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준구의 DEBUT] 하늘 높이 날지 못한 한 마리의 새, 박찬성의 이야기

민준구 기자 / 기사승인 : 2020-07-03 15:5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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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프볼=민준구 기자] 한국농구 역사에 있어 이름을 널리 알린 선수들이 있는 반면 상황이 따라주지 않아 금세 잊혀진 이름도 분명 존재한다. 한때 한국농구를 책임질 것으로 여겼던 영웅들의 좌절은 가슴 아픈 이야기로 돌아왔지만 그들의 노력과 열정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최진수와 함께 세계무대를 누볐던 남자 박찬성 프라임 타임 대표 역시 그들 중 한 명이다.

2000년대 중후반 농구를 기억하는 팬들이라면 박유민이란 이름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삼일상고의 전성기를 이끈 주인공으로 중앙대 3인방(오세근, 김선형, 함준후)보다 더 많은 주목을 받았던 그는 현재 박찬성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다.

운동을 좋아했던 어린 박찬성 대표는 부모님의 권유로 농구를 시작하게 된다. 한국나이로 10살이 되던 해, 매산초로 전학한 그는 본격적으로 농구 인생의 문을 열었다. 자신이 좋아하던 운동과 정식으로 배우는 농구는 분명 달랐다. 당시만 하더라도 지도자들의 강경한 태도 역시 쉽게 적응할 수 없었던 부분. 삼일중으로 진학한 초기까지 농구는 그저 힘들다는 생각만 하게 만드는 존재였다.

박찬성 대표는 “초등학교 때랑 중학교 때 운동은 차원이 달랐다. 정말 너무 힘들었고 훈련 강도도 강했다. 개인적으로도 농구에 진지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또 사춘기 시절이었기 때문에 중심을 잡지 못하기도 했다. 아폴로 눈병이 유행했던 시절이었는데 눈을 빨갛게 하려고 노력할 정도로 어렸었다”라고 기억했다.

그러나 인생 최고의 지도자를 만난 이후 박찬성 대표는 달라지기 시작했다. 현재 중앙대 사령탑으로 부임하고 있는 양형석 감독과의 만남은 인생의 터닝 포인트였다.

“양형석 감독님께서 오신 이후 모든 게 달라졌다. 훈련은 힘들었지만 농구를 대하는 태도에 변화가 생겼다. 양형석 감독님도 나를 자극하기 시작했다. 3학년 선배들이 전국대회에서 수차례 우승할 때였는데 나와 비교하기 시작하시더라(웃음). 혼도 많이 났고 비교도 되니 심적으로 힘들었다. 근데 오기가 생겼다. 내가 더 잘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다. 그때부터 농구에 대해 진지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 양형석 감독은 “(박)찬성이는 더 잘할 수 있는 선수였다. 가진 재능은 대단한데 그걸 코트 위에서 보여주지 못하는 느낌도 있었다. 더 세련되고 멋지게 농구할 수 있는 아이가 그렇지 못한 모습을 보니 아쉬움이 있더라. 그래서 자극했던 것 같다. 근데 찬성이는 그 부분에 대해 화만 내는 선수가 아니었다. 오히려 내 예상보다 더 좋은 모습을 보여주려고 노력했고 기대 이상의 활약을 보여줬다”라고 설명했다.

박찬성 대표의 각성, 그리고 어린 시절부터 함께 농구를 했던 최진수의 성장은 삼일중을 전국 최강으로 올려놨다. 박찬성 대표가 3학년이었던 시절, 삼일중은 전국 3관왕을 차지했고 이는 많은 이들의 평가를 깨는 이변이었다.

“외부 평가에서 우리를 우승후보로 두지 않더라. 그 정도로 강한 전력은 아니었다. 그러나 전국대회에서 3관왕을 할 수 있었던 건 다른 선수들은 물론 나와 (최)진수, 그리고 양형석 감독님이 계셨기 때문에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이때부터 박찬성 대표는 농구계에선 모를 사람이 없을 정도로 이름을 알리게 된다. 최진수가 미국 진출에 나선 상황에서도 삼일상고가 전국 최강으로 꼽힐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했다.

박찬성 대표는 “당시만 하더라도 3학년 선배들이 없었다. 그래서 1학년 때부터 경기에 많이 출전할 수 있었는데 예전에 나를 자극하게 한 삼일중 선배들과의 체급 차이가 느껴지지 않았다. 또 대학 팀과의 연습경기에서도 없어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신입생이었는데 여러 대학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올 정도로 관심을 많이 받았다. 그때가 나의 황금기였을지도 모른다”라고 이야기했다.

삼일상고 1학년 시절, 박찬성 대표는 2004 인도 방갈로르에서 열린 U18 아시아 챔피언십에 출전하게 된다. 다른 선수들에 비해 2살이나 어린 그가 태극마크를 가슴에 달았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특히 절친이었던 최진수와의 재회는 지금까지 이어지는 우정의 토대를 다진 일이었다(당시 유성호(KCC)도 1학년 신분으로 승선했으며 삼일중 3학년이었던 최진수 역시 이름을 올렸다).

“내게 있어 2004년 청소년 국가대표에 선발된 일은 지금까지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농구에 대한 눈이 더 넓어지는 계기가 됐고 무엇보다 진수와 다시 만났다는 것에 의미를 둘 수 있다. 이후 2006년, 2007년에도 함께 국제대회에 나서게 되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재회가 아닐까 싶다.”

국내에선 적수가 없었던 박찬성 대표에게 있어 NBA 및 아시아 캠프 참가는 새로운 도전에 대한 의지를 불태우는 계기가 됐다. 특히 최진수가 이미 사우스켄트고에서 뛰고 있다는 점은 미국 진출에 대한 생각을 더욱 깊게 했다.

박찬성 대표는 “삼일상고에서 3년을 보내면서 정말 많은 생각을 했다. 여러 국제 캠프에 참가했고 다양한 국적의 선수들을 만나 보니 도전에 대해 정말 많이 생각하게 됐다. 그때는 세 가지 선택지를 두고 고민했던 것 같다. 삼일상고 졸업 후 대학 진학, 그리고 프로 진출, 마지막으로 진수가 있는 사우스켄트고로 가는 것. 결국에는 미국 진출을 결정했고 등록금까지 낼 정도로 절차상 문제가 없었다”라고 말했다.

※ 이 과정에서 재밌는 일화가 하나 있다. 당시 사우스켄트고에서 뛰고 있었던 최진수는 박찬성 대표에게 하나의 메시지를 전한다. 현재 포인트가드가 너무 혼자 플레이를 하니 빨리 합류해서 도움을 달라고 말이다. 훗날 드러난 사실이지만 최진수가 불만을 드러낸 그 포인트가드는 바로 아이재아 토마스다.

그러나 박찬성 대표의 농구 인생에 있어 큰 벽이 된 부상 악령이 이때부터 찾아오게 된다. 2006 중국 우루무치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U18 아시아 챔피언십을 준비하던 과정에서 무릎 부상을 당하게 된 것이다. 6개월 진단을 받게 된 박찬성 대표는 자연스럽게 미국 진출 역시 무산되고 말았고 인생 처음으로 좌절을 겪게 된다.

“농구를 시작한 이래 이렇게까지 힘든 경험은 해본 적이 없었다. 크게 다쳐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 정도의 장기 부상을 어떻게 이겨내야 하는지도 몰랐다. 청소년 대표로서 활약할 수 있는 기회, 또 미국 진출 이후 내 농구를 증명할 수 있는 기회를 모두 놓쳤다는 생각에 실망감이 너무도 컸다. 정말 많이 울었고 힘들었다.”

좌절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미국 및 프로 진출의 길이 끊긴 박찬성 대표는 대학 진학을 선택했고 행선지는 연세대와 고려대가 아닌 중앙대였다. 과연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박찬성 대표는 “솔직히 말하면 양형석 감독님에게 인정받고 싶었기 때문에 중앙대를 선택했다. 다른 대학의 제의도 많았지만 중앙대에서 성공하는 모습을 보이면 그래도 내가 가지 못한 길에 대해 어느 정도 보상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다행히 (오)세근이 형, (김)선형이, (함)준후 등 좋은 선수들과 함께 입학하게 돼 행운이었다”라고 밝혔다.

김상준 감독 부임 이후 과거의 영광을 되찾아가고 있었던 중앙대는 오세근과 박찬성 대표를 품에 안으며 강한 전력을 갖출 수 있었다. 이대로만 간다면 프로 진출은 물론 성공의 길이 보장되어 있었던 상황. 하지만 박찬성 대표는 또 한 번의 도전을 준비했다.

2007년 세르비아에서 열린 U19 세계농구선수권대회는 한국농구 역사상 잊을 수 없는 순간이었다. 그동안 1라운드 통과도 해내지 못했던 역사 속에서 사상 처음으로 2라운드 진출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외국 스카우트의 관심도 집중됐으며 스타덤에 오른 최진수는 물론 박찬성 대표 역시 주목을 받았다.

“관중석에서 미국 전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어떤 외국인이 명함을 건네주더라. 인디애나 대학의 스카우트라고 했는데 미국 진출에 관심이 많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면서 연락을 달라고 했다. 누군가가 나를 인정해준다는 생각에 자신감이 넘쳤었다. 사실 브리검영 대학 진학까지도 생각할 정도로 미국에 가고 싶었는데 직접 스카우트가 명함을 줄 정도였으니 엄청난 일이었다.”

아쉽게도 박찬성 대표의 미국 진출 꿈은 이뤄지지 못했다. 1년간 투병 중이었던 아버지의 죽음은 박찬성 대표를 무너지게 했다. 잦은 부상에도 흔들리지 않았던 그에게 있어 영웅과도 같았던 아버지가 떠났다는 사실은 쉽게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결국 가장이 된 박찬성 대표는 미국 진출의 꿈을 완벽히 접은 후 프로에서의 성공을 준비했다. 하루라도 빨리 큰 돈을 벌기 위해 조기 진출까지 고려했을 정도로 박찬성 대표는 당장의 성공이 필요했다. 또 돌아가신 아버지가 원했던 길이기에 당연히 걸을 수밖에 없었다.

독기 품은 박찬성 대표는 중앙대의 주축으로 단숨에 자리잡았다. 황금세대로 불린 주전 선수들의 공백을 문제 없이 채웠고 2008 베이징올림픽 최종예선을 준비하는 국가대표 명단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4일 만에 탈락 통보를 받아야 했지만 오세근과 함께 대학 선수로는 유이하게 선발됐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둘 수 있었다.

하나, 2학년을 마치고 프로로 떠나려 했던 박찬성 대표는 다시 부상에 발목을 잡히며 1년을 허비해야 했다. 결국 3학년 생활을 마무리한 뒤 미련 없이 드래프트 지원서를 제출했고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게 됐다.

2010년 2월 3일, 서울 양재동 교육문화회관에서 열린 2010 KBL 국내 신인선수 드래프트는 ‘박찬희 드래프트’로 불렸다. 그러나 드래프트 직전 진행된 농구대잔치에서 이정현이 활약했고 변기훈, 박형철 등 쏠쏠한 자원들도 경쟁력을 보였다. 그럼에도 박찬성 대표는 자신감이 넘쳤다. 그리고 당당히 전체 3순위로서 대구 오리온스에 지명됐다.

“솔직히 말하면 2순위까지 생각했었다(웃음). (이)정현이 형이 농구대잔치 전까지 평가가 그리 좋지 않았었는데 갑자기 너무 잘하면서 아쉽게 됐다. 그때 KT&G가 포인트가드 포지션을 보강한다고 해서 어느 정도 기대가 있었다. 그래도 높은 순위에 지명됐다는 사실, 그리고 국가대표 시절 만났던 김남기 감독님과의 재회에 의미를 뒀다.”

당시 오리온스는 주전 포인트가드 김승현의 부재로 인해 박찬성 대표에게 많은 기대를 걸었다. 신인에게 있어 큰 경쟁 없이 주전 자리를 가져갈 수 있다는 것은 큰 이점이 될 수 있었다. 문제는 박찬성 대표에게 여유가 없었던 것. 중앙대 시절 잦은 부상으로 인해 만신창이가 된 그는 몸과 마음의 안정기가 필요했다. 그러나 김승현이 없는 오리온스의 입장에선 박찬성 대표를 중용할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위태로운 데뷔 시즌이 시작됐다.

데뷔전은 성공적이었다. 2010년 10월 16일, 대구실내체육관에서 열린 원주 동부와의 경기에서 선발 출전해 29분 48초 동안 13득점 1리바운드 4어시스트 2스틸을 기록했다. 당시 우승후보로 꼽혔던 동부를 상대로 자신감 넘치는 플레이를 보였고 팀의 패배(79-91)에도 높은 점수를 받았다.

박찬성 대표는 “부담감이 정말 컸던 데뷔전이었다. 근데 힘든 일이 있다고 해서 쉽게 포기하는 성격은 아니다. 어차피 손해볼 싸움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겁 없이 달려들었다. 근데 코트 위에 막상 서니 김주성, 윤호영 선배가 골밑을 지키고 있어 막막하기는 하더라(웃음). 다리가 후들거리는 걸 참는 게 힘들었는데 그래도 끝까지 버티려고 했다”라고 추억했다.

성공적이었던 첫 출발 이후 박찬성 대표는 오리온스의 주전 포인트가드로서 조금씩 자리를 잡았다. 비록 팀 성적은 바닥을 쳤지만 45경기 출전, 평균 23분 11초 동안 5.0득점 1.9리바운드 3.4어시스트를 기록하며 준수한 활약을 펼쳤다. 야전사령관으로 불리는 포인트가드. 신인에게 있어 큰 부담이 됐지만 잔부상 속에서도 마지막까지 코트를 지켰다는 것에 의미를 둘 수 있었다.

아쉬움도 존재했다. 박찬성 대표는 “만약에 김승현이란 존재가 버티고 있었고 내가 그 뒤를 받쳐주는 역할이었다면 과연 어땠을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더라. 몸 상태가 좋지 않았고 많은 시간을 뛰기에는 멘탈적으로도 흔들린 상황이었다. 정말 쉽지 않은 시즌이었는데 잘 버티려고 했던 게 나중에는 독이 되어 온 것 같았다”라고 언급했다.

박찬성 대표가 말한 독은 곧 부상이었다. 2006년 U18 아시아 챔피언십 준비 과정부터 시작된 부상 악령은 중앙대를 거쳐 오리온스까지 쫓아왔다. 공식적으로 박찬성 대표의 부상 이력은 3~4차례로 알려졌지만 그는 8번의 무릎 수술을 했다고 밝혔다. 팀에 해를 끼치고 싶지 않았던 마음에 개인적으로 수술을 받은 것까지 포함한 횟수다.

마이클 조던급 재능이라 하더라도 부상이 잦으면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없다. 박찬성 대표 역시 중앙대 시절까지의 좋은 평가가 프로까지 이어지지 못하면서 서서히 잊혀졌고 끝내 임의탈퇴를 거쳐 은퇴 수순을 밟게 된다.

아직도 박찬성 대표에 대해 아쉬움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양형석 감독은 “찬성이는 너무 쉬지 않았다. 그 부분이 찬성이를 성장시켜준 계기가 됐지만 반대로 부상 위험도가 높아진 이유가 되기도 했다. 정말 열심히 했던 아이였는데 개인적으로도 많이 아쉬움이 남는다”라고 말했다.

오랜 시간 함께했고 지금까지도 우정을 나누고 있는 최진수 역시 “공과 사 구분이 뚜렷했고 사적으로 만날 때와 농구를 할 때의 느낌이 달랐던 사람이었다. 코트 위에서의 카리스마가 대단해서 의지가 되는 선수였고 부상만 아니었다면 미국에서 함께 즐거운 농구를 했을 거라고 자신한다. 그만큼 좋은 선수였다”라고 이야기했다.

중앙대 시절 한솥밥을 먹었던 김선형 또한 “부상만 없었던 지금까지도 최고의 선수라는 평가를 받았을 것”이라고 동의했다.

일찍 프로 생활을 마친 박찬성 대표는 박대남 스킬팩토리 대표와 함께 스킬 트레이닝의 전파에 힘썼다. 이후 경기도 용인에 프라임 타임을 개업, 자신만의 사업을 시작했다.

한때 한국농구 정상에 섰던 박찬성 대표. 이후 끝없는 추락 속에 이른 은퇴의 길을 걸었지만 무너지지 않는 멘탈을 자랑하며 새로운 인생을 살고 있다.

박찬성 대표는 “행복, 기쁨, 슬픔, 좌절 등 여러 감정을 안고 살아왔지만 지금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 이유는 세 가지라고 생각한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강한 사람이 될 수 있도록 키워주신 것, 그리고 농구에 모든 것을 걸었던 시절, 옆을 돌아볼 수 있게 해준 (유)성호, 마지막으로 진수부터 (유)병훈이, (박)병우 등 평생 함께할 사람들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나의 농구 인생은 아쉽게 끝났지만 앞으로 한국농구를 이끌어야 할, 그리고 이끌고 있는 선수들을 위해 내 힘을 다하고 싶다”라며 마무리 인사를 전했다.

# 사진_점프볼 DB(문복주, 한필상, 이청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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