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준구의 DEBUT] 수비 하나로 황금세대 반열에 오른 남자 신명호

민준구 기자 / 기사승인 : 2020-05-22 14: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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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프볼=민준구 기자] 프로에서 성공하려면 단 하나의 확실한 무기만 있으면 된다는 속설이 있다. 다방면에서 재능을 보이는 것보다 프로 무대에서 통할 수 있는 하나의 재능만 있다면 롱-런 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 그리고 그걸 실현한 선수가 존재한다. 올해 13년의 프로 선수 생활을 마감한 신명호가 그 주인공이다.
신명호는 아마추어 시절 크게 눈에 띄는 선수는 아니었다. 과거 인터뷰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를 중·고등학교 때라고 언급할 정도로 힘든 나날을 보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농구를 시작했으나 여천중으로 진학하면서 큰 어려움을 맞이하게 됐다. 2학년이 됐을 때 농구부가 창단하면서 체육관 없이 운동하게 된 것. 어려운 시기를 이겨냈다고 생각했지만 여수전자화학고 역시 신명호의 입학과 함께 창단한 새내기에 불과했다.

“농구를 하면서 공백이 많았던 것 같다. 체육관이 없어 농구를 하는 게 참 쉽지 않다는 생각도 많이 했던 시기였다. 환경만 탓할 수는 없지만 그때는 참 힘들었다.” 신명호의 말이다.

힘든 시기를 극복해낸 신명호는 간신히 경희대로 진학할 수 있었다. 한계에 굴복하지 않고 끝내 이겨낸 모습을 최부영 전 감독이 지켜본 것이다.

당시 경희대는 대학농구의 다크호스로 강한 전력을 뽐내며 매 대회마다 우승 후보로 꼽혔다. 물론 경희대 3인방(김종규, 김민구, 두경민)이 펄펄 날던 시절과는 비교하기 힘들지만 전통의 강호들과 견주어봐도 크게 밀리지 않았다는 평가다.

그러나 신명호의 상황은 달랐다. 당시 그를 지도했던 김현국 경희대 감독은 “(신)명호의 첫인상은 ‘두루두루 잘한다’ 정도였다. 신체조건은 평범했고 지금처럼 수비가 좋지도 않았다. 아니 아예 할 줄 몰랐다는 평가가 더 알맞을 수도 있다. 발도 빠르지 않았고 슛이 준수하다는 생각만 들었다. 내가 처음 본 명호의 모습이다. 엄청난 노력이 없다면 뛰기 힘들 것 같았다”라고 이야기했다.

실제로 신명호는 1, 2학년 때까지 주목받지 못했다. 자신의 확실한 장점을 찾지 못했고 그나마 준수했던 슛마저도 점점 약점이 되고 말았다. 농구를 그만둘 뻔했을 정도로 신명호는 인생 최대의 위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신명호는 “현실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다. 경희대의 훈련이 힘든 것도 사실이었지만 뜻대로 농구가 되지 않는 부분에 있어 좌절감을 느꼈다. 그래서 피하려고 했었다. 근데 그럴 때마다 잡아주시는 분들 때문에 겨우 일어설 수 있었다”라고 말했다.

김현국 감독은 포기하지 않았다. 절정의 운동량을 과시했던 당시 경희대의 훈련 이상으로 신명호를 지도했고 수비라는 확실한 무기를 장착시키려 노력했다. 현역 시절 수비 하나로 코트 위에서 살아남았던 김현국 감독이기에 자신의 모든 것을 전수한 것이다.

“명호에게 한 말이 정확히 기억난다. ‘너가 가진 발은 지금 대학 선수들 중에 제일 빠르다. 농구는 3점슛만 있는 게 아니다. 당장 슛이 들어가지 않는다 하더라도 돌파하거나 동료를 살릴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출전 시간을 받을 가치가 있다. 그리고 수비에 힘을 쏟아라’라고 매일 이야기했다. 명호는 벼랑 끝에 몰린 상황이었지만 누군가가 밀지만 않으면 떨어질 아이는 아니었다. 그렇게 하루, 하루를 버텨냈고 3학년 때부터 기량이 오르기 시작했다.” 김현국 감독의 말이다.

조금씩 자신의 길을 찾게 된 신명호는 결국 경희대의 주전 가드로서 맹활약하게 된다. 우승연, 강우형 등 동기생들은 물론 에이스 김민수, 슈퍼 신입생 박찬희까지 존재했던 경희대는 중앙대, 고려대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올라섰다.

그 중심에는 신명호가 있었다. 비록 공격에서의 존재감은 과거보다 떨어졌지만 앞선에서의 압도적이었던 압박 수비는 그 누구도 견뎌내기 힘들었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스틸 능력, 신장 대비 정확한 위치 선정과 긴 팔을 이용해 잡아내는 리바운드, 결정적인 순간에 득점을 해내는 클러치 능력까지 신명호의 주가는 점점 상승했다.

신명호의 대학 시절 최고의 순간은 2006년 6월, 원주치악체육관에서 열린 전국대학농구 1차 연맹전이었다. 명지대와의 예선에서 발목을 다쳤던 그는 주장으로서 마지막까지 코트에 섰고 40년 만에 정상에 서는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하이라이트는 고려대와의 4강전. 에이스 차재영이 버티고 있었던 고려대는 강력한 우승후보였고 경희대는 도전자의 입장이었다. 팽팽했던 경기는 4쿼터 마지막 순간, 승부가 결정됐고 중심에 선 이는 바로 신명호였다.

신명호는 4쿼터 종료 1분 전, 동점을 만들어내는 돌파를 성공하며 기세를 올렸다. 이후 스틸에 성공하며 역전 득점까지 해냈다. 72-72로 균형이 맞춰진 순간에는 우승연의 패스를 받아 승부를 결정짓는 득점까지 성공시키면서 주인공이 됐다.

명승부 끝에 결승에 진출한 경희대는 당대 최강으로 불린 중앙대까지 꺾고 정상에 설 수 있었다.

한층 주가를 올린 신명호는 여름 내내 진행된 프로 팀과의 연습경기에서도 기복 없이 제 능력을 마음껏 발휘했다. 공격력에 대해선 여전히 의문 부호가 붙었지만 앞선에서의 압박은 프로 가드들도 쉽게 벗어날 수 없었다고. 특히 KCC와의 연습경기에서 신명호에 주목한 허재 전 감독은 결국 사제지간으로 재회하게 된다.

2007년 2월 1일, 서울 양재동 교육문화회관에서 열린 2007 KBL 국내 신인선수 드래프트는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김태술, 이동준, 양희종, 정영삼 등 황금세대의 등장으로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받게 됐다. 그리고 신명호는 그들 중 최고의 깜짝 스타가 된다.

전체 1순위로 지명된 김태술에 이어 이동준, 양희종, 정영삼, 박상오가 차례로 지명됐다. 이어진 전체 6순위 지명의 순서. 허재 전 감독이 단상 위에 섰고 신명호의 이름을 불렀다. 모두가 놀랐고 신명호 역시 놀랄 수밖에 없는 상황이 찾아온 것이다.

신명호는 “사실 내가 포함된 드래프트 세대는 지금까지도 절정의 기량을 과시하는 선수들이 있을 정도로 대단했다. 그런 상황에서 내 이름이 전체 6순위로 불렸다는 게 너무 신기했고 놀랐다”라며 “솔직히 순위에 상관없이 지명만 되어도 좋을 것 같았다. 1라운드, 2라운드는 중요하지 않았다. 근데 1라운드에서도 6순위라는 사실이 기쁘면서도 한편으론 걱정도 됐다”라고 회상했다.

당시 허재 전 감독은 “신명호가 다른 선수들에 비해 전체적인 능력이 떨어질지 몰라도 수비만큼은 1등이다. 벤치 자원으로서 뒤를 잘 받쳐줄 거라고 생각한다”라며 신뢰를 보였다.

하지만 세간의 평가는 그리 좋지 않았다. 뒤이어 지명된 이광재, 김영환, 함지훈에 대한 아쉬움이 짙었던 탓일까. 당사자인 신명호 역시 이 부분에 대해 확실히 인지하고 있었다.

“주변의 평가에 대해선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더 잘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을 수 있었다. 당장 주전으로 뛸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주어진 시간 속에서 최대한 좋은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생각을 항상 가지고 있었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말처럼 신명호의 데뷔전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1~2년 사이에 사라지는 선수가 되지 않겠다는 다짐을 잃지 않았던 그는 혹독한 비시즌 끝에 2007-2008시즌 개막전부터 출전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2007년 10월 19일, 전주실내체육관에서 열린 KCC와 동부의 홈 개막전. 신명호는 12인 명단에 포함됐고 꿈에 그리던 데뷔전을 기다렸다. 1쿼터를 그대로 보낸 뒤 2쿼터 종료 1분 22초 전, 추승균 감독과 자리를 바꾸며 코트에 발을 디딜 수 있었다.

짧은 시간에 불과했지만 신명호의 존재감은 대단했다. 1분 22초 동안 강대협, 김주성을 상대로 2개의 스틸을 기록하며 자신의 진가를 발휘했다. 허재 전 감독이 자신을 지명한 이유를 확실히 증명해낸 것이기도 했다.

신명호는 “너무 오래 전 일이기 때문에 상세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그저 KCC의 첫 경기에 투입됐고 짧은 시간 동안 뛰었다는 것만 생각난다. 다른 선수들처럼 주전급으로 평가되지는 않았지만 당장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받은 만큼 기뻤다”라고 전했다.

신명호의 데뷔전 기록은 2분 12초 출전, 2스틸. 그동안 물음표가 가득했던 전주 팬들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줄 수 있었던 생애 첫 프로 경기였다.

수비 하나로 조금씩 자신의 자리를 만들어 낸 신명호는 이후 KCC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 올라섰다. 주전으로서 유명세를 떨친 적은 없지만 정규경기 1위 1회, 챔피언결정전 우승 2회에 지대한 공헌을 세웠다.

# 사진_점프볼 DB(문복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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