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유희형이 쓰는 나의 삶 나의 농구 ⑧ 1970 방콕 아시안게임

점프볼 편집부 / 기사승인 : 2021-07-05 20:4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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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프볼이 유희형 전 KBL 심판위원장이 쓰는 <나의 삶 나의 농구>를 연재합니다.
1960~1970년대 남자농구 국가대표를 지낸 유희형 전 위원장은 이번 연재를 통해 송도중에서 농구를 시작한 이래 실업선수와 국가대표로 활약하며 살아온 농구인생을 독자들에게 담담하게 전달할 예정입니다.

 

"태국 텃세 극복하고 이스라엘까지 잡았다"

제6회 아시아경기대회는 1970년 12월 9일부터 20일까지 태국의 수도 방콕에서 열렸다. 원래 우리나라가 개최하기로 했던 대회인데,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등의 이유로 개최권을 반납했다. 아시아올림픽평의회(OCA)는 4년 전 아시안게임을 개최했던 태국에 개최를 권유했다. 그러한 이유로 방콕에는 선수촌이 없었다. 대신 참가국마다 호텔을 하나씩 배정해 주었다. 우리나라 선수단은 방콕 시내에 있는 마노라 호텔을 숙소로 사용했다.

아시아 45개국 중 18개 나라가 참가했다. 당시 중동국가 대부분이 참가하지 않았다. 스포츠 후진국이었기 때문이다. 총 13개 종목 2,500여 명의 선수단이 참가했다. 우리나라는 172명(선수 131명, 임원 41명)의 대규모 선수단을 출전시켰다. 성적은 11개 종목에서 금메달 18개, 은메달 13개, 동메달 23개를 획득, 일본(금 35개)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구기 종목에서 남자농구와 축구(버마와 공동우승)가 금메달을 땄고, 수영에서 조오련이 2개의 금메달을 획득했다. 복싱에서는 무려 6개의 금메달을 쓸어 담았다. 육상 투포환에서 백옥자 선수가 1위를 하며 아시아 마녀로 등극하였다. 

 

홈팀 태국에 화끈한 설욕전

남자농구는 총감독 이경재, 감독 김영기, 선수 김영일, 이인표, 김인건, 신동파, 신현수, 최종규, 박한, 곽현채, 유희형, 이자영, 추헌근, 윤평노로 구성되었다. 경기에 돌입했다. 예선에서 이란(110-77), 필리핀(79-77), 홍콩(116-51)을 물리치고, 6강이 겨루는 결승리그에 진출했다. 결승리그에는 이스라엘, 일본, 필리핀, 태국 등이 올라왔다. 한국이 예선에서 승리했던 필리핀에 결승리그에서 65-70으로 일격을 당했다. 선수단 모두 실망이 컸지만,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었다. 다른 나라는 이스라엘의 적수가 되지 않는다. 이스라엘 격파를 목표로 정하고 차분히 준비했다. 우리는 우승에 대한 집념으로 하나가 되었다. 다행히 필리핀이 이스라엘, 대만, 일본에 패하며 우승권에서 멀어졌다. 이스라엘만 꺾으면 금메달을 거머쥐는 것이다. 홈팀 태국도 신경이 쓰였다. 태국 농구는 중위권 수준이지만 유독 홈에서 강했다. 4년 전 1966년 아시안게임 준결승에서 우리나라는 주최국 태국에 패했다. 심지어 한국의 선수, 임원, 응원단이 집단 폭행을 당하기도 했다.

경위는 이렇다. 실력이 부족한 태국이 와일드한 방법으로 일본, 대만을 꺾고 준결승에 진출했다. 준결승에서 한국과 맞붙었다. 초반부터 거친 동작으로 시비를 걸었다. 농구 경기가 아니라 마치 격투기를 방불케 했다. 전반에는 우리나라 선수가 자제했지만, 후반에도 계속 얻어맞고 있을 수 없었다. 두 대 맞으면 한 대 때렸다. 집단 난투극이 벌어졌고 경기가 중단되었다. 우리나라 선수 중 김철갑은 치아 2개가 부러졌고, 이병국은 팔뚝이 찢어져 피를 흘렸다. 어이없는 것은 말리고 제지해야 할 경찰까지 합세하여 우리 선수단에 폭행을 가한 것이다. 이병희 대한농구협회장도 얻어맞았다. 경기 중단이 선언되었다. 당시 점수로 우리나라는 패했다. 그럼에도 태국은 우승하지 못했다. 이스라엘이 태국을 대파하며 손쉽게 우승했고, 우리나라는 일본을 꺾고 동메달을 차지했다. 4년 전을 생각하며 태국과 경기에 임했다. 초반부터 기선을 제압해서 그들이 감히 승리에 대한 마음을 먹지 못하도록 하자고 했다. 시작부터 치고 나갔다. 점수 차이가 크게 나자 태국은 백기를 들었다.

아시아 최강 이스라엘 꺾은 비책은?

이제 이스라엘만 남았다. 이스라엘은 유럽에서 축출되어 1974년까지 아시아로 출전했다. 유독 농구만 강했다. 이전 아시안게임(1966년)에서도 1등을 했던 농구 강국이다. 이스라엘은 인종 자체가 다르다. 서구형으로 신장이 크고 민첩했다. 선수 대부분이 미국대학교 재학생이었다. 당연히 미국식 농구를 했고, 대학리그인 NCAA에 출전하고 있는 현역들이었다. 전승을 거두며 우리와 최종전을 가졌다. 대부분 이스라엘의 우승을 예상했다. 그러나 우리는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충만했다. 1968년 멕시코시티올림픽부터 함께 다져온 팀워크는 우리의 최대 강점이었다. 3년간 손과 발을 맞추며 마음까지 하나가 된 팀이었다. 서로 눈빛만 봐도 통하는데 어찌 질 수가 있겠는가? 정면 대결을 피했다. 공격력이 뛰어난 이스라엘을 꺾는 비책으로 지공 작전(delayed play)을 택했다. 수비 리바운드 볼을 잡으면 빠른 속공을 시도하여 완벽하게 득점했다. 속공이 여의치 않으면 지공을 했다. 공격 제한시간을 충분히 이용하는 전술이다. 당시 공격 제한시간은 30초였다. 현재는 24초다. 우리가 공격권을 가지면 20초를 보낸다. 나머지 10초 동안 외곽 찬스를 만드는 G2 작전을 실행한다. 두 명의 선수가 수비를 막아주는 더블 스크린(Double screen)인데, 최고 슈터인 신동파 선배에게 패스가 가면 백발백중 골인이었다. 상대방이 알고도 막지 못하는 기막힌 전술이었다. 이스라엘은 당황하기 시작했고, 우리가 초반부터 리드를 잡았다. 운도 따라주었다. 이스라엘의 최장신 센터가 경기 시작 3분 만에 공중볼을 다투다 우리 선수 팔꿈치에 맞아 눈 주위가 찢어졌다. 안경이 깨지고 눈까지 다쳐 병원으로 실려갔다. 이스라엘의 전력손실이 컸다. 그 후 리바운드 잡기가 수월해졌다. 공격권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수비 리바운드가 중요한데, 대부분 나와 김영일 선배가 책임졌다.

금메달 따고 먼 길 떠난 김영일 선배

그분은 1976년 기차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참으로 안타깝고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한국 농구계는 값진 인재를 잃었다. 김영일 선배는 경기 중·고교를 나온 수재로 연세대학 1학년 때 농구를 시작했다. 어느 누군가가 천재는 단명하다고 했던가? 모든 면에서 뛰어나고 존경받던 훌륭한 선배를 너무 일찍 떠나보냈다. 이 자리를 빌려 그분의 명복을 빈다. 우리는 결국 이스라엘을 81-67로 격파하고 사상 첫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너무 기뻤다. 한국은 전년도 아시아선수권 우승 때 보다 발전된 면모를 보였고, 플레이의 폭도 넓어졌다는 평가를 받았다. 우승한 다음 날 버마와 공동 우승한 축구선수들과 술 시합을 가졌다. 농구선수들이 축구선수들을 모두 KO 시켰다. 귀국할 때 많은 환영도 받았다. 추위를 무릅쓰고 무개차에 타고 카퍼레이드도 하였다. 국민훈장 석류장도 받아서 가문의 영광으로 기록된 해였다. 한국농구 역사에 큰 획을 그은 1970년을 나 자신도 영광과 환희가 가득했던 한해로 지금까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사진_유희형 선생 본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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