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유희형이 쓰는 나의 삶 나의 농구 ⑥ 1970 유고세계남자농구 선수권대회

점프볼 편집부 / 기사승인 : 2021-04-06 13:4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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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프볼=편집부] 점프볼이 유희형 전 KBL 심판위원장이 쓰는 <나의 삶 나의 농구>를 연재합니다.1960~1970년대 남자농구 국가대표를 지낸 유희형 전 위원장은 이번 연재를 통해 송도중에서 농구를 시작한 이래 실업선수와 국가대표로 활약하며 살아온 농구인생을 독자들에게 담담하게 전달할 예정입니다.

※ 본 기사는 점프볼 4월호에 게재되었습니다.

한국 남자농구 대표팀은 1969년 방콕아시아농구선수권대회에서 사상 첫 우승을 차지한 덕에 세계농구선수권 대회 출전자격을 얻었다. 1950년에 창설된 세계선수권대회는 4년마다 개최된다. 20년 만에 처음 출전하는 대회인데, 1970년 5월 공산국가 유고슬라비아에서 열렸다. 대한항공이 없던 시절이라 대표팀은 네덜란드 비행기 KLM을 타고 알래스카를 경유, 북극을 넘어 베오그라드에 도착했다.

암스테르담 공항에서 유고행으로 갈아타기 위해 대기하던 중 농구공 두 개를 분실했다. 비행기를 갈아타려면 대기실에서 보통 서너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많은 가방과 함께 있던 농구공이 감쪽같이 사라졌는데 아무도 보질 못했다. 농구를 좋아하는 젊은이가 가져간 모양이다. 달랑 두 개만 남았다. 지금은 초등학교 팀도 공을 가지고 다니지 않지만, 그때는 물자가 귀했던 시절이다. 감독격인 협회 전무이사한테 엄청나게 혼이 났다. 전쟁터에 가는데 총기를 잃어버리는 놈들이 어디에 있느냐? 정신 상태까지 들먹이며 혼을 냈다. 3년째 말단인 내 담당이어서 몸 둘 바를 모르고 졸지에 죄인이 되었다.

 

▲해외여행 가기가 어려웠던 시절이다. 국제대회에 출전한 뒤 짬을 내서 하는 관광은 보너스다. 이탈리아 로마에 들러 콜로세움을 구경했다

암스테르담 공항에서 사라진 농구공

공 두 개를 가지고 예선 대회 장소인 스플리트(현재 크로아티아)로 향했다. 아드리아 해변에 있는 스플리트는 경치가 수려하고 날씨도 쾌청했다. 서기 305년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마지막 여생을 보내기 위해 지은 왕궁으로 유명한 관광 명소다. 당시에도 빼어난 경관이 많았지만 둘러볼 시간이 없었다. 예선경기 후 하위리그 장소인 스코피에로 이동해야 했기 때문이다. 공산국가였던 유고연방은 도시가 어둡고 활기가 없었다. 우리가 하룻밤을 묵은 베오그라드는 전기 사정이 좋지 않아 호텔과 도로가 음산했고, 오가는 사람도 적었다. 그런데도 유고인들은 명랑하고 좋은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매사 자유분방하고 여유가 있어 보였다. 베오그라드 시내에는 ‘티토 광장’이 있다. 선남선녀 미팅 장소다. 오른쪽은 미혼자, 왼쪽은 기혼자끼리 만나 대화하고 교제를 하는 곳인데, 미혼자는 그곳에서 배우자를 만나 결혼하는 커플이 많다고 한다. 기혼자끼리 만나는 것은 불륜인데 자연스럽게 교제가 이루어진다고 하니 의아하기도 했지만, 오히려 건전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우리나라의 어색한 맞선 제도보다 이성 간의 만남이 쉽고 자연스럽다는 생각을 했다.

예선경기를 치른 스플리트는 깨끗했다. 숙소인 호텔도 3층으로 되어있는데 괜찮았다. 다만 음식이 입맛에 맞지 않았다. 밥이 문제였다. 알이 큰 쌀을 물속에서 익힌 후 꺼낸다. 그러면 죽이 되어야 하는데 쌀알이 크기 때문에축축한 밥이 되어 나왔다. 선배들이 밥투정하며 말단인 나에게 한국식 밥을 해오라고 주문했다. 주방에 들어가 어깨너머로 배운 대로 밥을 지어 내놓았다. 밥알이 크지만, 그런대로 괜찮았다. 경기가 끝나는 날까지 밥 당번은 나였다.

 

호주, 캐나다, 이집트 이겼던 50년 전 한국농구

대표팀은 예선경기에서 캐나다(97-88)를 이겼지만 브라질(77-82)과 이탈리아(66-77)에 패해 탈락했다. 강호 브라질과 대등한 경기를 펼친 끝에 5점 차로 패했다. 경기 종료 1분 전에 우리가 1점을 리드했다. 속공으로 내가 림을 향해 레이업 슛(lay up shoot)을 시도할 때 블로킹(blocking)을 당했는데, 공격자 반칙을 선언한 것이다. 완전한 오심이었다. 그 판정 하나로 결국 패했다. 브라질은 결승리그에 진출, 유고에 이어 2위를 차지한 팀이다. 단신의 핸디캡을 극복하며 선전한 것에 자신감도 생겼다.

하위리그 장소인 스코피에로 이동했다. 1963년 대지진으로 1,000명 이상 사망했고, 현재는 마케도니아에 속해있는 도시다. 하위리그에서 파나마(88-91)와 쿠바(76-77)에 근소한 차이로 패했지만 캐나다(79-77), 이집트(93-73), 호주(92-79)를 이겼다. 세 팀이 동률을 이뤘고, 득실차에서 뒤져 11위를 했다. 쿠바를 이겼을 경우 13개국 중 8위를 할 수 있었다.

대회가 끝난 후, 숙소로 쿠바 선수들이 몰려왔다. 우리가 버린 농구화, 때가 절은 양말, 티셔츠 등 모든 것을 가져갔다. 어떤 선수는 모자나 싸구려 볼펜까지 달라고 애원해 줘버렸다. 쿠바를 모르던 시절이었지만 얼마나 어려우면 저 정도일까? 공산국가는 왜 가난할까? 1984년 LA올림픽 여자농구 예선경기가 쿠바에서 열렸다. 한국 선수단 임원으로 쿠바 아바나에 2주간 머물렀다. 그때 그 나라의 현실과 실정을 파악할 수 있었다. 사유재산을 인정하지 않고 똑같이 급여를 받는다. 국가가 주는 월급으로는 겨우 끼니만 때울 정도다. 채소 파는 곳과 빵 가게 앞에 수십 명이 줄을 서서 기다린다. 신선한것을 먼저 차지하기 위해서다. 사는 집도 자기 소유가 아니다. 깨끗하게 관리할 이유가 없다. 모든 주택은 낡았고 흉물스러웠다. 도로에 달리는 차는 1950년대 미국에서 만들어진 고물차 들이다. 모두 평등하게 잘 살게 한다는 것은 허구다. 특권층은 잘 산다. 일반 국민은 매일 식품 가게 앞에서 무한정 기다리는 삶을 살고 있었다. 유고라는 나라도 못 살기는 마찬가지다. 티토 대통령이 강제로 여섯 나라를 점령, 유고연방을 만들었지만 당시의 생활 수준은 형편없었다. 각 나라가 독립한 지금은 관광수입 등으로 잘 사는 나라가 되었다.

▲로마에 이어 프랑스 파리를 경유했다. 개선문을 배경으로 포즈를 잡았다. 왼쪽부터 이인표, 신현수, 이병국, 김인건, 유희형.
귀국길 로마와 파리, 오사카에서 본 풍경

경기를 모두 마치고 귀국길에 로마에 들러 관광을 했다. 로마에서 호랑이 전무이사로부터 또 혼이 났다. 이탈리아는 스파게티가 유명하다. 레스토랑에서 스파게티를 먹어 보기로 했다. 종류가 너무 많았다. 하나를 찍어서 주문했는데 괴상한 것이 나왔다. 냄새가 역겨워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다. 전원이 젓가락을 놓았다. 스파게티가 담겨있는 접시를 냅킨으로 덮어놓고 나가려는데 그분이 들어왔다. 남긴 음식을 보고 불같이 화를 냈다. ‘짐승만도 못한 놈들’이라는 말까지 들었다. 한 끼를 굶어야 했다.

기원전부터 유럽을 지배했던 화려한 고대문명의 발자취를 따라 로마를 둘러보았다. 콜로세움과 바티칸은 감탄의 연속이었다. 로마 황제 베스파시아누스가 서기 70년에 시작하여 80년에 완공한 콜로세움은 웅장하고 규모가 엄청났다. 미켈란젤로가 완성한 바티칸성당의 규모와 조각상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대리석으로 된 피에타상은 너무 정교해서 살아 숨 쉬는 것 같았다. 종교탄압을 받던 그리스도인들이 300년 동안 숨어 살았던 카타콤은 지하 5층으로 되어있는데 안내자가 없으면 길을 찾지 못한다고 했다. 밤늦게 호텔로 가는 도중 묘한 광경을 목격했다. 길가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야한 차림의 아가씨들이 휘파람을 불며 손짓을 해댔다. 알고 보니 길에서 호객행위를 하는 직업여성들이었다. 이색적인 광경에 놀라기도 하고 호기심도 느꼈다. 로마에 이어 파리까지 방문했다. 하지만 오직 개선문 하나만 기억에 남아있다. 너무 피곤해 버스에서 잠만 잤기 때문이다. 그 당시 유럽 가는 길은 아시아 길과 북극을 횡단하는 두 길이 있었다. 돌아올 때는 아시아 길을 택했다. 6시간마다 급유를 해야 해서 여러 나라에 기착했다. 인도 봄베이(현재 뭄바이)에 오후 4시경에 도착했는데, 트랩 앞에 많은 인도인이 손을 내밀고 구걸을 하고 있었다. 1시간을 청사에서 기다리는 데 가는 곳마다 손을 내미는 자들 때문에 깜짝깜짝 놀랐던 기억이 있다. 마지막 기착지는 일본 오사카, 그곳에서 세계박람회(엑스포70)가 열리고 있었다. 일본이 경제 발전을 과시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박람회였다. 미국, 독일, 일본관이 인기가 있었다. 한국관은 초라했다. 관객도 적었다. 경제 개발에 총력을 기울이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그후 우리나라는 눈부신 경제 발전을 이루었다. 국가는 부강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다.
▲대표팀은 마지막 기착지인 일본 오사카에서 세계박람회장을 찾았다. 사진 뒤쪽에 대한민국관이 보인다. 왼쪽부터 이인표, 박한, 유희형, 신동파.
유희형은…
1949년 3월 10일 충북 청원군에서 출생했다. 송도중 1학년 때 농구를 시작해서 송도고를 거쳐 전매청에서 민완 가드로 활약했다. 1968년 멕시코올림픽 남자농구 대표팀에 선발되었고, 1969년 방콕 아시아선수권대회와 1970년 방콕 아시안게임에서 한국남자농구 우승 주역중 한 명으로 주목받았다. 남자농구 명가드 계보를 열었던 그는 1978년까지 대표선수로 활약했고, 은퇴 후에는 관계로 입문, 문화체육부와 월드컵조직위원에서 체육행정가로 매끄러운 일솜씨를 발휘했다. KBL 출범 후에는 심판위원장과 경기이사를 역임했다. 1984년부터 1997년까지 KBS해설위원을 맡아 해박하고 명쾌한 입담을 과시하기도 했다. 한양대 겸임교수와 마천청소년수련관장도 지냈다. 만년(晩年)에 글을 쓰는데 재미를 붙였다. <수필춘추> 2020년 가을호에 응모한 ‘스승을 만나다’로 신인상을 수상하며 수필가로 데뷔했다.

# 사진_ 본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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