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진석의 농담(籠談)] 천지불인이라, 가정이 아닌 그 곳

허진석 기자 / 기사승인 : 2021-02-09 13: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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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사에서 일할 때, 체육부에 새로 온 후배를 경기장에 데리고 나가며 말했다.
“걱정 마. 나도 처음 체육기자가 됐을 때는 농구를 다섯 명이 하는 줄도 몰랐어.”
물론 거짓말이었다. 나는 농구를 무척 좋아했다. 어릴 때는 키가 제법 커서 “농구선수를 하라.”는 말도 자주 들었다. 내가 처음으로 좋아한 농구스타는 송금순 선수였다. 점프볼 독자 가운데 이 선수를 아는 분은 거의 없으리라. 김화순 선수를 엄청나게 좋아했고, 신일고등학교에 다니던 김진 선수의 경기를 보러 장충체육관에 가기도 했다.

고등학교에 다닐 때 농구를 많이 했다. 운동신경이 없어서 잘하지는 못했지만 즐겁게 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나의 담임 선생님은 자율학습을 하는 저녁마다 당번을 보내 나를 찾게 하셨다. 나는 어두워서 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농구를 했다. ‘공부 안 하고 농구만 한 아이’라는 이미지가 선생님의 기억 속에 선명했다. 나중에 선생님을 모시고 저녁을 대접할 때도 그 일을 잊지 않고 말씀하셨다. 나는 공부를 열심히 하기보다는 소설을 읽고 그림을 그리고 운동을 하면서 중고등학교 학생 시절을 보냈다.

나는 후배기자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거짓말을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채 경기장에 나가면 아무리 기자라도 주눅이 든다. 텔레비전에서 보던 슈퍼스타가 눈앞에 있는데, 키는 훌쩍 크고 건장하다. 잠시 정신줄을 놓으면 기사를 쓰기 위해 물 물어보려 해도 순간적으로 머릿속이 컴컴해지는 수가 있다. 꽤 많이 아는 것 같은 선배도 시작할 땐 바보와 다름없었다고 얘기하면 (후배들은 대부분 농구를 다섯 명이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용기도 생기고, 나도 하나씩 배우면 된다는 셈이 섰을 것이다.

또한 내가 ‘농구를 잘 몰랐다.’는 취지로 그 말을 했다면 거의 사실이다. 사실 나의 농구 지식(내게 그런 게 조금이라도 있다면)은 기자가 된 이후에 배워서 모은 것이다. 어느 분야에나 누군가 물으면 기꺼이 가르쳐 주는 분이 계신다. 나에게는 방열, 정주현, 이문규와 같은 일류 감독들이 농구선생님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방열 감독님(그를 교수, 총장, 회장 등 다양하게 부를 수 있지만 ‘감독’이 가장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은 나에게 정말로 너그러운 농구의 스승이었다. 농구는 나의 직업과 관련 있는 운동 종목일 뿐 아니라 학문의 대상이기도 했다. 농구공부는 재미있다.

나의 첫 책은 『농구코트의 젊은 영웅들』이다. 1994년에 나온 이 책은 무척 많이 팔렸다. 그 뒤 『길거리 농구 핸드북』을 농구잡지의 별책으로 냈다. 동양 오리온스의 박광호 감독이 자문하고 전희철-김병철 선수가 사진 모델을 했다. 모교인 동국대학교 대학원에서 체육정책을 연구해 박사학위를 받은 뒤 농구를 소재로 논문이나 책을 여러 권 썼다. 『아메리칸 바스켓볼』, 『우리 아버지 시대의 마이클 조던 신동파』, 『맘보 김인건』. 비슷한 내용이 많지만 사실(史實)을 발전시켜 나간 책으로, 2021년 현재 정확성과 완성도는 『맘보 김인건』이 가장 높다.

가장 최근에 발표한 논문은 「한국 남자농구 최초의 다문화인 국가대표 선수 김동광 연구」이다. 우리 한국체육대학교 체육과학연구소에서 내는 학술지 『스포츠 사이언스』에 실린 이 논문은 언론계 선후배님들의 배려를 받아 여러 매체에 소개되었다. 정말 감사드린다. 많이 부족한 논문을 살펴 주신 결과다. 무엇보다 김동광 한국농구연맹(KBL) 경기본부장이 새삼 주목을 받고, 우리학교의 자랑거리 가운데 하나인 『스포츠 사이언스』가 널리 알려져서 보람을 느낀다. 나는 김동광 본부장을 ‘차별이 선명하던 시기에 태어나 수준 높은 기량을 발휘하며 농구 경기의 중심인물로 자리 잡은 첫 번째 다문화인’이라고 정리했다.

김 본부장에 대한 논문을 쓰면서 느낀 점이 있다. 김 본부장은 송도중학교 농구부에 들어간 뒤 노골적인 차별에서 해방된다. 농구 코치이기에 앞서 위대한 교육자라고 불러야 마땅할 전규삼 선생님의 훈도 아래, 송도중학교 농구부의 선배들은 후배 김동광을 훌륭히 보호했다. 고려대학교에 진학한 다음에도 마찬가지였다. 미완의 가정(家庭)에서, 그러니까 홀어머니 슬하에서 어렵게 자란 다문화인 김동광은 농구부에 들어감으로써 새로운 가정에 편입되었고, 가정의 보호와 사랑을 경험했다. 이 토양 위에서 슈퍼스타로 성장했고 존중받는 위치로 올라섰다. 기업은행에 들어간 뒤로는 상업광고에 나갈 만큼 인기를 누렸다.

농구부를, 팀이나 구단을 가정이라고 생각하는 인식은 적어도 실업농구 시대까지 유효했다. 농구대잔치가 큰 인기를 끌던 시절, 지방에서 대회가 열리면 매일 저녁 팀별로 회식을 했다. 거기 초청받아 참석하는 일은 농구기자를 하는 즐거움 가운데 하나였다. 농구인들을 편안한 자리에서 만나 대화할 기회였기에 염치불구하고 참석했다. 그 자리에는 예외 없이 ‘OB’들이 모였다. 기업은행, 산업은행, 한국은행의 레전드들이 참석해 후배들을 격려하고 덕담을 나누었다. 나는 그 안에서 구성원들이 가족의 따뜻함을 누리는 모습을 관찰했다. 가끔은 그 광경들이 그립다. 프로농구가 출범한 다음 이 같은 모습을 보기는 어려워졌다.

실업농구 시절에는 이적이 거의 불가능했다. 한번 삼성맨은 영원한 삼성맨, 한번 현대맨은 영원한 현대맨이었다. 역대 단장과 사무국원, 코치-감독과 선수들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으로 묶여 서로를 대했다. 이들의 송년잔치는 한국농구의 올스타 대회 같은 분위기였다. 그러나 프로가 출범한 뒤 이 같은 유대와 결속은 서서히 해체되어갔다. 한 팀에서 데뷔와 은퇴를 할 수 있는 선수는 손에 꼽힐 정도다. 내가 달라진 현실을 실감한 전형적인 사례는 2001년 6월 21일에 이루어진 문경은(삼성) 선수와 우지원(신세기) 선수의 맞교환이다. 특히 삼성이 문경은 선수를 내보내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충격을 받았다.


나는 삼성이 어떻게 문경은 선수를 스카우트했는지 잘 안다. 문 선수는 대학농구 최고의 슈터였다. 이충희-김현준 선수의 뒤를 잇는다는 평가가 과장이 아니었다. 누구나 매혹될 만큼 아름다운 슛동작과 높은 정확성, 덩크슛이 가능한 큰 키와 탄력 등 매력의 집합체였다. 기아가 실업 무대를 평정한 그 시절, 동아일보의 최화경 선배가 썼듯 현대든 삼성이든 “문경은을 영입하면 기아 격파가 가능”했다(고 생각했다). 현대와 삼성의 스카우트 역량이 총동원된 스카우트 전쟁에서 이인표 상무의 지휘 아래 이성훈-전창진 등 경기인 출신 프런트가 전력투구한 삼성이 역전승(당시 분위기로는 현대의 승리가 유력해 보였다)했다.

아무튼 삼성은 2000-2001시즌 우승을 달성한 뒤 문경은 선수의 방출을 결정했다. 문 선수 본인이 이적을 원한 점도 감안해야 하리라. 그래도 삼성이 우지원 선수를 얻기 위해 교환을 시도한 결과가 아닌 이상 방출이라고 규정해야 옳다고 생각한다. 이 트레이드에 마지막까지 반대한 인물은 이성훈 전 단장(당시 사무국장)이다. 그는 삼성이 현대를 이기고 문경은 선수를 받아들이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인물이다. 그의 초인적인 인내력과 진심을 다한 설득이 문경은 영입이라는 결실로 이어졌다. 삼성 정신이라는, ‘혈관 속에 푸른 피가 흐른다.’는 삼성농구의 이념이라는 면에서 이성훈 전 단장만큼 투철한 인물을 나는 다시 보지 못했다. 삼성이 침체기를 겪던 시절에 단장을 맡았다고 해서 그의 역량과 헌신을 폄훼할 수는 없다. 그가 보기에 ‘삼성의 아들’ 문경은 선수를 타 구단에 보내는 일은 천부당만부당했다.

지난 4일 삼성이 LG에 이관희 선수를 보내고 김시래 선수를 받는 트레이드를 했다. 나는 이 장면을 보면서 문경은-우지원 트레이드를 떠올렸다. 나는 이관희 선수가 삼성에 썩 어울린다고 생각했고, 눈이 부실 정도는 아니지만 재능을 지녔음이 분명하다고 느꼈다. 그의 방출은 의외였고, 그래서 몇 군데 전화를 해서 확인해 보았다.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트레이드의 명분은 여러 언론에서 보도한 그대로니까 반복하지 않겠다. 팀을 바꾼 선수들이 제 자리를 잘 지키면서 전보다 나은 기량을 발휘해 주기를 기대한다. 어찌됐든, 나는 이번 트레이드를 보면서 구단과 팀은 더 이상 가정이 아님을 확인했다. 그곳에는 동료나 형제가 아니라 경쟁자와 동업자가 있을 뿐이다. 그래도 이번 트레이드를 소재로 글을 쓰고 싶지는 않았다.

어제, 그러니까 2021년 2월 8일에 나는 놀라운 뉴스를 접했다. 매우 인기가 있는 여자프로배구 스타가 구단 숙소에서 쓰러졌는데, ‘극단적인 선택’을 시도했을 수도 있다는 보도였다. 다행히 선수의 생명에는 지장이 없고, 건강을 회복하고 있다는 후속 기사가 나와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 일을 계기로 그 선수와 관련된 이야기를 온·오프라인을 통해 확인하니 과연 순탄하지 않은 생활이 거듭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특히 숙소와 훈련장에서 선수가 경험한 스트레스를 짐작할 수 있었다. 세상은 달라졌고, 훈련장과 숙소 역시 생존경쟁이 거듭되는 전장(戰場)이 되었다. 숙소에서 한 지붕을 지고 있어도 선수 개인은 세상에 홀로 던져진 고독한 자아일 수밖에 없는 시대. 천지불인(天地不仁)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몸과 마음이 모두 성치 않을 배구선수가 속히 아픔을 떨치고 일어나기 바란다. 아무 일 없기를.

허진석 한국체육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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