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준구의 DEBUT] 찬스에 강했던 ‘나이스 큐’ 이규섭의 농구 인생

민준구 기자 / 기사승인 : 2020-06-26 11:5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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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프볼=민준구 기자] 모든 사람에게는 일생에 세 번의 기회가 온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어느 누구나 그 기회를 잡지는 못한다. 기회를 살리느냐 못 살리느냐에 따라 인생은 달라지기 마련이다. 서울 삼성의 이규섭 코치는 이 부분에 있어 전자에 속하는 인생을 살았다.

어린 시절, 형 이흥섭 원주 DB 사무차장이 농구하는 모습을 보고 선수로서의 꿈을 키웠던 이규섭 코치. 동산초 5학년이 된 그는 이흥섭 차장이 탄탄대로를 걷는 모습에 반해 자신도 농구공을 잡게 됐다.

기본기를 익히는 것에 만족해야 했던 동산초 시절 이후 이규섭 코치는 대경중에 입학했다. 동기만 무려 12명. 단 한 명의 선수만 제외한 채 11명은 코트 주변에서 기본기 훈련에 매진해야했고 그들 중 이규섭 코치도 포함되어 있었다.

“중학교 1학년 때 키가 170cm대 중반 정도 됐다. 2학년으로 올라가면서 185cm까지 크게 됐는데 그때도 솔직히 경기에 투입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기회가 찾아왔는데 부상 당한 선수 대신 들어간 경기에서 피벗으로 첫 득점을 넣었다. 이후에도 상대를 계속 속이면서 득점을 하니까 코치님이 너무 좋아하더라(웃음). 솔직히 그전까지만 하더라도 엄청 무서운 사람이었고 관심도 주지 않았었는데 그 경기 이후로 계속 주전이 되어 뛰었다.” 이규섭 코치의 말이다.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않았던 이규섭 코치는 선수로서 성장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더불어 해마다 10cm 가까이 성장하며 195cm를 넘었고 대경상고 시절에는 198cm까지 성장했다.

수많은 농구 스타들을 배출한 대경상고이지만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이규섭 코치 전까지 이름을 알린 선수들이 많지 않았다. 이규섭 코치가 대경상고 2학년 재학 중에 청소년 대표팀으로 차출됐을 때도 학교 전체가 들썩일 정도였으니 쉽게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이규섭 코치는 1995년 3월,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제13회 아시아청소년농구선수권대회에 출전했다. 당시 한국의 핵심 멤버는 에이스 조우현을 비롯해 황성인, 조상현, 임재현이었고 이규섭 코치 역시 한 축을 담당했다. 너무나도 압도적인 전력이었다. 중국의 미래로 불린 왕즈즈도 한국을 막아낼 수는 없었다. 전승 우승. 1984년 이후 11년 만에 이룬 쾌거였다. 더불어 외국에서 열린 대회에서의 우승은 최초였다(1984년은 서울에서 개최).

“그때는 농구가 너무 쉬웠다. 다들 자기가 가장 잘하는 줄 알던 시절이기도 했다(웃음). 나도 그랬으니까. 중국에는 왕즈즈부터 황금 세대가 있었는데도 우리한테 상대가 안 됐다. 특히 (조)우현이 형은 우리보다 한 단계 위 레벨의 선수였다. 뭘 해도 막을 수 없는 존재이기도 했고.”

대한민국농구협회가 지금과는 달리 재정적으로 안정적이었던 시절, 아시아 정상을 차지했던 청소년 대표팀은 이후에도 그리스·이탈리아 전지훈련부터 4개국 초청대회 등 적극적인 투자를 받을 수 있었다.

수준 높은 곳에서의 농구는 이규섭 코치를 성장시켰다. 자신보다 큰 선수들을 상대하던 그가 국내로 돌아오니 농구가 쉬울 수밖에 없었다. 자신보다 더 뛰어나다고 생각했던 형들이 졸업한 뒤 3학년이 된 이규섭 코치는 그렇게 고등부 랭킹 1위에 올랐다.

이규섭 코치는 “솔직히 말하면 농구가 조금 시시해진 느낌도 있었다. 워낙 좋은 선수들과 계속 맞붙다 보니까 국내에선 나보다 더 잘하는 선수를 찾기가 힘들었다. 근데 그 건방진 생각이 오래가지는 못했다. 고려대로 진학하면서 내가 가진 생각이 모두 깨져버린 것이다”라고 전했다.

-고등부 랭킹 1위로 선정된 이규섭은 여러 대학의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 그중 형 이흥섭 차장이 있었던 한양대 역시 하나의 후보였다. 한양대는 이흥섭 차장을 앞세워 이규섭 스카우트에 나섰지만 끝내 목표한 바를 이루지 못했다. 이로 인해 이흥섭 차장이 잠시 팀을 떠나 있어야 해던 해프닝도 벌어졌다-

자신이 최고인줄만 알았던 이규섭 코치에게 있어 고려대에서의 신입생 시절은 충격과 공포였다. 졸업반에 전희철과 김병철이 버티고 있었고 이후 양희승, 박규현, 박훈근, 박재헌을 시작으로 신기성, 현주엽 등 당대 최고의 선수들 사이에서 이규섭 코치는 기를 펴지 못했다.

“대경상고 졸업 이후에 고려대에 진학한 뒤 딱 1년 만에 슬럼프가 제대로 찾아왔다. 이 세상에서 제일 농구 잘하는 줄 알았는데 고려대에 와보니 제일 못하더라(웃음). 너무 힘들어서 농구를 그만두려고 했던 적도 있다. 그때 (신)기성이 형이랑 (박)훈근이 형이 불러서 잠깐 술 한잔을 하게 됐고 간신히 농구 인생을 이어갈 수 있었다.”

신기성 해설위원은 “(이)규섭이가 신입생 때 많이 힘들어한 기억이 있다. 아무래도 같은 포지션에 경쟁자도 많고 당시 고려대 전력이 워낙 강하다 보니 당장 많은 시간을 뛰지 못한다는 것에 대해 쉽게 적응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나 역시 겪었던 일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공감대가 형성됐다. 너무 오래 전 일이라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그래도 잘 다독여서 마지막까지 잘 할 수 있도록 도운 일이라고 생각한다”라고 회상했다.

절치부심한 이규섭 코치는 신입생 시절의 좌절감에 깊이 빠져 있지 않았다. 오히려 이들 사이에서 빛을 내겠다는 의지 하나로 자신을 단련했고 그렇게 조금씩 존재감을 드러냈다. 무엇보다 골밑에 치중하지 않고 내외곽을 오고 가는 훈련을 지속했던 것은 이규섭 코치의 선견지명(先見之明)일수도 있다. 전형적인 센터가 아닌 올-어라운드 플레이어로서 이규섭 코치는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 보였다.

고려대의 전성 시대를 연 선수들이 모두 실업 및 프로로 떠났을 때도 이규섭 코치는 하나의 버팀목이 됐다. 과거에 비해 약해졌다는 평가 속에서도 매번 상위권을 유지했고 졸업반이었던 1999년에는 농구최강전에서 중앙대를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또 3관왕에 오르며 최고의 자리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프로 진출의 시기가 다가오자 10개 구단의 시선은 모두 이규섭 코치에게 집중됐다. 198cm의 장신, 넓은 범위를 자랑하는 슈팅 거리 등 활용도가 높다는 평가 속에서 전체 1순위 지명권에 대한 경쟁도 심화됐다. 그렇다면 이규섭 코치 본인은 자신이 전체 1순위라는 것을 어느 정도 예상했을까?

이규섭 코치는 “솔직히 말하면 기대는 했지만 자신하지는 않았다. 대신 신문을 보면 1면에 내 이름이 나올 때가 있는데 그때는 조금씩 기대가 되더라. 워낙 좋은 평가를 해주다 보니 이미 뽑힌 것 같은 느낌도 있었다”라고 전했다.

이변은 없었다. 1999년 12월 9일, 서울 교육문화회관에서 열린 2000 KBL 국내 신인선수 드래프트의 주인공은 이규섭 코치였다. 전체 1순위 지명권을 가진 삼성의 선택을 받으며 예비 신인들 중 가장 먼저 무대 위에 올라섰다.

여기서 한 가지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다. 대부분의 신인 드래프트는 전년도 성적을 기준으로 지명권 확률을 배분한다. 하나, 2000 KBL 국내 신인선수 드래프트는 지난 3년간의 성적을 종합한 것을 바탕으로 지명권 확률을 배분하고 말았다. 사실상 이규섭 쟁탈전과 같았던 2000 KBL 국내 신인선수 드래프트 전체 1순위 지명권 추첨에서 1999-2000시즌, 15승 30패로 최하위에 머무른 신세기 빅스가 경쟁에서 이탈한 것이다.

그동안 시즌 종료 후 진행된 신인 드래프트가 시즌 도중 열리게 되면서 일어난 상황이었다. 결국 1999년에는 두 차례 신인 드래프트가 진행됐고 이러한 해프닝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지난 3년간의 성적을 종합해 지명권 확률을 나눈 것은 2000 KBL 국내 신인선수 드래프트가 최초이자 최후의 일이었다.

규정 변화로 인해 삼성과 SK, 골드뱅크, 동양이 전체 1순위 지명권을 두고 다퉜으며 결국 최후의 승자는 삼성이 됐다. 제2의 전희철로 불렸던 이규섭의 삼성행은 우승후보로 꼽혔던 그들에게 날개를 달아준 것과 같았고 그렇게 2000-2001시즌 통합우승이라는 결과로 이어졌다.

그렇다면 이규섭 코치의 프로 데뷔전은 어땠을까.

이규섭 코치는 2000년 11월 4일, 수원실내체육관에서 열린 삼성과 동양의 시즌 개막전에서 선발 출전했다. 1쿼터에만 6득점을 기록했던 그는 파울 트러블에 걸리며 이후 활약하지 못했고 22분 9초 동안 7득점 1리바운드로 마무리했다.

“솔직히 데뷔전은 너무 아쉬웠다. 개막 전에 열린 에어컨 리그에서 50득점 가까이 넣을 정도로 활약했는데 정식 경기는 다르더라. 그때 (서)장훈이 형이 ‘너가 골 좀 넣을 줄 안다며?’라고 말한 게 생생히 기억난다(웃음). 스카우트였던 (고)상준이 형도 국내선수가 50득점 하는 걸 꼭 보고 싶었는데 너가 할 뻔했다고 할 정도로 펄펄 날았다. 근데 데뷔전에서는 파울 트러블 때문에 뭘 할 수가 없었다. 신문에도 미숙하다는 평가를 한 기사가 막 실릴 정도였다. 스스로 한심하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된 데뷔전이 아니었나 싶다.”

하지만 이규섭의 데뷔 시즌은 탄탄대로였다. 아쉬웠던 데뷔전을 뒤로 한 채 팀의 주축으로 활약했고 45경기에 모두 출전하며 평균 31분 4초 동안 12.7득점 4.6리바운드 1.5어시스트를 기록했다. 신인상 역시 경쟁자가 없을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총 유효 투표수 70표 중 65표를 가져왔다.

데뷔전에서 활약할 수 있는 기회는 놓쳤지만 이후 주어진 상황에 대해선 외면하는 일이 없었다. 이규섭 코치는 그렇게 매번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았고 삼성의 창단 첫 통합우승에 기여했다.

플레이오프 때의 부진은 특별한 이유가 존재했다. 사실 무릎뼈 골절로 출전이 불가능했던 이규섭 코치였지만 코칭스태프의 지시로 코트 위에 항상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경기에 뛸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상대에게 혼란을 주기 위해 코트 위에서 매일 몸을 풀었다. 정작 뛰지는 못했는데 그래도 나를 신경 쓸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우승까지 했으니 조금은 통하지 않았나 싶다”라고 이야기했다.

이후에도 이규섭 코치의 인생은 기회의 연속이었다. 상무 입대 후 서장훈이 삼성으로 이적하면서 위기를 맞이했지만 오히려 기회로 삼아 슈터로서 포지션을 변화했다. 프로 인생 최대의 터닝 포인트가 된 이 시기에 이규섭 코치는 포기하지 않았고 국내 최고의 슈터로 성장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오랜 시간 이규섭 코치를 지켜본 양은성 삼성 코치는 “주어진 상황에 포기하지 않고 극복해내려는 모습은 지금 선수들이 본받아야 할 부분이 아닌가 싶다. 이규섭 코치가 굴곡 없는 선수 생활을 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수 있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힘든 환경 속에서도 자신이 농구를 놓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도 좋은 평가를 받는 것이다. 지금도 주어진 기회를 스스로 놓치는 선수들이 많다. 그럴 때마다 이규섭 코치가 어떻게 농구를 했는지 잘 알았으면 좋겠다”라고 바랐다.

과거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에 참석한 야오밍 중국농구협회 회장은 이런 말을 했다. “운이란 준비된 자에게 찾아오는 것.” 기회 역시 마찬가지다.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주어진 기회도 놓칠 수밖에 없다. 이규섭 코치의 농구 인생은 철저한 준비를 바탕으로 기회를 잡으며 그려졌다.

# 사진_점프볼 DB(문복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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