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미시간주, 어머니는 전라도 출신입니다”

김종수 칼럼니스트 / 기사승인 : 2022-05-17 02:3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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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수의 농구人터뷰(36)] 'KBL 강백호’ 이동준

 

 

KBL 역사에서 한국계 혼혈선수는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빼어난 기량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다른 문화권에서 온 새로운 가족이라는 점 더불어 이전 국내 선수들과 차별화되는 플레이 스타일 등으로 인해 한시대의 트랜드에 적지않은 영향을 끼쳤다는 평가다.


국내 대학을 다닌후 신인드래프트를 거쳐 프로무대에 발을 내딛은 아르헨티나 특급 김민수, 귀화혼혈 드래프트 출신 전태풍, 문태종‧문태형 형제, 이승준, 원하준, 박태양 등이 대표적이다. 각각의 개성도 뚜렷해 입성 당시부터 적지않은 관심을 받았다. 문태종은 전성기가 지나서왔음에도 불구하고 어지간한 외국인선수 이상급 기량을 선보였으며 전태풍은 실력에 더해 특유의 캐릭터까지 관심을 끌며 인기스타로 올라섰다. 탄력넘치는 운동능력을 자랑했던 이승준은 리그에서의 활약은 기대에 미치지못했으나 국가대표로 좋은 모습을 보이며 ‘국제용’이라는 명성을 얻기도 했다.


여기서 빠질 수 없는 선수가 한명 더 있다. 귀화전 다니엘 산드린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노머시’ 이동준(42‧200cm)이다. 이승준의 친동생으로도 유명했던 그는 형과 더불어 잘생긴 외모로도 화제를 모았는데 그로인해 많은 여성 팬들의 관심을 받기도 했다. 형제이기는 했지만 국내 무대에서 뛰게된 방식은 다르다. 혼혈드래프트 출신 형과 달리 연세대에 편입해서 대학과정을 거친후 2007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 2순위로 KBL 무대에 입성했다.


당시 신인드래프트는 역대급 풍년으로 불린다. 김태술, 양희종, 박상오, 신명호, 이광재, 김영환, 함지훈 등 쟁쟁한 선수들이 쏟아져나왔다. 그런 가운데 2순위로 지명받았을 만큼 이동준의 파워와 운동능력은 높은 평가를 받았다. 아쉽게도 기대치에는 다소 미치지 못했던 것은 사실이다.


이동준은 정규리그 397경기에서 경기당 24분 40초를 소화하며 평균 10.5득점, 4.5리바운드, 1.1어시스트, 0.6스틸, 0.5블록슛을 기록했다. 정규리그 2순위 출신에 부끄럽지않은 충분히 좋은 기록이다. 하지만 농구관계자와 팬들 사이에서는 아쉽다는 평가가 많았다. 다름아닌 이동준의 성적이기 때문이다. 엄청난 영향력으로 팀을 우승시키고 국가대표팀에서도 활약하는 모습이 당초 기대치였다.


미국에서 농구한 선수답지않게(?) 이동준은 화려한 스타일보다는 건실한 플레이를 보여줬다. 좋은 피지컬과 운동능력을 활용해 몸을 아끼지 않는 허슬 플레이어로 활약했다. 김민수, 이승준 등이 몸싸움을 기피한다는 지적을 받았던 것에 비해 이동준은 컷인, 박스아웃, 수비 등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워낙 열심히 뛰어다니는지라 받아먹기에도 능했고 슈팅력도 나쁘지않았다. 시야, 테크닉 등에서는 높은 평가를 받지 못했으나 활동량이 좋고 몸을 사리지않는 에너지 레벨이 인상적이었으며 그로인해 팬들 사이에서 ‘KBL 강백호’로 불렸다.


 



“아들 이름의 백호요. 슬램덩크의 그 강백호 영향 받은 것 맞습니다”

 

Q.어떻게 지내세요?
뭐, 그냥, 흐흐흐…, 사랑하는 농구와 함께 하고 있습니다. 형(이승준)이랑 비선출리그하고 있고 3x3농구도 즐기고 있어요. 한솔레미콘에 속해있는데 이번 주말에 형이 참가하지 못할것 같아서 오랜만에 나가려고 몸도 만들면서 준비중입니다. 비선출리그같은 경우 완전한 오픈형태에요. 간혹보면 동호회 농구가 너무 나뉘어져 있다는 생각이 들때가 있어요. 우리는 그런 것 따지지 않아요. 한국인이건 미국인이건 몽골사람이건간에 농구에 관심만 있다면 즐겁게 함께하자는 주의에요. 잘하지 않아도 되요. 농구를 진심으로 사랑할 준비만 되어 있으면 여기있는 모두가 반갑게 맞아줄거에요. 한나라의 농구가 발전하려면 얼마나 대중화가 되어있느냐도 중요한 요소같은데 그 밑바탕은 ‘즐긴다?’는 마인드라고 생각합니다.

Q.국제농구연맹(FIBA) 3x3 아시아컵 2022 국가대표 선발 트라이아웃에 참가하는 것으로 알고있어요.(인터뷰는 트라이아웃이 열리기 전에 이뤄졌다)
예, 뭐, 지난번에도 참가했지만 좋은 경험을 쌓았던지라 이번에도 그때의 즐거움을 느껴보고싶어요. 3x3농구의 최고 매력은 오픈성같아요. 선수 출신이든 아니든 가리지 않아요. 농구만 좋아하면 다 함께 즐길 수 있어요. 물론 대회 등에 출전하려면 어느 정도 실력이 있어야하겠지만 주변의 사례만 봐도 즐기면서 하다보니까 실력 등이 금세 늘어가는 사람들이 많더라고요. 일반 농구경기와 다르게 짧고 굵은 색깔도 마음에 들고요. 같은 관심사를 공유하다보니 낯선 사람끼리도 쉽게 친해진다는 장점도 있는 것 같아요.

Q.아들 이름은 이백호, 딸 이름은 이미호인데 웬지 만화 주인공같은 느낌도 들어요. 이름을 짓는데 만화 캐릭터가 영향을 끼쳤을까요?
맞아요. 만화 ‘슬램덩크’ 주인공 이름이 강백호잖아요. 사실 한국 처음 왔을 때는 그 만화를 안봤던지라 강백호가 누군지 몰랐어요. 근데, 저 농구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플레이 스타일이 강백호를 닮았다’고 하더라고요. 궁금했어요. 도대체 강백호가 누군데…, 그래서 강백호를 찾아보니까 딱 제 스타일인거에요. 그다음부터 백호라는 이름이 너무 친근하고 마음에 들었어요. 그래서 아들을 낳게되자마자 제가 제일 좋아하는 백호라는 이름을 짓게 됐습니다. 딸 역시도 같은 ‘호’자 돌림을 쓰게 되다보니 아름다울 미를 추가해서 미호가 된거죠. 뜻만보면 ‘아름다운 호랑이’라는 점에서 딸 이름으로 갸우뚱거려 질수도 있겠지만 전체적인 어감도 그렇고 나쁘지 않은 것 같아요. 일단 부르기 좋잖아요. 입에 척척 붙고요.(웃음)


 



“전라북도 정읍의 시골 초가집, 캠핑 온 기분이었습니다”

Q.형을 봐도 알 수 있듯이 어릴 때부터 신체조건은 상당히 좋았을 듯 싶어요.

예 뭐, 우리 어머니만 빼고 다들 키는 좋은 편이었어요. 어머니는 163cm 정도? 아버님이 키가 크셔서 저희 형제도 그 부분을 물려받은 듯 싶어요. 사실 저같은 경우는 어릴 때 키가 크다는 생각은 안하고 살았어요. 형이랑 같이 붙어다니다보니 상대적으로 작은 부분이 스스로 도드라지게 느껴졌던 것 같아요.

Q.아버지는 주한미군 헌병이었고 어머니는 미국 워싱턴주 출신 한국인으로 알고 있어요.
출신은 고향을 말하는 것이겠죠? 그렇다면 어머니는 출신지가 따로 있어요. 전라북도 정읍 출신이세요. 아버지가 군인 신분으로 한국에 오셨을 때 어머니를 만나게 되었어요. 결혼하고 미국으로 가신 것이죠.

Q.어머니로 인해서 어릴 때부터 한국어, 한국음식, 한국문화 등은 어느정도 익숙했을 것 같아요.
어머니가 한국분이시다보니까 음식은 한국 음식을 많이 먹었지만 언어는 영어만 썼어요. 때문에 한국에 올 때만 해도 한국어를 전혀 몰랐어요. 지금 한국어를 어느 정도 할 수 있게 된 것은 따로 공부를 해서 그런거에요. 주변에서는 한국어를 빨리 배웠다고 하지만, 글쎄요…, 한국에 온지도 벌써 17년째에요. 요즘 텔레비전을 보니까 어떤 외국인은 한국어를 6개월만에 마스터했다고하고, 되게 속성으로 배우는 경우가 더러있더라고요.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솔직히 지금도 한국어 쉽지않아요. 아직도 모르는 단어나 말도 꽤 많아요. 한국어하면 (전)태풍이도 많이 언급되는데, 태풍이도 대단하고 형(이승준)도 대단해요. 저같은 경우 연세대가서 9개월 정도는 한국어를 공부하고 배울 기회가 있었거든요. 하지만 태풍이하고 형은 곧바로 KBL로가서 그럴 기회 조차 없었어요. 그런데 잘하잖아요. 칭찬해주고 싶어요. 우리 어릴 적에 어머님은 ‘그냥 한국에 가서 살다보면 자연스럽게 한국어 늘겠지’라고 생각하셨어요. 하지만 그것은 아니에요. 한국에도 외국인친구들 많아요. 그들과 어울리면 영어 많이써요. 꼭 한국에서 오래있다고 한국어 잘하는 것 아니에요. 공부해야해요. 그래야 늘어요.

 



Q.미국에 있던 시절 한국에 대한 이미지는 어땠나요? 또 직접 와서보니 어떤 느낌이셨을까요?
어릴 적에 한국에 온적이 있었어요. 그때는 캠핑 느낌을 받았어요. 어머니 고향이 전라북도 정읍인데 거기서도 엄청 시골이었어요. 시내에서도 한참 더 들어가야 하는…. 외갓집이 초가집이었어요. 아궁이에서 불을 때서 밥을 하고 화장실도 완전 푸세식, 거기에 마당에는 돼지, 개 등이 있었어요. 풀밭을 뛰어다니면서 개구리 잡으러 다니고 그랬던 기억이 생생해요. 너무 재미있었어요. 외갓집만 그런게 아니라 아버지 고향도 완전 시골이었어요. 미시간주 북쪽인데 완전 산속이에요. 근처에 거의 나무 밖에 안보이는.

 

“브랜드 로이, 자말 크로포드, 네이트 로빈슨 등 다 같은 지역 또래들이었어요”

Q.농구는 어떤 계기로 시작하게 되었나요?

아버지가 경찰관이었는데 경찰관 리그에서 농구를 즐기셨어요. 미국은 스포츠가 되게 대중화되어있잖아요. 경찰관 리그, 소방관 리그 등 각 직군별로 다양하게 있어요. 아버지가 키도 크고 농구도 잘하셨어요. 어린시절 그런 아버지는 영웅처럼 느껴졌어요. 아버지를 닮고 싶었고 그래서 자연스레 농구에 흥미가 갔던 듯 싶어요. 그런 이유로 농구공을 잡았고 그때부터 아장아장 경기를 했죠.(웃음) 한국은 엘리트 스포츠라는게 있잖아요. 미국은 딱히 그런 것 없어요. 동네 리그로 시작해 즐기면서 나아가는거죠. 각 지역별로 선발팀이라는 것은 있어요. 리그가 워낙 많으니까요. 키도 크고 하니까 초등학교 6학년때 선발팀에 처음 뽑혔어요. 전국을 여행하면서 경기도 가지고 재미있었어요. 그런 곳에서 뛰면 대학 스카우터들도 대회에 와서 보고 그래요. 다만 한국의 엘리트 시스템하고는 달라요. 실력이 있으면 선발팀에 뽑히지만 딱히 나누고 그런 것은 없어요. 일반 학생들처럼 똑같이 공부하고 놀고, 하고 싶은 것 다해요.

Q.처음에 포지션은 어떻게 되었나요?
제 나이 또래 팀에서는 빅맨이었어요. 하지만 형이 경기하는 곳으로 가면 포인트가드를 봤어요. 또래 중에서는 컸지만 거기서는 신체조건은 물론 힘이나 그런 것에서도 많이 딸렸어요. 왜냐하면 어릴 때는 2살 차이도 크잖아요. 그렇게 포인트가드로 익숙해지다 보니까 나중에는 장신 1번으로, 그냥 동네에서 좀 유명했어요.(웃음)

Q.미국 현지에는 학창 시절부터 신체조건, 운동능력 등에서 괴물같은 선수들도 많았을 것 같아요.
많아요. 좋은 체격, 재능을 갖춘 선수들이 어릴 때부터 농구를 즐기거든요. 저도 주변에 잘하는 선수들이 꽤 많았어요. 브랜드 로이, 자말 크로포드, 네이트 로빈슨 등 다 같은 지역 또래였어요. 어릴 때부터 함께 농구하면서 자랐죠. 본래부터 아는 사이도 있고 선발대회가서 친해진 케이스도 있어요. 농구라는 공통분모가 있으니 금방금방 친해져요. 로이는 원래 잘했고 크로포드는 그냥 또래 중에서 최고였어요. 하지만 로빈슨같은 경우는 고등학교 때까지만해도 크게 눈에 띄지않았어요. 근데 대학교 들어가서 실력이 확 늘었고 주목을 받게된 케이스죠.

Q.NBA는 모든 농구하는 이들의 선망의 무대잖아요. NBA진출에 대한 꿈은 있으셨나요?
어릴 때야 당연히 있었죠. 농구하는 사람들에게는 꿈의 무대잖아요. 하지만 조금 시간이 지나니까 알겠더라고요. 원한다고 무조건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잖아요. 더불어 현실적인 문제도 있었어요. 특히 대학, 미국은 학비가 비싸요. 그때는 장학금 노리려고 고등학교때 열심히 했어요. 그런 가운데 먼저 농구했던 선배들의 행보도 자연스레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선배 중에서 해외에서 용병으로 뛰는 케이스가 꽤 많았어요. 그것을 보면서 ‘아, 나도 도전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품게 됐죠.

Q.2004년 유럽으로 건너가 룩셈부르크 리그, 독일 3부리그 등 다양한 곳에서 뛰다가 이후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 은행원 생활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선수생활은 포기했던 건가요?
아 그것보다…, 돈 좀 벌고 싶었죠. 좀전에도 얘기했지만 현실을 무시 할 수 없잖아요. 유럽에서 농구를 재미있게는 했는데 당장 돈은 되지 않았어요. 세미프로 형식이라 자리를 제대로 잡으려면 시간이 꽤 필요했어요. 한해 한해 열심히해서 계속해서 더 좋은 리그로 가는 방식이었는데 그렇게 오래 버티기에는 여유가 없었어요. 버틴다고 확실하게 보장되는 것도 없고요. 그때 할아버지가 이탈리아분이시라 저는 이중국적이 가능한 상태였어요. 좋은 조건이기는 했지만 그렇게하려면 이탈리아에서 3년을 살아야 했어요. 고민좀 하다가 포기했어요. 그리고 대학에서 공부한게 있어서 전공을 살려서 은행원 생활을 했죠. 하지만 잘 안맞더라고요. 1년 정도 다니다가 이건 아니다싶어서 그만두게 됐죠. 

 

 



“한국 생활하면서 얻은 가장 큰 소득은 어머니를 좀 더 깊게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Q.적지 않은 나이에 한국에 들어와 대학에 입학해 다시 농구공을 잡았습니다.

은행원 생활을 했다고 농구를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었어요. 승준이형이랑 계속 함께 농구를 했어요. 사람 인생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요. 준비는 하고 있어야죠. 그렇지 않으면 오는 기회도 놓칠 수 있으니까요. 그러다가 우연한 기회에 하승진의 에이전트를 만났어요. 고 코비 브라이언트가 속해있던 에이전시 사람이었어요. 그분이 형에게 ‘한국에 가면 어떻겠냐?’라고 의견을 냈죠. 하지만 형은 당시 NBA에 도전하고자 준비하고 있는 상황이었어요. 어머니의 나라이기도해서 친숙한 느낌은 들었겠지만 그렇다고 당장 NBA꿈을 포기하기는 아쉬웠겠죠. 대신 형이 저를 에이전트에게 추천했어요. 그래서 한국에 가게됐습니다.

Q.어머니의 나라이기도해서 적응은 빨리 됐을 듯 싶어요.
그렇지도 않았어요. 일단 느낌적으로는 친숙했죠. 어머니의 나라이고 어쨌거나 저에게도 절반의 피가 흐르는 곳이잖아요. 하지만 문화나 사고 등 기타 등등 적응하기 쉽지 않더라고요. 오히려 아무 관련없는 독일이 적응은 쉬웠어요. 아무래도 미국과 독일보다는 미국과 한국이 여러 가지면에서 더 차이가 있을테니까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적응해갔어요. 이제는 이곳이 저에게 너무나 익숙하고 편해요. 무엇보다 큰 소득은 어머니를 좀 더 깊이 이해할수 있게 된 것이에요. 미국에 있을 때는 사고방식 등에서 어머니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어요. 아무래도 미국에서 그곳 스타일로 자라왔던지라 여전히 한국식 정서가 있는 어머니와는 차이가 있었겠죠. 하지만 한국에서 살고 이런저런 것을 새로이 배우게 되면서 이제는 ‘아, 그때는 어머니가 이래서 그랬구나’ 등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훨씬 많아졌어요. 어머니도 그렇고, 외할머니도 그렇구요. 그게 최고의 선물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Q.시험을 거쳐 귀화를 했는데요. 시험은 어렵지 않았나요?
미리 공부하고 준비하는 과정을 거쳤던지라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어요. 지금은 오래되서 기억이 잘나지 않는데 한국 속담 질문도 있었던 것 같고, 나름 재미있었습니다. 다만 어려웠던 것은 아니지만 조금 민망한 것은 있었어요. 여러사람들 앞에서 애국가 불렀던 것? 제가 좀 쑥스러움도 타고 그러는데 혼자 사람들 있는데서 그렇게 노래를 부르려니까 살짝 얼굴이 화끈거리기도 하더라고요.(웃음) 그 정도 빼고는 뭐, 다 할만 했습니다. 이후에 귀화시험을 거칠 분들에게도 말씀드리고 싶어요. 귀화시험 크게 어렵지않아요. 다만 미리 준비를 해야된다는 전제를 붙여서요.

 




“저는 포인트가드였어요. 한국에 와서 빅맨 플레이를 배웠죠”

Q.2007 KBL 신인 드래프트에서 전체 2순위로 지명됐어요. 1순위가 되지 못한 것이 아쉽지는 않았나요?

음…, 솔직히 말하면 그때는 조금 아쉬웠어요. 미국 마인드라서 그런지 몰라도 ‘내가 그래도 신체조건이나 운동능력도 좋고 개인기도 뛰어난데 왜 저 선수가 나보다 먼저 뽑혔지?’ 하는 생각도 들었던 것이 사실이에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나니까 알 수 있었어요. 김태술은 당연히 1순위로 뽑힐만한 선수였습니다. KBL은 특히나 조직력을 중시해요. 거기에 맞는 패싱마스터는 정말 훌륭한 자산이 될 수 있죠. 특유의 센스는 물론 마인드적인 부분까지, 김태술은 팀을 이기게 만들 수 있는 선수에요. 제가 당시에는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네가 뭐가 잘나서 김태술을 이길 수 있었다고 생각했냐’ 그렇게 보지마시고 ‘당시 이동준은 미국식 지명방식에 익숙했구나’하고 여겨주시면 감사할 것 같아요.

Q.아무래도 한국식 농구가 낯선 부분도 있었겠어요.
맞아요. 낯설고 어려웠습니다. 제가 대학 때도 그랬고 외국인선수 생활 할 때도 해왔던 플레이 스타일이 있는데 이곳에서는 그렇게하면 안되는지라 적응 부분에서 난관이 좀 있었어요. 미국에서는 개인기 등이 중요하고 고집스럽게 일대일로 승부를 볼 때도 많았습니다. 외국인선수로 뛸 때는 더했어요. 이것저것 다해야되는지라 중심에 서서 보다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했죠. 반면 한국에서는 그렇게 하면 안됐습니다. 개인기로 밀어붙이다 실패하면 이기적이고 BQ가 떨어지는 선수 취급받아요. 무리하지말고 적재적소에서 잘 빼주고 서로 양보하는 등 좀더 이타적으로 해야되요. 물론 그런 방식 또한 팀의 승리를 가져오는데 있어서는 효과적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런 식의 농구에 익숙치 않았던지라 좀처럼 적응이 되지 않더라고요. 노력은 했지만 의식하고 있지 않을 때는 저한테 익숙한 움직임이 먼저 나오게되요. 어릴 때부터 몸에 배인 스타일이라는 것이 하루아침에 바뀌지 않잖아요. 형만해도 그래요. 형이 국가대표팀에서는 정말 잘했는데 소속팀에서는 그만큼 하지 못했다고 원성을 좀 들었어요. 그게 국가대표팀에서는 마음껏 풀어줘서 해결사 역할을 하면서 자신의 농구를 했던 것인데, 아무래도 소속팀으로 돌아가서는 외국인선수도 있고 짜여진 틀 안에서 움직여야 하니까 족쇄가 되지않았나 싶기도해요.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맞춰서 잘했다면 베스트였겠지만 플레이 스타일적인 측면에서의 차이도 있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어요. 어쨌거나 형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많이 몰랐죠. 그리고 많이 배웠습니다. 선수 시절 저의 플레이가 성에 차지않았던 팬분들도 계시겠지만 나름대로는 많이 노력했어요. 더불어 당시 배운 것들은 지금도 저에게 큰 자신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Q.상대하기 어려웠던 선수로는 누가 있었나요?
많았죠. 서장훈형, 김주성형 그리고 (함)지훈이까지…, 각자 기량은 말할 것도 없고 플레이 스타일도 다르잖아요. 많이 당하면서 또 많이 배워갔던 것 같아요.(웃음) 장훈이형은 힘도 좋고 일대일도 빼어난 선수에요. 특히 워낙 슛을 많이 던지고 슛도 정확하잖아요. 기록에 대한 열정이 대단하고 그렇게해서 개인기록도 많이 쌓은 선수죠. 주성이형하고 지훈이는 프랜차이즈 스타로서 본인의 팀을 최고로 이끈 선수들이라고 생각합니다. 본인도 뛰어나지만 동료를 살리는 팀 플레이도 좋고 후배들을 살뜰히 챙기고 이끄는 좋은 리더가 아닐까 싶어요. 주성이형은 키도 큰데 정말 빨라요. 그 키로 그렇게 잘 달리면 정말 막기 힘들죠. 거기다 궂은 일을 잘하고 개인 욕심보다는 팀을 위한 플레이를 하는지라 그로인해 원주가 강한 팀이 되지 않았나 싶어요. 존경할 만한 선수입니다. 지훈이같은 경우는 주성이형처럼 빠르고 높이뛰는 스타일은 아닌데 힘과 기술이 정말 뛰어나요. 같이 몸싸움을 하다보면 어느샌가 돌아서서 득점을 해버리거든요. 농구 머리가 정말 좋은 선수인 듯 싶어요.

Q.투지도 대단했지만 승부욕 때문이었는지 나름 다혈질 성향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납니다.
그게, 하하핫…, 미국에서였다면 조금 덜했지 싶어요. 화를 내려고 냈던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서 도저히 이해가 안갈 때가 있었습니다. 머릿속에서 받아들여지지가 않는거에요. 어느 정도 납득이 가야 마음이 정리가 되는데, ‘이게 뭐지?’싶은 상황이 쌓이게되자 저도 모르게 욱했던 부분도 있었어요. 물론 잘했다는 것은 아닙니다. 참았어야 되는데 혹은 당장 이해가 되지않아도 이후에 생각할 부분도 있었는데 하는 후회도 들어요.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좀 민망합니다.(웃음)

Q.형과는 플레이 스타일이 서로 달랐던 것 같아요.
앞서도 얘기했지만 저는 미국에서 주로 포인트 가드 포지션을 봤어요. 어릴 적에 잠깐 경험하기는 했지만 사실상 빅맨의 플레이를 잘 몰랐어요. 하지만 한국에서는 빅맨을 요구하더라고요. 키크고 몸좋으니까 그랬던 것 같은데 저는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였어요. 아니 사실상 완전히 낯선 포지션이죠. 당황스러웠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포스트업 등 골밑 플레이도 거의 몰랐다가 한국와서 배웠습니다. 적지않은 나이에 백지상태에서 새로 시작한거죠. 귀화시험까지봐서 한국에 왔는데 선택의 여지가 없잖아요. 시키는데로 했어요. 그런 점에서는 형도 어려웠을거에요. 형도 빅맨하고는 거리가 먼 스타일이에요. 열심히 뛰어다니면서 3점슛 던지고 슬램덩크 찍고…, 3&D 플레이어에 가까웠죠. 그래도 저보다는 덜했을거에요. 저는 아예 완전히 다른 환경에서 새로 시작해야 했으니까요.

 

 

 



Q.가드를 보았던 선수가 빅맨을 해야하는 실정에도 아쉬움이 있었겠어요?
아쉬움은 있죠. 미국에서는 포지션을 신장으로 나누고 그러지는 않아요. 완전히 압도적으로 커버리면 모르겠지만 어지간하면 적성 등에 맞추죠. 신장을 떠나 본인이 가장 잘하는 방식으로 플레이를 해야 경기가 더 잘되지 않겠어요? 하지만 한국은 달라요. 키크면 빅맨시켜요. 아마 미국무대에서 활약중인 이현중 선수도 국내에 남아있었으면 누군가는 빅맨을 권했을지도 몰라요. 물론 이해하는 부분도 있어요. 가드는 수효가 많지만 빅맨은 적잖아요. 빅맨을 맡을 사이즈를 갖춘 선수가 많이 부족할거에요. 모든 선수가 슛만 쏠 수는 없잖아요. 그럼 리바운드는 누가 하고, 골밑수비는 누가 해요. 이건 국내 농구계의 특수성도 있는 부분이니까 뭐가 옳다 그르다를 논하기 힘든 부분같아요. 사이즈 좋은 빅맨 자원이 많으면 그런 흐름으로 가지않았겠죠.

Q.NBA도 종종 보시나요? 올 시즌에는 어떤 팀이 우승할 것 같은지 예상 한번 해주세요.
맨날맨날 보기는 해요. 하지만 와~ 이번 시즌은 정말 예측하기 힘든 것 같아요. 골든스테이트는 노련한 베테랑도 많고 우승 경험도 여러번 있어서 큰 경기에 강한 팀인 것은 맞아요. 하지만 올 시즌에는 기복이 심한 것 같아요. 어디로 튈지 모르는 느낌? 피닉스는 정말 안타까워요. 크리스 폴은 정말 최고의 가드에요. 플레이를 보고 있노라면 최고라는 말밖에 안나와요. 하지만 폴은 너무 지쳤어요. 결국 체력적인 부분이 발목을 잡혀서 댈러스에 당한 듯 싶어요. 물론 돈치치가 너무 잘한 것도 있지만요. 동부같은 경우 개인적으로 의외였어요. 마이애미하고 밀워키가 파이널 진출을 다투고 최종적으로 밀워키가 우승할 것으로 예상했었거든요. 완전히 빗나갔어요. 그래서 이제는 모르겠어요. 어디가 우승해도 이상하지 않을 대진표에요.

Q.향후 계획은 어떻게 되실까요? 농구교실 등을 통해서 이른바 아메리칸 스타일로 꿈나무 등을 키우셔도 좋을 것 같은데요.
감사합니다.(웃음) 하지만 당장은 우리 아이들 잘 키우는 것 외에는 다른 생각은 없어요. 농구는 여전히 사랑해요. 그리고 제가 할 수 있는 것이 있으면 노력하고 싶고요. 그렇지않아도 승준이형이랑 국제학교에서 종종 아이들을 비주기적으로 가르치기도해요. 아메리칸 스타일 말씀하시는데 이제는 크게 의미가 없지 않을까 싶어요. 예전하고 지금은 국내 농구계도 분위기가 많이 달라진 듯 싶어요. 저 처음 왔을때만 해도 감독님들께서 ‘하지마, 하지만, 이것 하지마’ 그런 소리 엄청 많이 했어요. 계속 듣다보니까 자신감이 확 떨어졌어요. 지금은 다르잖아요. 소리지르는 것보다 다독여주는 분들이 더 많아진 것 같고, 전체적인 분위기가 좀 더 자유스러워졌다고 할까요. 허훈이나 김선형 등을 보면 즐겁게 농구하는 것 같아서 너무 보기좋아요. 그런 환경 속에서 농구한 선수들이 지도자를 하면 해피한 흐름이 이어지지 않을까 생각해요.

Q.마지막으로 여전히 농구인 이동준을 기억하고 응원해주는 팬들에게 인사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하하핫…, 저는 이런게 참 민망합니다. 그래도 팬 분들에게 드리는 인사는 빠지면 안되겠죠. 제가 은퇴한지 7~8년 정도 됐습니다. 그래도 잊지않고 기억해주시는 팬 분들께는 너무너무 감사한 마음 뿐입니다. 농구도 즐기면서 하고있고 우리 아들 딸에게도 좋은 아빠가 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요즘 한국 농구가 더 발전하고 인기도 좋아지는 분위기같아요. 많이 관심가져주시고 농구장도 찾아가서 응원부탁드려요.

#글_김종수 칼럼니스트

​​#사진_본인제공, KBL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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