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LEGENDS] (19) '여자농구 100년 파워포워드 역사를 뒤흔들다' 유영주

서민교 / 기사승인 : 2022-05-21 06:4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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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한국여자농구 파워포워드 역사를 뒤바꿔 버린 유영주.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그의 에너지 넘치는 동작 하나 하나에 농구팬들은 매료됐다. 100년 여자농구에 한 번 나올만한 선수라는 찬사도 아깝지 않았다. 아직도 깨지지 않고 있는 55득점 역사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림자에 가려진 6년
실업팀에 들어가기 전 유영주는 무명의 선수에 불과했다. 그저 리바운드를 잡아 힘껏 패스를 해주는 역할이 전부였다. 어려서도 힘은 장사였다. 남자아이들도 집어 던질 만큼. 하지만 농구선수로서 그의 인생은 화려하지 않았다. 중학교 시절부터 한 팀이었던 당시 최고의 스타 정은순의 그림자일 뿐이었다. 숨겨진 그의 재능은 그림자 속에서 빛을 보지 못한 채 가려져만 있었다. 언니의 농구화가 부러워서 시작한 농구. 그의 농구인생은 그렇게 시작됐다.

Q. 처음 농구공을 잡은 게 언제였나요?
농구는 언니가 먼저 시작했어요. 전 초등학교 5학년 때 시작했고요. 언니가 신은 농구화가 신고 싶어서 농구를 시작했죠. 그 전에는 농구공 한 번 잡아보지 못했어요. 아빠가 배구선수 출신인데 촌에서만 하시다보니 아쉬움이 많이 남으셨나 봐요. 고(故) 심욱규 선생님이 제가 촌에서 뛰어노는 것을 계속 봐 오셨나 봐요. 그 뒤로 적극적으로 지원해주셨죠.

Q. 처음부터 재능이 있다고 보셨나요?
전혀요. 제가 농구를 했을 때 남자부와 여자부가 있었는데, 여자부는 그냥 설거지하는 명분으로 운영되는 팀이었어요. 인천에서 3위였거든요. 전체 3팀 중에요. 하하.

Q. 그래도 힘은 장사였을 것 같은데요.
제가 어려서부터 허벅지 근육이 남달랐죠. 남자들이 하는 놀이는 다 했거든요. 오르막과 내리막길을 뛰어다니며 놀았으니까요. 어렸을 때는 남자들보다 더 힘이 셌던 것 같아요.

Q. 남자들이 함부로 건드리지 못했겠어요. 운동도 잘하셨을 것 같고요.
까부는 애가 있으면 남자하고도 맞장을 떴죠. 6학년 때 쪼그만 애와 한번 뒤에서 붙은 적이 있어요. 그 애가 저를 먼저 때리는 거예요. 그대로 잡아서 집어 던져 버렸죠. 하하. 그 다음부터는 절 못 건드리더라고요. 그 뒤로 인기가 많아져서 투표로 반장도 했었어요. 특히 남자 들한테 인기가 많았죠. 반 대항 축구대회가 있어도 11명 중 유일하게 여자로 대표에 발탁이 됐으니까요.

Q. 언제부터 농구의 매력에 빠져들기 시작했나요?
그냥 재밌었던 기억만 있어요. 림 안에 넣기 위한 방법이 여러 가지가 있잖아요? 슛 폼도 다양하고요. 한 가지 상황에서 여러 상황이 벌어질 수 있는 것도 다 매력적이었어요. 일단, 잔머리를 굴려도 되잖아요. 그런 게 신기했죠. 코치님이 “농구는 사기를 잘 쳐야 하는 스포츠”라고 말씀하신 것을 일찍 깨달은 셈이죠.

Q. 인성여중으로 진학을 하셨어요. 정은순 선수와도 그때 처음 만났습니다.
은순이는 중앙초에 있었는데 소년체전 3위 멤버였고, 전 인천시내 3위 멤버였죠. 역시 3팀 중에요. 하하. 그때 동기가 8명 정도 있었는데 저만 다른데서 왔었어요. 선배들은 한 20명 정도 있었고요.

Q. 중학교 때는 어땠나요? 실력이 좀 늘었나요?
처음엔 잘 못했죠. 근데, 몸 풀 때 백보드를 치면서 하는 연습이 있었어요. 제가 탄력이랑 힘은 좋아서 저만 되는 거예요. 제가 언니들 앞에서 대표로 시범을 보이고 그랬어요. 그거 하나만 잘했죠.

Q. 게임도 거의 뛰지 못했겠네요?
그렇죠. A, B, C팀까지 있었는데, 제가 C팀에 속했으니까요. A팀은 베스트 멤버고, B팀은 조끼를 입었어요. 근데, 팀에 환자가 워낙 많아서 제가 조끼 팀으로 올라갔죠. 수비만 하는 역할이었죠. “공 튀면 무조건 잡아라”라는 코치님 말씀에 리바운드만 열심히 했어요. 그러다 1학년 겨울방학 때 연습하는데, 갑자기 선생님이 “너 조끼 벗어봐”라고 하시더라고요. 그 때부터 A팀에서 뛰기 시작했어요. 리바운드 잡아서 우리 편한테 무조건 주는 거였죠. 중학교 2학년 5월에 처음 소년체전에 나갔는데, 아웃렛 패스를 길게 준다는 것을 정확하게 심판에게 패스했던 기억이 나요. 그때 다들 “넌 심판이 인정한 선수”라고 절 놀려댔죠.

Q. 본격적으로 농구에 재미를 붙인 것은 언제였나요?
중학교 3학년 때부터였던 것 같아요. 2학년 마치고 3학년 올라가는 겨울방학 때 정말 힘들게 운동을 했거든요. 요즘 상식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겠지만, 정말 많이 맞으면서 배웠어요. 농구는 습관의 스포츠인데, 안 좋은 습관을 고치기 위해 강한 체벌이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 같아요. 결국 고쳐졌으니까요. 신기하게도 그때 재미를 붙였고 가장 많이 늘었죠. 종별대회에서 우승이라는 것도 처음 해봤고요.

Q. 타고난 것도 있지만, 몸에 힘이 붙기 시작한 게 언제였나요?
안 믿으시겠지만, 고1 때까지는 삐쩍 말랐었어요. 그때도 먹는 양은 많았지만, 빈혈 약을 먹을 정도였으니까요. 고2 올라가는 시기에 88꿈나무에 뽑혀서 호주를 갔는데, 교포들이 매일 바비큐 파티를 하는 거예요. 상대가 게임이 안 돼서 10분 정도만 뛰면서 바꿔가며 편하게 농구하고 엄청 먹었어요. 그땐 바나나 1개에 천 원 이상 할 때였는데, 제가 바나나를 먹고 경기를 하면 정말 잘했거든요. 호주가서는 바나나랑 오렌지를 박스로 쌓아놓고 먹었죠. 보름 정도 호주 갔다 오니까 어깨가 벌어지고 살도 쪄서 코치님이 못 알아볼 정도였어요. 그때부터 슛 거리도 멀어지고, 빈혈 약도 끊었죠.

Q. 체력관리를 위해 따로 훈련을 한 것이 있나요?
그땐 웨이트 트레이닝이 따로 없어서 서로 업고 뛰고, 무등 태워 앉았다 일어났다 하는 것이 전부였죠. 고3 때 청소년대표로 나고야를 간 적이 있었어요. 은순이랑 내기를 했죠. 제가 한 손으로 팔굽혀펴기를 할 수 있다고요. 평행봉도 그렇고 한 손 팔굽혀펴기 같은 것은 코치 선생님이 하시는 것을 보고 저도 따라해 본 적이 있었거든요. 언젠가부터 강한 것이 좋더라고요. 남들이 저랑 부딪히고 나가떨어지는 것에 희열을 느끼기 시작한 거죠.


Q. 정은순이라는 걸출한 스타가 있었어요. 라이벌 의식도 생겼을 것 같은데요.
거물급 선수였죠. 중학교 때부터 대표팀에 들었으니까요. 은순이 취재 오면 제가 뒤에서 들러리 서주고 그랬어요. 저의 롤 모델이었고, 경쟁 상대이자 자극제였죠. 언젠가 나도 주연급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죠. 단순히 먼 나라 얘기가 아니라 친구가 하니까 나도 할 수 있다는 그런 마음이요. 저에게 태극마크는 그런 의미였어요.

Q. 그래도 부러운 점이 많았겠어요.
은순이는 초등학교 때부터 알았고, 한솥밥은 1학년 때부터 먹었죠. 부러운 거야 진짜 많았죠. 질투도 많았고요. 걔는 진짜 악바리였어요. 선생님이 지적한 것이 안 되면 엄마한테 도시락 싸오라고 해서 될 때까지 계속 할 정도로요. 그런 노력을 했기에 큰 선수가 될 수 있었던 거죠. 저도 그런 것을 보고 배우고 따라하면서 늘었죠. 농구일지도 매일 썼으니까 대단하죠.

Q. 고교 시절 기억에 남는 경기가 있나요?
저희랑 선일여중이 강했어요. 고3 마지막 대회가 전국체전이었는데, 은순이와 제가 5반칙으로 퇴장을 당했죠. 그런데도 다른 애들이 잘해서 우승을 해냈어요. 그 경기가 가장 기억에 남아요.

1990년대 꽃을 피우다
숨겨진 재능은 감출 수 없었다. 인천 인성여고를 졸업하던 1990년. 유영주는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뜨거운 스카우트 전쟁의 중심에 섰고, 그 해 태극마크를 가슴에 달았다. SK증권 입단과 함께 신인상을 거머쥔 이후 팀을 3번이나 실업무대 정상에 올려놨고, 숱한 최우수선수상 수상은 물론 7년 연속 베스트5에 선정되며 명실상부한 최고의 자리에 올라섰다. 1995년 그가 세운 한 경기 55득점은 1983년 김영희의 52득점 기록을 13년 만에 갈아치운 역대 여자농구 최다득점이자 지금도 깨지지 않는 불변의 기록으로 남았다.

Q. 그 당시 스카우트 경쟁도 대단했잖아요.
우리 때부터 운 좋게 자유계약으로 바뀌었어요. 실업 감독이나 코치들이 학교로 찾아오고 난리도 아니었죠. 13개 실업팀 코칭스태프가 찾아왔으니까요. 그땐 대부분 밤 9시까지 연습할 때였는데, 그 사람들이 오면 저녁 7시에 훈련 끝나는 날이에요. 저를 데려가기 위해 사람들이 오는 것 자체가 너무 신기하고 우쭐하기도 하고 좋았죠.

Q. 결국 SKC로 입단을 결정했어요.
한국화장품으로 정해졌었는데, 정해일 코치님이 송도 출신이었던 것도 있었고요. 주위에서 ‘크려면 SKC로 가는 게 더 낫다’라는 말이 많았죠. 금액도 더 컸고요. 근데, 임영보 선생님의 스파르타식 훈련이 걱정은 됐었죠. 욕도 잘하시고 원-투 펀치도 강하신 분이었거든요. 하하. 그래도 심욱규 선생님하고도 적응을 잘했는데 뭐가 무섭겠냐고 생각하고 결정했죠.

Q. 그 무섭다는 임영보 선생님과는 어떻게 지내셨나요?
다른 선수들은 임영보 선생님한테 인사만 꾸벅하고 말을 못 붙이는데, 전 편하게 말을 했어요. 보통 선수촌 들어갔다 나오면 7~8개월 있다 와서 다른 사람들은 피하는데, 전 친근감 있게 선생님 무릎 위에서 V도 하면서 사진도 찍고 그랬죠. 주위에서 절 대단하게 여겼죠. 하하. 제가 지금도 붙임성이 좋잖아요?

Q. SKC에 입단한 첫해 정은순과 함께 신인상 공동 수상을 했습니다.
은순이는 어려서부터 워낙 관심을 받은 선수고, 전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선수였죠. 은순이는 성정아 언니나 최경희 언니 같은 쟁쟁한 선배들과 함께 뛰었고, 전 어리지만 득점을 책임져야 하는 상황에 있었어요. 이젠 내가 은순이와 같은 레벨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뿌듯했죠. 그 뒤로는 저도 인정을 받고 은순이와 라이벌 관계처럼 자꾸 붙여놓더라고요.

Q. 득점부터 리바운드까지 못하는 게 없었어요. 가장 자신 있던 플레이는 뭐였나요?
팀 구성 자체가 제가 득점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었어요. 인사이드에서 비비는 것과 돌파가 가장 자신 있었죠. 그땐 남자 고등학교 선수들과 연습경기를 많이 했었는데, 휘문고랑 연습경기도 많이 했거든요. (현)주엽이가 그러더라고요. 제가 돌파를 한 다음 오른손으로 쏘려다 왼손으로 바꿔 쏴서 남자인지 여자인지 몰랐다고요. 제가 탄력은 좋았던 것 같아요.

Q. ‘여자 현주엽’이라는 별명도 있었는데, 기억나는 별명 있으세요? 정말 많았잖아요.
정말 많았죠. 불곰, 핵탄두, 선머슴. 슈퍼오리, 오리궁둥이, 유진실 등 정말 많았어요. 제 슛 폼이 그렇게 이상한지 몰랐어요. 그래도 유진실이라는 별명이 가장 좋죠. 고(故) 최진실 씨가 인기가 많을 때였는데, 저도 코트에서 항상 웃고 그런다고 해서 진실이라는 별명을 붙여줬어요.

Q. 장거리 3점슛이 대단했어요. 거리는 상관없었을 정도였으니까요.
전 전형적인 4번(파워포워드)이었어요. 3점슛도 전혀 못 쐈고요. 고3 때 최경도 선생님이 3점슛을 가르쳐주러 내려왔다가 결국 포기했을 정도였으니까요. 3점슛은 SKC 입단하고, 대표팀에 들어가서 배웠어요. 고3말 신입생 때죠. 실업 1, 2년생 때는 외곽을 아예 못 쏘게 했었는데, 대표팀에 들어가면 3번(스몰포워드)을 해야 해서 3점슛도 넣어야 했거든요. 3년차가 되던 1992년도에 3점슛 5개를 넣고 35득점을 기록한 다음에야 임영보 선생님이 인정을 하셨죠. 그 뒤에 (정)선민이 들어오고 나서 전 자연스럽게 외곽으로 밀렸죠.

Q. 여자농구 역대 한 경기 최다득점 기록도 갖고 있습니다.
1995년도에 외환은행전이었죠. 전반에 35점을 넣었거든요. 감독님도 밀어주시고 선수들도 저한테 좀 몰아줬죠. 저도 욕심을 부렸고요. 그 전에 (김)영희 언니가 52점 기록을 갖고 있었는데, 제가 55점을 기록했죠. 그 뒤로는 쭉 내려갔죠. 워낙 오버페이스를 해서요. 그 뒤로는 절대 후배들에게 그런 짓 하지 말라고 얘기해요. 내 꼴 난다고요. 하하.

Q. 아직까지 그 기록이 깨지지 않고 있는데, 자부심도 많으시겠어요.
제가 13년 만에 기록을 깼고, 앞으로 누가 깰지는 모르겠어요. 그런 기록을 아직까지 갖고 있다는 것에는 자부심이 있죠.

Q. 실업팀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가 있다면요?
94-95 농구대잔치 결승전이죠. 1, 2차전을 모두 지고 3, 4, 5차전에서 역전 우승을 했었거든요. 1, 2차전을 20점, 25점차로 졌기 때문에 완전 포기했었죠. 3차전 경기 전날에 “경기 끝나고 동대문 시장 몇 시쯤 갈까?” 그런 얘기하고 있었거든요. 오히려 마음을 비웠던 것이 몸을 가볍게 했던 것 같아요. 4차전 전날에도 한번 이겼으면 됐다고 했으니까요. 또 이기니까 그 다음 5차전에서는 욕심이 생기더라고요. (김)지윤이랑 (정)선민이가 잘 해줬기 때문에 이길 수 있었죠.

Q. 그 당시 롤-모델로 삼았던 선수는 누구였나요?
어려서는 은순이었지만, 포지션 자체가 달랐기 때문에 플레이면에서 닮고 싶은 선수는 이강희 언니였어요. 언니가 농구를 너무 쉽게 하는 거예요. 저는 죽을힘을 다해 하는데도 결국은 못 닮은 것 같아요. 전 힘으로 하고 언니는 기교로 했으니까 절대 닮을 수가 없었죠.

Q. 갑작스럽게 SK증권 농구팀이 해체됐습니다.
그 해 결승전에서 우승을 했어요. 우승하던 날 상대선수 팔꿈치에 맞아 코뼈가 골절됐는데, 트레이너가 손가락으로 뼈를 대충 맞추고 뛰었어요. 그날 나이트 가서 놀고 다 놀고 아침에 일어나서 수술했는데, 신문에 ‘SKC 해체’라고 나와 있는 것을 처음 봤어요. 오보라고 생각했죠. 회사로 바로 전화를 했더니 진짜더라고요. 뼈까지 부러져가며 죽기 살기로 뛰어서 우승했는데, 그 결과물이 이건가란 생각이 들었죠. 이렇게 배신을 하는구나라는 생각에 1~2개월 방황을 했었어요.

Q. 드래프트를 거쳐서 다시 삼성생명으로 입단을 했는데요.
해체된 선수들 모아서 드래프트를 한 거였죠. 2월에 해체되고 4월에 입단했는데, 제가 삼성생명으로 가기로 됐다고 하더라고요. 집에서 전화로 통보를 받았죠. 삼성생명은 SKC와 라이벌이던 팀이었어요. 제가 쉽게 갈 수가 없었죠. 방황하고 있을 때 심욱규 선생님이 학교로 불러서 한 마디 하셨죠. “잔말하지 말고 들어가”라고요. 그래서 바로 들어갔죠.

Q. 우여곡절 끝에 들어간 삼성생명에서는 어땠나요?
많이 겉돌았어요. 우승을 했었는데, 우승을 해도 별 느낌 없이 허무했어요. 신세계와 결승이었는데, 같은 팀이었던 지윤이랑 선민이랑 부둥켜안고 서럽게 울었던 기억이 나요.


태극마크 그리고 WNBA 러브콜
1990년 유영주는 꿈에 그리던 태극마크를 달았다. 대표팀에서도 그의 활약은 눈부셨다.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에서 개최국 일본을 꺾고 금메달을 목에 걸었고, 1997년 방콕 아시아여자농구선수권대회에서 우승과 함께 최우수선수상과 득점왕 2관왕에 차지하며 국제대회에서도 진가를 드러냈다. 국제무대에서 통한 그에게 돌아온 것은 WNBA(美여자프로농구)의 러브콜이었다. 당시 WNBA에 대해 무지했던 그는 단번에 거절해 한국 1호 WNBA리거는 무산됐지만, 그의 높아진 위상을 알리기에는 충분했다.

Q. 대표팀에 처음 발탁된 것은 언제였나요?
1990년이었어요.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였죠. 상비군은 고3 때 들어갔고요. 최경희, 조문주 등 쟁쟁한 선배들이 많아서 태극마크라는 희열을 느끼기도 전에 가자마자 주전자를 열심히 날랐죠. 그래도 우리는 운이 좋은 세대에요. 막내인데도 불구하고 게임을 뛰었거든요. (전)주원이가 1991년에 들어왔는데, 각 팀에서 에이스급 선수로 인정을 해서 그런지 선배들도 인정을 해주고 그랬어요. 우리가 선발 출전을 했던 적도 있었고요.

Q. 1994년 아시안게임 금메달의 주역이기도 합니다.
일본과 결승전을 했는데, 예선에서 일본한테 일부러 져줬다고 해서 논란이 있었어요. 중국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진 게 아니냐는 얘기였죠. 지금도 얘기하지만 저희는 절대 그런 것 없었거든요. 더구나 일본인데요. 전반을 지고 라커룸에서 코치 선생님이 “너희들 ‘마루타’를 생각하고 들어가라”고 하면 바로 경기를 뒤집을 정도였는데, 어떻게 일부러 지겠어요. 그때 ‘마루타’에 대한 얘기가 많이 나올 때였거든요. 결승전에서도 정말 어렵게 이겼어요.

Q. 1997년 아시아여자선수권대회에서도 우승과 함께 MVP 수상 영예도 누렸습니다.
그 대회에서 MVP와 득점상을 받았죠. 그 당시 실업팀에서 6~7년 정도 뛰면 은퇴할 시기였거든요. 제가 6년차였는데 연습을 정말 열심히 했던 것 같아요. 역시 임영보 선생님이 가르치셨고요. 선생님이 우승하고 처음으로 “고맙다”고 한 마디 하셨을 정도니까 정말 열심히 한 거였죠. 그래서 기분이 더 좋았던 것 같아요.

 


Q. WNBA 도전을 해도 됐을 실력이었어요. 신체조건도 좋고요.
실제로 그 대회 마치고 WNBA에서 콜이 왔었어요. 그땐 마이클 조던에 대해서는 알지만, WNBA에 대해서는 금시초문이었던 시기거든요. 매니지먼트까지 만나서 직접 얘기도 들었죠. “너는 미국에서 충분히 통한다”고 하더라고요. 전 모르는 곳이니까 단호하게 거절을 했죠. 지금 생각하면 바보 같죠. 아쉽기도 하고요. 우물 안의 개구리였으니까요.

Q. 2001년 9월에 은퇴를 했습니다.
무릎관절염 때문에 2000년부터 재활을 하고 있는 상태였어요. 어떻게든지 재활해서 재기하려고 생각하고 있었죠. 2001년 여름리그 끝나고 다른 선수들은 휴가 갈 때 전 휴가를 반납하고 재활을 하겠다고 했었어요. 하지만 제 뜻이 받아지지 않았죠. 그래서 영예로운 은퇴를 못했어요. 그 부분은 아쉽고 서운한 면이 많았죠.

Q. 은퇴 후 지도자 인생을 걸었습니다. 국민은행에서 코치를 시작으로 WKBL 최초로 선수 출신 감독대행을 맡기도 했습니다.
은퇴 한 달 만이었어요. 최초였기 때문에 언론의 스포트라이트가 많았죠. 지금 생각하면 선수들이 조명을 받아야 하는데 제가 관심의 대상이 돼서 여자선수들은 싫어했을 것 같기도 해요. 하지만 그때만큼 열정을 갖고 한 적은 없었어요. 정말 순수하게 준비도 많이 하고요. 열정만큼 생각대로 되진 않았죠. 감독대행하면서 ‘감독자리가 명을 줄인다는 말이 사실이구나’라고 느꼈죠. 리더십의 중요성도 알 수 있었고요. 그 당시에는 정말 힘들고 고민도 많이 하고 그랬는데, 돈 주고 살 수 없는 경험을 한 것 같아요. (※ 유영주는 2019-2020시즌 창단한 여자프로농구 부산 BNK썸의 초대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Q. 지금껏 쉴 새 없이 달려왔던 농구인생을 돌아보면 어떤가요?
복 받은 거죠. 다시 태어나도 농구를 하고 싶어요. 농구만큼 매력적인 스포츠는 없거든요.

유영주는...
정은순과 함께 1990년대 한국여자농구를 이끈 유영주는 1971년 11월 23일 출생으로 인성여중·고를 거쳐 SK증권과 삼성생명에서 농구선수로 활약했다. 1990년부터 2000년까지 국가대표팀에서 뛰며 1994년 아시안게임 금메달과 1997년 아시아여자농구선수권대회 우승을 거머쥐며 최우수선수에 선정되기도 했다. 2001년 은퇴한 그는 KB국민은행 코치를 거쳐 2002년 여자선수 최초로 감독대행을 맡기도 했다. 1999년 쌍둥이 아들을 두고 있는 그는 SBS스포츠 해설위원을 거쳐 2019년부터 2021년까지 부산 BNK썸의 감독으로 활약했다.


※ 이 글은 JUMPBALL 스페셜 에디션「TEAM KOREA」에서 발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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