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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레전드' 임영보, "농구는 생존게임, 지면 죽는다"
권부원
기사작성일 : 2018-01-17 10:51

[점프볼=권부원 편집인] 한국과 일본에서 농구감독으로 반세기를 살았던 임영보 선생(84)은 학교에서 농구를 배우지 않았다. 그는 1933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학창시절엔 농구공을 만져보지도 않았다. 오히려 복싱과 축구를 즐겨하던 소년이었다. 임 선생과 농구의 인연은 6.25 전쟁이 만들어주었다. 최근 일본생활을 정리하고 영구 귀국한 임 선생은 지난 11월 22일 점프볼과 만나 농구입문 과정, 지도자 인생, 그리고 지도철학을 들려주었다.

 

※ 본 기사는 2018년 점프볼 1월호에 게재된 글입니다.

 

6.25전쟁 중 포로수용소에서 처음 접한 농구
그는 해주중학교(중고교5년과정)를 졸업하고 교사를 희망하며 해주사범학교에 들어갔다. 청운의 꿈을 키우던 1950년, 하필 그때 6.25전쟁이 터졌다. 북한 지역 고교생, 대학생들은 자기 뜻과 관계없이 인민군에 들어갔다. 그 역시 교생수업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총을 잡아야 했다. 전쟁 중 임 선생은 삶과 죽음 경계선을 셀 수없이 넘나들었다. 아직도 몸에 남아있는 총상과 포탄 파편 흔적이 말해주고 있다.

 

그는 미군포로로 잡혀 들어간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인생 전환점을 만났다.

 

“이남에서 인민군에 끌려갔던 농구선수 출신들이 포로가 되어서 거제도로 왔어. 우리 수용소 텐트에도 여럿 있었지.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사람일거야.”

 

임 선생은 그러면서 운명적 만남을 떠올렸다. “김영철 씨라고, 전쟁이전 남한에서 유명한 선수였다고 해. 수용소에서 같이 생활하던 중 그 사람이 날 보더니 ‘이리와봐, 농구는 이렇게 하는거야’라며 공을 던지고 받는 법을 가르쳐주더라고. 그게 시작이었지.”

 

약관(弱冠) 나이에 처음 접한 농구였다. 농구는 묘한 쾌감을 주었다. 그는 시작은 늦었어도 농구에서 삶의 의미와 목표를 찾기로 결심했다. 전쟁포로가 된 이후 매일 걱정하던 불투명한 미래도 농구를 하면 잊혀졌다.

 

1953년, 그는 수용소를 나와 한국군에 다시 입대했다. 휴전협정이 맺어지자 정부는 전군에 스포츠 활성화 방침을 시달했다. 그는 “전투하던 군인들이 전쟁 끝나고 기를 발산할 곳이 없어지자 자꾸 사고를 치는거야. 그러자 정부에서 각 군마다 스포츠 팀을 만들라고 지시 한거지.”

 

그가 소속된 26사단에도 농구부가 만들어졌고, 임영보는 농구선수로 본격 활동했다. 1959년 전역 후에는 조선운수에 입단, 선수생활을 이어갔다. 농구지도자로 한 시대를 풍미한 임영보 선생이 현역 때 어떤 활약상을 펼쳤는지 사료를 통해서는 확인하기 어렵다.     

 

Q. 선생님은 현역 때 어떤 농구선수였습니까.  
내 키가 170cm였다. 그 키로 포워드와 센터를 봤다. 농구하면서 내가 생각해도 지나친 인간이 된 것 같다. 키가 작아서 큰 사람과 싸우려면 점프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거든. 연습을 지독하게 많이 했어. 후배들이 땅속 지렁이 죽는다고 할 만큼 점프력이 좋았어.

 

그는 림 아래에서 점프하면 3m5cm 높이 림을 잡을 정도였다고 했다. 그렇다고 특출한 선수로 명성을 떨치지 않았다. 현역 시절 소속팀이 우승 한번, 준우승 한 번씩 해본 기억이 나는데, 그 때마저도 그는 주전선수가 아닌 교체멤버로 출전한 수준이었다고 했다.  

 

 

평범한 선수생활, 지도자로 화려한 업적
임영보는 평범했던 선수시절과 달리 지도자로서 능력을 발휘하며 업적을 쌓아나갔다. 그는 한국과 일본에서 감독으로만 50여년을 지냈다. 한국여자농구가 전성기를 노래했던 1960~1990년대, 감독 임영보의 손을 거치지 않은 팀을 찾기 어려울 정도다. 그 시절 그가 지휘봉을 잡았던 실업, 은행팀이 11개나 된다. ‘호랑이 선생님’, ‘독종’, ‘욕쟁이’란 말을 들으며 코트를 장악하던 시절이다.

 

Q. 그럼 어떻게 지도자 생활을 시작하게 됐나요.
그게 운명이랄까. 정말 우연하게 코치가 됐다. 서른 살 때 고향선배가 농구부 코치로 있는 수도여고에 놀러갔더니, 그 선배가 나한테 코치를 떠맡겼다. 학생들을 모아놓고 나를 부르더니 이 사람이 앞으로 코치라고 소개했다.

 

Q. 어떤 지도자가 되려고 했나요. 지도철학은 무엇이었습니까.
생각도 못했고, 준비도 되어있지 않았으니 지도철학이 뭐 있겠어. 내가 전쟁과 수용소생활을 하며 느낀 것은 ‘노력하지 않으면 거지가 된다’였다. 그때는 굶는 때가 많았다. 그래서 선수들하고 이야기할 때 ‘지면 죽는다’, ‘이왕 하는 거 이기자’란 생각을 주입했다. 그래서 다 아시다시피 아이들 패고, 어려운 것 주문하고 그랬다. 이기기 위해 고비를 넘기려면 채찍질할 수  밖에 없었다.

 

Q. 그럼 선생님은 처음부터 기술보다 정신력에 중점을 두고 가르친 것 같습니다.
그렇지. 기술보다는 정신력을 강조했다. 한때 인민군대식 농구를 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적한테 이기려면 적이 잠자고, 먹고, 쉬고 있을 때 해야 했다. 그렇게 해서 성적이 나니, 그렇게 지도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초보선수여도 나한테 와서 4~5년 배우면 대표급 선수가 되었다. 나하고 인연 맺으면 후회시키지 말자고 생각했다. 그래서 새벽 4시부터 밤 11시까지 밥 먹는 시간 빼고 연습을 했다.

 

Q. 실제로 그렇게 지도해서 성과를 냈지 않았습니까. 
우승하면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올라갈수록 적이 많아졌다. 적이 나를 목표로 삼으니까 지지않기 위해 악을 써야했다.

 

Q. 성적이 나쁜 팀의 경우, 선생님을 모셔가려고 서로 다투었겠어요.
실업팀이 13개가 있던 시절에 내가 11개팀에서 감독을 했다. 그때는 오너들이 농구에 관심많았기 때문에 성적내고 싶은 팀이 나를 데려갔다. 그런데 무슨 영문인지 꼴찌팀을 우승시키고, 4강권에 올려놓고 나면 나보고 계약 끝내자고 했다. 좋은 대학을 나온 사람들이 동문 감독을 앉히려고 나를 가만 놓아두지 않았던 거다.

 

맡은 팀마다 단기 감독을 반복했던 임 선생은 유독 국민은행에만 장기 재직했다. 28연승 기록도 국민은행 시절에 남겼다.

 

 

Q. 국민은행은 어떻게 가게 되었나요.
내가 코오롱에 있을 때 민경재란 분이 나를 찾아왔다. “소문 들으니 당신 데려오면 성적 난다고 들었다. 같이 일해보자”고 제안하길래, 몇 년을 보장하겠느냐고 물었다. 다시 그쪽이 몇 년 필요하냐고 해서 3년 달라고 했다. 은행쪽에선 성적나면 영원히 같이 있자고 해서 갔다. 그게 1970년이고 이듬해 국민은행 창단 후 처음 우승을 맛보았다. 그 분이 내게 불어오는 외풍을 모두 막아줘서 오래 몸담을 수 있었던 같다.

 

Q. 그렇게 오래 몸담았던 국민은행은 왜 그만두었습니까.
내가 정년이 되니까 부장을 만들어주면서 이제 고문으로 계시라, 코치 구하자고 하더라고. 마침 그때 SKC가 나에게 스카우트를 제안하더군. 그때부터 여기저기서 오라는 제안이 들어왔다.

 

그는 “그때 내가 실력을 믿고 너무 까불었다. 배포가 너무 컸다”며 “심지어 누가 팀 운영에 간섭이라도 하면 당신이 와서 가르치라고 일갈했던 적도 있다”고 과거를 돌아보았다.

 

 

일본에 전파한 임영보식 한국농구
일본행 역시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길이다. 현대산업개발 감독으로 재임하던 1998년, 임영보는 일본농구협회에서 일하던 지인으로부터 전화 한통을 받았다. 한국을 방문한 지인은 잠깐 얼굴을 보고싶다며 만나자고 했다. 롯데호텔에서 가진 저녁식사 자리에서 임 감독은 뜻밖의 제안을 받았다. “선생님이 일본에 와서 팀을 맡아줄 수 있느냐”란 말에 그는 “꼴찌하던 현대 와서 성적내고 잘 있는데 왜 가느냐”고 거절하면서 “돈만 많이 주면 갈 수도 있다”란 말을 농담조로 덧붙였다. 곧바로 얼마주면 되느냐고 상대가 묻자 “한 십만달러 주면 되지”라고 눙치며 답했다.

 

거절의미를 담아 던진 한마디 농담이 수습할 수 없을 만큼 커졌다. 그 일본인은 그 자리를 끝내면서 “선생님이 한 말씀은 꼭 지켜야 한다”고 다짐받더니, 일주일후 전화로 “우리 사장님 과 담판을 지어 선생님 영입을 결재 받았다”고 전했다. 그 농구팀이 바로 일본항공(JAL)이었다. 아무런 준비가 없었지만 일은 어쩔 수 없는 국면으로 흘러갔다. 결국 임 감독은 “일단 2년만 도와주겠다는 조건으로 건너갔지. 가서보니 팀이 실업동호회 수준이야. 처음 3부리그부터 시작해, 다음해 2부, 그 다음해 1부 올라가다보니 시간이 흐른거야.”

 

한국인 임영보 감독이 이끈 일본항공은 마침내 2005년 일본종합선수권대회에서 우승, 승격드라마를 완성하고야 말았다. 일본 농구계를 흔든 그 스토리는 영화 ‘날아라 래비츠’로 제작되기도 했다.

 

임 감독의 지도철학은 일본에서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 정신력과 기본기를 강조한 임영보식 훈련방식을 그대로 적용했다. “왜 싸워야 하는지, 왜 이겨야 하는지 인식하도록 했어. 이기려면 경쟁의식을 가져야하고, 자기와의 싸움에서도 이겨야 하지. 그것을 모르면 승자로서 의미가 없어지게 되지.”

 

일본항공에서 8년을 보낸 임 감독의 일본 지도자 경력은 북해도공원을 거쳐 나고야고, 야마니시 퀸비스, 니카타현 순회코치로 20년간 이어졌다. 임 감독은 최근 일본에서 정립한 농구이론을 비디오테이프로 제작, 보급하고 있다. 여기에 자신이 창안한 에잇크로스(스크린을 8자로 운영하는 작전), 맨투맨, 존디펜스 같은 각종 전술과 공략법을 녹여놓았다. 일본 초중고 지도자들이 반드시 봐야하는 목록에 들었다고 한다.

 

농구감독으로만 반세기, 유례를 찾기 힘든 이력이다. 임영보 감독은 그렇게 50여년간 한국과 일본에서 수십개 팀을 지도하며 셀 수 없는 우승경력을 남겼다. 그의 나이도 어느덧 팔순을 훌쩍 넘겼다. 그는 지난 8월, 일본생활을 완전 청산하고 귀국길에 올랐다. 그때 마지막 봉사는 고국에서 하겠다고 마음먹었다. 현재 경기도 분당 자택에서 부인과 함께 지내고 있다. 귀국 후에도 농구에 대한 그의 관심은 식지 않았다. 틈틈이 여자프로농구 경기를 관전한다고 했다.  초등학교 농구부를 방문해 아이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도 찾고 있다.

 

 

“보수 안 받아도 좋아. 어디든 가서 아이들과 어울려 농구를 가르치고 싶어.”

 

노감독이 진행하는 농구수업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 사진_유용우 기자, 임영보 선생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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