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유희형이 쓰는 나의 삶 나의 농구 ③ 1960년대 미국전훈에서 생긴 일

점프볼 기자 / 기사승인 : 2021-01-23 14:4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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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프볼=편집부] 점프볼이 유희형 전 KBL 심판위원장이 쓰는 <나의 삶 나의 농구>를 연재합니다. 1960~1970년대 남자농구 국가대표를 지낸 유희형 전 위원장은 이번 연재를 통해 송도중에서 농구를 시작한 이래 실업선수와 국가대표로 활약하며 살아온 농구인생을 독자들에게 담담하게 전달할 예정입니다.

※ 본 기사는 농구전문매거진 점프볼 1월호에 게재된 글입니다.

1968 멕시코올림픽을 대비한 미국 전지훈련은 어려움도 있었지만, 보람 있고 흥미로운 일도 많았다. 한국 남자농구대표팀은 첫 방문지인 캐나다의 밴쿠버에서 세 경기를 치렀다. 밴쿠버에는 한국 교민 100여 가구가 살고 있었다. 대표팀은 교민들의 열렬한 응원을 받으며 뛰었으나 3경기에서 모두 패했다.

밴쿠버에서 두 번째 상대인 브리티시콜롬비아대학(UBC)과의 경기에서는 모멸감과 함께 자존심 상하는 일까지 있었다. 전반전이 끝나자 코트 중앙에 모금함이 놓였다. 장내 아나운서가 관중들에게 간곡하게 부탁한다고 얘기했다. 멀리 한국에서 온 국가대표 농구팀이 어려움을 겪고 있으니 도와달라는 내용이었다. 미국인들이 기부를 잘 한다고 들었지만 마치 구걸하는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 경기라도 이겼으면 위안이 되었겠지만 가난한 나라의 설움을 고스란히 느껴야만 했다.

고마운 밴쿠버 교민들…학연없는 설움도 겪어
그곳에서 고려대에 진학하지 않은 서러움도 경험했다. 경기가 끝나면 밴쿠버에 거주하는 연·고대 동문이 대표 선수들을 초대했다. 두 학교와 연이 없는 나는 숙소에 남을 수밖에 없었다. 서운했다. 집안 형편 때문에 고대 진학을 포기했지만, 처음으로 겪는 아픔이었다.

밴쿠버의 교민들은 비교적 부유하고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었다. 대부분 지식 수준이 높은 상류층이어서 빨리 정착을 한 것 같다. 그분들의 후원으로 우리는 모텔에서 편안하게 지냈다. 밴쿠버 한인들은 500km가 넘는 미국 워싱턴주 벨링햄(Belling ham)까지 승용차 4대를 동원해 선수단을 태워다 주기도 했다. 왕복 12시간 거리다. 웬만한 성의가 아니면 도와주기 힘든 일이라 지금도 감사할 뿐이다.

미국 벨링 햄(Belling ham)에서 웨스턴 워싱턴대학에 패한 뒤 8시간을 달려 체니(Cheney)로 갔다. 거기에서 5차전 경기를 했다. 또 졌다. 5전 전패다. 한국 국가대표의 위상을 살려야 하는데,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샤워를 하고 나오니 홈스테이 희망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대학 교수의 집에 배정되었다. 그 집엔 세 명의 자녀가 있었다. 나를 보자마자 질문을 쏟아냈다. 푸에블로호 피랍 사건 때문에 전 미국이 시끄러울 때라 이해는 갔지만, 도무지 영어를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진땀을 흘리다가 피곤하다는 말 한마디를 남기곤 문을 걸어 잠갔다.

대표팀은 주로 그레이하운드 버스를 타고 이동했다. 보통 7~8시간이 소요되었다. 야키마(Yakima)에 있는 센트럴 워싱턴대학과 경기에서도 많은 점수 차이로 패했다. 6전 6패, 참담한 성적인데 미국인 가스폴 감독은 콧노래를 불렀다. 이유가 있었다. 많은 관중이 입장한 것이다. 입장 수입의 70%가 우리 몫이다. 그는 서투른 한국말로 ‘사람 많아! 돈 많아 기분 좋다’ 며 주머니를 두드렸다.

그 덕에 모텔에 투숙했다. 그런데 가스폴이 아침에 일찍 일어나지 말라고 얘기했다. 11시쯤 기상해서 아점(아침 겸 점심)을 먹으라는 주문이다. 아침 식사 한 끼 경비라도 아껴야만 했던 당시 우리의 상황과 감독의 마음이 안타까워 가슴이 찡했다.

시애틀에서 시선 붙잡은 히피족과 성인쇼
시애틀에서는 군부대에 머물렀다. 미군팀과 경기를 하기 위해서다. 군 막사이기 때문에 무료하고 지루했다. 종일 숙소에만 있으니 죽을 지경이라 내가 나섰다. 재미있는 일을 만든 것이다. 성냥개비로 하는 신수점의 일종이다. 대상자로 신동파를 택했지만. 교묘하게 빠지고 최종규가 나섰다. 성냥개비를 잘게 잘라 10개를 만들었다. 입김을 쏘여 손가락에 작은 조각을 붙이는 것인데, 일일이 숫자를 적는다. 많이 붙어야 행운이 온다고 속였다. 최종규 씨는 고지식하게 시키는 대로 따라 했다.

마지막 클라이맥스, 손바닥에 있는 10개를 최대한 많이 붙여야 한다고 부추겼다. 도망가기 위해 방문도 열어 놓았다. 입김을 쏘이기 위해 입을 대고 훅하고 불어 넣을 때 툭 치고 달아났다. 10개의 성냥개비 조각이 목에 걸려서 캑캑하는 소리가 들렸다. 유일한 인천 출신(제물포고 졸) 선배에게 미안했지만 너그럽게 이해를 해 주셨다.

시애틀에서 국내선 비행기를 타고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그곳은 비틀스와 히피족 천국이었다. 어디를 가나 비틀즈의 헤이 쥬드(Hey Jude), 예스터데이(Yesterday)가 울려 퍼졌다. 수만 명의 젊은 남녀가 가출하여 샌프란시스코에 집결했다. 이들은 노숙하고 마음껏 즐기며 생활한다고 했다. 몇 달 후 마음잡고 집으로 돌아가서 학교생활을 충실히 한다는데, 이해가 되질 않았다. 젊은 반항심을 한껏 발휘한 후 새 사람이 되면 무엇하나?

그동안 대표팀 사정이 나아져서 YMCA 호텔에 투숙했다. 모처럼 선수들 사기를 올려주기 위해 시내에 있는 성인 술집에 들어갔다. 처음 보는 장면에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미희들이 춤을 추고 있었다. 우리가 앉아있는 탁자 위까지 걸어와 눈앞에서 흔들어댄다. 정신없이 보고 있는데 경찰이 다가왔다. 성인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며 여권을 보여 달라고 했다. 여권은 없고, 한국대표 농구선수단이라고 설명했지만 물러서질 않는다. 가스폴이 경기장에서 나누어주는 선수명단(Name List)을 보여주었다. 거기에는 이름, 신장, 포지션, 등 번호, 생년월일이 적혀 있었다.

즉시 내 이름이 호명되었다. 1949년생이라 19세인 나를 향해 나가라고 소리쳤다. 아쉬움을 달래며 나는 그만 쫓겨나고 말았다. 호텔 방에 돌아와 누워 있다가 한 번 더 보려고 그곳에 다시 갔다. 방 열쇠가 없다는 핑계를 대고 미적거리며 힐끔거리다 나왔다.

헌혈에 주전선수는 열외…한국해군 응원 속 승리
샌프란시스코에서는 헌혈까지 했다. 자선단체의 초청이어서 헌혈계획이 확정되어 있었다. TV 뉴스에도 보도되었다. 가스폴이 주전 선수인 신동파, 김인건, 이인표 등은 제외시켰다. 나는 당당하게 나섰는데, 20세 미만은 헌혈이 안 된다고 하여 포기했다. 한 사람이 500cc를 뽑고 나서 오렌지 주스 한잔 먹고 왔다고 한다. 그 후 K모 선수는 후유증이 심했다. 빈혈과 체력저하 때문에 코트에 나서지 못했다.

샌디에이고에선 미국 대학팀을 두 번 이겼다. 대표팀은 그만큼 전력이 향상되었고, 나 또한 베스트 멤버로 기용되었다. 1945년 퇴역한 미군 군함을 인수하기 위해 한국에서 온 해군 장병 200명의 열렬한 응원 덕분에 힘이 났다. 그것이 승리의 원동력이 되었다. 경기가 끝난 후 초청을 받아 군함을 구경하고 모처럼 이발도 했다. 미국의 이발요금이 비싸 우리 모두 장발족이 되어 있었다.

하와이에 도착했다. 미군 부대 숙소에 여장을 풀었다. 이경재 코치께서 나와 곽현채, 김무현을 불러내어 와이키키 해변을 가자며 택시에 태웠다. 무조건 따라나섰다. 와이키키는 미인 천국이었다. 미녀들이 비키니를 입고 활보하는 모습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곳곳에 일본 이름의 호텔, 식당이 즐비했다. 일찍이 하와이에 뿌리를 내린 일본인들의 안목과 부지런함에 시기가 났다. 여기저기 둘러본 후 숙소로 향했는데 주소나 막사 번호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군부대 숙소는 모두 똑같은 형태다. 자정까지 찾아 헤매었다. 나이가 지긋하신 이경재 코치가 안쓰러웠다. 가스폴이 수소문하여 겨우 숙소를 찾아냈고, 우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35일간의 훈련일정을 마치고 귀국했다. 출발부터 어려움이 있었지만 특별한 경험을 했다. 전력 향상에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것이 밑바탕이 되어 한국 남자농구가 승승장구하며 아시아를 제패했다. 가난의 설움도 느끼고 겪어봤다. 나라가 부강하고 잘 살아야 한다는 교훈도 얻었다. 그래서였을까? 당시 정부가 시행하던 경제개발계획이 부디 성공하여 더욱 잘 사는 나라가 되길 기원하는 애국심마저 샘솟았다. 그 후 경제부흥은 실현되어 국민소득 3만 달러의 부유한 국가로 발돋움했다.

유희형은…
1949년 3월 10일 충북 청원군에서 출생했다. 송도중 1학년 때 농구를 시작해서 송도고를 거쳐 전매청에서 민완 가드로 활약했다. 1968년 멕시코올림픽 남자농구 대표팀에 선발되었고, 1969년 방콕 아시아선수권대회와 1970년 방콕 아시안게임에서 한국남자농구 우승 주역중 한 명으로 주목받았다. 남자농구 명가드 계보를 열었던 그는 1978년까지 대표선수로 활약했고, 은퇴 후에는 관계로 입문, 문화체육부와 월드컵조직위원에서 체육행정가로 매끄러운 일솜씨를 발휘했다. KBL 출범 후에는 심판위원장과 경기이사를 역임했다. 1984년부터 1997년까지 KBS해설위원을 맡아 해박하고 명쾌한 입담을 과시하기도 했다. 한양대 겸임교수와 마천청소년수련관장도 지냈다. 만년(晩年)에 글을 쓰는데 재미를 붙였다. <수필춘추> 2020년 가을호에 응모한 ‘스승을 만나다’로 신인상을 수상하며 수필가로 데뷔했다.

# 사진_ 본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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