 감독님들은 월요일에 절대 휴식을 안 주세요. 그런데 이상범 감독님은 일요일 전자랜드전에서 박살이 났는데, 밤 10시에 선수들을 집합시키시더니 ‘너희 이렇게 숙소에 있으면 정신병 걸려. 나갔다 와. 가서 여자친구도 만나고, 술도 한잔하고 들어와라. 대신 깨끗이 잊어야 된다. 그리고 화요일에 경기 준비하고 부산 내려가자.’ 그 모습이 그렇게 쿨하더라고요. 저도 만약 지도자가 된다면, 이상범 감독님 같은 지도자가 되고 싶어요.”

 

#사진_홍기웅 기자, KBL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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