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진석의 농담(籠談)] 농구대통령, 연예대통령

기자 / 기사승인 : 2021-06-10 08:2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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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17일에 허재 이야기를 쓰려 했다. 허재가 한국체육대학교 스포츠분석센터에서 발표하는 ‘CSPA 스포츠관심도’의 스포테이너 부문에서 5월 2주차 1위를 기록한 날이다. 한 주 전에는 핸드볼 스타 윤경신이 1위였다. CSPA 스포츠관심도는 한국체대 스포츠분석센터에서 스포츠 트렌드를 종합적으로 표현할 수 있도록 개발한 지수다. CSPA 스포츠관심도가 나타내는 점수는 주요 포털사이트 검색어 통계를 빅데이터 분석으로 표준화한 값이다. 따라서 점수들 간 상대비교가 가능하다. 한국체대 스포츠분석센터는 CSPA 스포츠관심도를 매주 월요일 정오에 발표한다. (www.cspa.re.kr)

이런 저런 고민과 주저 속에 시간이 흘렀다. 6월도 중순으로 접어드는 지금 이 글을 쓴다. “예능이 좋아 프로농구단의 감독 제의도 거절했다.”는 스포츠서울의 기사를 읽은 지 한 달이 지났다. 놀라운 기사는 아니었다. 허재가 CSPA 스포츠관심도 1위를 기록한 일이 놀랍지 않듯이. 현실은 현실이고, 허재에게는 자신의 생활 방식을 선택할 자유가 있다. 허재가 프로농구 감독으로서 일하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 농구계의 큰 손실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코트에서든 스튜디오에서는 낚시터에서든 허재는 다 같은 허재다.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뛰어난 선수였다는 평가를 받는 그가 예능인으로서 성공하면, 그것도 좋은 일이다. 그는 자신뿐 아니라 우리를 위해 (또는 우리와 함께)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예능이 좋다는 그의 말은 100% 진심일 것이다. 두 아들도 진심으로 아버지의 예능활동을 응원하고 있을 것이다. 스포츠서울의 기사를 읽으니 맏아들 웅은 “농구인들은 아버지가 (농구계로) 아버지가 돌아오길 바라는데, 아들 입장에서는 요즘이 더 젊어 보이셔서 좋다. 아버지의 건강을 위해 연예계에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지난겨울 활약이 대단했던 훈도 “아버지가 감독으로 오면 구설 밖에 안 나온다. 마음 편하게 예능 하셔라.”고 거들었다. 농을 곁들여 말했지만, 가장 높은 단계에서 경쟁하는 두 아들은 알고 있는 것이다. 매일 매시간 경쟁으로 점철된 삶이 어떠한지, 얼마나 고통스러우며 위태로운 일인지, 사람을 극한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지.

허재는 진지하게 예능 일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이영미 기자와 인터뷰한 포털 기사에 눈에 띄는 대목이 있다. 이 기자는 ‘허 전 감독은 방송을 시작하면서 술자리를 피하게 됐다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특히 몸을 써야 하는 방송 녹화를 앞두고선 이틀 전부터 몸 관리를 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고 전했다. “농구하는 체력과 방송하는 체력은 별개인 것 같다. 스포츠는 2시간 안에 승패가 결정되지만 방송은 시작 시간은 정해져 있는데 끝나는 시간은 정해져 있지 않다. 녹화가 길어지면 체력적으로 지치게 된다. 다른 사람들한테 피해주지 않으려면 몸 관리는 필수인 것 같다.”는 허재의 말도 소개했다. 나는 조금 웃었다. 허재는 토요일 경기를 앞둔 금요일 저녁에도 긴 술자리를 마다않던 사나이였기 때문이다. 조금 앞에 나온 허재의 말도 눈길을 끈다.

“‘뭉쳐야 찬다’가 발판이 돼 다양한 프로그램에 출연하다 보니 1년이란 시간이 금세 지나갔다. 얼마 전 ‘뭉쳐야 찬다’가 1주년 기념 방송을 했는데 그 방송 녹화하면서 알았다. 내가 예능한지 1년이 됐다는 사실을. 나름 의미 있는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예능은 리액션도 중요하고, 자신을 드러낼 줄도 알아야 하고, 때로는 기분 나쁜 상황도 웃음으로 넘겨야 한다. 농구에서는 내가 최고라고 생각했지만 방송은 절대 최고가 될 수도 없고, 되고 싶지도 않다. 그런 경험이 새로웠다. 무엇보다 농구 팬들 뿐만이 아니라 일반인들이 나를 좋아해주는 부분이 신기했다.”

농구에서는 최고여야만 했지만 예능에서는 최고가 아니어도 상관없다는 말이 가슴에 와 닿는다. 거짓말이 섞였을지 모르지만. 최고는 늘 이겨야 하고, 졌을 때 받는 충격과 상처가 평범한 사람들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다. 나는 지금도 2007년 2월 6일 잠실체육관에서 (체육관은 실내에서 운동할 수 있게 지은 건축물이다. 1979년 4월 18일 박정희 대통령이 개관 테이프를 끊은 서울잠실체육관이 언제부터 ‘실내’라는 흔적기관을 달았는지 모르겠다. 잠실학생체육관과 구분하기 위해서라는 말은 이해하기 어렵다) 본 허재의 모습을 기억한다. 허재는 KCC의 감독이었다. 삼성 썬더스가 무자비한 공격를 퍼부어 108-68로 이겼다. 그날 허재는 내가 본 그의 모습 가운데 가장 초라하고 비참했다. 나중에 중앙일보가 있는 순화동에서 만난 허재는 청주를 마시면서 “정말 견디기 어렵더라.”고 고백했다.

선수 허재는 무적이었다. 손이 부러지고 등 근육이 배배 꼬이거나 눈두덩이 찢어져 피가 줄줄 흘러도 이기고자 마음먹으면 이길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유니폼을 다시 입을 수 없다. 허재가 농구장으로 돌아가 할 수 있는 일은 감독 아니면 단장이다. 텔레비전 방송의 농구 해설자 같은 일은 직업도 부업도 되지 못한다. 허재를 원했다는 구단도 감독으로 일해 달라고 했을 것이다. 감독의 일은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선수로서 자신만 못했던 상대 감독에게 빈번히 지는 나날을 허재가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그는 이기는 데 익숙했지만 패배에는 서툴렀다. 패배를 기피하는 마음이, 질 것 같으면 싸우지 않으려는 심리도 아주 없지는 않을 것이다. 나도 의심한 적이 있다. 허재가 미국프로농구(NBA)에 진출할지 모른다는, 그런 기대를 품었던 몇 주일 동안에.

나는 중앙일보의 1995년 9월 12일자 종합 37면에 ‘허재 캐나다 밴쿠버 구단·대만 프로농구서 입단제의’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썼다. 많은 농구팬들이 아직도 이때의 일을 두고 의견을 나눈다고 한다. 다만 그 팬들은 대만을 제쳐두고 NBA 이야기만 하는 편이다. 기사는 “NBA냐 대만이냐.”로 시작된다. 시간이 흐른 뒤 이 리드 뒤에 ‘아니면 남느냐.’가 숨어 있었음을 알겠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기아 잔류 가능성이 가장 컸다. 움직였다면 대만에 갔을 것이다. 허재가 그해 8월 존스컵 대회에 출전했을 때, 대만농구협회 왕젠타 회장이 타이중에서 그를 만나 자신이 연말에 창단하는 프로 팀에 입단해줄 것을 요청했다. 당시 왕 회장 측이 제시한 연봉은 4억 원이었다고 한다. 지금도 큰돈이고 그때는 더 큰돈이었다. 왕 회장 입장에서는 그래도 해볼 만한 투자였을 것이다. 대만의 농구팬들은 허재를 우리가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사랑했기 때문이다.

NBA 진출과 관련해서 말하자면, 분명한 움직임이 있었다고 증언할 수 있다. 1995~96시즌부터 리그에 참여한 밴쿠버 그리즐리스가 허재에게 관심을 가졌음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캐나다 농구계의 한국통인 브루스 언스 브리티시 컬럼비아 대학교(UBC) 감독, UBC 부총장을 역임한 하인스 마치 구단이사가 고 한창도 선생의 도움을 받아 허재와 접촉했다. 캐나다에 거주하는 허재의 용산고 선배 한 분도 한국의 슈퍼스타를 밴쿠버로 초대하기 위해 노력했다. 나는 운 좋게 이 일을 알게 되었다. 지금 거론한 네 분 중에 두 분을 통해 확인한 일이다. 나는 꽤 열심히 뛰었다. 중앙일보 사내방송(운현궁 스튜디오)의 도움으로 허재의 하이라이트 비디오를 제작해 밴쿠버로 보냈다. 허재의 가족 몇 분에게는 상황 설명도 해드렸다. 사실 허재의 하이라이트 비디오는 필요조차 없었다. 허재는 1994년 토론토에서 벌어진 제12회 세계남자농구선수권대회에서 눈부시게 활약했다. 그의 드리블, 시야, 패스는 요즘 말로 ‘월드 클래스’였다. 장신 수비수를 쉽게 제치고 동료들에게 노마크 슛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그러므로 밴쿠버에서는 허재가 어떤 선수인지 잘 알았고, 그의 기량을 결코 의심하지 않았다. 북미에서 샌프란시스코 다음으로 동양계(주로 중국인이지만) 이민자가 많이 거주하는 지역적인 배경도 크게 작용한 듯했다.

허재의 밴쿠버행이 성사되고, 내가 단독으로 기사를 썼다면 당시로서는 엄청난 특종이 되었을 것이다. 모두가 아는 대로, 그렇게 되지 않았다. 당시 허재의 나이 만 서른이었다. 운명에 도전하고 운을 시험하기에는 늦은 나이였다. 밴쿠버는 허재가 마음대로 대장이나 1등을 할 수 없는 곳이다. 밑바닥에서 시작해야 했다. 아무 연고도, 어떠한 보장도 없는 NBA 코트에서 베스트 멤버로 활약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더구나 허재는 ‘도전하는 정신’만으로 상찬(賞讚)을 누릴 입장이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허재에게 움직일 마음이 없었던 것 같다. 아까 말한 대로 움직였다면 대만이 행선지가 됐을 가능성이 크다. 허재보다 앞서 한국 남자농구의 간판으로 활약한 이충희가 대만에서 뛰고 있었다. 당시 허재는 ‘경제적인 전환점’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왕젠타 회장은 그의 현실적인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당시 허재가 속한 기아농구단이 간판스타를 아무 말 없이 대만으로든 밴쿠버로든 보냈을 리 없다. 허재가 대만 측의 제의를 받았고 밴쿠버와도 대화했다는 사실을 나중에 확인한 기아 관계자들은 몹시 화를 냈다.

이제 와서 생각하면 ‘밴쿠버 그리즐리스의 제안’을 구단의 직접적인 영입 움직임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구단의 스카우트 부문과 에이전트들의 비즈니스가 아니었을까. 한창도 선생과 캐나다 동포가 엄청나게 노력했다. 우리 농구를 위해서라도 허재를 반드시 밴쿠버로 보내고 싶었던 것이다. 사실 허재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정확히 알지는 못했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이 무렵에는 NBA 구단들이 어떻게 선수를 접촉해 협상하고 계약하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사실과 정보보다 단독기사를 쓰겠다는 야망이 더 컸기에, 미처 못 본 진실의 영역도 있을 것이다. 나는 전해들은 대로 썼다. 허재에게 제시됐다는 ‘계약 조건’도 기사로 소개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이해가 잘못되었거나 비현실적인 (또는 비상식적인)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나는 이 일을 계기로 미국을 포함한 외국의 농구 제도와 시장에 대해서 공부하기 시작했다. 지금처럼 국내에도 우수한 에이전트들이 많은 시절이었다면, 그래서 허재를 설득해 밴쿠버 행을 성사시켰다면 우리 농구의 역사도 달라지지 않았을까.

(허재가 받은 ‘제안’과 비슷한 수준의 접촉을 현주엽도 경험했다. 1997년 8월 이탈리아의 시칠리아에서 하계 유니버시아드가 열렸을 때의 일이다. 뉴욕 닉스의 스카우트가 카타니아대학교 체육관에서 내게 명함을 주며 한국대표팀의 현주엽에 대한 관심을 드러냈다. 나는 이번에도 운현궁 스튜디오에 의뢰해 현주엽의 하이라이트 비디오를 제작해 보내주었다. 현주엽의 어머니가 아들을 대신해 상황을 관리했다.)

세월이 덧없이 흘러, 모두가 먼 옛날의 이야기가 되었다. 열성적으로 도와주시던 한창도 선생도 세상을 떠난 지 6년이 지났다. 나 역시 은퇴한지 오래된 ‘한 때 기자’일 뿐이다. 허재의 이야기도 이런저런 살이 붙어 (온라인에서 굴러다니다 보면 그렇게 되는 것 같다) 누구도 증명 못할 전설이 되어 간다. 그리고 허재는 지난달 말까지 4주 연속 CSPA 스포츠관심도 1위를 지키면서 새로운 이야기를 써나가고 있다. 그는 반드시 1등을 해야 하는 사람이다. 1등을 할 수 없다면 안하고 말, 그런 사람. 허재가 “예능은 1등이 아니어도 되니까 괜찮다.”고 말한다면, 내가 알기로는 거짓말이다. 그가 ‘도시어부’에 나가서 붕어나 도미를 잡지 못할 때, 마음속에 불길이 일 것이다. 그는 누구보다도 물고기를 많이 잡아야 한다. 그러지 못할 때, 그 분노를 감추고 싶어서 낚시라는 ‘경기’를 내심 치열하게 하면서도 대충 하는 척, 관심 없는 척 할 뿐이다. 허재는 예능판에서도 노력하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단언한다. 허재는 몇 년 안에 ‘연말연예대상’을 받을 것이다. 연예 무대에서 트로피 수집에 실패한다면? 당연히 분장을 지워 버리고 농구장에 돌아올 것이다.


허진석 한국체육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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