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LEGENDS] (23) 우리시대 최고의 슈터 문경은

정지욱 / 기사승인 : 2022-06-17 12:1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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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보슈터’ 문경은은 신동파-이충희에서 이어지는 역대 최고 슈터 계보를 잇는 1990년대 대표 슛쟁이다. 190cm에 덩크까지 가능한 탄력 여기에 3점슛이라는 최고의 무기를 장착한 그는 대학시절부터 농구대잔치 무대를 호령하며 스타 반열에 올랐다. 프로에서도 2000-2001시즌 삼성을 우승으로 이끌었으며, KBL 역대 최초로 3점슛 1,600개를 성공시키는 대기록을 남겼다. 역대 2위가 1,152개의 주희정, 3위가 1,116개의 우지원이니 당분간 역대 1위의 주인이 바뀌는 일은 없어 보인다.  


농구대잔치의 오빠
농구 인기가 절정에 달했던 90년대 중반, 연세대 문경은은 농구 붐의 한 가운데에 있었다. 한번 터지면 걷잡을 수 없었던 무차별 3점슛 실력에 잘생긴 외모는 여성 팬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문경은에게는 늘 스포트라이트가 따라다녔다. 그를 영입하기 위한 팀들간의 경쟁도 장난이 아니었다.

Q. 문경은 하면 연세대 시절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대학 시절에는 농구화 신고 유니폼 입는 것만으로도 이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마추어 시절이었지만 드라마 ‘마지막 승부’와 만화 ‘슬램덩크’ 등과 맞물려 청소년들에게 농구가 많은 인기를 누렸다. 그 때는 일반 연예인보다 농구선수들이 더 인기가 많았다. 또한 학생팀이 기아, 현대, 삼성과 같은 실업팀을 이기는 모습이 팬들에게 신선하게 여겨졌던 것 같다.

Q. 그땐 정말 농구 할 맛 낫을 것 같다.
연세대 경기가 있는 날엔 학생체육관에 빈자리가 없었다. 체육관에 못 들어오시는 분들이 체육관에 입장한 인원정도가 되었으니…. 입장하기 위해 서로 밀치다가 유리창이 깨지기도 하고 암표도 많이 돌았다. 워낙 열기가 뜨겁다 보니 정말 농구 할 맛이 낫다. 지금은 케이블 방송이 있지만, 그때는 공중파가 전부여서 방송에서도 농구를 많이 다루었다. 당시 인기 때문에 지금은 김주성, 김승현, 김태술, 방성윤 같은 선수들이 있지만, 그 선수들보다 농구대잔치 세대의 선수들을 팬들이 더 많이 알아주는 것 같다.

Q. 팬이 많아서 생긴 에피소드가 있다면.
당시에는 여성 팬들이 많았다. 요즘 팬레터에 주로 부상이나 기록에 대한 부분에 내용이 적혀있다면, 그때 팬들은 쉬는 날 뭐하는 지, 언제 영화를 같이 보자고 하는 내용 등이 담겨있었다. 어떤 학생들은 커서 결혼할 테니 10년만 기다려달라고 할 정도였다. 연애편지와 같은 내용이었다고 할까. 발렌타인 데이와 같이 특별한 날에는 서대문 우체국이 마비되기도 했었다. 우리 숙소에는 우편물들이 트럭에 자루 채 왔었는데, 상민이, 지원이와 선수들끼리 누가 더 선물이 많이 왔는지 경쟁도 했다. 하하.

Q. 워낙 인기가 많다보니 경기나 연습 때 팬들을 의식하기도 했을 것 같다.
당연히 의식했다. 움직임 하나하나, 슛을 시도하기만 해도 함성이 들렸다. 한창 나이인데, 그러한 관심에 흥분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최희암 감독님께도 많이 혼났다. 감독님은 “여자 팬들이 있으니 보이는 게 없냐”고 자주 혼내셨다. 감독님이 그런 것 때문에 엄청 고생하셨다.

Q. 대학 최초로 농구대잔치 우승을 했다.
4학년 때까지 우승했던 기쁨을 다 합쳐도 안 될 정도로 최고로 기뻤다. 4학년 때 주장을 하면서 이룬 것이고 졸업식을 치른 후에 챔피언 결정전 뛰면서 우승을 한 것이라 더욱 기뻤다. 최 감독님과 유재학 코치님을 안고 엉엉 울었다. ‘이 기쁨을 이루기 위해 연세대에 와서 운동을 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무리가 좋았다.

Q. 당시와 지금 경기장 분위기는 어떻게 다른가.
농구대잔치는 콘서트장에 가까웠다. 승패에 관계없이 팬들은 ‘우리 오빠’를 보러왔다. 응원을 하다가 실려 나가는 학생도 있었다. 정말 웬만한 인기가수들의 공연장이 부럽지 않았다.

Q.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는?
1학년 때 치른 연고전이다. 연고전을 위해 100일전부터 합숙에 들어가고 거울, 컵과 같이 깨질만한 물건들은 전부 내려 놨다(깨지지 말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합숙 초반에는 훈련이 고된데, 컨디션이 어느 정도 올라오면 보약도 사주고 격려를 해주면서 분위기가 싹 바뀐다. 그 한 경기를 위해 3~4달을 투자하는 것이다. 경기장을 들어섰는데, 그냥 파란색 반, 빨간색 반이라는 것 외에는 보이지 않았다. 1학년 때부터 연고전에서 주축으로 뛰는 것이 드문 일인데, 30분여를 뛰어 15점 정도를 넣으면서 팀이 이겼다. 아직도 당시의 모습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2학년 때부터는 고대가 우리에 비해 너무 약했다.

Q. 앞서 얘기한대로 현대와 삼성간의 스카우트 경쟁이 치열했었다.
내가 (대학)2학년 때 故(고) 정주영 회장이 한 대회를 보러 왔었는데 선일여고의 전주원을 보고 무조건 데리고 오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그 다음이 우리(연세대) 경기였는데, 그때 정주영 회장이 ‘14번 달고 뛰는 선수를 데리고 오라’라고 얘기했다고 들었다. 나도 원래는 자유로운 분위기의 현대가 가고 싶었다. 현대는 나를 데리고 다녔고 삼성은 부모님을 설득했다.

Q. 삼성을 택했던 이유가 있었나.
(김)현준이 형 때문이었다. 현준이 형은 중, 고, 대학교 선배인데, 어릴 때부터 늘 내 우상이었다. 우상인 선수와 함께 뛰고 싶었다.

Q. 삼성에서 첫 시즌에 준우승을 했다. 결승전에서는 부상이 있었는데 어느 정도였는가?
아킬레스가 좋지 못했다. 지금 같았으면 못 뛸 경기였다. 스포트라이트 받고 삼성에 왔는데 매 번 준우승만해서 뭔가 보여줘야 한다는 마음이 있었다. 진통제를 먹고 주사까지 맞고 경기를 치렀다. 한쪽 다리 없이 뛰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Q. 천하의 문경은도 부담스럽거나 어려운 상대, 또는 팀이 있었을듯하다.
프로가 되기 전에는 없었다. 고대의 이지승은 자신이 문경은을 잘 막는다고 후배들에게 이야기를 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난 크게 의식하지 않았다. 이지승은 나 때문에 먹고사는 선수였다(웃음). 프로에 와서는 김영만과 양경민이 부담스러운 상대였다. 아마시절 만해도 나보다 큰 포워드는 없었다. 하지만 김영만과 양경민은 센터 출신인데다 공격과 수비력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 전문수비수들의 경우 공격력이 떨어져 수비를 할 때 체력을 세이브 할 수 있지만 김영만과 양경민은 죽어라 뚫어야 하면서도 죽어라 막아야했다. 지금은 10살 이상 차이나는 동생들을 따라다니느라 정말 죽겠다. 하하.


3점슛 = 문경은
문경은이 프로무대에 진출한 건 KBL 출범 후 두 번째 시즌인 97-98시즌부터였다. 이후 현재까지 한 차례의 우승, 올스타 MVP, 5번의 3점슛 왕 등 여러 가지 기록을 세우며 업적을 쌓아 나갔다. 특히 문경은의 3점슛 1,669개 성공 기록은 당분간 깨지기 어려운 기록으로 그는 KBL 역사에 한 획을 긋게 되었다.

Q. 프로 첫 시즌 삼성은 우승 후보로 꼽혔지만 하위권에 머무르고 말았다. 뭐가 문제였는가.
그 해 9위(17승 28패)를 했는데, 외국인선수 한 명이 너무 안 좋았다. 너무 못해서 아직도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 숀 이스트윅이라고…. 공도 잘 잡지 못하는 선수였다. 존 스트릭랜드는 너무 개인플레이만 했다. 그래서 (김)승기가 고생을 많이 했다. 나는 첫 시즌에 3점슛 1위를 하고 득점에서도 상위권에 랭크되었다. 국내 선수 부문이 아니라 전체 순위에서 말이다. (※ 문경은은 97-98시즌 평균25점을 기록했다.)

Q. 주희정과 싱글턴이 가세하면서부터는 성적이 괜찮았다.
승기가 포인트가드보다는 2번에 가깝다는 판단에 김동광 감독님이 김승기와 양경민을 내주고 주희정과 강병수(현 KTF 코치)를 영입해왔다. 김동광 감독님 스타일에 맞는 팀이 구성되었고 버넬 싱글턴의 기량이 아주 좋아 4강까지 갔었다.

Q. 2000-2001시즌에는 우승을 했지만 팀의 중심은 주희정과 맥클래리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아쉽지는 않았나.
팀 구성은 내가 바라던 대로 됐다. 나는 그때에도 평균 17~18점을 넣는 간판슈터였고 몸 상태도 정말 좋았다. 그러나 팀은 나를 간판으로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아마추어 시절 나를 원했던 그 팀이 아니었다. 챔피언결정전 마지막 경기 때도 우승하는 순간에는 나를 다시 코트에 서게 할 줄 알았는데, 계속 벤치에 앉아있었다. 그 순간 삼성이 이미 주희정을 간판으로 세웠다는 생각이 들었고 떠나야겠다는 마음을 먹게 되었다.

Q. 김동광 감독과 스타일이 맞지 않는다는 이야기도 많이 흘러나왔다.
내 특기는 속공 상황에서 던지는 3점슛이다. 그 부분은 늘 팀에서도 인정을 해왔고 속공 3점슛은 내 무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김 감독님은 확률 높은 레이업을 원하셨다. 속공 3점슛이 성공이 되어도 교체되는 경우가 많았다. 김 감독님은 (주)희정이와 외국선수가 2대2를 하고 어시스트가 나가는 농구 스타일을 좋아하셨다. 그러나 감독님과 스타일이 맞지 않았다기보다는 달라진 구단의 모습에 실망했던 것이 컸다.

Q. SK빅스 이적은 그런 마음에서 결심하게 된 것인가.
팀을 옮겨야겠다는 생각을 한 찰나에 유재학 감독님이 나를 원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당시 SK 빅스(현 인천 전자랜드)는 4강을 못 갔다. 창단 동기들이 주축이다 보니 구심점이 될 고참이 없었고, 팀워크에도 문제가 있었다. 유 감독님은 내 플레이를 잘 아셨기 때문에 가고 싶었다. 어려운 트레이드였다. 삼성에서는 트레이드가 안 된다고 했다. 하와이로 우승보너스 여행을 가서 거의 빌다시피 해 트레이드 허락을 받았다. 김동광 감독님 밑에서 배운 것도 많았지만 내가 하고 싶은 농구를 하고 싶었다.

Q. 당시 우지원과의 트레이드는 많은 화제가 되었다. 통화는 했었나.
통화를 하지는 않았다. (우)지원이는 전혀 알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지원이가 창단 멤버인 데다 유재학 감독님의 제자이기도 했기 때문에, 지원이 만큼이나 유 감독님도 마음고생을 많이 한 것으로 알고 있다.

Q. 전자랜드에서 SK로 다시 한 번 이적을 하게 되었다. 그때는 어떤 심정이었는가.
제이 험프리스 감독이 있을 때인데, 험프리스 감독과 리벤슨이 연습 때마다 말싸움을 하고 둘 중 하나는 나가버렸다. 그러다 보니 훈련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그 트레이드도 쉽지는 않았다. SK 입장에서는 젊은 선수 대신 30대 중반의 노장을 데리고 오는 것이라 반기지 않았던 걸로 안다. 하지만 김일두는 부상으로 활용을 하지 못하는 상태였고, 방성윤도 부상을 당해 슈터가 필요하게 되어 어렵게 이적하게 됐다. 혼란기가 아니었다면 전자랜드에서 남아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상황이 되지 못했다.


Q. SK에서는 식스맨으로 뛰는 일이 잦았다.
SK에서 간판을 해야겠다는 마음은 애당초 없었다. 식스맨으로서 후배들을 도우면서 우승을 한 번 해보겠다는 생각이었다. SK 정도면 충분할 것 같았다. 지원 좋은 구단에서 멋있는 후배들과 뛰고 싶었다.

Q. 하지만 성적은 계속 하위권이었다.
그래서 많이 힘들었다. 내가 20대 나이의 선수였다면 다음시즌이 있고 기약이 있지만, SK에 올 때 이미 35살의 노장이 되어있었다. 언제 부상이 오고 언제 체력이 떨어질지 모른다는 마음에 매 게임이 아쉽기만 했다. 꼭 챔피언결정전 무대에 서고 싶은데 기회가 닿질 않아 지금도 조급한 마음이다.

Q. 12시즌을 뛰어오면서 큰 부상이 없었다. 비결은 무엇인가.
후배들에게 농담 삼아 이야기하는데, 위험한 행동을 잘 하지 않는다. 무리한 블록이나 파울을 얻어내려고 일부러 부딪치는 일은 되도록 피한다. 또한 약간의 통증이라도 있다면 트레이너들에게 치료를 받는다. 그러나 그 치료와 관리가 훈련에 지장을 주어서는 안 된다.

Q. 3점슛 1,600개째를 돌파하는 대기록을 세웠다.
3점슛 기록에 대해서는 큰 자부심을 갖고 있다. 깰 수 없는 기록을 세워 KBL 역사에 흔적을 남겼다는 생각이 든다. 9천 득점도 마찬가지다. 서장훈이 세운 1만 득점에 대한 마음도 있지만, 그러기에는 시간이 부족하다. 9천점을 넘겼다는 것도 부상 없이 성실하게 프로생활을 해온 결실이라고 생각한다.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

Q. 3점슛의 비결이 당연히 노력일 테지만, 또 다른 노하우가 있을 듯하다.
3점슛은 자신감이다. 물론, 그런 자신감이 생기려면 노력이 있어야한다. 예전부터 3점슛을 던지는 것이 마음 편했다. 팀 동료들과 코칭스태프가 인정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을 갖추어야 한다.

Q. 다시 태어나 농구를 한다 해도 슈터가 되고 싶은가.
다시 농구를 한다면 포인트가드를 하고 싶다. 드리블과 패스를 연습해서 장신가드가 되고 싶다. 슈터는 슛을 던지기 위해 여러 선수의 도움을 받아야 하지만, 가드는 경기 조율도 할 수 있고 경기를 더 내 손으로 만들어나가는 포지션이다. 매력이 있다.


감격의 태극마크
문경은은 대학교 2학년 때부터 15년여 간 태극마크를 가슴에 달고 대표팀의 골게터로 뛰어왔다. 문경은은 대표팀에 처음으로 이름을 올리던 그 때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대학교 2학년 때 농구대잔치 2차 리그를 마치고 18명의 대표팀 예비 명단이 발표되었다는 소식을 스포츠 뉴스로 접했다. 허재, 김유택, 한기범, 김현준, 정덕화 등 쟁쟁한 이름들 사이에 막내인 내 이름이 올라있었다.”

문경은은 18명의 예비 명단에 이름을 올린 것만으로도 영광스럽고 놀랍기만 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스포츠 뉴스를 보고 더 큰 기쁨을 누리게 되었다. 12명의 대표팀 명단에 문경은의 이름이 올라 있었던 것이다.

“가드에 허재 형과 (강)동희 형의 이름이 있었고 포워드에 현준이 형 이름 옆에 내 이름이 보였다. 스포츠 뉴스를 보신 어머니께서 너무 기쁜 나머지 눈물을 흘리셨다. 정말 너무 기뻤다.”

그렇게 처음 가슴에 달게 된 태극마크는 2006년까지 문경은의 이름을 더욱 빛나게 했다. 문경은이 15년이 넘도록 대표팀 생활을 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았던 경기는 단연 2002년 부산 아시안 게임 결승전이다.

중국이 자랑하는 장신 군단은 우리나라에 큰 부담이었고 NBA리거인 야오밍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승리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점수 차는 점점 좁혀졌고 ‘승리’라는 단어도 함께 보이기 시작했다.

“점수차가 10점 안으로 들어오면서 응원이 거세지고 중국 선수들의 눈에서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김)승현이와 (방)성윤이는 그때 이길 것이라고 확신했다고 한다. 승현이는 병역 문제가 걸려있어서 정말 죽자살자 뛰었다.”

결국 우리 대표팀은 연장 끝에 102-100으로 승리를 거뒀다. 문경은과 선수들은 얼싸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문경은은 2002년 아시안게임과 더불어 1997년 ABC대회를 가장 기억에 남는 대회로 꼽았다. 당시 대표팀은 대표팀 사상 최악의 전력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현주엽이 출국 날 오전 연습경기 도중 코뼈가 부러져 뛸 수 없게 되었고, 서장훈은 중이염에 시달려 똑바로 서있기조차 힘들었다.

“장훈이와 주엽이가 빠지니 제일 큰 선수가 (전)희철이와 (정)재근이 형이었다. 예선에서 일본에게 지는 바람에 결승에서 만났어야 할 중국을 준결승에서 만났다.”

그러나 이 위기는 선수들을 더욱 똘똘 뭉치게 하는 효과를 낳았다. 대표팀은 정재근의 활약으로 중국을 대파하고 결승에서 일본을 만났다.

“일본도 신장이 좋았다. 218cm의 야마자키와 다카하시가 있었다. 하지만 죽 써서 개주지는 말자고 다짐했다. 일본은 무조건 이기자는 마음가짐으로 경기에 나섰다.”

문경은의 말대로 우승후보인 중국을 이겨놓고 일본에게 우승컵을 내주는 일은 없었다. 대표팀은 1점차로 일본을 꺾고 28년 만에 ABC대회 우승컵을 들었다. “정광석, 김동광 감독님과 선수들이 모두 어깨동무를 하고 울었다. 대표팀을 하면서 딱 두 번 울었는데, 하나가 2002 아시안게임이고 나머지 하나가 바로 이 대회다.”

이어 문경은은 “정말 거하게 한잔 했어야 했는데, 하필 술이 없는 나라(사우디)에서 우승을 했다. 대사관 땅은 사우디 땅이 아니라고 해서 대사관 지하에서 양주를 마셨던 기억이 난다”며 당시를 떠올렸다. 하지만 영광의 기억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세계선수권과 올림픽 등 세계 농구의 벽은 대표팀과 문경은에게 좌절을 안겨주었다.

한 번은 크로아티아와 경기를 하는데, 그 팀의 가드가 207cm의 토니 쿠코치였다. 대표팀에서 영광과 좌절을 맛본 문경은은 갈수록 떨어지고 있는 대표팀에 대한 인식에 대해서도 한마디 했다.

“지금 선수들은 프로생활을 하기 때문에 우리 세대가 대표팀 선수가 될 때와 같은 감격적인 심정을 느껴보지 못했을 것이다. 프로화가 되면서 선수들은 대표팀에서 부상을 당할 경우 손해가 막심해진다. ‘대표선수가 되면 뭔가 다르다’는 생각이 들 수 있도록 편의나 대우면에서 변화가 있어야한다. 애국심만으로 선수들을 끌어내기보다는 선수들로 하여금 리그 MVP를 받는 것보다 태극마크를 더 달고 싶도록 할 수 있는 제도적인 부분을 대폭 보강해야 할 것 같다.”


문경은은...
1971년 8월 27일생인 문경은은 한국프로농구를 대표하는 최고의 슈터였다. 광신상고와 연세대를 거쳐 삼성전자에 입단했으며, 프로 출범 후 2000-2001시즌에 삼성의 KBL 첫 우승을 주도했다. 전자랜드, SK 등에서 뛰었고, 2010년에 은퇴했다. 국가대표로도 오랜 시간 활약한 문경은은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에서 농구대잔치 시절 동료들과 함께 중국을 무너뜨리고 20년 만에 금메달을 목에 거는데 큰 역할을 했다. 은퇴 후 SK 전력분석 코치로 지도자 경력을 시작한 문경은은 2012-2013시즌 SK를 정규리그 1위에 올려놨고, 2017-2018시즌에는 챔피언결정전에서 우승을 거머쥐는 쾌거를 이루었다.

※ 이 글은 JUMPBALL 스페셜 에디션「TEAM KOREA」에서 발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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