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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NBA 옛날 옛적에- 셀틱 왕조에 대항했던 백인 군단
최연길
기사작성일 : 2018-04-04 03:15

[점프볼=최연길 칼럼니스트(MBC 스포츠플러스 해설위원)]NBA 역사상 최다 우승팀인 보스턴 셀틱스는 16개의 우승트로피를 수집하기까지 셀 수 없이 많은 도전을 받아왔다. 필라델피아 세븐티 식서스와 LA 레이커스는 이들의 대표적인 라이벌이었지만, 초창기 세인트루이스 호크스도 빼놓을 수 없는 강적이었다.

 

애틀랜타 호크스의 전신인 세인트루이스 호크스는 NBA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전통의 구단 중 하나다. 긴 역사에 비해 우승은 단 한 번(1958년)뿐이지만, ‘셀틱 왕조’를 상대로 거둔 우승이었기에 의미가 깊다. 또 이들은 파이널에서 네 차례나 ‘셀틱 왕조’와 맞서기도 했다.  또한 1958년 세인트루이스 호크스는 팀원 전원이 백인이었던 NBA 역사상 마지막 팀으로 기록되고 있다.

 

▲ 호크스 구단의 시작

 

 

애틀랜타 호크스 구단의 시작은 1946년이었다. 당시는 연고지가 뉴욕주(州) 버팔로시(市)였고 팀명은 버팔로 바이슨스였다. 버팔로는 NBL(National Basketball League)에 가입했다. 당시 버팔로는 파격적인 구단이었다. 인종차별이 만연했던 당시 버팔로는 할렘 르네상스의 전설적인 선수 윌리엄 ‘팝(Pop)’ 게이츠와 윌리엄 ‘달리(Dolly)’ 킹을 영입했다. NBL은 훗날 BAA에 합병이 되었는데 재키 로빈슨이 MLB의 브루클린 다저스에 데뷔한 것이 1947년 4월 15일이었으니, 이 보다 오히려 더 빨랐다고 볼 수 있다. (물론 NBL의 톨레도 짐 화이트 쉐보레스와 시카고 스터드베이커스는 1942-1943시즌 흑인 선수들을 기용한 것으로 알려지기도 한다.)

 

1946년 11월 8일, 버팔로는 시라큐스 내셔널스와의 개막전에서 50-39로 이기며 데뷔전을 승리로 장식했다. 하지만 그 시기 대부분의 프로 농구단들처럼 버팔로도 재정적인 어려움에 직면하게 된다. 당시 버팔로의 홈구장은 버팔로 메모리얼 오디토리엄으로 아이스하키 경기장으로 사용할 때 12,280명을 수용할 수 있었고 농구 경기를 위해서는 2,000석 이상이 추가되는 대규모 경기장이었다. 버팔로가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격지 않으려면 경기당 최소 3,600명 이상이 와야 했다. 하지만 버팔로의 평균 관중은 1,000명이 채 되지 않았다.

 

결국 창단한 지 불과 38일 만인 12월 25일, 버팔로 단장이던 리오 페리스는 연고지 이전을 발표했다. 새로운 연고지는 트라이시티스라 불리는 곳이었다. 트라이시티(Tri-Cities)는 일리노이의 멀린과 락 아일랜드 그리고 아이오와의 데븐포트 등 인접한 세 도시를 묶어서 일컫는 명칭이었다. 또한 팀명도 바이슨스에서 블랙호크스로 바뀌었다. 홈구장은 멀린에 위치한 6,000석 규모의 와튼 필드 하우스였다. 연고지를 바꾼 블랙호크스는 1949년 NBL MVP 돈 오튼과 게이츠를 앞세워 나름 선전하며 생존에 성공했다.

 

그리고 1949년 NBL보다 후발 주자였던 BAA(Basketball Association of Amercia)가 NBL을 흡수·합병하며 NBA(National Basketball Association)으로 재출범할 때 블랙호크스는 첫 17개 구단 중 하나로 포함되며 NBA의 원년 구단으로 등록됐다.

 


▲ 첫 번째 왕조가 될 기회를 놓쳤다?

 

많은 사람들은 세인트루이스 호크스하면 빌 러셀을 드래프트해서 보스턴 셀틱스에 트레이드로 넘겨준 바보 같은 구단이라고 생각한다. 러셀이 보스턴에서 13시즌을 뛰며 11번 우승을 이끌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빌 러셀을 놓친 세인트루이스를 마치 1984년 드래프트에서 2순위 지명권을 가지고도 마이클 조던을 거르고 샘 부이를 지명한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와 비슷하다고 여긴다.

 

그런데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더 흥미로운 이야기가 많다.

 

1949년 NBA에 가입한 트라이시티스 블랙호크스의 초대 감독은 1946년부터 1949년까지 BAA의 워싱턴 캐피톨스를 이끌었던 레드 아워백이었다. 그렇다. 바로 보스턴 셀틱스 왕조를 만든 그 명장이다. 아워백은 1949년 워싱턴을 NBA 월드 챔피언십 시리즈(현 NBA 파이널)로 이끌었지만, 그 시기 NBA를 지배했던 미니애폴리스 레이커스에게 2승 4패로 무너지며 준우승에 머물렀다.

 

그 다음 시즌이었던 1949-1950시즌에도 아워백의 성적은 나름대로 괜찮았다. 한때 7승 19패까지 추락했지만 시즌 중반부터 살아나며 점점 승률 5할에 근접했다. 하지만 아워백은 구단주인 벤 커너와 갈등이 심해졌고 결국 시즌 막판 28승 29패를 기록한 상황에서 경질되었다. 후임으로 로저 포터가 부임한 후 팀 성적이 1승 6패에 그쳤다는 점을 감안하면 아워백의 성적은 결코 나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서부 지구 3위를 차지한 트라이시티스는 플레이오프에 올랐고 서부 지구 준결승에서 앤더슨 패커스에게 1승 2패로 패했다.

 

구단주와의 갈등으로 팀을 나온 아워백은 1950년, 보스턴 셀틱스의 감독이 된다. 그리고는 왕조의 틀을 마련하기 시작한다.

 

반대로 블랙호크스는 운이 따르지 않았다. 1950년 NBA 드래프트에서도 아쉬운 선택이 이어졌다. 1950년 드래프트는 초창기 NBA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었던 이벤트였다. ‘명예의 전당’에 입성한 폴 아리진, 밥 쿠지, 조지 야틀리, 빌 샤먼 등을 배출했기 때문이다. 또한 1950년 드래프트는 인종의 벽이 허물어진 드래프트기도 했다. 1950년 드래프트에서 필라델피아 워리어스는 빌라노바 대학 출신의 ‘득점기계’ 폴 아리진을 지역 연고 드래프트로 선점했다. 전체 1순위 지명권을 가지고 있던 보스턴 셀틱스의 아워백 감독은 보울링 그린 대학의 찰리 셰어(211cm)라는 센터를 뽑았다. 이어 2순위 지명권을 갖고 있던 볼티모어 불리츠는 위스컨신 대학의 돈 레펠트를 선발했다. 당시 블랙호크스는 3순위 지명권을 가지고 있었다. 블랙호크스의 구단주 커너는 1947년 홀리크로스 대학을 NCAA 토너먼트 우승으로 이끌었고 3년 연속 올아메리칸에 선정된 명가드 밥 쿠지(185cm)를 선택했다. 그렇다. 보스턴 셀틱스를 우승으로 이끈 전설적인 포인트가드, 밥 쿠지다. 그런데, 쿠지는 처음부터 소규모 시장인 트라이시티스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또한 쿠지는 연봉 10,000달러를 원했지만 커너는 6,000달러만을 제시했다.

 

양 측이 첨예하게 대립하자, 커너는 쿠지의 권리를 시카고 스택스에 넘겼다. 그러다 시카고 구단이 해체되면서 쿠지는 보스턴 유니폼을 입게 되었다.

 

또, 1956년 드래프트에서 호크스 구단이 빌 러셀을 지명하고 보스턴으로부터 클리프 헤이건과 에드 매컬리를 받은 일화는 2018년 1월호에 소개한 바 있다.

 

이런 역사를 다시 정리해보면 이런 가설도 있을 수 있다. 호크스 구단이 레드 아워백을 경질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1950년 드래프트로 밥 쿠지를 뽑아 원하는대로 액수를 맞춰줬다면,   1954년 드래프트에서 밥 페티트를 지명하고 1956년 드래프트에서 다시 빌 러셀을 영입했다면? 감독에 아워백, 포인트가드에 쿠지, 파워포워드에 페티트, 센터에 빌 러셀이라는 역대 최강의 라인업이 구축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들 3인방은 도합 8번이나 MVP가 됐고, 올-NBA 퍼스트팀에도 총 23번 선정됐으며, NBA가 50주년을 기념해 발표했던 위대한 50인에도 모두 이름을 올렸던 선수들이다. 또 ‘명예의 전당’에도 입성했다.

 

물론 이런 가정은 의미가 없다. 아워백이 쿠지를 뽑지 않았을 수도 있고 인종 차별이 심한 세인트루이스에서는 러셀이 적응에 실패했을 수도 있다. 또한 호크스의 성적상 드래프트 순위도 바뀔 수 있기 때문에 상상할 가치조차 없는 가정일 수도 있다.

 

▲ 괴짜 구단주 커너

 

또 하나의 가정을 세워보자. 세인트루이스 호크스는 구단주 벤 커너의 괴팍함이 없었다면 왕조를 이뤘을 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반대로 그가 없었다면 호크스 구단은 버팔로 시절 그냥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버팔로 대학 출신인 커너는 1946년 사업 파트너였던 리오 페리스와 함께 버팔로 바이슨스를 창단했다. 같은 해 연고지를 트라이시티스로 옮긴 커너는 다시 1951년 연고지를 밀워키로 옮겼고 팀명도 밀워키 호크스로 변경했다. 이때부터 호크스 구단의 명칭은 바뀌지 않았다. 1955년 세인트루이스로 다시 연고를 바꾼 커너는 1968년, 애틀랜타의 부동산 개발업자인 톰 커즌스와 조지아 주지사였던 칼 샌더스에게 구단을 매각할 때까지 열정적으로 경영 일선에서 활약했다. 커너는 다른 구단주들과 달리 대단한 부자는 아니었다. 그의 유일한 자산은 호크스 구단 하나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하지만 커너의 농구에 대한 사랑과 열정은 다른 어느 구단주보다도 대단했다. 1913년생인 커너는 구단주로 있던 시절까지는 독신으로 살았다. 1971년에서야 58세의 나이에 비서였던 진 빌브리와 결혼했을 정도로 구단 경영에 모든 것을 바쳤다. 커너는 재정적인 어려움 때문에 연고지도 많이 옮겨 다녀야 했지만, 농구를 위해서는 그 어떤 투자도 마다하지 않았다. 1954년 밀워키 블랙호크스 시절에는 현대 스카우트의 개척자라 할 수 있는 마티 블레이크를 매니저로 발탁하기도 했다.

 

커너는 레드 홀즈먼, 해리 갤러틴, 알렉스 해넘, 앤디 필립스, 레드 아워백 같은 명장 혹은 슈퍼스타 출신 감독들을 가차 없이 해임하기도 했다. 또한 구단 운영비를 벌기 위해 드래프트에서 일부러 많은 선수들을 지명하고 그 선수 고향 혹은 모교에서 시범경기를 치른 후 방출하는 등 엽기적인 행동도 했다.

 

또한 커너는 심판들이 불리한 판정을 할 때는 거친 욕설을 퍼부었다. 보스턴과의 1957년 월드 챔피언십 시리즈 3차전 도중에는 상대팀 감독 아워백이 이전부터 쌓인 분노를 조절하지 못하고 커너의 얼굴을 가격하는 사태까지 벌어지기도 했다.

 


▲ 왕조에 맞서 싸우다

 

1956-1957시즌 빌 러셀을 보스턴에 내주고 에드 매컬리와 클리프 헤이건을 받은 세인트루이스의 시즌은 좌충우돌 롤러코스터와 같았다. 개막전에서 미니애폴리스 레이커스를 97-75로 잡고 산듯하게 출발했으며, 이후 다섯 경기에서 4승 1패, 여덟 경기에서 6승 2패를 기록하며 활짝 웃었다. 하지만 12월 들어 승률 5할이 무너지기 시작한 이래 좀처럼 승률을 회복하지 못했다. 그러자 커너 구단주는 레드 홀즈먼 감독을 해고했다. 물론 대안은 없었다. 커너는 미니애폴리스 레이커스 출신 베테랑 포인트가드 슬레이터 마틴을 선수 겸 감독으로 지명했지만, 마틴은 감독 자리를 원하지 않았고 8경기만을 맡은 후 감독 자리를 원했던 알렉스 해넘에게 바통을 넘겼다. 그저 그런 선수였던 해넘에게 감독 자리를 주는 것이 커너는 처음에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해넘은 마틴 등 동료들의 전폭적인 지지 속에 세인트루이스를 34승 38패로 이끌었다. 당시만 해도 NBA는 동고서저의 시대였다. 동부 지구 소속 4팀이 모두 승률 5할이 넘은 반면 서부 지구는 세인트루이스, 포트웨인 피스톤스, 미니애폴리스가 나란히 34승 38패로 공동 1위를 기록했다. 결국 세 팀은 타이브레이크 시리즈를 가졌고 두 팀을 물리친 세인트루이스가 서부 지구 우승을 차지했다. 서부 결승전에서 미니애폴리스에 3전 전승을 거둔  세인트루이스는 ‘운명의 상대’ 보스턴 셀틱스와 창단 이후 첫 우승을 놓고 다투게 되었다.

 

당시 세인트루이스는 경기당 24.7득점, 14.6리바운드로 절정의 기량을 뽐내던 밥 페티트를 필두로 매컬리(16.5득점, 6.1리바운드), 마틴(11.5득점, 4.6리바운드, 4.3어시스트), 잭 콜먼(10.5득점, 9리바운드) 등이 고루 활약 중이었다. 이에 맞서는 보스턴은 밥 쿠지(20.6득점, 4.8리바운드, 7.5어시스트), 빌 셔먼(21.1득점, 4.3리바운드, 3.5어시스트)이라는 환상의 백코트에 빌 러셀(14.7득점, 19.6리바운드)과 탐 하인슨(16.2득점, 9.8리바운드)이 버티는 골밑이 든든한 팀이었다.

 

두 팀 모두 창단 이후 첫 우승을 노리는 팀들이라 시리즈는 팽팽했다. 1차전은 원정팀 세인트루이스가 주전들의 고른 활약에 힘입어 2차 연장 끝에 125-123으로 신승했다. 러셀은 6반칙 퇴장을 당하기 전까지 7득점, 18리바운드를 기록했고, 페티트는 37득점, 14리바운드를 올렸다. 2차전은 보스턴이 홈에서 119-99, 20점차로 낙승했다. 3차전은 다시 페티트가 종료 직전 결승골을 성공하며 홈팀 세인트루이스가 100-98로 이겼다. 4차전은 원정팀 보스턴이 123-118로 이기며 시리즈는 2승 2패로 동률을 이뤘다. 5차전과 6차전은 모두 홈팀이 이겼다. 5차전은 14득점, 23리바운드를 올린 러셀과 32득점을 폭발한 샤먼을 앞세워 보스턴이 124-109로 이겼다. 6차전은 페팃이 32득점, 23리바운드, 클리프 헤이건이 16득점, 20리바운드를 올리며 세인트루이스가 96-94로 이겨 시리즈는 최종 7차전으로 가게 되었다.

 

두 팀의 7차전은 NBA 파이널 7차전 역사상 최고의 명승부로 꼽힌다. 세인트루이스에서 4명, 보스턴에서 2명이 6반칙 퇴장을 당하기도 했다.

 

전반까지는 원정팀 세인트루이스가 선전하며 53-51, 2점차로 근소하게 앞서나갔다. 하지만 3쿼터 들어 보스턴도 힘을 내며 역전에 성공했다. 4쿼터 종료 6초 남은 상황, 보스턴이 103-101, 2점차로 앞서고 있었지만 페티트가 자유투를 얻어낸다. 페티트는 보스턴 관중들의 엄청난 방해를 극복하고 자유투를 모두 성공해 승부를 연장으로 끌고 갔다. 1차 연장에서도 종료 직전 콜먼이 점프슛을 깨끗하게 넣어 113-113으로 승부를 가리지 못했다. 2차 연장에서는 보스턴이 위기에 바진다. 이날 37득점, 23리바운드로 활약이 가장 좋았던 하인슨이 파울아웃 된 것이다. 세인트루이스도 이미 매컬리, 맥먼, 콜먼이 퇴장 당한 상황. 보스턴은 하인슨의 공백이 치명적이었다. 이날 따라 쿠지와 샤먼이 극도의 야투 부진을 겪고 있었기 때문이다.

 

위기는 세인트루이스에게 먼저 찾아왔다. 헤이건마저 종료 1분 여전 6번째 반칙을 범한 것이다. 세인트루이스는 이날 가용자원이 달랑 8명뿐이었다. 결국 선수 등록이 되어있던 해넘이 유니폼을 갈아입고 출전했다.

 

경기 종료 2초 남은 상황, 보스턴이 125-123으로 앞서 나가게 되자 해넘은 작전시간을 요청했다. 당시만 해도 작전시간 후 하프라인을 넘어서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베이스라인에서 공격을 해야 했다. 해넘은 “좋아, 내가 아웃오브바운드를 나가겠다. 페티트, 너는 반대편 자유투라인에 서있어라. 내가 코트 반대편 백보드를 맞출 테니 네가 리바운드를 잡아 팁인을 넣어라”라고 지시했다. 페티트는 리그 최고의 공격리바운더였기에 충분히 가능한 작전이었다. 하지만 페티트는 결정적인 오판을 했다. 해넘의 작전지시를 100% 신뢰해야 했지만 해넘이 반대편 백보드를 맞추지 못할 것이라는 의심을 했다. 해넘의 패스는 백보드를 맞았다. 하지만 페티트는 잠시 주춤거리다 리바운드를 잡았지만 풋백을 실패했고 결국 보스턴이 4승 3패로 창단 이후 첫 우승을 차지했다.

 

다시 가정을 해보자. 만일 세인트루이스가 이 경기를 잡았더라면 보스턴 왕조는 없었을지 모르고 대신 세인트루이스 왕조가 생겼을 지도 모르다. 혹은 보스턴 왕조의 탄생이 조금은 늦춰졌을 지도 모른다.

 


▲ 보스턴에 설욕하다

 

1957-1958시즌 세인트루이스는 더 강해진 전력으로 돌아왔다. 해넘 감독이 처음부터 팀을 갈고 닦은 가운데, 페티트(24.6득점, 17.4리바운드), 헤이건(19.9득점, 10.1리바운드), 매컬리(14.2득점, 6.6리바운드) 등 프론트코트 3인방이 58.7득점, 34.1리바운드를 합작했다. 또 마틴이 12득점, 3.8리바운드, 3.6어시스트로 노련한 경기운영을 담당하며 상승세를 탔다. 41승 31패로 서부 우승을 차지한 세인트루이스는 서부 지구 결승 시리즈에서 디트로이트 피스톤스를 4승 1패로 제압하고 2년 연속 월드 챔피언십 시리즈에 진출했다. 상대는 이번에도 보스턴이었다.

 

동부 1위(49승 23패)였던 보스턴은 동부 결승 시리즈에서 필라델피아 워리어스를 4승 1패로 제압하고 2연패에 도전했다. 필라델피아는 러셀(16.6득점, 22.7리바운드), 샤먼(22.3득점, 4.7리바운드), 쿠지(18득점, 5리바운드, 7.1어시스트), 하인슨(17.8득점, 10.2리바운드)에 식스맨 프랭크 램지(16.5득점, 7.3리바운드)까지 맹활약했다.

 

1차전은 세인트루이스가 원정에서 104-102로 승리했고 2차전은 홈팀 보스턴이 136-112로 이겼다. 장소를 바꿔 열린 3차전은 세인트루이스가 홈에서 111-108로 이겼고 4차전은 보스턴이 109-98로 원정승을 거두며 시리즈는 2승 2패로 팽팽한 균형을 이뤘다. 여기까지는 전년도와 비슷하게 진행되었다. 하지만 5차전에서 시리즈 균형을 추를 기울게 만드는 사건이 터진다. 5차전 전반까지 49-49로 팽팽했다. 3쿼터 중반 세인트루이스의 페티트가 슛을 시도하자 러셀이 블락샷을 위해 높이 솟구쳤다. 하지만 착지하다 오른 발목이 심하게 꺾이는 중상을 입고 남은 시리즈를 뛰지 못했다. 결국 5차전은 원정팀 세인트루이스가 102-100으로 승리했다.

 

러셀이 없는 보스턴은 원정에서 열린 6차전에서 끝까지 저항했다. 1958년 4월 12일 세인트루이스의 키엘 오디토리엄에는 10,218명의 관중이 운집, 세인트루이스의 첫 번째 우승을 위해 열띤 응원을 펼쳤다. 열화와 같은 응원 속에 페티트는 전반에만 19득점을 올렸고 세인트루이스가 59-52로 기선을 제압했다. 보스턴은 부상을 입은 러셀을 투입하며 반격에 나섰고 한때 86-84로 역전에 성공했다. 이후 두 팀은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펼쳤다. 경기 종료 20여초를 남기고 페티트는 부상을 안고 있는 러셀을 상대로 돌파를 시도, 득점을 뽑아내며 세인트루이스에 리드(108-105)를 안겼다. 하지만 보스턴도 하인슨이 자유투를 넣으면서 경기 종료 16초를 남기고 108-107로 추격했다. 다음 공격에서 세인트루이스는 페티트가 마틴이 실패한 슛을 팁인으로 마무리했다. 사실상의 결승골이었다. 이후 보스턴도 득점을 했지만 시간은 세인트루이스 편이었다.

 

결국 110-109로 세인트루이스가 극적인 승리를 거두며 창단 이후 첫 우승이자, 구단의 유일한 우승을 차지했다.

이날 페티트는 50득점, 19리바운드를 기록하며 일등공신이 되었다. 이후에도 두 팀은 1960년과 1961년 두 차례 더 만났지만 보스턴이 각각 4승 3패, 4승 1패로 승리하며 왕조의 기틀을 마련했다.


#점프볼 2018년 3월호에 게재된 내용을 일부 수정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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