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진석의 농담(籠談)]삼성제일주의에 대한 명상, 그리고 임근배의 길

기자 / 기사승인 : 2021-03-29 16: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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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프로농구 삼성생명의 우승은 큰 감동을 남겼다. (내가 보기에) 부족한 부분이 상대적으로 많았던 팀이 더 강한 팀을 이겼다. 흔히 “누가 더 강한지는 싸워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말은 아주 정확하지는 않다. 농구는 손을 사용해 좁은 공간에서 겨루는 경기다. 변수가 적은 편이다. 축구나 야구와 비교해 점수가 많이 나기 때문에 표본이 많다. 그 결과는 평균치에 수렴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약한 팀이 강한 팀을 상대할 때 공격제한시간을 활용해 경기 템포를 늦추는 작전을 즐겨 쓴다. 공격과 수비의 횟수가 줄면 슛을 던지는 횟수도 준다. 그러면 오차범위가 커지고 선수 개개인과 팀의 능력이 평균치에 도달하기 어려울 수 있다. 이 작전은 공격제한시간이 30초일 때 효과가 더 컸다. 24초 제한 상황에서는 더 간결한 연결과 마무리가 필요하다. 특히 강한 팀에게.

동네 마트에서 가정에 상품을 배달하기 위해 운용하는 경형트럭이나 승합차는 고속도로에서 고성능 자동차를 이길 수 없다. 하지만 산 아래 자리를 잡은 올드 타운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곳은 길이 좁고 구불구불하며 과속방지턱이 즐비하다. 그뿐인가. 곳곳에 맨홀이 푹 꺼져 있다. 아이들이나 노인이 툭툭 튀어나온다. 이런 곳이라면 배달용 경형트럭이 슈퍼카보다 먼저 고객을 만날 수 있다. 그러니 맹수와도 같이 힘이 강한 팀이라면 사냥감이 그런 곳으로 달아나지 못하도록 길목을 지켜야 한다. 승부의 세계는 약육강식의 야생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사자도 초식동물을 맘대로 잡아먹지는 못한다. 온가족이 달라붙어 사냥에 나서도 성공률은 10%에서 20% 사이라고 한다. 자연다큐멘터리를 보면 사냥하던 사자가 하마에게 머리를 통째로 물려 사경을 헤매기도 한다. 고립된 사자가 하이에나 떼에 둘러싸여 공격당한 끝에 목숨을 잃기도 한다. 들소 떼에 잘못 걸려 수없이 뿔에 찍히고 럭비공처럼 날아다니다 잘 다진 산적이 되어버리기도 한다. 물에 발을 잘못 들였다가 악어의 댄스 파트너가 되기도 한다. 악어가 사냥감을 물고 물속에서 몸을 회전하는 동작을 ‘죽음의 무도(舞蹈)’라고 부른다.

지금 막바지를 향해 치닫는 여자배구 챔피언 전을 보라. 한 팀은 ‘어차피 우승하리라’던 강한 팀이다. 그러나 이 팀은 갑작스럽게 뛰어난 선수 둘을 잃어버린 뒤 흐름을 잃었다. 그 둘이 없어도 강한 팀이지만 걸음이 흐트러지면서 길에서 벗어났다. 그들보다 구성이 뛰어나지는 않았지만 더 단결된 팀이 정규리그 1등자리를 빼앗았다. 챔피언 결정전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우승후보였던 팀은 완전히 포위당했다. 1, 2차전에서는 빠져나갈 길을 찾기 전에 무자비한 공격을 당했다. 사냥꾼이 도리어 사냥감이 되어 버린 것이다. 여자농구에서처럼 3, 4차전을 건져 동률을 이루고 최종전으로 몰고 갈 수도 물론 있다. 그럴 가능성은 아주 작아 보인다. 그러나 어떤 결과가 나오든, 우승할 가능성이 높았던 팀의 몰락보다는 그 팀을 이긴 상대와 그 소속 선수들에게 찬사를 바쳐야 한다. 코트와 벤치가 하나 되어 보여준 그들의 플레이는 배구팬 누구라도 반할 만큼 매력이 넘쳤다. 그들은 팀 정신을 보여주었고, 선수들은 경기를 거듭할수록 기량이 향상되었다.

다시 삼성생명으로 돌아와서, 그들이 거둔 승리의 의미를 생각한다. 너무 야박할지 모르지만, 또한 무수한 비난을 받으리라고 짐작하지만, 나는 샐러리캡 소진율 꼴찌(81.43%)인 팀이 1위(우리은행 100%)와 2위(95.00%) 팀을 차례로 꺾고 우승한 결과가 그다지 통쾌하지만은 않다. 모기업이, 그리고 구단 관계자들이 팀을 위해 흘린 땀의 값은 선수들이 훈련장과 코트에서 흘린 땀의 값 못지않다. 해마다 좋은 성적을 올린 구단은 많은 예산과 정성과 노하우를 팀을 위해 투자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삼성생명의 우승을 폄훼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그렇지만 승리의 공로는 절반 이상을 임근배 감독이, 나머지 절반의 절반 이상을 선수들이 가져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삼성생명은 물론이고, 삼성의 간판을 내건 유수한 스포츠 팀들은 대부분 후퇴를 거듭하고 있다. 삼성 스포츠를 상징해온 유일한 언어, ‘제일주의’는 과거의 그림자가 되어 버렸다. 삼성의 여러 스포츠 팀들은 타이틀이 아니라 출석인증에 만족하는 것 같다. 올레길을 걷고 나면 구간인증 도장을 찍고, 모든 구간을 걷고 나면 마침내 그 길과 작별한다. 삼성 스포츠를 지켜보면서 나는 작별의 공포를 가끔 느낀다.

나는 현장 기자로 일하면서 삼성의 제일주의를 여러 차례 체감했다. 그중에 대표적인 사례를 꼽는다면 프로축구 삼성 블루윙스다. 1995년 12월 15일에 창단한 수원은 당시 중앙일보에서 일하던 나의 출입처였다. 창단 작업이 한창일 때, 삼성 본관에서 만난 임원 한 분의 말씀을 기억한다. “우리 삼성이 축구 팀을 만든다면 국내리그 우승에 만족하지 않을 겁니다. 회장께서는 ‘유럽 수준’의 축구팀을 원하세요. 과감하게 투자할 겁니다.” 삼성 블루윙스의 모델은 독일이었다. 윤성규 초대 단장은 독일 축구계에 인맥이 두터운 동포 축구인이고, 김호 창단 감독은 브레멘에서 지도자 수업을 했다. 코치 조광래는 독일 프랑크푸르트와 프랑스의 파리 생제르망에서 연수를 하고 프랑스 코칭아카데미에서 지도자 수업을 받았다. 팀이 이렇게 모양을 갖추자 지향점이 더욱 구체화됐다. 삼성 축구가 빠르게 상위권에 자리 잡고 리그의 강자가 된 과정은 그들이 거둔 성적이 말해준다. 삼성은 리그 우승 네 차례, FA컵 우승 다섯 차례, 리그컵 우승 여섯 차례, 슈퍼컵 우승 세 차례, 아시아챔피언스리그 우승 두 차례, 아시아슈퍼컵 우승 두 차례, A3챔피언스컵 우승 한 차례를 기록했다. 국내 더블(K리그와 리그컵) 두 차례, 국제 더블(아시아챔피언스리그 및 FA컵) 한 차례의 기록도 남겼다. 이런 팀이 2011년 11월 20일 열린 프로축구 6강 플레이오프 경기에서 홈 팬들의 야유를 받는다. 삼성은 부산 아이파크에 1-0으로 이겼다. 그러나 선제골을 넣은 뒤 수비 일변도로 경기하자 홈 팬들이 “공격을 하라.”며 질책했다. 나는 이들이 충성도 높은 팬으로서 삼성의 ‘창단정신’에 닿아 있다고 믿는다. 단장과 감독이 대물림 되면서 ‘푸른 날개’가 상징하는 삼성의 기상은 기억 저편으로 사라져갔다. 그러나 팬들은 끝까지 잊지 않은 것이다.

내가 보기에 삼성생명의 우승은 임근배 감독이 추구한 사람 중심의 농구, 스포츠의 본질에 닿은 농구, 미래에 투자한 농구, 인격과 사랑과 신뢰의 농구가 거둔 결실이다. 감독과 선수의 ‘맞절’이 이 사실을 함축해 보여준다. 나는 삼성생명 구단(정확히 말해 제일기획) 정책의 승리라고 보지 않는다. 그래서 구단과 모기업의 주요 결정권자들이 “거봐 우리 말이 맞잖아.”라고 착각하거나 자기 최면에 빠지지는 않는지 지켜보고 있다. 지난 시즌의 우승이 삼성생명 구단의 가치관이나 철학을 단숨에 바꿨으리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스포츠에서 삼성제일주의는 (관리주체의 회사명에 ‘제일’이 들어 있기는 하지만) 거세된 것 같다. 설령 누군가 야망을 품는다 해도 그것을 실현할 물질적 토대가 준비돼 있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삼성스포츠, 좁혀 말해 삼성생명 여자농구 구단의 철학에 조금이라도 변화가 있다면 그 징후는 곧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삼성생명은 우승의 기쁨을 오래 누릴 겨를도 없이 자유계약(FA) 선수들과 협상을 앞두고 있다. 협상 방식과 결과를 보면 윤곽을 그릴 수 있다. 팬들도 각종 미디어를 통해 상황을 모니터할 것이다. 이번 FA 협상장에는 리그의 판도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스타들이 많이 나왔다. 어느 팀을 응원하든, 팬들이 스릴을 느낄 만하다.

지켜보겠다.


: 3월 29일 오전에 임근배 감독과 잠깐 통화했다. 그는 운전을 해서 어딘가 찾아가는 중이었다. 전화기 주변에 바람 스치는 소리, 엔진 웅웅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곧 조용해졌으니까, 그는 자동차를 세우고 통화한 것 같다. 미안한 마음이 들어 얼른 몇 가지 묻고 끊었다. 대화중에 (질문의 주제는 아니었다) 임 감독이 감독과 선수 사이를 ‘사제(스승과 제자)’의 관계로 표현하는 데 거북함을 느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특히 여자) 농구에서는 선수들이 감독이나 코치를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다. 임 감독은 “규모가 작은 실내종목의 특징이 아닐까요?” 하고 되물었다. 그러나 그는 선수들이 ‘가르쳐야 할 학생’이 아니고 ‘같은 일을 하는 동반자’라고 생각했다. 감독과 선수 모두 구단이 고용하며, 감독은 감독의 일을 하고 선수는 선수의 일을 한다는 것이다. 임 감독은 ‘선생님’이라는 호칭이나 ‘사제지간’이라는 관계규정이 감독이 선수들을 마음대로 대해도 괜찮다는 보증서는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런 생각들이 지도자로 하여금 선수들을 ‘내 것’으로 인식하게 만들고, 여러 가지 불합리를 낳는다고도 했다. 감독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나는 그의 말을 듣는 게 싫지 않았지만 시간을 너무 많이 빼앗는 것 같아서 서둘러 끊었다. 그는 곧 아이들이 있는 캐나다로 간다고 했다.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건강한 몸으로 돌아오기 바란다.

 

허진석 한국체육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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