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통산 2골, NBA 경기장에서 공연하는게 꿈입니다”

김종수 칼럼니스트 / 기사승인 : 2022-06-19 01:5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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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수의 농구人터뷰(41)] ‘W걸스' 정하윤

 

 

“저를 누가 안다고…, 제가 WKBL에서 뛰기는 했는데요. 말그대로 경험만 쌓은 정도라서요.” 용인 삼성생명 블루밍스 유소년 클럽 정하윤(37‧177cm) 코치에게 인터뷰 제의를 하자 가장 먼저 나온 답변이다. 언뜻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닐 수 있다. 2003 WKBL 신인드래프트에서 2라운드 6순위(전체 12순위)로 금호생명 레드윙스에 뽑히기는 했지만 정하윤이라는 이름을 기억하는 이들은 많지 않기 때문이다.


2시즌 동안 4경기에 출전했으며 4득점(2골), 2리바운드, 1어시스트, 1블록슛이 남긴 성적의 전부다. 그것도 평균이 아닌 통산 기록이다. 4경기에서의 평균 출장 시간은 1분 36초이며 코트를 밟은 시간을 모두를 합쳐도 6분 25초에 불과하다. 아무리 모든 농구인을 인터뷰 대상으로하는 ‘농구人터뷰’라지만 이래저래 아쉬워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아마 제목이 레전드 열전이었다면 다루기 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해당 시리즈는 농구인의 과거와 현재를 다루는 연재물이다. 업적보다는 열정, 기록보다는 삶 자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런 점에서 정하윤은 인터뷰 대상자로 손색이 없다. 성공이라는 부분을 떠나 끊임없이 농구를 잊지않고 함께 해온 점, 거기에서 나온 해당 종목에 대한 사랑 만큼은 진짜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찐 농구人’이 아닐 수 없다.


현재 정하윤의 행보가 의미있어 보이는 이유는 선수로서 성공하지 못한 농구인에게 롤모델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대한민국에서 엘리트 농구를 배우는 모든 이들의 공통된 목표는 프로 선수다. 선수로서 일정 기간 이상 활약하고 이후 그간의 커리어나 명성을 바탕으로 지도자, 농구 행정 쪽으로 가는게 최상의 코스다.


하지만 그렇게 되는 경우는 극소수다. 초, 중, 고에 걸쳐서 농구에만 매진해왔어도 대학진학(남성부 기준, 여성부는 다소 다름) 조차 쉽지않으며 거기서 다시 치열한 경쟁을 거쳐 인정을 받아야만 프로에 진출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프로선수가 되어서도 어지간한 스타급 선수로 성장하지않는 이상 매시즌 생존 경쟁을 벌어야 한다. 현실적으로 열에 아홉은 프로에 진출하지 못하고 중간에 낙마하며 남은 한명 조차도 성공을 장담하기 어렵다.


“얼마나 힘들게 들어온 프로 무대인데요. 그만두려고 마음먹기까지 고민도 많았고, 또 막상 그만둔다고 생각하니 앞으로 뭘해야 할지 앞이 막막하더라고요. 저같은 케이스가 되게 많을거에요. 프로에 이름을 올리기는 했지만, 저 선수는 누구? 하는…, 솔직히 다른 길도 가고싶어서 이것저것 해봤지만 돌고돌아 주위을 둘러보니 여전히 농구와 관련된 길을 걷고있는 스스로를 발견하고는 여전히 내가 농구를 많이 좋아하는구나 싶었습니다”


이래저래 좋지못한 상황 속에서도 새로운 도전을 멈추지 않았고 그것을 실천하고 현실화시킨 정하윤을 만나 선수로서 성공하지 못했어도 갈 수 있는 ‘길’에 대해서 얘기해보았다. 그녀의 말처럼 여전히 목적지에는 도착하지 못했지만 비슷한 고민을 가진(가질) 후발주자들에게 ‘생각의 샘’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득점보다 패스를 즐기는 장신 1번 유망주였습니다”

Q.안녕하세요. 자기소개 부탁드릴 수 있을까요?

흐흐흣…, 그럼요. 안녕하세요. 국내 최초, 국내 유일 농구 퍼포먼스 걸그룹 ‘W걸스’를 이끌고있는 정하윤이라고 합니다. 최근 4년째 저의 소개를 이렇게 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만큼 최근 저와 W걸스는 한몸이 되어서 움직이고 있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사실 인터뷰에 응한 이유 중 W걸스를 좀더 알리고 싶다는 마음도 컸어요. 다른 여러 가지 일도 하고 있지만 W걸스는 개인적 이익과는 관계없이 순수한 열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요. 농구가 이렇게 활용될 수도 있고 또다른 아름다운 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꼭 보여드리고 싶은 마음 가득합니다.

Q.농구와는 언제 인연을 맺게 된 것일까요?
학창 시절 농구를 했었던 엄마의 추천으로 숭의초등학교 3학년 말에 농구를 시작하게 됐어요. 엄마는 167cm, 아빠는 180cm정도였던지라 키가 어느 정도까지 클지는 짐작할 수가 없더라고요. 어쨌거나 어렸을 때는 키가 작은 편이었던지라 가드 포지션을 맡게 됐고 그 안에서 저의 경쟁력을 찾아갔어요. 보통 신장에서 경쟁력이 다소 떨어져도 힘이 좋다거나 발이 빠르다거나하면 공격형 가드로서 앞선에서 에이스 역할을 하는 케이스도 많잖아요. 저는 둘다 해당이 되지않았어요. 그래서인지 자연스럽게 직접 공격하는 것보다는 동료의 찬스를 봐주는 플레이가 몸에 잘 맞더라고요. 다행히 볼 핸들링은 좋은 편이었던지라 제법 재능있다는 소리도 들었어요. 막 드리블을 치면서 정신없이 나가고 있는 상황에서도 빈곳에 있는 동료를 잘 찾았고 ‘아 저곳에 공을 주면 되겠구나’하는 길이 딱딱 보이더라고요. 득점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어요. 남들은 득점을 할 때 기분이 좋다던데 저는 패스가 득점으로 연결될 때 짜릿한 희열을 느꼈던 것 같아요. 그러다보니 가족들은 ‘너는 남 좋은 일만 시키냐?’고 핀잔을 주기도 했어요.(웃음) 저도 득점을 많이 올리면서 주목받기는 바라는 마음이었겠죠.

Q.오, 그 귀하다는 퓨어 포인트가드였군요. 그래도 프로 입단 할 때는 장신 1번으로 주목을 받았잖아요.
정확히 말하자면 장신 1번 유망주였겠지요. 특별히 보여준 것은 적고 그 가능성에 주목하시는 분들이 좀 계셨어요. 제 키가 177cm인데 프로필상에는 180cm로도 표기가 되었으니까요. 포인트가드로서는 충분히 경쟁력있는 신장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중학교 2학년 때까지 계속 작다가 이후 중3~고1 시기 짧은기간 동안 10cm씩 한꺼번에 컸어요. 다행히 리딩, 패스 위주의 정통파 1번이라는 점을 좋게 봐주신 분들도 꽤 계세요. 그중의 한분이 신인드래프트 당시 금호생명을 맡고 계시던 신동찬 감독님이셨어요. 그분도 현역 시절 그런 스타일이라고 들었거든요. 어릴 때부터 쭉 지켜봐주셨고 대기만성형을 기대하며 2라운드에서 뽑아주셨죠.
 

 

 

 

Q.그런데 두시즌 만에 은퇴를 하셨어요.
그러게요. 개인적으로도 너무 아쉽고 믿어줬던 팀에게도 너무 죄송했어요. 제가 사실 고3 첫대회 끝나고 크게 다쳐서 이후 거의 뛰지를 못했어요. 프로에 들어가서도 마찬가지였죠. 결국 팀에 들어가서도 계속 재활만 했어요. 그래도 구단에서는 몸을 제대로 만들어서 몇 년 후를 노려보자고 말씀해주셔서 너무 감사했습니다. 언니들도 ‘조급해하지 말고 길게 보자’고 격려해줬고요. 하지만 긴 재활과 복귀, 다시 부상이 반복되는 것을 스스로가 이기지 못했습니다. 저 개인도 개인이지만 팀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자괴감이 컸어요. 모두에게 미안한 마음만 가득했고요. 제가 그 전에 무엇인가를 제대로 보여준 선수같았으면 좀 더 버티었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기대주라는 타이틀만 가지고 가기에는 견디기 힘든 상황이었지않나 싶어요. 그당시 국장님께서 제 연봉보다 재활비가 더 들어갔다고 장난삼아 농담을 던지셨던 기억도 납니다.(웃음) 저는 별반 도움이 못되었지만 그래도 언니들 덕분에 우승반지도 끼어보고 행복한 추억도 많이 쌓았답니다.

Q.2년 동안 부상, 재활만 반복하다보니 알게모르게 눈치도 보였을 것 같아요.
그렇죠. 저의 가능성을 믿어주신 신동찬 감독님, 믿음을 이어가주신 김태일 감독님, 든든한 언니들, 지금까지도 친근한 이훈재 코치님 등 너무 많은 분들이 잘해주셨지만 저로서는 마음이 편할 리가 없었죠. 아무리 그래도 저는 프로로 뭔가를 증명하지 않으면 안될 입장이었으니까요. 사람이라면 그런 감정이 안드는게 이상하죠. 어린 나이이기도 했고, 이래저래 제가 잘하지못해서 일어난 결과지만 잘해주셨던 모든분들께는 지금도 미안한 마음이 큽니다.

Q.부상이 잦았던 배경에는 갑작스럽게 신장이 커졌던 영향도 있었을까요?
제가 주관적으로 판단하기는 어려운 부분같지만 주변에서 그런 것 같다는 얘기는 좀 들었어요. 다듬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신장이 갑자기 커지면 몸이 버티지 못한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인지 저를 가르쳐주셨던 선생님들께서 관리를 많이 해주신 편이에요. 어찌보면 감사한 일이죠. 어떤 경우는 그런 상황에서도 무리를 하거나 혹사를 당해서 망가진 케이스도 있다고 들었으니까요. 하지만 저에게는 마냥 좋은 쪽으로만 작용한 것 같지는 않아요. 그 시기에 운동량이 매우 적었고 그러다보니 제대로 된 체력이 만들어지지 못했던 것이죠. 기초 체력, 몸 상태등이 튼튼하지 못하다 보니 조금 무리하게 되면 부상을 당하기도 했고요. 나름 승부욕은 있어서 경기장에 나서면 아등바등 지지않으려고 몸부림을 치는 편이었거든요. 훈련 중에 뛰는 것을 많이 안했어요. 대신에 드리블, 패스 등 기술 위주로 많이 연마했죠. 그래서인지 남들보다 뛰는 쪽에서 뒤처지면 ‘내가 아직 체력이 약해서 그런가보다’라고 생각했지만 기술적인 부분에서 떨어지는 느낌이 들면 무척 열받아했던 기억도 납니다.

Q.역시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는 따로 떨어뜨려놓고 생각 할 수 없는 부분같아요.
맞아요. 뭐든지 기초가 중요하잖아요. 제대로 기술을 펼치려면 튼튼한 몸과 체력은 필수인데 이런 부분에서 좀 더 긴장감을 가지지 못했던 것이 후회스럽기는 합니다. 사실 완전히 잘하지못하고 어중간한 경우에는 운영형 가드보다는 튼튼한 공격형 가드가 더 선호될 것 같기는해요. 농구의 기본은 뛰는 것이고 수비시에도 튼튼한 몸과 체력은 기본이잖아요. 저는 소위 말하는 몸빵이나 파워 그리고 그것의 기초가 되는 체력이 너무 약했다고 생각합니다. 당시에도 몰랐던 것은 아니지만 지도자로서 한걸음 물러서서 돌아보니 더 절실하게 느껴집니다. 많은 지도자분들께서 기본, 기본 강조하는 이유가 있는겁니다.

 

 

 


Q.가드로서 롤모델로 있었나요?
남자부에서는 옥범준 선수를 좋아했어요. 남자부 기준으로 신장은 작지만 포인트가드로서 갖춰야 할 모든 것을 겸비했던 교과서같은 1번이라고 생각해요. 언젠가는 꼭 여성부 옥범준이 되고싶다는 꿈을 꾸기도 했죠. 아쉽게 그분도 부상으로 날개를 펴지 못했지만요. 프로에 들어와서 같은 방을 쓰기도 했던 김지윤 언니도 어릴 적부터 우상이었어요. 그분은 저랑 플레이 스타일이 완전히 달랐죠. 공격형 가드의 대명사였으니까요. 뭐랄까, 퓨어 포인트가드의 상당수는 상대를 속여서 득점이나 어시스트를 성공시키는데 언니는 다른 방향으로 대단했던 것 같아요. 워낙 힘과 운동능력 등이 좋으니까 상대가 알면서도 당하는 느낌? 정말 대단한거죠. 한때는 저도 언니처럼 하고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것이었고요. 언젠가 언니가 그런 말을 한적이 있어요. ‘나는 공을 줄 곳이 없으면 만들어서 준다’ 그 얘기를 듣고 되게 충격을 받았어요. 저같은 경우 공을 줄 곳이 보이거든요. 하지만 항상 길이 보이는 것도 아니고 안보이게되면 거기가 한계인거잖아요. 언니는 없는 길도 어떻게든 만들어낼 수 있는 선수였어요. 정말 저 언니는 내가 상상할 수 없는 수준에 올라있구나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럼에도 언니는 저에게 ‘너가 대단한거야. 그렇게 길을 볼 수 있는 재능도 많지않아’라면서 힘을 주셨어요. 마음의 그릇까지도 정말 크신분이에요. 어쨌든 그렇게 좋아했던 우상인데 저만의 스타일로 언니 근처까지라도 갔으면 좋으련만 그런점에서는 많이 아쉽죠. 지금도 영원한 우상으로 남아있어요.

“사업 아이디어의 현실화를 위해 SBS슈퍼모델대회에 덜컥 지원했습니다”

Q.지금이야 웃으면서 얘기하지만 은퇴를 결심했던 시점에서는 ‘앞으로 뭘하지?’ 등 앞이 캄캄했을 것 같아요.

그렇죠. 하지만 은퇴할 때의 결심 만큼 앞으로의 삶에 대한 의지도 강한 편이었던지라 계획을 세워서 나가기로 했어요. 일단은 요가 자격증을 따서 강사를 하는 것 그리고 공부를 더하는 쪽에 1차 목표를 세웠습니다. 농구를 하던 시절부터 많이 들었던 말인데 저는 유연성이 남달리 좋다고 하더라고요. 그냥 좋은 정도가 아니라 관절이 꺾이는 수준이 다르다는 평가를 받았어요. 솔직히 운동선수가 유연하다는 것은 좋은 것이잖아요.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저는 너무 좋아서 그게 부상으로 연결되기도 했어요. 꺾이는 각도가 워낙 큰지라 격한 운동을 하면서 더 다치는 이유가 되기도 했죠. 뭐랄까. 좀 웃프죠.(웃음) 나중에 주변에서는 그런 유연성에 리듬감을 갖췄으면 춤 쪽으로 나가도 좋았을 것 같다고 말씀해주시는 분들도 있었어요. 제가 또 그런 쪽에 관심이 없던 것도 아니고요. 하지만 사실 엄마가 제게 농구를 시키신 데는 춤을 못 추게 하고 싶어서 그런 부분도 있었어요. 지금이야 많이 달라졌지만 당시에는 딴따라라며 인식이 썩 좋지 못했잖아요. 성향 등을 봤을 때 분명 동적인 활동을 좋아한다는 것을 아셨을 것 같고 그 에너지를 춤보다는 운동에 풀기를 바라셨지 않나 싶어요. 어쨌든 유연성이라는 장점을 살려보려고 은퇴 후 요가를 시작했고 강사 자격증까지 따게 됐습니다. 가끔 우스갯소리로 지인들에게 하는 얘기가 있어요. ‘그때 제가 춤을 췄다면 보아가 됐을 것이다’고.(웃음)

Q.요가 자격증을 땄는데 그 길로 안가고 공부를 하셨어요?
그러게요. 갑자기 공부가 하고 싶더라고요. 몇달간 수능 공부를 해서 서울여대 체육학과를 갔어요. 대학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서울 쪽에 있는 대학교를 전체적으로 알아봤어요. 일단 남자농구부가 있는 곳은 수시가 안되더라고요. 그래서 갈 수 있는 대학을 체크해 보던 중 레이더에 두 곳이 걸렸어요. 서울대와 서울여대였습니다. 그래서 두 곳에 원서를 냈는데 서울대는 떨어지고 서울여대에 붙게된거죠. 수시라는 혜택이 있어서 내신 5등급만 맞으면 됐거든요. 그래도 이전까지 제대로 공부를 해본 적이 없었던지라 3개월간 노량진에서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어쨌거나 대학에 들어간 것은 결과적으로 잘한 선택같아요. 정말 우연히도 (신)혜인이도 서울여대에 와서 동기가 되었어요. 이후 농구 했던 후배들이 차례로 들어오게 됐고 서울여대 농구부까지 창단되며 처음으로 서울 대표가 되어 전국체전에도 출전했죠. 혜인이 권유로 WKBL에서 하는 웹진 작업도 참여했었고요. 이래저래 정말 즐겁게 대학 생활을 했습니다.

Q.즐거운 대학 생활도 좋지만 애당초 대학을 간 것은 미래에 대한 준비 개념 아니었나요?
맞습니다. 단순히 대학 생활을 경험해보기 위해 간 것은 절대 아니었죠. 질문하신 것처럼 이것저것 배우면서 미래를 준비하자는 생각이 컸습니다. 보통의 동기들보다 4년 늦게 대학을 간거라서 학교만 다닐 수 없으니 요가와 유아체육강사 알바를 하며 학업을 이어나갔어요. 그러던 중 꿈이 하나 생기더라고요. 일명 멀티 다이어트센터라고 한 건물에서 미용, 운동, 다이어트식을 모두 책임져주는 그런 장소를 만들고 싶어졌어요. 하지만 아이디어를 현실화시키기에는 여러 가지 장벽이 있잖아요. 금전, 경험, 전문지식 등등…, 그래서 저 혼자는 할 수 없으니 인맥을 넓히는게 중요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어떻게하면 스타트를 끊을 수 있을까 골똘히 생각하다가 덜컥 SBS슈퍼모델대회를 나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추진력 짱이죠? 지금 생각해도 그 당시에 왜 그렇게 용감했나 싶어요.(웃음)


 

 

 

Q.와우! 완전 파격적인데요?
제가 좀 빨라요. 결심한 것을 실행에 옮기기까지요. 적응력도 나쁘지 않은 편이고요. 하려고 마음먹었으면 시도라도 해봐야 나중에 후회가 없는 것 아니겠어요. 지인들에게도 조언은 잘 안 구하는 편이에요. 엄마에게만 상의를해요. 여기서 함정은, 엄마는 제 성격을 너무 잘 알거든요. 어릴 때부터 저는 마음먹은 것은 꼭 하는 편이었기 때문에 제가 뭔가를 하겠다고 하면 ‘아…, 또 하겠구나’하는 생각에 반대는 거의 안하시고 ‘그래 알겠다’하는 편이세요. 물어보는 순간 하겠다는 통보로 들리시나 봐요.(웃음)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SBS슈퍼모델대회 출전은 제가 생각해도 파격적이기는 했네요. 당시 운동했던 이들이 대부분 그랬겠지만 저 역시 예쁨은 커녕 멋 자체도 잘 모르던 말 그대로 선머슴같은 스타일이었거든요. 꾸미고 그런 것 전혀 못했어요. 이전까지 관심도 별로 없었고요. 일단은 서류심사가 중요하잖아요. 거기서부터 예쁘게 보여야 그 다음이 있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바로 난관이 닥치더군요. 남들은 비싼 곳에서 헤어, 메이크업하고 고급 스튜디오에서 프로필 촬영하는데 비해 저는 돈도 없고 어떻게 찍어야 할지 하나도 모르겠더라고요. 그렇다고 누구에게 도움을 요청할 상황도 아니었어요. 그냥 동네 스튜디오서 책에서 본 포즈 취하고 만원짜리 프로필 사진 찍어서 원서 접수했죠.

Q.막막했겠네요. 결과는 어떻게 됐죠?
대회 예선 날이 전공 기말고사 날이었는데 쿨하게 패스하고 예선 치르러 갔죠. 그리고는 전공 F 받아서 다음 해에 재수강을 해야 했어요. 출혈이 컸죠. 하지만 그만큼 결과도 괜찮았어요. 운이 좋게도 1,300명 넘게 응시한 예선에서 3차 심사까지 통과해 본선 진출 32명 안에 들었거든요. 비록 본선에서 수상은 못했지만 현역모델, 연예인 지망생, 연예관련학과 재학생 등 예쁘고 멋진 사람들 중에 완전 선머슴 같은 제가 낀 것으로 만족합니다. 슈퍼모델이라는 타이틀도 얻게 됐고요. 제가 얼마나 선머슴 같았느냐면요. 보통 9cm의 하이힐을 신고 쇼를 하는데 저는 아직까지도 하이힐에 적응을 못했어요. 조금만 걸으면 어느새 발목이 돌아가 버리거든요. 그렇게 어렵사리 대회를 치르고 1년여 동안 패션쇼 등도 나가며 모델 일을 했어요. 모델을 할 때에는 엄지발가락으로만 걸어 다녔던 기억이 납니다. 패션쇼 중에 발목이 돌아가면 완전 끝이잖아요.(웃음)

 

 

 

 


Q.모델 뿐 아니라 아나운서의 길로도 연결됐다고 들었어요.
아…, 연관은 있죠. 당시 남자 농구중계권이 SBS에 있어서 슈퍼모델 관계자분께서 스포츠국에 소개를 시켜줬어요. ‘앞으로 열심히 해봐라’하면서 많은 사람들도 소개받고 SBS중계차도 타고 돌아다니고, 당장 데뷔할 것 같은 분위기였죠. 저도 기대가 컸고요. 하지만 아쉽게도 때가 맞지 않았어요. 구조조정 바람 등이 불던 시기였던지라 있는 자원들도 정리가 되는 판국이었거든요. 하지만 잠깐의 경험으로 스포츠 아나운서의 매력을 알아버렸어요. 그리고는 때를 기다리며 본격적으로 스포츠 아나운서를 준비하게 됐죠. 그 당시 스포츠 여자 아나운서가 처음 나올 때였거든요. 김석류, 고 송지선, 김민아 아나운서 등이 이때 분들이세요. 어쨌든 그렇게 꿈을 꾸면서 학원도 다니면서 스포츠 리포터도 1년 정도 했어요. 축구장을 주로 많이 갔지만 여자 농구도 했어요. 그때 수훈선수 인터뷰를 하는데 제가 좋아하는 언니들과 친구. 후배들을 하니까 감회가 정말 남다르더라고요. 그렇게 1년을 혼자 옷, 헤어, 메이크업까지 해결하고 지방까지 다니는게 여의치 않았어요. 매니저도 없어서 스케줄도 스스로 짜야 하고 할 것이 정말 많더라고요. 설상가상으로 제가 운전을 못해요. 그래서 춘천에서 여자농구가 있었는데 지하철을 타고 갔던 기억도 납니다. 지금처럼 스포츠 아나운서가 흔하지 않던 때여서 혼자 다니면서 여러 가지를 해야 되는게 참 어렵더라고요. 막판에 대기업에 초대 스포츠 여자 아나운서 시험을 봤는데 아쉽게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즐겁게 농구의 기본기를 가르치고 싶었습니다”

Q.그렇게 농구와의 직접적인 인연은 끊어지나 싶었는데 농구 강사 자리가 들어왔어요.

그러게요. 은퇴후 농구와는 조금 다른 길을 가고 있었는데요. 스포츠 여자 아나운서 시험에 떨어졌지만 쉽게 포기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어요. 더 철저히 준비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그때쯤 좋은 조건으로 농구강사 아르바이트 자리가 들어왔어요. 그게 지금 제가 11년째 하고 있는 용인 삼성생명 블루밍스 유소년클럽이에요. 사실 처음에는 이렇게 오래 할 것이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더 부담 없이 했던 것 같은데 결과적으로 성적까지 따라붙었어요. 아이들과 소통하면서 가장 먼저 들려온 소리는 ‘이기고 싶다’였어요. 대회만 나가면 항상 졌다면서 아쉬움이 컸다고 하더라고요. 다른 생각은 안 들었어요. 이기고 싶은 마음이 불타오르는데 거기에 강한 훈련으로 답변해 줬죠. 다들 동기부여가 되는지라 나름 잘 따라와줬고 성적도 잘 나왔어요. 각종 대회에서 우승도 하고 회원도 많이 늘어나는 등 첫해부터 변화가 있었죠. 2012 WKBL유소년클럽 최강전에서도 삼성이 남, 여 모두 우승을 차지했고요.


 

 


Q.오~ 지도자로서 능력이 있으셨군요?
그 정도까지는 아직 아니고요. 팀과의 궁합이 잘 맞았다고 생각해요. 그래도 들었던 칭찬 중에 기분 좋았던 것이 하나 있어요. 저는 뭐랄까 동기부여를 잘 해준데요. 아이들이 스스로 하고 싶게 만드는?(웃음) 강하게 할 때는 강하게 하고, 놀아줄 때는 또 격의 없이 잘 놀아주고…, 그러던 중 차양숙 선생님께서 WKBL 1호 유소녀클럽을 만드신다고 불러주셔서 삼성 유소년과 WKBL유소녀를 한동안 같이 지도했어요. 2015년 WKBL유소녀최강전에서는 제가 지도하는 두팀이 나란히 결승전에 올라서 제가 가운데 서서 벤치를 보는 일까지도 생겼었죠. 그리고 WKBL유소녀대표팀 코치도 되어 한일교류전도 하는 등 저학년과 여자아이들 농구수업에 특화가 되어가게 됐어요. 그렇게 스포츠 아나운서는 서서히 잊혀지고 농구 선생님으로 굳혀지게 되었죠. 어쨌거나 제 마음 속에 농구에 대한 열정이 여전히 남아있었던 듯 싶어요. 농구관련 일을 하게 되니까 정말 신나더라고요.

Q.농구인 정하윤을 대표하는 W걸스는 어떻게 생겨나게 된것이죠?
하핫…, 드디어 W걸스로 넘어오게 됐네요. 앞서도 말씀드렸다시피 최근 몇 년간 제 머릿속에서 가장 크게 자라난 부분이거든요. 저는 농구를 가르칠 때 기본기를 가장 중요시해요. 그런데 사실 기본기는 조금 지루한 면이 있잖아요. 제가 다른 것은 몰라도 드리블, 볼 핸들링은 잘하거든요. 그런데 또 그것을 잘해야 다음 단계로 넘어 갈 수 있는 것이잖아요. ‘어떻게 하면 재미있게 기본기를 가르칠 수 있을까?’고심하던 중 음악에 맞춰서 하는 시도가 확 떠오르더라고요. 제가 좋아하고 흥미 있어 하는 영역이니까 서로서로 즐겁게 할 수도 있을 것 같더라고요. 실제로 해보니 흥 많았던 당시 여자아이들이 즐겁게 잘 따라해 줘서 좋았어요. ‘음악에 맞춰 드리블을 해보면 어떨까?’ 점점 욕심이 생겨났고 본격적으로 판을 키웠죠. 상큼한 트와이스 노래로 드리블을 만들었어요. 아이들이 저와 같이 기본기 드리블을 해왔기 때문에 시작은 쉬웠어요. 드리블만 하면 심심하니 포인트 안무를 넣었어요. 제가 모델 일을 하면서 배웠던 무대동선, 포즈, 표정까지 아이들에게 알려주었죠. 제가 sm을 좋아하다 보니 칼군무가 좋아서 모든 드리블을 그렇게 완성 시켰고 그게 2018년 W걸스의 시작이에요.
 

 

 



Q.공연도 꽤 하셨죠?
일단 여기가 삼성 구단이다 보니 삼성 남녀 홈경기에 저희를 써주셨어요. 그러다가 장충체육관에서 한 WKBL올스타전에서 공연을 하면서 W걸스를 본격적으로 알리기 시작했죠. 코로나때문에 그 기세를 이어가진 못했지만요. 어쨌거나 2년 연속 WKBL 올스타전 공연에 3년 연속 WKBL 개막전 공연도 하고 KBL공연도 했어요. 이번 시즌에도 올스타전 공연을 준비했는데 취소되어서 너무 아쉬워요. 현재 4년째로 제 인생은 W걸스에 올인 중이에요. 농구 선생님 11년을 하면서 15명의 아이들을 엘리트에 보내고 우승도 많이 했지만 지금은 W걸스가 잘되었으면 하는 마음만 가득하네요. W걸스가 하고있는 농구 퍼포먼스가 널리 알려져서 모든 여자 아이들이 마치 코스처럼 농구 퍼포먼스를 했으면 좋겠어요. 그러다 보면 스타성 있는 여자 선수들도 많이 나올 것이라고 생각해요. W걸스 처음 만들 때 모토가 ‘너 발레 하니? 나는 농구해~’ 거든요. ‘예쁘게 입고 예쁘게 농구하자~!’ 항상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해요.

Q.열정의 크기만큼 목표도 커졌을 것 같아요.
맞습니다. 현재 W걸스의 가장 큰 목표는 NBA공연가기에요. NBA보면 종종 파워 넘치는 퍼포먼스 팀들이 공연도 하고 그러잖아요. 거기에 한국에서 온 작은 소녀들이 예쁘고 귀여운 선을 보여주면 또 다른 매력으로 느껴지지 않을까 싶어요. 요즘 K팝이 핫한데 거기에 맞춰서 공연을 하면 완전 금상첨화겠죠. 더불어 하나 더 추가한다면 올림픽 공연? 하하핫…, 좀 거창하죠. 하지만 이것은 개인적으로 뭔가를 얻기 위함이 아니에요. 농구를 다양하게 알리고 즐길 수 있는 컨텐츠를 늘려보자는 취지죠. 분명 농구 홍보나 인기상승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만큼 W걸스가 널리 알려져서 각 분야 전문가들의 도움도 받아 완벽해지고 싶어요. 지금 W걸스 퍼포먼스는 제가 유튜브로 걸그룹 영상을 보면서 동선을 따라 하고, 유행하는 최신곡 댄스들 찾아서 하고 있어요. 영상과 사진도 비전문가인 제가 하느라 아무래도 어설픈 부분도 적지 않죠. 수입 사업이 아닌지라 사람을 쓸 형편도 아니고요. 솔직히 제 아이디어가 좋아서 다른 곳에서도 팀을 만들어보자는 시도는 종종 있어 왔어요. 서로 합동 공연도 하고 그러면 좋잖아요. 하지만 번번이 무산됐어요. 가장 큰 이유는 돈이죠. 현재 상황에서 거의 수익이 발생하지 않거든요. 하지만 거기에 드는 노력은 엄청나요. 계속 매달려야 하죠. 다들 생활이 있고 사정이 있는데 그만큼 쏟을 수가 없는 거죠. 어쨌든 저는 열정 하나로 계속 하고 있습니다. 다른 분들과 마찬가지로 생활도 해야 하고 언젠가는 한계에 부딪히겠죠. 지금도 많이 힘들고요. ‘언제까지 할 수 있을까?’고민도 커요. 당장 올해가 마지막 일수도 있고요. 그러기 전에 자리를 잡아가면서 이어가고 싶어요. 농구는 제 분야이지만 그 외 부분에는 전문가분들이 따로 계시잖아요. 그 전문가분들이 함께 힘을 실어주시면 대한민국을 넘어 전 세계적인 NO.1 ONLY 1~! 농구 걸그룹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불가능하다고요? 저는 현재 혼자서도 이렇게 하고 있는 중이에요. 함께하고 관심 가져주시면 지금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성장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W걸스의 W도 WKBL을 뜻하거든요. 그냥 댄스팀이 아니라 애당초 농구 홍보의 성격을 가지고 탄생했습니다. 아이들 공연영상은 유투브를 통해 꾸준히 올리고 있어요. 검색창에서 ‘W걸스’만 쳐도 나와요.

 

 

 


Q.얘기를 쭉 듣다보니 농구로 성공하지 못한 후배들에게도 좋은 메시지로 남을 듯 해요.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성공한 분들의 얘기도 동기부여가 되지만 상황에 따라서는 치열하게 견디고 있는 선배의 현재 진행형 스토리가 좀 더 가슴에 와닿지 않을까 싶기도 해요. 예전에 여고 농구선수들의 고민을 들어주는 시간이 있었는데 그때 받은 질문이 기억에 남아요. ‘프로 못가면 어쩌죠? 중간에 그만두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등 가장 현실적인 질문이었죠. 농구를 하고 있는 대부분 학생들은 프로선수 혹은 국가대표를 꿈꾸잖아요. 저는 유명한 선수도 아니었고 그저 키 큰 가드 유망주일 뿐이었어요. 프로는 갔지만 기록도 거의 없고요. 농구를 하다가 관둬도 농구로 할 수 있는 다른 길이 있고 그래야만이 농구를 배워온 시간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지 않을까요. 저뿐 아니라 후배들에게 길을 열어주고 싶어요.

Q.W걸스도 그런 의미에서 더욱 치열하게 하고 계신거죠?
맞아요. 저는 제가 비록 선수로는 성공 못했지만 모델을 할 때는 WKBL시상식에서 패션쇼로, 스포츠리포터를 할 때는 WKBL에서 인터뷰를 하는 등 어디가서 무엇을 하든 농구 덕을 보고 다시 농구계로 흘러왔어요. 그리고 거기에서 힘을 얻어서 농구 퍼포먼스라는 새로운 장르를 만들어서 열심히 진행 중이고요. 지금은 제가 어떻게 보면 농구계의 아웃사이더? 같지만 많은 농구인들이, 그리고 중간에 관두게 된 선수 출신 후배들이 여러 분야에서 다양한 농구 관련 일을 했으면 좋겠어요. 제가 못다 이룬 꿈인 스포츠 아나운서도 꼭 나왔으면 좋겠고요. 그러려면 새로운 길이 계속해서 나와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되면 농구 관련 직업들이 생겨나고, 선수로서 최고는 아니었어도 다른 부분에서 롤모델이 될 만한 사람들이 많아지겠죠. 그런 결과들이 농구를 시작하게 될 이들에게까지 영향을 주어서 선수층도 두터워지는 선순환이 이어지기를 바래봅니다. 제가 먼저 농구 퍼포먼스라는 새로운 장르로 성공을 거둬서 본보기가 되고 싶어요. 많이 지켜봐 주시고 응원해주세요.

#글_김종수 칼럼니스트

​​#사진_본인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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