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마지막을 준비하는 전자랜드, 그들이 걸어온 17년의 역사

이재범 기자 / 기사승인 : 2020-10-24 10:3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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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프볼=이재범 기자] 인천 전자랜드는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2020-2021시즌을 맞이한다. 2003-2004시즌부터 KBL에 뛰어들었던 전자랜드는 지난 8월 KBL 임시총회에서 이번 시즌까지만 팀을 운영하겠다고 밝혔다. 지난 17시즌 동안 많은 이야기거리를 만들어냈던 전자랜드가 걸어온 길을 되짚어보자.

※ 본 기사는 농구전문매거진 점프볼 10월호에 게재된 글입니다. 기록은 2020-2021 현대모비스 프로농구 정규리그 개막 전을 기준으로 반영됐음을 알립니다.

전자랜드의 첫 출발은 대우증권
1997년 KBL이 출범할 때 인천의 주인은 대우증권이었다. 대우증권은 1994년 5월 23일, 1996년 3월 출범을 목표로 남자실업농구팀 창단을 공식 발표했다. 대우증권에 이어 럭키금성, 동양제과, 진로까지 창단을 확정했다. 남자실업농구연맹은 한 번에 4개 팀이 창단하는 건 선수 수급 등을 고려할 때 어려움이 있다는 이유로 1996년과 1997년 두 팀씩 나눠 창단하는 걸로 결정했다. 1996년 창단한 팀이 대우증권과 동양(현 오리온), 1997년 창단한 팀이 LG와 진로(현 SK)다. 대우증권은 1994년 12월 30일 연세대 졸업 예정이었던 우지원, 김훈, 석주일 등을 영입하는 걸로 확정했으며, 그 외 총 10명의 선수들과 계약을 마무리했다. 당시에는 유재학 코치가 팀을 이끌었던 대우증권은 1995년 10월 16일 최종규 초대 감독을 내정했고, 1996년 3월 5일 창단했다.

많은 실업팀이 한 번에 창단한 건 프로 출범을 대비한 것이었다. 프로 출범의 본격적인 첫 발을 내딛는 건 연고지 선정이었다. 가장 뜨겁게 경쟁이 펼치진 곳은 5팀까지 원했던 수원이었다. 청주와 대전도 경합이 펼쳐졌다. 대우증권은 별다른 경쟁 없이, 마음에 품고 있던 인천을 연고지로 정했다.

1998년 3월 대우증권에서 이름을 바꾼 대우는 1997시즌부터 1998-1999시즌까지 3시즌 연속으로 6강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1998-1999시즌이 끝난 뒤 대만에서 열린 1999 아시아 슈퍼리그에 단일팀으로 출전까지 했지만, 1999년 9월 13일 신세기통신에 인수되었다.

전자랜드의 또 다른 이름, 신세기와 SK빅스
삼성과 LG, SK는 프로농구 출범 후 한 번도 팀명을 바꾸지 않은 구단이다. 이와 달리 팀 이름이 가장 많이 바뀐 구단은 나래로 시작해 삼보, TG, TG삼보, 동부를 사용했던 DB다. 그 다음으로 5개의 이름을 가진 전자랜드와 KT(나산, 골드뱅크, 코리아텐더, KTF, KT)가 두 번째 많은 팀명의 구단에 이름을 올렸다.

전자랜드는 대우증권과 대우에 이어 신세기, SK빅스(SK나이츠와 구분하기 위해 빅스를 붙
임)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다. 신세기통신은 1999년 12월 세계 최초로 CDMA 국제 자동 로밍 서비스를 시작하는 등 현재 사라진 017을 대표번호로 사용했던 통신회사였다. 대우를 인수해 프로농구에 뛰어든 신세기는 명맥을 오래 유지하지 못했다.

2000년 4월, SK에 조건부 인수되는 걸로 결정되었고, 2002년 1월 최종 SK에 흡수 합병되
었다. 이름도 신세기에서 SK빅스로 바뀌었다. 이 때문에 SK는 한 때 SK나이츠와 SK빅스라는 두 개 구단을 운영했다. 하나의 기업이 두 개 구단을 가질 수 없는 KBL 규약을 적용 받아 SK빅스는 무조건 매각되어야 하는 운명이었다. 전자랜드가 구세주처럼 등장했다. 전자랜드는 2003년 8월 5일 SK빅스를 인수했다.

전자랜드, 상쾌했던 첫 출발
전자랜드는 창단 첫 해였던 2003-2004시즌을 기분 좋게 시작했다. TG삼보(현 DB)와 개막전에서 패배를 당했지만, 2003년 10월 26일 KTF(현 KT)와 홈 경기에서 첫 승을 거둔 뒤 내리 5연승을 질주했다. 곧바로 4연패 뒤 4연승을 기록하며 중위권에 확실하게 자리잡았다. 6라운드에서 8승을 거두며 4위로 정규경기를 마무리해 플레이오프를 기대하게 만들었다.

전자랜드의 전신이었던 대우와 신세기, SK빅스는 7시즌 동안 5번이나 플레이오프 무대에 섰으나 매번 6강 플레이오프에서 탈락했다. 전자랜드는 처음 진출한 6강 플레이오프에서 삼성과 맞붙었다. 전자랜드는 1차전을 95-68로 크게 이겼지만, 2차전에서 67-89로 역시 20점 이상의 대패를 당했다. 1승 1패로 동률을 이뤘다.

운명의 3차전이었다. 4쿼터까지 승부를 가리지 못했다. 73-73, 동점으로 1차 연장에 들어갔다. 전자랜드는 강혁과 이현호에게 연속 5실점하며 끌려갔지만, 1.6초를 남기고 앨버트 화이트가 극적인 동점 3점슛을 성공해 기사회생했다. 전자랜드는 2차 연장에서 화이트의 연속 득점과 문경은의 달아나는 3점슛에 힘입어 4강 플레이오프 진출을 확정했다. 문경은은 자신의 약속대로 4강 플레이오프 진출을 자축하며 웃통을 벗고 춤을 추며 팬들과 4강 플레이오프 진출의 기쁨을 함께 즐겼다.

새로운 시도와 불안했던 성적
팀을 창단할 때 코치였고, 1998-1999시즌부터 팀이 바뀔 때마다 계속 감독을 역임했던 유재학 감독이 2003-2004시즌을 끝으로 떠났다. 유재학 감독과 계속 인연을 이어나가길 원했던 전자랜드는 어쩔 수 없이 새로운 감독을 찾았다. 유재학 감독이 모비스(현 현대모비스)로 이적하자 모비스에서 감독을 맡은 바있는 박수교 감독을 선임했다. 박수교 감독은 2004-2005시즌 17승 37패로 최하위에 머물자 감독에서 물러날 뜻을 밝혔다. 전자랜드는 박수교 감독에게 단장직을 제의했고, 박수교 감독은 이를 받아들였다. 박수교 감독은 프로농구 감독 출신 중에서 처음으로 단장직에 올랐다.

전자랜드는 최초의 선례를 여기서 끝내지 않았다. 박수교 감독의 뒤를 이을 감독으로 TG삼보 제이 험프리스 코치를 선임했다. 험프리스 감독은 TG삼보 코치로 2002-2003시즌부터 3년 연속 챔피언결정전 진출, 2차례 챔피언 등극에 힘을 실었다. 프로농구 출범할 때부터 외국인 코치는 다수였지만, 외국인 감독은 최초였다. 다만, 험프리스 감독은 2005-2006시즌 20경기에서 3승 17패로 부진하자 금세 지휘봉을 놓고 말았다.

전자랜드는 연세대 전성시대를 이끌었던 최희암 감독, 대전 현대와 창원 LG에서 코치와 감독을 역임했던 박종천 감독에게 연이어 팀을 맡겼지만 두 감독 모두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했다. 2004-2005시즌부터 10위, 10위, 9위, 7위, 6위, 9위 등 6시즌 동안 플레이오프에 한 번 밖에 오르지 못했다. 특히, 2009-2010시즌에는 13연패와 12연패를 당했다. KBL 통산 정규경기에서 12연패 이상 긴 연패는 딱 9번 밖에 나오지 않았다. 전자랜드는 희귀한 기록을 한 시즌에 두 번이나 기록하는 아픔을 겪었다.

전자랜드는 성적이 좋지 않았던 시절인 2006년 12월 3일 진정한 연고지 인천에서 경기를 갖기 시작했다. 1997시즌 인천시립체육관을 홈 코트를 사용한 뒤 1997-1998시즌부터 부천실내체육관에서 홈 경기를 가졌던 전자랜드는 2006년 11월 26일을 끝으로 부천 시대를 끝내고 인천삼산월드체육관을 홈 코트로 사용하며 인천 시대를 열었다.

전자랜드의 버팀목, 유도훈 감독
전자랜드는 2008-2009시즌이 끝난 뒤 새로운 박종천 감독과 현대 포함 KCC에서 인연이 깊은 유도훈 코치를 선임했다. 당시 유도훈 코치는 2006-2007시즌 중반 KT&G(현 KGC) 감독에 부임한 뒤 2007-2008시즌까지 2년 연속 플레이오프로 이끄는 등 통산 39승 24패를 기록한, 감독 경력자였다. 코치가 감독이 되는 경우가 종종 나오기 때문에 박종천 감독이 물러나면 감독 경험이 있는 유도훈 코치가 전자랜드 감독을 맡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 시기가 예상보다 빨리 찾아왔다. 박종천 감독은 2009-2010시즌 초반 12경기에서 단 1승 밖에 거두지 못하자 감독 자리를 내놓았다. 유도훈 코치는 감독대행으로 2009-2010시즌을 마무리했다. 전자랜드는 2010-2011시즌부터 대행 꼬리표를 떼고 유도훈 감독에게 지휘봉을 맡겼다.

프로 원년부터 국내선수 드래프트에 운이 유난히 따르지 않았던 전자랜드였다. 포지션 보강을 할 수 없는 지명 순위가 많이 나왔다. 1순위가 나올 땐 리그 판도를 뒤흔들 선수가 없을 때였다. 그나마 2010년 귀화혼혈선수 드래프트에서 운이 따랐다. 유일하게 전력에 보탬이 되는 문태종을 뽑기 위해선 1순위가 필요했고, 전자랜드에게 그 운이 찾아왔다.

전자랜드는 2010-2011시즌 서장훈과 문태종, 허버트 힐을 앞세워 승승장구했다. 4라운드 중반까지도 22승 8패를 기록하며 1위를 질주했다. 시즌 중이라도 1위에 오른 건 2000-2001시즌 이후 처음이며, 전신 구단 포함해 전자랜드 역사에서 4라운드 중 1위를 기록한 건 이 때가 유일하다. 그만큼 우승에 근접했던 시즌이다. 그렇지만 KT의 돌풍에 밀려 아쉽게 2위에 머물렀다. 최초로 4강 플레이오프에 직행이란 성과는 남겼다.

유도훈 감독은 이를 시작으로 고전을 면치 못하던 전자랜드의 새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당연히 계약 기간이 끝날 때마다 재계약을 맺었다. 유도훈 감독은 전자랜드에서만 570경기에 나서 292승 278패(승률 51.2%)를 기록 중이다. 한 팀에서 570경기를 소화하고 292승을 거둔 감독은 현대모비스 유재학 감독(852경기, 512승) 외에는 아무도 없다.

이제는 전자랜드 하면 유도훈 감독이 떠오른다. 유도훈 감독이 정식 감독으로 부임한 뒤 전자랜드는 지난 10시즌 동안 9번(지난 시즌 5위 포함)이나 플레이오프에 올랐다. 더구나2018-2019시즌에는 염원이었던 챔피언결정전 진출까지 이뤘다. 유도훈 감독의 존재가 지금의 전자랜드를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영삼과 리카르도 포웰
전자랜드가 창단한 2003-2004시즌부터 지난 시즌까지 정규경기 단 한 경기라도 출전한 선수는 총 138명이다. 이 중 국내선수는 92명, 외국선수는 46명이다. 전자랜드를 대표하는 국내선수와 외국선수를 한 명씩 뽑는다면 정영삼과 리카르도 포웰일 것이다.

정영삼은 2007-2008시즌 전자랜드에서 데뷔한 뒤 단 한 번도 이적없이 줄곧 전자랜드 유니폼을 입고 있다. 정영삼은 팀 내 유일하게 500경기 이상인 527경기에 출전해 4,421점 912리바운드 897어시스트 3점슛 성공 599개를 기록 중이다. 한 구단에서만 활약하며 527경기 이상 출전한 선수는 김주성(742G), 추승균(738G), 양동근(665G), 함지훈(563G), 김병철(556G) 뿐이다. 정영삼이 얼마나 오랜시간 동안 전자랜드를 지켰는지 잘 보여준다.

포웰은 전자랜드 소속으로 5시즌(2015-2016시즌은 시즌 중 트레이드로 합류) 동안 활약하며 235경기에 출전해 4,797점 1,700리바운드 687어시스트를 기록했다. 득점은 정영삼보다 376점 더 많다. 정영삼이 이 기록을 넘지 못한다면 전자랜드 소속 선수 중 최다 득점 기록은 오랜 시간 동안 포웰의 몫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포웰 이외에도 KBL 역대 최다인 10회 트리플더블 기록을 남긴 앨버트 화이트도 전자랜드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외국선수다.

전자랜드, 두 번의 매각 위기
전자랜드는 유도훈 감독 부임 후 늘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는 전력을 자랑했지만, 두 차례 매각 위기를 겪었다. 처음은 잘 알려진 2012년이다. 모기업이 매각설에 휘말려 농구단 운영에도 비상이 걸렸다. 10개 구단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KBL에서 선수단의 급여를 지원하고, 구단운영은 전자랜드에서 맡는 방식으로 위기에서 가까스로 벗어났다.

전자랜드는 좋은 성적을 거둔다면 모기업에서 마음을 바꿀 수 있을 것이라는 절박한 심정으로 경기에 임했고, 2012-2013시즌 3위를 차지한 뒤 4강 플레이오프까지 진출했다. 인천 팬들도 인천 연고 한 시즌 최다인 133,459명이 체육관을 찾아 전자랜드를 응원했다. 선수들은 최상의 성적을 거두고, 팬들도 뜨거운 응원을 보내자 전자랜드는 팀을 계속 운영하는 방향으로 돌아섰다.

전자랜드는 2016년에도 KBL에 매각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또 한 번 찾아온 위기를 조용하게 넘긴 전자랜드는 이번에 세 번째 매각 위기에 빠졌다. 2012-2013시즌처럼 2020-2021시즌에도 한 번 더 선전을 펼친다면 전자랜드는 지난 두 차례처럼 다시 팀을 운영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여파와 사회의 변화를 고려할 때 더 이상 전자랜드가 팀을 운영하기는 힘들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이제는 2021년 5월까지 전자랜드를 맡을 새로운 주인을 찾아야 한다.

전자랜드, 투혼과 감동의 아이콘
전자랜드 하면 떠오르는 첫 번째 단어는 투혼이다. KBL은 2008-2009시즌부터 6강 플레이오프를 3전2선승제에서 5전3선승제로 바꿨다. 이 때부터 5차전까지 펼쳐진 건 8번이다. 이 중 전자랜드는 5번이나 6강 플레이오프 5차전을 경험했다. 4강 플레이오프나 챔피언결정전 진출이란 성과와 거리가 멀었지만, 6강 플레이오프에서 어느 팀을 만나더라도 쉽게 물러서지 않고 치열하게 물고 늘어지는 투혼을 발휘했다.

이 과정에서 팬들에게 감동을 선사했다. 특히, 2014-2015시즌 SK와 6강 플레이오프는 전자랜드 팬들에게 잊을 수 없는 순간이다. 6강 플레이오프는 정규경기 3위와 6위, 4위와 5위의 맞대결이다. 4위와 5위의 맞대결보다 3위와 6위의 맞대결 결과는 싱겁다. 보통 3위가 4강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는 경향이 짙다. 전자랜드는 6위였음에도 3위 SK에게 3전승을 거뒀다. 6위가 3위에게 최초로 스윕을 기록한 것이다. 더구나 6위가 4강 플레이오프에 진출한 건 9시즌 만이었다. 시리즈 전적은 일방적이지만, 경기 내용은 결코 그렇지 않다. 2차전과 3차전은 경기 종료 1분 이내에 결승 득점이 나올 정도로 뜨거운 승부였다. 4강 플레이오프가 확정되었던 인천삼산월드체육관은 감동의 물결로 넘쳤다.

전자랜드는 다시 한 번 투혼과 감동을 발휘해야 한다. 그래야만 9개 구단으로 운영되는 파국을 막고, 새로운 구단에서 새롭게 태어나 2021-2022시즌을 맞이할 수 있다.

BONUS ONE SHOT | 전자랜드, 올스타전에선 강했다
전자랜드는 정규경기 우승이나 챔피언 등극을 한 번도 하지 못했다. 정규경기와 플레이오프 MVP에 선정된 선수가 아무도 없다. 그나마 허버트 힐이 2010-2011시즌 외국선수 MVP인 외국선수상을 수상했다. 그렇지만, 올스타전에선 나름 선전했다. 전자랜드의 전신인 신세기 때 1999-2000시즌 올스타전에서 MVP와 덩크왕(이상 워렌 로즈그린), 3점슛왕(우지원)을 동시에 배출했다. 올스타전 3부문을 동시에 휩쓴 사례로는 유일하다.

KBL은 2003-2004시즌 올스타전부터 덩크 콘테스트를 국내와 외국선수 부문으로 나눴다. 2005-2006시즌 석명준과 안드레 브라운이 KBL 최초로 동시에 국내선수와 외국선수 덩크왕을 차지했다. 2003-2004시즌 올스타전 MVP인 문경은도 전자랜드 소속이었다.

# 사진_ 점프볼 DB(문복주, 유용우, 박상혁, 한명석 기자), KBL 제공

 

점프볼 / 이재범 기자 sinae@jumpbal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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