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스페인, 미국, 그리고 일본까지.. 새로운 도전을 선택한 양재민

민준구 기자 / 기사승인 : 2020-08-09 13:39:16
  • -
  • +
  • 인쇄

[점프볼=민준구 기자] 한국농구의 유망주 양재민의 농구 인생은 한마디로 ‘도전의 연속’이라 설명할 수 있다. 현실과 타협할 수 있었음에도 한계를 넘겠다는 의지를 보여온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양재민에게 ‘도전’이란 무엇일까. 그리고 스페인과 미국, 그리고 일본까지 이어진 그의 여정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 본 기사는 점프볼 8월호에 게재되었습니다.

Q. 인생 자체가 도전이다. 매 순간 현실보다 이상을 선택했고 그 결과물을 냈다.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
예전부터 즐겨 들었고 또 가슴속에 와닿은 말이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생기지 않는다”는 말이다. 무언가를 해야 내가 원하고 얻고자 했던 것을 해낼 수 있다고 믿는다. 평범한 성공을 위한 길은 정해져 있지만 똑같은 선수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인지 매번 무엇이든 찾아내려고 했다.

Q. 양재민의 인생에 있어 첫 번째 도전은 무엇이었나.
아마 16세 이하 청소년 대표팀을 이끌고 아시아 대회(2015년 FIBA U-16 아시아대회)에서 우승했을 때가 아닐까 싶다. 처음으로 우승이라는 기록을 썼다. 알 수 없는 희열과 성취감을 느낄 수 있었다.

Q. 그 대회는 지금도 회자되고 있는 대회다. 얻은 것이 있다면?
소중한 인연을 얻었다. 그게 최고의 수확이다. 지금까지도 깊게 연락하며 지내고 있다. (이)혀중이도 그 전까지는 잘 몰랐지만, 대표팀에서 알고 지내게 된 동생이다. 개성이 강했던 선수들이었지만 호흡이 맞아가면서 최고의 시너지 효과를 냈다. 오세일 감독님께서는 선수들에게 높은 자유도를 제공해주셨고 수비보다 공격 위주의 농구를 가르쳐주시면서 분위기를 올리셨다. 사실 우리를 기대한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중국, 그리고 대만을 넘어 아시아 최고의 자리에 오를 것이란 기대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더욱 얻은 것이 많았던 대회였다.

Q. 2013년 대회에도 참가한 적이 있다. 그때와는 느낌이 달랐나?
당시 대표팀에 뽑힌 형들보다 2살 어렸던 내가 선택됐다는 건 대단한 일이었다. 그저 후보 선수였고 막내였지만 좋은 경험이었다. 그때 생긴 우승에 대한 열망이 2년 후 주장으로서 정상으로 가는 데 큰 도움이 됐다.

Q. 해외 진출에 대한 꿈은 언제 생긴 것인가.

도전 의식이 생긴 것도 2015년이었다. 아시아의 여러 선수들과 만나다 보니 시야가 넓어진 느낌이었다. 그때 이후로 국내선수들만이 아닌 해외 선수들과의 경쟁이 더 큰 자극이 됐다. 여러 곳에서 나를 주목해주셨고 개인적으로도 정보를 알아보게 된 계기가 됐다.

Q. 이후 스페인, 미국, 일본으로 이어지는 긴 여정이 시작된다. 지금까지의 농구 인생을 한마디로 설명한다면?
쉼 없이 계속 올라갈 수밖에 없는 오르막길이라 표현하고 싶다. 사실 스페인 때가 가장 힘들었다. 혼자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것을 처음 느낀 때였으니까. 아침 7시에 나와 저녁 10시에 들어갈 때까지 혼자 전부 이겨내야 한다는 부담이 너무도 컸다. 그래도 이 모든 게 밑거름이 될 거라고 믿는다. 힘들어도 참고 이겨내면 모든 걸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양재민의 스페인 진출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이끌어 냈다. 미국의 뒤를 바짝 쫓고 있는 스페인의 벽을 한국의 유망주가 넘어서려는 것만으로도 흥미로웠다. 1년이 채 안 되는 짧은 생활 동안 양재민은 많은 것을 배웠고 또 깨달았다. 그동안 깊게 밝히지 않았던 양재민의 스페인 생활. 과연 어떤 일이 있었을까.

Q. 스페인 유학 생활에 대해선 깊게 알려진 적이 없었다. 어떻게 갈 수 있었나?
해외 진출에 대한 생각은 있었는데 뭘 어떻게 해야 할지는 몰랐다. 그러다가 루카 돈치치에 대한 기사를 보게 됐다. 어린 나이에도 프로 1~2군을 오고 가는 유망주였을 때였다. 영상을 보는데 나랑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NBA 선수들처럼 화려하지는 않지만 자신이 가진 장점을 코트 위에서 120% 쏟는 모습에 감탄하기도 했다. 그래서 더 빨리 해외로 나가고 싶었다. 부모님을 설득했고 아버지가 아시는 분이 축구 에이전트 관련 일을 하고 계셨는데 많은 도움을 받았다.

Q. 세계농구의 변방에 속한 한국의 유망주가 스페인으로 향한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하지만 반대의 입장에선 크게 주목할 일이 아니었을 것 같은데?
마드리드 지역에 있는 여러 팀들을 찾았고 입단 테스트를 보기 위해 메시지를 수차례 남겼다. 근데 대부분의 팀들이 무시하더라(웃음). 처음 스페인에 도착했을 때는 여러 팀에서 “너의 포지션은 모두 채운 상태이기 때문에 와도 뽑을 이유가 없다”라고 하더라. 자존심도 많이 상했고 좌절도 했다. 그러다가 또 다른 3팀에서 관심을 줬고 모두 합격하게 됐다. 그중에서 다년 계약보다는 1년 계약을 제시한 또레로도네스에 가게 된 것이다.

Q. 현실에 비해 국내 언론의 관심은 대단했다. 또 많은 사람들이 주목했는데 이에 대해선 부담스럽지 않았나?
그전까지 언론에서 주목해주신 적이 2번 있었다. 한 번은 소년체전이 끝났을 때였고 다른 한 번은 청소년 대표팀 때였다. 그러다가 스페인으로 가게 되니 관심이 배가 되더라(웃음). 그때는 주변 시선 때문에 가진 꿈이 더 커진 느낌도 있었다. 하루라도 빨리 더 큰 선수가 되어야 한다는 계기도 됐다. 너무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우쭐할 수도 있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이)종현이 형, 그리고 (최)준용이 형처럼 나보다 더 대단한 선배들이 분명 도전하지 않은 이유가 있었을 것이란 생각이 컸다. 내가 잘해서 나가는 것보단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에 더 감사했다.

Q. 또레로도네스는 어떤 팀이었나?

이름이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포틀랜드 트레일 블레이저스의 서머리그 코치님에게 정말 많은 걸 배울 수 있었다. 뛰는 농구보다는 체계적이고 완벽한 전술 훈련이 대부분이었다. 한국에선 볼 없이 하는 훈련이 많았는데 스페인은 끝까지 볼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체력 훈련을 하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또레로도네스는 내게 있어 다른 농구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려준 팀이었다.

Q. 한국과 스페인은 모든 것이 다르다. 유학 생활 내내 문화적 차이부터 시작해서 여러 문제가 있었을 것 같다.
농구 외적으로 정말 많은 성장을 할 수 있었던 시기였다.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어린 내가 할 수 있는 스페인어는 고작 ‘올라’ 하나였다. 학교에 가면 많은 아이들이 빠르게 스페인어를 내뱉고 있는데 나 혼자만 조용했다. 그러다 보니 점점 사람들과 멀어지게 됐고 학교에 있는 시간이 너무 힘들었다. 학교 수업과는 상관없이 스페인어를 배우는 시간이 대부분이었다. 그렇게 하루, 하루가 지나다 보니 결국 스페인어로 인터뷰를 할 수 있을 정도의 수준이 되더라. 부모님이 스페인에 오신 적이 있었는데 그때 내가 직접 음식점을 소개하고 쇼핑하는 데 큰 도움을 드렸다. 농구 외에 무언가를 배운다는 것에 대해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Q. 얻은 것이 있다면 잃은 것도 있을 것이다. 차이는 어느 정도인가.
많은 경험을 얻었다는 것에 비해 잃은 건 없었다고 생각한다. 또래 아이들이 쉽게 경험할 수 없는 걸 나는 해냈다는 것에 기쁘기도 했다. 그리고 경복고에 계속 있었다면 얻지 못할 순간이 아니었을까. 그것에 만족한다.

Q. 외부에서는 양재민의 국내 복귀를 실패로 정의하고 있다. 이에 대해 자세한 설명이 없다는 건 다소 아쉬운 부분이다.
그동안 스페인에서 돌아온 것에 대해 말할 기회도 없었고 그렇다고 억지로 설명하고 싶지도 않았다. 원래는 돌아오지 않을 수 있었다. 스페인에서 생활하고 있다가 2월 정도 됐을 때 한국 선수로는 처음으로 ‘국경 없는 농구’ 글로벌 캠프에 참가했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아시아 체격으로는 미국의 농구를 따라갈 수 없을 것이란 편견이 있었다. 근데 글로벌 캠프가 열린 뉴올리언스에 도착한 순간부터 내 편견이 깨지기 시작했다. 전 세계의 유망주들과 3박 4일 동안 생활하면서 또 다른 경쟁의 매력을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스페인, 또는 미국을 가려고 해도 고등학교 졸업장이 필요했다. 1학기 내에 경복고로 복학해야만 스페인 학교에서의 생활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 돌아가게 된 것이다.

Q. 다시 스페인에 돌아가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글로벌 캠프에서 지낸 3박 4일 동안 인생의 전환점을 찾게 됐다. 특히 NBA 단장 및 감독, 코치들과 함께 VIP 룸에서 대화를 나눴던 일은 아직도 꿈만 같다. 초청받은 67명의 선수들 중 나만 영어를 할 줄 몰랐다. 그때 어떤 사람이 나에게 “전 세계에서 NBA가 최대 시장인데 선수가 영어를 할 줄 모른다는 것은 선수로서의 자격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라고 하더라. 큰 충격이었다. 스페인도 좋았지만 더 큰 무대에서 인정받고 싶다는 생각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때 NCAA에 진출해야겠다는 결정을 내렸고 때마침 NBA 아카데미에서 제의가 오기도 했다. 나를 중심으로 전 세계의 유망주들을 모으겠다는 계획을 설명해주더라. 하지만 나는 하루라도 더 빨리 미국으로 가고 싶었다. 스페인에서도 자신들이 보내주겠다며 돌아오기를 바랐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래서 SAT 시험 패스와 고교 졸업장을 받기 위해 한국으로 돌아간 것이다.

Q. 한국으로 돌아온 후 생활은 어땠나?
SAT 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하루에만 10시간씩 영어 공부를 했다. 몸 관리는 게을리하면 안 되니 최대한 시간을 쪼개 영어 공부에 투자하려 했다. 저녁에는 형(양재혁)의 친구에게 수학 과외를 받기도 했다. 일반 영어 시험이라면 이 정도 했을 때 어느 정도 자신감이 있었을 거다. 근데 SAT는 미국의 수능이기 때문에 초짜인 내가 쉽게 건들 수 없는 수준이었다. 너무 힘든 시간이 계속되다 보니 점점 지쳐갔는데 대학 진학에 대한 문제까지 겹쳐오면서 스트레스가 너무 심했다. 가족들과의 갈등이 있기도 했다. 모두가 동의할 수는 없는 도전이었으니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Q. 결국 연세대에 입학하게 됐다.
시간이 촉박했다. 어차피 고교 졸업장은 다음해 3월에 나오기 때문에 1년의 공백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연세대에서도 수차례 스카우트 제의를 해주셨고 부모님도 강력히 원하셨다. 해외 진출에 대한 꿈이 컸던 만큼 연세대에서 내 의지를 알아주셨으면 했다. 결국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았고 연세대에 입학하게 됐다. 또 누군가는 대학 편입을 하게 되면 SAT 시험을 보지 않아도 된다고 했던 것 역시 큰 부분이었다.

Q. 전반기, 즉 1학기를 마친 후 결국 미국 진출을 위해 나오게 됐다.

공부할 시간이 적었던 만큼 몰래 영어를 배웠다. 숙소에 있을 때면 단어책을 보곤 했는데 쉽지 않은 일이었다. 보통 공강 시간에는 체육관에서 슈팅 연습을 해야 하는데 그때마다 영어 학원을 찾아가 수업을 듣기도 했다. 국제학부 학생한테 과외를 받을 정도였으니 참 독했던 것 같다. 미국에 너무 가고 싶었다. 그래서 남들은 비난할 수 있는 부분이라는 생각에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결국 은희석 감독님에게 말씀을 드렸고 연세대를 떠나게 됐다.

양재민의 미국 도전은 무모해 보였다. 영화나 만화에서 나오는 것처럼 맨몸으로 부딪쳐 나갔다. 연세대 복귀까지 생각할 정도로 암울했던 그 시절, 결국 양재민은 이겨냈고 자신이 가는 길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했다.

Q. 연세대에서 나온 후, 곧바로 미국으로 떠난 것인가.
하루라도 빨리 미국에 가는 게 맞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LA에 방 한 칸을 얻었고 한 달 반 정도 생활했다. 현실은 냉정했다. 일단 미국에 가면 무슨 일이 생길 줄 알았는데 아무도 알아주지 않더라. 최소한 대학에 입학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코치 얼굴조차 보기 힘들었다. 그러다가 라스베이거스에서 고등학교 선수들이 출전하는 대회가 있었는데 거기서 1시간 정도를 밖에서 서성였다. 가슴에 명찰이 달려 있는 사람이면 무조건 다가가서 말을 걸었다(웃음). 그러다가 마지막 사람이 LA에서 캠프를 여는데 점심값으로 15달러만 들고 오면 참가할 수 있다고 했다. 그렇게 우연히 대회에 참가할 수 있었고 조금씩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Q. 니오쇼 커뮤니티 컬리지로 갈 수 있었던 것도 하나의 행운이었다.
LA 대회에서 뛰고 있는데 어떤 분이 내게 말을 걸더라. 아시아 선수가 뛰고 있는 걸 보면서 호기심이 생겼나 싶었다. 그래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연세대에 입학한 기록이 있어 미국에서 4년제 대학에 들어갈 수 없다는 정보를 얻게 됐다. 그러나 기회는 있었다. NJCAA, 즉 주니어 컬리지로 가게 되면 편입 절차를 밟을 수 있었다. 물론 그 과정 속에서 우연도 존재했다.

Q. 무명의 아시아 선수에게 손을 내민 이유는 무엇일까.
사실 주니어 컬리지에 들어가기도 쉽지 않았다. 오랜 시간 공을 들여 스카우트한 선수에게 장학금을 주고 대우를 해주는 게 정상이지 않나. 또 해외에서 온 학생의 경우 등록금이 더 비싸기 때문에 쉽게 데려올 수가 없다. 그런 상황에서 나는 한국으로 돌아가 연세대와 은희석 감독님께 그만두겠다고 말을 해놓은 상태였다. 어떤 곳도 내게 제의를 하지 않았고 그저 집에서 노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마지막으로 하루만 더 기다려보고 그래도 제의가 없으면 다시 연세대로 돌아가려 했다. ‘아직 어리니까 죄송하다고 하면 다시 받아주시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했다. 근데 그날 밤 전화가 와 있었다. 니오쇼 커뮤니티 컬리에서 학비부터 식비, 기숙사비 등 모든 지원을 해줄 테니 오라는 것이다. 지금도 꿈만 같은 일이다.

Q. 꿈에 그렸던 미국에서의 대학 생활은 어땠나.

소속이 없는 무적 신세가 되어봤기 때문에 내가 뛸 수 있는 팀이 생겼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또 동경했던 미국에서의 농구를 감사히 생각했다.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먹고 자고 운동할 수 있다는 것에 기뻤다. 또 쿰스 감독님이 나의 청소년 대표 경력을 굉장히 좋아하셨다. 매번 힘들어할 때마다 “너는 여기서 실패하더라도 한국에서 성공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러니 손해 볼 것 없다는 생각으로 여유 있게 해라”라고 항상 말씀해주셨다. 이러한 따뜻함에 항상 고마움을 느끼며 재밌게 운동할 수 있었다.

Q. NJCAA와 NCAA의 차이는 큰 편인가?
어느 정도의 차이는 있을 수 있겠지만 결코 낮지 않다고 생각한다. 물론 2년제라는 개념이 남들의 시선에선 차별성을 줄 수 있지만 분명 다른 부분이 있다. 만약 한국이라면 자존감이 낮을 수도 있는 상황일 것이다. 근데 여기에서는 대부분 자신이 최고라는 자부심이 있었다. 이에 대해 물어보니 미국에서는 장학금을 받으며 운동하는 학생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또 고등학교 시절 대부분 팀의 에이스였고 나처럼 SAT 문제 때문에 충분히 NCAA 디비전Ⅰ에서 뛸 수 있음에도 여기에 온 경우도 있었다. 대학에서의 출발점은 조금 다를 수 있지만 서로가 최고라는 자부심이 있을 만한 이유였다.

Q. 그런 곳에서 풀타임 출전 보장을 받은 건 대단한 일이었다.
1학년 때는 40경기 중 20경기를 주전으로 나섰다. 근데 2학년 때부터 모든 경기에서 베스트5로 나서게 되니 여러 선수들의 시기와 질투를 한 몸에 받기도 했다. 앞서 말한 대로 NJCAA 소속 선수들이라 해서 자존감이 낮지 않다. 근데 그런 선수들 중에서도 아시아에서 온 애가 자기보다 더 많이 뛰게 되니 속이 많이 상했을 것이다. 누구는 “넌 감독 아들”이라는 말까지 했다(웃음). 그래도 즐거웠다. 그 정도로 경쟁력이 있다는 걸 증명했으니까.

Q. 환경이 열악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고 들었다.
미국이 왜 세계 최고의 농구 수준을 자랑하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일단 농구를 대하는 태도, 그리고 지원이 다르다. 누군가는 미국 농구는 훈련이 자유롭고 시간도 짧다고 한다. 물론 NBA는 그럴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대학은 다르다. 아침 6시에 운동을 나가면 코치들이 체육관에서 훈련을 도와준다. 한국이나 스페인에서 느껴보지 못한 훈련 강도를 여기서 체험할 수 있었다. 만약에 한국이었으면 몇 번을 도망갔을 것이라 생각할 정도로 대단했다. 발바닥에 물집이 잡히고 터지는 일이 반복될 정도로 엄청났다. 그래도 운동하는 데 있어 최고의 환경을 마련해주는 만큼 열악했다는 평가는 올바르지 않다.

Q. 오랜 시간 해외 생활을 하다 보면 외로움을 느낄 것 같다.
솔직히 말하면 힘든 순간마다 부모님과 친구들 모두 보고 싶었다. 하지만 스페인에서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를 생각하면 그보다 더한 고생은 없을 거란 생각이 컸다. 무조건 성공해서 그때의 고통을 다시 느끼고 싶지 않았다. 또 한국에서 열심히 하고 있는 경쟁자들보다 더 뛰어나야 한다는 마음에 외로울 틈이 없다. 해외에서 고생하는 것에 대한 보람은 있어야 하니 말이다.

Q. 한국에서도 충분히 자신의 재능을 보일 기회는 있었을 것이다. 해외 진출을 고집하는 이유가 있을까.
현중이도 최근 인터뷰를 통해 말했던 것처럼 우리의 목표는 NBA가 아니다. 물론 사람마다 다를 수 있겠지만 선수로서 성장하는 게 최우선 목표다. 하루가 지나면 그 시간 동안 무언가를 배웠는지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스페인이나 미국에서는 동기부여가 사라지지 않는다. 무언가를 더 열심히 하게 되고 극복해내려 한다. 만약 한국에 계속 있었다면 성공이 보장된 삶 속에서 발전의 기회를 찾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계속 해외 진출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내가 성장할 수 있는 동기부여를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하면 중국, 일본, 대만에 비해 한국은 해외 진출에 인색한 편이다. 그래서 현중이와 내가 더 열심히 하려는 것도 있다. 어린 선수들에게 있어 성공 사례로 남아 부담 없이 도전할 수 있도록 돕고 싶다.

NCAA 디비전Ⅰ 진출을 꿈꿨던 양재민은 캘리포니아 폴리테크닉 주립대학으로부터 정식 제의를 받았다. 이후에도 여러 대학의 관심을 받아오며 드디어 꿈을 이뤄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전 세계를 강타한 코로나19로 인해 시간이 흘러만 갔고 결국 일본 B.리그 진출로 노선을 바꿨다. 꿈은 포기하지 않았지만 허무함이 컸던 양재민. 그에게 있어 B.리그 진출은 어떤 고민 끝에 이뤄진 결과일까.


Q. 일본 진출을 결심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3월 1일에 시즌을 마치고 나니 여러 대학에서 편입 제의가 들어왔다. 캠퍼스 방문 계획이 짜여져 있었지만 코로나19로 인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갔다. 쿰스 감독님은 “(양)재민아 이건 게임이야. 한 번 즐겨봐”라고 하시면서 힘을 주셨지만 아쉽게도 코로나19는 잠잠해지지 않았다. 입국 금지가 될까 걱정돼 한국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고 NCAA 역시 컨퍼런스 토너먼트부터 3월의 광란까지 모두 취소되더라. 그 순간에 일본과 호주에서 연락을 주셨고 고민이 됐다. 시간을 더 지체하면 어떤 선택도 할 수 없을 거란 생각에 결국 B.리그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Q. 선택지는 많았다. 그중 B.리그, 신슈 브레이브 썬더스를 선택한 이유는?
마이클 카즈히사 감독님이 있기 때문에 선택할 수 있었다. 미국에서 고등학교 때까지 지내다 오신 분이시더라. 또 B.리그에선 아시아 쿼터제를 통해 영입할 때 영어가 되는 선수를 선호했다. 또 문화권이 같다는 측면에서 선택에 도움이 됐다. 에이전트 역시 당장 큰 돈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기회를 얻고 싶다면 신슈가 가장 적절하다고 이야기해줬다. 그래서 선택하게 됐다.

Q. 카즈히사 감독은 어떤 사람인지 파악했나.
협상하는 과정에서 굉장히 꼼꼼하신 분이라고 느꼈다. 나에 대한 정보를 모두 요청했고 파악하는 것에 많은 시간이 흘렀다. 또 청소년 대표 시절 나를 지도해주신 오세일 감독님과 삼자 대화를 할 정도로 여러 면에서 나를 알려고 노력했다. 영어가 가능하다는 것도 확인하고 싶었는지 테스트를 하시더라(웃음). 다행히 통과하게 되면서 신슈와 계약할 수 있었다.

Q. 포지션에 대한 부분도 중요할 텐데?
1번부터 3번까지 활용할 계획이라고 하셨다. 4, 5번은 외국선수가 있기 때문에 경쟁이 힘들다는 것을 알고 계시더라. 최대한 2~3번에서 뛸 예정이고 다른 선수들의 신장이 크지 않은 만큼 많은 도움이 될 거라고 말씀하셨다.

Q. B.리그가 종착지는 아닐 것이다. 미국 진출에 대한 꿈은 여전할 것 같은데.
언론에 잘못 나온 내용이 있다. 신슈와 계약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미국에 보내준다는 내용은 없다. 다만 일본은 해외 진출에 관대한 만큼 잘하면 가는 거고 못하면 가지 못한다. 에이전트도 굳이 이 내용을 넣을 필요가 없으며 오히려 해외 진출을 하게 되면 좋아할 거라고 했다. 물론 100% 신뢰하지는 않지만 긍정적인 부분이다.

Q. 끊임없는 도전 속에 양재민이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을 것이다.
농구를 하면서 정말 많은 선수들과 만나왔다. 그들은 농구를 대하는 자세가 다르다. 우리는 목적의식 없이 훈련이 끝나기를 바라는 경우가 많다. 물론 훈련이 좋은 선수들은 없을 것이다. 다만 그들은 코트 위에 서면 달라진다. 쉽게 득점을 주지 않으려 하고 부상을 당할지언정 실점은 안 된다는 마인드가 크다. 차이점은 있다. 한국에서는 “다치지 않게”라는 구호가 있다. 하지만 밖에서는 듣기 힘든 말이다. 경쟁이 우선이니까. 난 그런 부분을 이야기하고 싶다. 그 말에 힘이 생길 수 있도록 도전하는 것이며 힘들어도 이겨내려 한다. 누군가는 무모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나는 무모한 도전에서 큰 성공이 이어진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도전하는 것이다. 인생에 후회라는 단어를 새기지 않으려고 말이다.

▲ 가깝지만 먼 나라 일본으로 향한 한국 선수들
일본 프로농구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JBL과 BJ리그로 나뉜 2000년대 중반에 첫 발을 디뎠지만 FIBA의 공식적인 제재를 통해 결국 2015년 B.리그로 통합되고 말았다. 양재민이 아시아 쿼터제를 통한 B.리그 진출 1호로 알려져 있지만 이전에 일본 무대로 향한 한국 선수들의 사례는 존재한다. 대한민국농구협회 및 KBL을 통해 알아본 결과, 공식적으로 집계된 수만 무려 10명. 이외에도 고교 졸업 후 곧바로 떠난 선수들은 물론 은퇴 후 제2의 인생을 그린 이들까지 포함한다면 적지 않은 수다. 일본 진출 사례 공식 1호는 음승민이다. 현재 일본에서 유소년 농구 클럽을 운영하고 있는 그는 홍대부고 졸업 후 규슈 산업대학에서 선수 생활을 했으며 이후 BJ리그 소속 오이타 히트데블스에서 활약했다. 이후 한재규, 한대균, 이정준, 최세영, 이혜천, 정세영, 안성수 등이 길을 이었고 송태영은 프로 은퇴 후 일본에 진출한 1호 사례로 알려져 있다. 대부분 KBL에서 외면 받은 선수들로 여러 길을 통해 다시 돌아온 경우도 있지만 대다수는 잊혀진 인물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지도가 높은 건 신제록으로 휘문고와 고려대를 거쳐 유망주로 꼽힌 인재였다. 2007년 KBL 국내 신인선수 드래프트에서 전체 12순위로 삼성에 지명된 그는 특급 식스맨으로 기대를 받았지만 허리 부상으로 인해 주춤했다. 상무 입대 후 기량 회복을 꿈꿨지만 현실로 이어지지 못했다. 재기를 꿈꾼 신제록은 BJ리그의 신생팀이었던 이와테 빅불스에 입단한 바 있다. B.리그 통합 이후 일본 진출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다. 과거 외국선수 쿼터 제한이 비교적 여유 있었던 것에 비해 B.리그는 분명 다른 방향성을 가지고 출발했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아시아 쿼터제를 통해 양재민이 진출하게 된 것은 큰 의미가 있다. 과거처럼 KBL에서 성공하지 못한 선수들이 가는 것이 아닌 새로운 도전을 위한 길이 됐기 때문이다.

사진_ 점프볼 DB, 니오쇼 대학 홈페이지

[저작권자ⓒ 점프볼.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후원합니다.

오늘의 이슈

점프볼 연재

더보기

주요기사

더보기

HOT PHOTO

JUMPBALL 매거진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