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LEGENDS] (21) 여자농구를 호령한 여제(女帝) 정선민

서민교 / 기사승인 : 2022-06-05 12:4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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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민에게 태극마크를 달았던 17년은 길고도 힘들었던 시간이다. 정선민에게 태극마크는 당연한 것이었고, 그저 묵묵히 여자농구대표팀을 이끌어야 한다는 사명감뿐이었다. 정선민이 대표팀 유니폼을 내려놓은 건 2010년이었다. 국가대표 은퇴. 그에게는 무거운 짐과 같았다. 마산여고 졸업 후 태극마크와 함께 한 정선민의 농구인생은 굵고 길게 이어졌다.

언제나 정선민의 이름 앞에 달린 ‘바스켓 퀸’이라는 수식어는 그냥 달린 것이 아니다.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시작으로 2000년 시드니올림픽 4강 신화, 1999년 시즈오카 아시아선수권대회 우승, 2002년 세계선수권대회 4강, 2007년 아시아선수권대회 우승, 한국 최초의 미국여자프로농구(WNBA) 진출 등 정선민의 발자취는 한국여자농구 역사의 한 페이지에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국가대표 은퇴 선언 당시 한국나이 서른일곱. 여자선수로서는 이미 환갑이 지난 나이였다. 세계선수권대회와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은 정선민이 태극기를 달고 뛴 마지막 대회였다.
 


과거를 묻다
앳된 고교 졸업생 정선민은 태극마크가 설레고 두려웠다.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은 그녀에게 또렷한 기억이었다.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청소년대표에서 성인대표팀으로 발탁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사실 느낌이 크게 다르진 않았어요. 선수생활 최고의 목표였던 태극마크였지만, 성취감과 부담감이 공존했죠. 정은순 언니가 막내축에 속할 정도로 그 당시 여자농구를 평정했던 대선배들이 있었기 때문에 함부로 이름을 올릴 수도 없었어요. 그런 언니들과 함께 ‘과연 해낼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앞섰어요. 그저 하루하루가 정신없고 정말 힘들었죠.”

‘바스켓 퀸’ 정선민이 주전자를 들고 뛰어다녔다는 것을 상상해보라. 하지만 정선민은 그랬다. 노란 주전자에 물을 가득 채우고 컵에 일일이 물을 따르며 언니들 뒷바라지를 했다. 손빨래 역시 정선민의 몫이었다. 버스도 택시도 잡기 힘들던 태릉선수촌에서 궂은일을 도맡으며 대표팀 막내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은 정선민의 대표팀 농구인생에 첫 시작을 알렸다. 한국은 당당히 금메달을 따냈다. 정선민의 기억 속에는 종료 1분 30초를 남기고 뛰었던 순간이 고스란히 자리 잡고 있었다.

“영화 같은 스토리였어요. 일본에 일부러 져서 결승전에서 다시 일본을 만나 금메달을 따냈죠. 어떻게 ‘이렇게도 할 수 있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요. 언니들이 정말 대단해 보였어요. 그땐 일본도 전력이 좋았거든요. 결승에서는 일본에 지면 죽는다는 생각이었죠. 제 기억 속에는 마지막 1분30초를 남기고 코트에 나갔던 기억밖에 없지만요. 하하.”


정선민의 기억은 2000년 시드니올림픽 4강 신화로 이어졌다. 한국여자농구가 이룬 기적의 순간이었다. “시드니 올림픽 4강은 정말 기대를 하지 않았던 대회였어요. 질 줄 알았던 경기들을 역전해서 이기고요. 한국 축구가 월드컵 4강에 들었던 그런 비슷한 기분이었죠. 저한텐 더 특별한 대회였어요. 시드니 이후 WNBA 진출 계기가 됐으니까요.”

WNBA. 전 세계 농구선수들의 꿈의 무대다. 정선민은 한국 선수로는 처음으로 2003년 WNBA 진출이라는 쾌거를 이뤄냈다. 아시아 선수로서도 최초였다. 정선민은 WNBA 신인 드래프트를 통해 전체 8순위로 시애틀 스톰에 당당히 입단했다. 하지만 경기당 출전 시간 7.25분을 뛰며 3개월 만에 국내 무대로 복귀했다. 그녀에게도 아쉬움은 짙게 남아있었다.

“무모한 도전이라도 한 번 해보고 싶었어요. 첫 해외 진출이라서 짧은 기간에 적응을 하면서 성공을 하기는 쉽지 않았어요. 조금만 더 젊었을 때 도전을 했더라면 계약기간을 다 채우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있어요.”

하지만 정작 정선민을 괴롭힌 것은 국내의 비난 여론이었다. 기대에 못 미치는 성적에 대한 팬들의 실망감은 그녀를 벼랑 끝으로 내몰았다.
“첫해는 저도 적응하는 기간으로 잡았는데, 한국에서 ‘우물 안 개구리다’, ‘너무 못한다’, ‘나라 망신이다’라는 혹독한 비판을 들었죠. WNBA 선수들과도 관계가 정말 좋았고, 추억도 기억도 많이 남는 시즌이었는데, 비난 여론은 견디기 힘들었어요.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미국서 느낀 경험을 확실히 보여줄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 때문이었어요. 최초라는 자부심과 제 자신한테 박수를 쳐주고 싶은 그런 심정으로 다시 일어선 거죠.” 정선민은 국내 복귀 후 비난 여론을 잠재웠고, 진정한 ‘바스켓 퀸’으로 WKBL을 평정하며 우뚝 섰다.

마지막 태극마크
정선민에게 태극마크는 추억의 한 페이지로 장식되고 있었다. 은퇴 결정은 갑작스런 것이 아니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은퇴 선언을 몇 번이고 했다. 다만 공식적으로 발표만 하지 않은 것이었다. 주위 농구관계자들과 대표팀 감독들에 의해 자연스럽게 묻힌 것뿐이었다.
“2004년 아테네올림픽 이후 세대교체가 시작됐어요. 제가 은퇴를 생각을 조금씩 하기 시작했던 때이기도 하고요. 이후 제가 참가하지 않았던 도하 아시안게임에서 성적이 좋지 않았어요. 대표팀에서 다시 저랑 (박)정은이를 부르더라고요. 그만 둬야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빠질 수 없다는 것을 알았어요. 일본 같은 팀한테 지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거든요.”

다시 입은 대표팀 유니폼. 정선민은 후배들을 이끌고 2007년 인천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우승을 이뤄냈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을 앞두고 감독과 약속을 했다. 마지막이라고. 하지만 소속팀 감독인 임달식 감독이 대표팀 사령탑을 맡으면서 또 은퇴는 미뤄졌다. 이유는 ‘너 없으면 안 돼’였다. 그렇게 또 태극마크를 달았다. 정선민은 “감독님과 약속을 다 지켰으니까 이번엔 진짜 공식 발표를 하겠다”고 했다. 대표팀 은퇴 발표는 그렇게 이뤄졌다.


대표팀 은퇴 선언을 한 진짜 이유는 뭐였을까? 그녀는 지쳐 있었다. 그리고 외로웠다. 공허함도 한 부분을 차지했다.
“외로움이요? 맞아요. 바로 그거에요. 정은이랑도 그런 얘기를 많이 해요. 그게 힘들어서 그만하고 싶은 생각을 하게 된 거죠.”


할 말이 많은지 계속 말을 이었다.
“예전과 분위기가 너무 달라요. 대표팀이 우승을 하고 와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요. 속이 타죠. 지금까지 만든 업적에 오점을 남기는 그런 기분이요. 함께 했던 선배들은 모두 떠났는데 저만 남은 그런 기분이죠. 떠밀리기 전에 웃으면서 떠나고 싶어요. 그래야 미련이 안 남거든요.” 대표팀 은퇴. 미련이 남지 않을까. 아쉬움은 없을까. 하지만 정선민에게 들려온 대답은 명쾌했다. “절대!”였다. “망설임, 미련 같은 것은 전혀 없어요. 정말 홀가분한 기분이에요. 오른쪽 어깨에 있던 짐을 내려놓았다고 할까요? 선수생활을 완전히 은퇴를 한다면 많은 생각이 들었겠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추해지기 전에 은퇴해야죠. 대신 마지막 세계선수권과 아시안게임에 대한 부담과 짐은 더 무거워진 느낌이에요.”

은퇴를 선언한 정선민에게 대표팀 복귀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다시 부를 것 같은 예감 때문이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다시 돌아오는 일은 없을 거예요. 박수 받고 떠났다가 돌아오는 것은 말도 안 되죠. 섣불리 결정한 은퇴도 아니고요. 마음은 아프더라도 어쩔 수 없어요.” 


정선민이 생각하는 정선민, 그리고 진짜 은퇴
정선민은 역대 여자선수들 가운데서도 최고의 포워드로 평가받는데 부족함이 없다. 하지만 정선민이 생각하는 정선민은 달랐다. 겸손이 아니었다. 스스로의 역할과 존재, 포지션에 대한 딜레마였다.

“전 그렇게 잘한단 생각을 안 해요. 주위에서 잘한다고 하니까 ‘내가 뭘 잘하나’ 하고 생각해봤어요. 그런데 없는 거예요. 전형적인 인사이드 선수도 아니고요. 정은순 언니나 성정아 언니 같은 그런 선수가 아니잖아요. 전 그냥 팀에 따라 짜 맞춰지는 선수 같은 느낌이에요. 끼워 맞추는 게임에 레고 조각 같은 선수요. 그냥 필요한 선수인지 최고의 선수인지 모르겠어요. 제 몸값도 최고였던 선수는 아니니까요. 그냥 말로만 최고의 선수인 것 같아요.”

정선민은 신한은행에서 5년 연속 우승을 차지했다. 마지막 시즌이었던 2011-2012시즌은 친정팀인 KB스타즈로 이적했는데, 이때도 팀을 챔피언결정전까지 끌어올리며 자존심을 보였다. 그 중에서도 4연패를 달성했던 2008-2009시즌이 많이 회자된다. 4연패 달성이 이뤄지던 날. 정선민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 어느 때보다 서글픈 눈물이었다. 눈물의 진짜 이유도 궁금했다. “솔직히 완전 억울했어요. 정규시즌 내내 힘들었던 모든 순간들이 스쳐지나가더라고요. 아파도 못 쉬고, 별별 소리를 다 들어가면서 참고 했던 운동들이 생각나더라고요. 제가 못하면 큰 일이 날 것처럼 하니까요. 그냥 스스로 위안을 삼는 거죠. 뒤로 돈 받는다고 하는 사람들은 정말 떼려주고 싶어요. 저 자신한테는 떳떳해요. 또 거짓말 한다고 욕할 지도 모르지만요.” 정선민의 억울함. 맞다. 정선민은 늘 당연히 잘해야 하는 선수였다. 정규시즌 공헌도 1위를 해도 정작 상복은 없었다. ‘레고 조각’이라는 말도 이해가 갔다.

농구선수 아닌 여자 정선민
여자 정선민. 왠지 생소한 느낌이다. 여자로서 정선민은 잔인하리만큼 혹독한 평가를 받는 선수다. 하지만 그녀의 매력은 무궁무진하다. 농구선수가 아닌 여자로다. 농구공만 붙잡고 싸움을 한지 20년이 훌쩍 넘었다. 농구에서 여자로 화제를 돌리자 얼굴부터 화색이 돌았다.
“농구장에서 비춰지는 제가 다는 아니에요. TV로 보던 제 모습과 평소에 보는 저를 보고 정말 다르다고 많이 해요. 그때마다 희열을 느껴요. 여자 정선민을 더 알리고 싶은데…. 언젠가부터 나 자신한테 투자를 하기 시작했거든요. 그런 게 정말 좋아요. 그 전에는 농구가 전부였으니까요.”

신한은행으로 옮긴 뒤부터다. 정선민은 여유가 생겼다. 피부 관리도 받고, 쇼핑도 하고, 시가만 나면 지인들을 만나 영화보고 수다를 떠는 재미에 푹 빠졌다. 차도 마시러 다니고, 술도 한 잔 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소주는 한 병이 주량이지만, 폭탄주는 대적할 상대가 없다고.

“요즘 애들과 비교하면 정말 미친 짓이죠. 농구를 하기 위해 쉬었고, 나보단 농구가 먼저였으니까요. 농구 외적으로는 아예 생각이 들지도 않았으니까요. 늦게 배운 도둑질이 무서워요. 20대 초반에 할 일을 지금 하는 거죠. 저를 위해 투자하는 게 정말 좋아요. 요즘엔 그런 낙으로 살아요.”

은퇴 후 인생. 왠지 농구와 관련된 일은 쳐다보기도 싫어할 것 같았지만, 정반대였다. 은퇴 후 국가대표팀 코치, 프로팀 코치(하나은행, 신한은행) 등을 거쳤으며, 현재는 2022 FIBA 여자농구월드컵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활약중이다.


정선민은 틈날 때마다 농구를 관람하며 스트레스를 풀기도 했다. 실제로 이상범 감독의 팬이라고 말하는 그는 원주 DB 홈구장인 원주 종합체육관에서도 종종 목격됐다.

“농구를 왜 떠나요? 농구 보는 게 얼마나 재밌는데요. 전 남자농구도 완전 팬이에요. 원한다면 언제든 여자농구를 지켜야죠. 제가 받은 사랑만큼 후배들에게 베풀어 주고 싶어요. 농구를 통해서 제가 얻은 게 정말 많잖아요. 제 모든 것을 최선을 다해 전수해서 후배들도 그런 사랑을 받게 해주고 싶어요. 물론 결혼하면 여자로 현명하면서 똑 부러지게 살고 싶고요.”

 


# 정선민은 트리플더블을 몇 번이나 놓쳤을까
꽤 오래 전 일이다. 한 신문사 선배가 내게 “박찬숙 플레이를 봤어야 한다”며 자랑(?)을 한가득 했다. 그 시절 참 대단한 선수였다며 말이다. 약 오르고 샘이 났다. 세월이 지나고나니 나도 후배에게 똑같은 짓(?)을 하고 있었다. “전주원, 정선민 등을 보았느냐”고….

비록 1984년 LA올림픽 세대를 겪진 못했지만, WKBL이 출범 20주년을 맞아 투표로 선정한 ‘그레잇12’의 전성시대를 모두 보고 감동했던 우리 세대 역시 행운아다. 그래서 괜한 아재의 자부심에 그런 질문을 던지게 됐다. 그 중 한 명인 정선민에게는 ‘바스켓퀸’이란 별명이 있었다. 여왕이란 별명이 붙었으니 보통 실력이 아니었음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정선민은 WKBL 역사상 가장 많은 트리플더블을 기록한 선수다. 챔프전을 포함, WKBL 역대경기에서 트리플더블은 총 36번 나왔는데, 정선민이 혼자 그 중 13번을 기록했다. 플레이오프와 챔피언결정전만 놓고 보면 오로지 정선민(5번)만이 이 기록을 달성했다. 양지희와 최윤아가 은퇴하면서 현역 선수 중 트리플더블을 경험해본 선수는 이제 아무도 없다. 이 이야기를 나누다 정선민이 물었다. “근데, 가끔 궁금하다. 어시스트나 리바운드 1~2개 차이로 놓친 적도 꽤 많았다. 몇 번이나 될 지 궁금하다.”

그래서 한 번 찾아봤다. 정선민이 리바운드 1~2개, 어시스트 1~2개 차이로 트리플더블을 놓친 경기는 몇 번이나 될까.

정규경기(21회)
1. 1998년 8월 2일_ 28점 10리바운드 9어시스트
2. 2000년 6월 6일_ 17점 8리바운드 9어시스트
3. 2000년 6월 26일_ 36득점 18리바운드 8어시스트
4. 2000년 7월 3일_ 27점 15리바운드 8어시스트
5. 2000년 7월 7일_ 14득점 15리바운드 8어시스트
6. 2001년 1월 22일_ 28득점 9리바운드 8어시스트
7. 2001년 7월 5일_ 31득점 15리바운드 8어시스트
8. 2001년 7월 13일_ 2득점 12리바운드 8어시스트
9. 2001년 7월 21일_ 16득점 12리바운드 8어시스트
10. 2001년 12월 17일_ 24득점 14리바운드 8어시스트
11. 2001년 12월 21일_ 25득점 8리바운드 10어시스트
12. 2002년 8월 3일_ 18득점 12리바운드 8어시스트
13. 2003년 2월 4일_ 16득점 11리바운드 8어시스트
14. 2003년 2월 25일_ 16득점 8리바운드 8어시스트
15. 2005년 1월 22일_ 17득점 8리바운드 9어시스트
16. 2005년 12월 28일_ 13득점 8리바운드 13어시스트
17. 2008년 2월 21일_ 21득점 9리바운드 11어시스트
18. 2009년 11월 20일_ 23득점 9리바운드 8어시스트
19. 2010년 1월 25일_ 14득점 9리바운드 9어시스트
20. 2010년 2월 6일_ 20득점 8리바운드 9어시스트
21. 2010년 2월 12일_ 16득점 17리바운드 9어시스트

플레이오프(3회)
1. 2000년 7월 21일_ 19득점 8리바운드 9어시스트
2. 2009년 3월 6일_ 31득점 8리바운드 10어시스트
3. 2010년 3월 23일_ 28득점 13리바운드 8어시스트

챔피언결정전(2회)
1. 2010년 4월 2일_ 8득점 8리바운드 10어시스트
2. 2010년 4월 6일_ 10득점 11리바운드 9어시스트

정선민은 ‘득점’에 있어서도 따라갈 자가 없었다. 정규경기 통산 8,140득점, 플레이오프 통산 811득점으로 이 부문 역대 1위에 올라있다. 99겨울리그에서 신세계를 깜짝 우승으로 이끈 정선민은 신세계(4회)와 신한은행(5회)에서 총 9번 챔피언이 됐다. 준우승에 그쳤지만 마지막 시즌이었던 2011-2012시즌에도 KB스타즈를 결승으로 이끌었다. 그러나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를 부탁하자 정선민은 우승한 시즌보다 준우승했던 시즌을 꼽았다. 1998년 여름리그였다.

“프로 출범 후 신세계를 결승으로 이끌었을 때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그때만 해도 아무도 신세계라는 팀을 신경쓰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 시즌에 우리는 결승까지 올라갔다. 1차전(73-68)을 이기면서 선수들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됐다. 비록 2~3차전을 모두 져서 준우승에 그쳤지만, 우승보다도 값진 성과였다고 생각한다. 그때 고생도 많이 했지만, 선수들이 갖고 있던 에너지와 자신감은 상상을 초월했다. 또 이 시리즈를 통해 나도 내 이름을 알릴 수 있었던 것 같다.”

삼성생명에게 패한 신세계는 바로 다음 리그였던 99겨울리그에서 팀을 정상에 올라섰다. 정선민 시대가 도래했음을 공식적으로 알리는 순간이었다. 신한은행에서 우승의 영광을 같이 했던 임달식 전 감독은 “가끔 보고 있으면, ‘저런 상황에서 저렇게도 플레이가 가능하구나’라는 걸 느끼게 해줬다. 센스가 정말 좋았다. 감독이 하나를 주문하면, 다음과 그 다음 상황까지도 생각해서 플레이 했다. 코트 위에서는 정말 편한 선수였다”고 회고한다.

정선민은 이러한 장점을 살려 WKBL 커리어동안 한 경기 40득점 이상을 8번. 한 경기 30득점 이상을 56번이나 기록했다. 이 부문도 역시 국내선수 역대 1위에 있다. 연장전 최다득점(15점), 연속 자유투 성공(42개, 역대 2위), 통산 자유투성공률 1위(87.1%), 역대 자유투 성공 1위(1,952개) 등도 정선민의 보유 기록이다. 정선민은 또한 한국여자농구 사상 최초로 WNBA(시애틀)에 진출했으며, 부산 아시안게임 은메달(2002년)과 아시아선수권 우승(2007년) 등 아시아 무대에서도 명성을 떨쳤다.



화려한 기록을 남기고 은퇴한 정선민에 대해, 농구관계자들에게 물었다.
“후배들이 정선민으로부터 무엇을 배우면 좋을까.”
신한은행에서 우승의 영광을 함께 했던 임달식 전 감독을 비롯, 많은 관계자들은 비슷한 답을 내놓았다. “기술도 분명 훌륭한 선수였지만, 지는 걸 정말로 싫어했다”는 것이다. 그러한 승부욕이 신세계 시절부터 정선민을 더 강하게 만들어준 것은 아닐까.

반대로 정선민에게 앞으로 WKBL을 이끌어갈 후배들에게 무엇이 가장 필요한 것 같냐고 물었다. 정선민은 “과도기를 견뎌야 한다. 프로가 되어야 한다. 어떻게든 잘 하는 선수들이 떠난 자리를 채워야 한다. 최선을 다해서 성장해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글. 손대범 기자]


정선민은…
1974년 10월 12일생인 정선민은 WKBL 선수사상 가장 많은 것을 이룬 스타였다. 마산여고 출신으로 SKC에 입단한 정선민은 WKBL 신세계와 KB스타즈, 신한은행 등을 거쳤다. 신한은행에서는 WKBL 최초로 5년 연속 통합우승에 일조하기도 했다. 2000년 시드니올림픽 4강 진출에 힘을 보태기도 했으며,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서도 8강 진출에 일조했다. 마지막 국제대회였던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서는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WKBL 역대 득점, 트리플더블 부문 1위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 이 글은 JUMPBALL 스페셜 에디션「TEAM KOREA」에서 발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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