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준구의 DEBUT] 포스트 이충희로 불렸던 비운의 사나이 이정래

민준구 기자 / 기사승인 : 2020-07-13 15:2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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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프볼=민준구 기자] 185cm의 크지 않은 신장, 그러나 탄탄한 몸에서 뿜어져 나온 멋진 3점슛은 한국농구의 영원한 에이스 이충희를 연상케 했다. 아쉽게도 모두가 성공할 거라고 생각했던 ‘포스트 이충희’의 삶은 그리 순탄치 않았다. 그리고 그는 그렇게 쓸쓸히 농구 코트를 떠났다.

1990년대 초반 명지고 이정래는 농구대잔치 세대가 빛낸 한국농구를 이어갈 차세대 스타로 떠올랐다. 뛰어난 신체 조건은 아니었지만 슈터 계보를 이을 또 한 명의 ‘슛쟁이’가 탄생했다는 찬사를 받기도 했다. 그 당시 고교무대에선 이정래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고 또 그림자를 밟을만한 경쟁자도 없었다.

서울 중동초에서 연가초로 전학한 이정래는 원래 핸드볼을 통해 운동을 시작한 평범한 소년이었다. 그러나 체계적인 시스템이 구축되지 않았던 상황에서 농구부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고 그렇게 첫 발을 디뎠다.

어린 시절부터 슈팅에 있어서는 자신감이 남달랐던 이정래. 그는 아직도 잊지 못하는 인생 최고의 스승을 만나며 지금까지도 간직하고 있는 슈팅 자세를 갖추게 된다. 당시 연가초 농구부를 이끈 서성민 감독은 이정래의 재능을 일찌감치 파악했고 최고의 슈팅 자세를 가르쳤다. 힘든 시간이었지만 배운 것이 더 많았던 시절. 이정래는 이때를 회상하며 서성민 감독에 대한 감사함과 미안한 마음을 전했다.

“연가초에서 농구를 했을 때 나는 즐거움 이상의 무언가를 항상 마음속에 간직할 수 있었다. 운동이란 게 참 힘든 일이라는 걸 느끼면서도 그만큼 재밌다는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모든 건 서성민 감독님이 곁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래서 더 죄송한 마음이 든다. 나 때문에 서성민 감독님께서 농구판을 떠나시게 됐기 때문이다.” 이정래의 말이다.

당시 연가초는 명지중-명지고로 이어지는 진학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지금도 이러한 연계 진학에 대해선 엄격한 룰이 적용되고 있지만 당시는 지금보다 더 보수적이었다고. 그러나 이정래는 명지중이 아닌 용산중으로 진학하게 된다. 이정래가 더 빛날 수 있는 곳으로 진학하기를 바란 서성민 감독의 도움 때문이었다.

이정래는 “사실 명지중으로 진학하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서성민 감독님께서는 더 체계적인 시스템이 잡혀 있는 용산중으로 가기를 바라셨다. 용산중 역시 나에게 많은 관심을 줬고 어린 마음에 진학을 결심하게 된다. 이후 명지중에서는 당연히 문제 제기했고 이 일로 인해 서성민 감독님이 떠나시게 됐다”라고 이야기했다.

용산중 진학 이후 이정래의 삶은 비참했다. 명지중으로 가지 않았던 것이 화살로 돌아와 2학년 때까지 정식 경기에 출전할 수 없었다. 훈련, 그리고 연습경기에서 펄펄 날았지만 정작 정식 무대에선 이름을 알릴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이정래의 농구 인생은 첫 번째 위기를 맞게 된다.

용산중 3학년 때부터 출전 기회를 잡게 된 이정래는 마음속에 품은 한을 코트 위에서 표출했다. 그동안 새벽, 오전, 오후, 야간 훈련을 소화한 후 자신만의 개인 훈련까지 이어가며 기량을 쌓았던 그는 코트 위에 선 한 마리의 사자와도 같았다.

이정래의 이름은 전국 농구계에 퍼져 나갔다. 명지고 역시 다시 이정래를 품에 안고 싶어했고 이 과정에서 그는 용산고가 아닌 명지고를 선택하게 된다. 물론 명지고로 진학하는 과정이 매끄럽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정래는 지난 일에 대해 다시 드러내고 싶어하지 않았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면 이미 지난 일에 대해 아쉬움만 내뱉는 한심한 사람이 될 것 같다. 연가초에서 명지중으로 가지 않았던 것, 그리고 용산중에서 용산고가 아닌 명지고로 가게 된 것 모두 쉽지 않은 선택이었고 어려운 일이었다. 그 과정 속에서 여러 일이 발생했지만 지금 드러낸다고 해서 좋을 건 없다. 그저 어린 날의 추억이라고 생각하며 잊고 싶다.”

농구에 대한 열정, 그리고 사랑만큼은 최고였던 이정래에게 있어 진학 과정에서의 문제는 외적인 일에 불과했다. 가슴 안에 품은 한을 실력 행사로 쏟아낸 그는 더 이상 막을 수 없는 존재로 성장했다.

대경상고 출신으로 이정래와 함께 코트 위에서 맞붙었던 이규섭 삼성 코치는 “(이)정래는 당시 어떤 선수가 오더라도 일대일로 막을 수 없는 존재였다. 대부분의 팀들이 명지고를 상대하게 되면 박스 원 전술을 썼는데 그런데도 2~30점씩 넣었던 게 정래였다. 주변 선수들 사이에선 분명 다른 수준에 오른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라고 기억했다.

이정래의 한 학년 아래 후배였던 전형수 안양고 코치는 “정래 형을 막을 수 있는 선수는 없었다. 많이 못 넣었다고 생각한 경기에서도 10점대 후반은 책임져줬을 때였다. 다른 팀들이 박스 원 전술을 쓰긴 했는데 제대로 통한 적이 없었을 정도로 수준이 달랐다. 이미 완성형이라고 해야 할까. 특히 3점슛 라인 한 두 발 뒤에서 던지는 딥-쓰리도 충분히 가능했을 정도였다”라고 이야기했다.

명지고 1학년 시절부터 부동의 에이스로 활약했던 이정래. 겉은 화려했지만 속은 그렇지 않았다. 명지중 출신이 아니라는 이유로 동료들의 견제를 받아야 했고 밖으로는 상대 선수들의 거친 파울로 인해 수많은 잔부상을 갖게 됐다. 조금이나마 문제가 사라질 수 있었던 것은 박성근 감독이 명지고로 부임했던 3학년 시절부터였다. 당시 정훈, 이근석 등과 함께 합류한 박성근 감독은 강도 높은 훈련으로 유명했지만 선입견 없는 지도로 이정래에게 날개를 달아줬다.

고교무대를 평정한 이정래에게 수많은 대학의 관심이 이어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름 있는 대부분의 선수들이 그랬을 것”이라며 겸손한 모습을 보인 이정래는 “연세대, 중앙대부터 시작해서 여러 대학이 나를 스카우트하기 위해 많은 이야기를 해주셨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내가 성장할 수 있고 많은 시간을 뛸 수 있는 팀은 고려대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고려대를 선택했고 지금도 후회는 없다”라고 말했다.

당시 고려대는 김병철의 졸업으로 인해 2번 라인에 공백이 생긴 상황이었다. 이정래에게는 고려대 진학이 가장 현명한 선택이었고 그렇게 신입생 때부터 당당히 주전 선수로서 활약할 수 있었다.

이정래는 “솔직히 말하면 자신감은 정말 많았다. 명지고 시절에도 대학 팀들을 만나면 전혀 밀린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으니까. 실제로 고려대에 입학한 후 처음 맞이한 MBC배 대회에서 (서)장훈이 형이 돌아온 연세대를 꺾고 우승도 했다. 그때부터 내 인생에 황금기가 온 것 같았다”라고 전했다.

이정래가 입학한 1996년의 고려대는 MBC배 대회에서 연세대를 상대로 우승을 차지하게 된다. 2차전에선 현주엽(24득점 16리바운드)과 함께 3점슛 6개를 100% 성공시킨 이정래(24득점)의 활약이 이어지면서 서장훈(6득점 9리바운드)을 압도하기도 했다.

3학년으로서 주전 포인트가드로 맹활약한 신기성 해설위원은 “정래가 아마 고교 랭킹 1위로 입학했을 것이다. 그때는 같은 학번에 (이)규섭이도 있었는데 정래가 대학 수준의 실력을 뽐냈던 걸로 기억한다. 고등학생 시절부터 이미 경쟁력이 있었다. 3점슛은 말할 것도 없었고 타이밍이나 타점, 점프력 등 전부 좋았다”라고 말했다.

탄탄대로를 걸을 것처럼 보였던 이정래의 농구 인생은 두 번째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용산중 시절부터 조금씩 문제가 되었던 허리 부상이 발목을 잡은 것이다. 당시만 하더라도 최대한 수술을 지양하던 시절이었으며 그렇다고 해서 재활에 대한 개념이 제대로 정착되지 못했다. 의료 기술 및 그에 대한 지식이 따라주지 못한 시기였던 만큼 이정래 역시 한 명의 피해자가 되고 말았다.

“용산중 시절부터 조금씩 허리 통증이 시작됐다. 그러다가 명지고 때부터 심해지기 시작했는데 그래도 경기에 뛰는 건 큰 문제가 없었다. 근데 고려대 재학 시절에 통증이 심각해지면서 여러 병원을 다니게 됐다. 수술과 재활 비슷한 치료 중 하나를 선택했어야 했는데 의사는 수술을 권장하지 않았고 나 역시 최대한 피하고 싶었다. 그렇게 1년이라는 시간 동안 허리 치료를 마치고 돌아온 것이 4학년 때였다. 그때는 나보다 뒤에 있던 동기들이 어느새 앞에서 달리고 있더라. 여러모로 너무 힘들었다.”

힘든 시기를 이겨낸 후 코트로 돌아왔지만 이정래는 웃을 수 없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버팀목이 되어주었던 어머니가 끝내 하늘로 떠난 것이다. 엎친 데 덮쳤다는 말이 이보다 더 잘 어울릴 수 있을까. 일주일간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고 전한 이정래는 결혼까지 미룰 정도로 좌절하고 말았다.

모든 것을 놓고 싶었던 그때, 이정래를 일으켜 세워준 것은 임정명 감독이었다.

“(임정명)감독님께선 제 은인과도 같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도 감독님과 사모님께서 자식처럼 돌봐주셨다. 너무 힘들었는데 더 이상 슬퍼하지 않도록 아껴주신 분들에게라도 이겨내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었다.”

다시 코트 위에 선 이정래는 여전히 위험한 남자였다. 오랜 부상 끝에 돌아왔음에도 자신의 기량을 마음껏 뽐냈고 당대 최강으로 꼽힌 중앙대와의 경쟁에서도 밀리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1999년 9월에 열린 농구최강전에선 중앙대의 우승 행진을 끊는 데 큰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렇게 졸업의 시기는 찾아왔고 2000 KBL 국내 신인선수 드래프트에 참가하게 된다.

1999년 12월 9일, 서울 교육문화회관 별관 1층에서 열린 2000 KBL 국내 신인선수 드래프트의 주인공은 이규섭 코치였다. 전체 1순위 지명권을 통해 삼성에 영입되면서 스포트라이트의 중심에 섰다. 그러나 이정래의 이름은 좀처럼 들려오지 않았다. 전체 6순위로 최병훈이 언급되기 전까지 말이다.

이정래는 “솔직히 말하면 초조했다. 그리고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상 때문에 1년 넘게 쉬었지만 실력으로는 항상 자신이 있었으니까. 전체 6순위까지 이름이 나오지 않아서 속으로 걱정도 했다. 그러다가 LG에서 내 이름을 불러주면서 프로에 가게 됐다는 마음에 모든 걱정이 사라졌다”라고 밝혔다.

이정래의 전체 7순위 지명은 다소 놀라운 결과였다. 당시 그를 지명한 이충희 감독은 “행운이다”라는 말로 감정을 드러낼 정도였다. 그 정도로 이정래의 순위 하락은 놀라운 일이었다.

하지만 LG는 중앙대의 김태환 감독을 영입하면서 대대적인 변화를 보였다. 이후 조성원이 영입됐고 외국선수 선발에 있어 에릭 이버츠를 지명하며 공격 농구의 기틀을 마련했다.

문제는 이정래의 입지가 좁아졌다는 것. 프리 시즌만 하더라도 LG의 주전 멤버로 평가된 그는 조우현이 동양에서 트레이드되어 오며 위기를 맞게 된다. 한 팀에 무려 세 명의 슈터가 존재하게 된 것이다.

이정래는 “(김태환)감독님께서 나에 대한 신뢰를 조금 내려놓은 듯한 모습이었다(개인적인 의견). (조)우현이 형이 좋은 선수인 건 맞지만 여름에 보인 내 실력에 자신이 있었다. 한 팀에 슈터가 세 명이 있으면 분명 한 명은 뛸 수가 없을 거란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게 내가 될 거란 걱정이 컸고 우려는 현실이 됐다”라고 말했다.

2000-2001시즌의 LG는 KBL 역사상 최고의 공격력을 자랑한 ‘닥공’ 팀이었다. 평균 103.3득점이라는 어마어마한 기록을 냈으며 정규리그 2위, 챔피언결정전 준우승이란 성과를 냈다. 특히 경기당 11.4개의 3점슛을 성공시켰다는 점 역시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이정래의 데뷔 시즌 성적은 그리 만족스럽지 못했다. 42경기에 출전, 평균 15분 13초 동안 7.3득점 1.7리바운드 1.3어시스트에 그치며 신인상 경쟁에서 멀어지고 말았다.

들쭉날쭉했던 출전 시간은 이정래의 경기력에 큰 영향을 끼쳤다. 20분 이상 출전한 경기에선 대부분 두 자릿수 득점을 기록했고 20점대 후반의 고득점을 올리기도 했다. 하나, 10분대 경기에선 대부분 부진한 모습을 보였다.

이정래는 “솔직히 원망도 많이 했다. 한 경기에서 잘하면 다음 경기에도 기회를 주실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은 적이 많았다. 어린 마음에 더 많이 뛰고 더 많이 넣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 그 당시 LG는 정말 신나는 농구를 했지만 내가 설 자리가 없었다는 것에 아쉬움이 컸다”라고 이야기했다.

그렇다면 김태환 감독이 이정래보다 조우현을 중용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과거 기자와의 대화에서 “이정래의 득점 감각은 분명 대단했다. 벤치에서 시작해 두 자릿수 득점은 거뜬히 해줄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수비적인 부분과 경기 흐름을 읽는 것에 있어 완성도를 높여야 했다. 슈팅에 대한 재능과 경기 체력은 신인들 중에서도 최고였다. 다른 부분에 대한 아쉬움이 있었고 조성원과 조우현의 조화가 더 좋다고 평가했다”라고 밝혔다.

이정래에게 있어 아쉬웠던 시즌인 만큼 프로 데뷔전도 크게 기억하지는 못했다. 2000년 11월 4일, 원주치악체육관에서 열린 삼보와의 경기에 나선 그는 5분 13초 동안 어떤 기록도 올리지 못했다.

화려했던 아마추어 시절에 비해 꽃을 피우지 못한 프로 생활. LG를 떠나 삼성으로 이적한 이정래는 이후 삼성-동양의 선수 양도 파문으로 인해 원하지 않은 이적을 하게 됐다. 이후 SK, 전자랜드를 끝으로 일찍 은퇴하게 된 그는 현재 미국에서 두 아이의 평범한 아버지로서 삶을 살고 있다.

이정래는 “참 파란만장한 농구 인생이었던 것 같다. 가슴속에 품은 한을 풀기 위해 코트에서 살았고 전혀 예상하지 못한 쓸쓸한 은퇴를 하게 됐다. 많이 아쉬운 건 사실이다. 하지만 후회는 없다. 지금은 아이들이 잘 자라고 있는 모습을 보며 하루, 하루를 보내고 있다. 조금이나마 나를 기억해주시는 팬들을 위해 간직했던 이야기를 건넬 수 있었다. 전부 꺼내지 못한 부분도 있지만 내 삶이 이랬다는 것을 봐주셨으면 좋겠다”라고 바랐다.

# 사진_KBL, 이정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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