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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삼성 코치 이규섭 "코트 밖에서도 도전은 계속"
김찬홍()
기사작성일 : 2017-12-29 09:57
[점프볼=김찬홍 기자] 대경상고 시절부터 슈팅능력 좋은 빅맨으로 평가를 받아온 이규섭. 투쟁심과 소속감이 강한 이규섭은 프로서 삼성 유니폼 외에 다른 유니폼을 입은 적이 없다. 소속팀은 바뀌지 않았지만 변화는 많았다. 포워드로 포지션 전향도 해봤고, 취업 비자를 맡고 D리그 코치도 맡아봤다. 파란만장한 경험 후에는 친정팀 삼성으로 돌아왔다. 여전히 도전을 이어가고 있는 이규섭 코치의 파란만장한 농구 이야기를 들어봤다.

※ 본 기사는 농구전문매거진 점프볼 12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애증의 대상 : 슛

대경상고 시절 최고의 고교 센터로 주목받았던 이규섭은 장신임에도 정교한 슈팅을 자랑하던 선수였다. 이규섭은 “어릴 때부터 슈팅에는 자신이 있었어요. 지금과는 다르게 슛을 던지는 빅맨은 적었어요. 고등학생 때는 감독님이 팀을 위해 제가 외곽플레이를 하는 것을 자제시켰어요. 사실 당시에는 이해하기 힘들었죠. 어렸으니까요.”

이규섭은 대경상고 졸업 이후 고려대로 진학했다. 존경하던 선배인 전희철(현 SK코치)가 고려대에 있었고, 부모님이 고려대를 좋아하셨던 것도 진학 이유 중 하나였다. 또한 고려대는 이규섭의 2년 선배 현주엽(창원 LG 감독), 신기성(인천 신한은행 감독)을 비롯하여 선수층도 탄탄했다. “선수층이 워낙 좋았죠. 신기성 선배는 제가 나가 있으면 그냥 바로 패스가 왔어요. 동기 중에는 이정래, 후배 중에는 전형수라는 가드도 만났어요. 좋은 환경과 좋은 선수들을 만났어요. 농구에 흥미가 많았던 나이에 좋은 선수들을 만나니 농구가 정말 재밌었죠.” 

원했던 외곽플레이도 마음껏 할 수 있었다. 다른 선수들은 슈팅 연습을 힘들어 하지만 이규섭은 예외였다. 프로에서의 생존도 달려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원하는 농구를 위한 연습이었기에 즐겁기만 했다. “포지션 변경은 3학년 때부터 준비했어요. 저보다 큰 신입생이 온다는 소문을 듣고 외곽 플레이 연습을 많이 했어요. 그 준비가 없었다면 프로에서 포지션 전향을 하는데 시간이 더 오래 걸리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의도치 않게 이규섭은 4학년 때 다시 센터로 돌아선다. 센터를 맡고 있던 2년 후배가 농구를 그만둔 것. “아직도 그날이 생생해요. 박한 감독님이 감독실에 부르셔서 ‘다시 센터를 맡아야 겠다’고 말씀하셨어요. 그전까지 외곽 연습을 정말 열심히 했어요. 너무 아쉬웠죠.” 그래도 이규섭은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지금 돌아보면 다시 센터를 맡은 것도 프로에서 많은 도움이 되었어요. 외곽에서 연습을 했던지라 당시 빅맨들이 사용하지 않았던 스킬들을 골밑에서 사용했죠. 2년 선배인 현주엽 선배한테도 정말 많이 배웠어요. 같이 부딪히면서 제 것으로 만들려고 노력했어요.”



고려대를 졸업하고 이규섭은 전체 1순위로 수원 삼성(현 서울 삼성)에 입단한다. 데뷔 시즌, 정규리그서 45경기에 출장하며 평균 31분 4초간 12.7득점 4.7리바운드 1.5어시스트를 기록하며 무난히 신인상을 받았다. 챔피언결정전서 무릎 부상을 당했지만 팀은 우승하며 데뷔 첫 시즌 우승 반지를 손에 끼었다.

본격적인 포지션 변경에 나서다

이듬해, 이규섭은 시즌을 마치고 상무에 입단한다. 그가 군대에 간 사이, 삼성에서는 대대적인 팀 개편이 일어난다. 이규섭 본인의 농구 인생에 있어서도 가장 큰 변화였다. “스토리가 길죠. 상무에 입단하고 추일승 감독(현 오리온 감독)님도 많이 도와주시겠다고 했어요. 그리고 훈련소에 갔어요. 당시에는 팬들이 기사를 스크랩해서 편지로 보내줬어요. 구단에서 알려준 것보다 빠를 때도 있었어요.”

첫 번째 소식이 바로 트레이드 소식이었다. 그것도 자신이 존경하는 전희철과의 트레이드. 하지만, 이 트레이드는 불발되었다. 그리고 두 번째 찾아온 편지에 담긴 소식도 임팩트가 강렬했다. 당시 최고의 센터였던 서장훈이 자유계약선수 신분으로 삼성에 합류한 것.

“2002년 아시안 게임 대표팀에서 (서)장훈이 형을 만나서 인사를 했어요. 그전부터 느낀 거지만 장훈이형은 경쟁을 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였어요. 모든 면에서요. 포지션에서 스스로 비교를 해봤는데 제가 나은 게 없던 것 같았어요. 그만큼 장훈이 형은 대단한 선수였어요. 그래서 곰곰이 생각했죠. 방법은 단 하나였어요. 다른 기술을 연마해서 새로운 모습을 보여줘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마침 이규섭의 상무 동기 중에 당대 최고의 슈팅가드 조상현(현 오리온 코치)이 있었다. 이규섭 본인에게도 딱 맞는 멘토였다. 이규섭은 조상현의 방을 찾아가서 도움을 요청했다. 그리고 돌아온 답은 자신을 따라하라는 것. 조상현은 말로 설명하기보다는 이규섭에게 시도를 해보게끔 만들었다. 조상현의 도움 아래에 이규섭은 스몰포워드라는 옷을 맞춰 입어갔다.  그가 확실히 자신감을 잡은 계기는 하얼빈에서 열린 2003년 ABC 대회였다. 당시에 센터였던 이규섭이 슛을 던지면 코칭스태프에게 혼을 나기도 했다. 하지만 이규섭은 뚝심 있게 슛을 고집했다. “혼나는 것보단 해보는 게 중요하다 생각했어요. 예선전에서는 센터로 뛰다가 플레이오프부터는 포워드로 뛰었어요. 준결승전부터 터지기 시작했어요. 결승전 상대가 중국이었는데 초반부터 10점 이상 벌어졌어요. ‘에라 모르겠다’라는 심정으로 슛을 던졌는데 거의 다 들어갔어요. 후반전부터는 패턴을 만들어서 공격을 했어요. 아쉽게 지긴 했지만 저에게는 충분히 소득이 있었죠.” 비록 한국은 결승전서 중국에게 패배했지만 이규섭은 3점슛 7개를 포함 28득점을 올리며 이목을 집중시켰다.

전역 이후, 이규섭은 훈련을 하다가 무릎 인대가 끊어지는 부상을 당했다. 다행히 2004-2005 시즌 시범 경기에 맞춰 복귀했다. 시범 경기 첫 상대는 은사였던 김동광 감독이 이끄는 안양 SBS(현 안양 KGC인삼공사)였다. 첫 시범경기서 이규섭은 2쿼터까지 3점슛 5개를 적중시키는 놀라운 활약을 펼쳤다. 이규섭을 센터로만 생각했던 김동광 감독은 황당하다는 눈빛으로 이규섭을 바라봤다. 이규섭은 포지션 전향에 완벽히 성공했다. 이후, 2005-2006 시즌, 팀의 주역으로 우승에 일조했다. 

“주변에 좋은 동료들을 만나고, 그걸 인정해주는 코칭스태프가 있었기에 그때의 제가 있었다고 생각해요. 어찌 보면 팀을 위해서 제가 외곽에서 플레이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겠지만 다들 흔쾌히 인정해주고 받아줬어요. 시기도 좋았어요. 제가 복을 많이 받은 것 같아요.”

원 클럽맨 이규섭, 미국으로 향하다 

삼성에서 13시즌을 함께한 이규섭은 2012-2013시즌을 끝으로 정든 삼성 유니폼을 벗고 은퇴를 선언했다. 그리고는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 산하의 G리그 팀 산타크루즈 워리어스에서 코치 연수를 위해 곧바로 미국으로 향했다. 

“골든스테이트와 삼성과 연결되어 있었어요. 전지훈련을 2년 연속 미국으로 갔는데 그때 골든스테이트에서 많이 도와줬어요. 그러면서 정식 코치로 산타크루즈 팀에 합류할 기회도 주어졌죠. 당시만 해도 워킹비자를 받고 간 코치가 없는 걸로 알고 있어요.”

부푼 마음을 안고 간 미국이었지만 처음은 쉽지 않았다. 그는 어디까지나 ‘타지에서 온 이방인’이었다. 또한 문화도 달랐다. 당시 G리그는 저예산으로 운영되었기에 비행기도 새벽 비행기가 아니면 타지 못했다. 식사비도 처음에는 받지 못했다. 결정적으로 소통이 잘 되지 않았다. 영어를 공부하고 갔지만, 쉽지 않았다. 선수 시절, 깡으로 버티던 이규섭은 미국에서도 깡으로 다시 도전했다. 다행히도 산타크루즈 코칭스태프가 이규섭을 많이 배려했다. 현장에서 말했던 내용을 이메일과 문자메시지로 다시 전했다. 이규섭은 이메일과 문자메시지를 받을 때면 사전을 동원해서라도 몽땅 습득했다. 실전에서는 말이 안 통하면 온 몸(?)으로 소통했다. 

그러한 이규섭의 열정이 통한 것일까. 두 번째 원정경기서 그는 식사비를 받았다. 원래는 받지 않기로 한 식사비였지만 산타크루즈 단장은 이규섭의 열정을 높이 사 식대를 제공했다.

그렇게 산타크루즈에서 지낸 10개월이 이규섭 코치에게 큰 영감을 줬다.

“지금도 연습할 때 매트를 직접 깔아요. 미국서는 산타크루즈 감독이 저한테 시켰어요. 우리나라와는 전혀 다른 문화죠. 미국에선 선수는 농구만 집중하는 문화가 잡혀있어요. 코치나 스태프가 모든 걸 해줘요. 처음에는 적응이 쉽지 않았지만 어느새 자연스레 몸에 베였어요.”



또한 선수가 모두 나가기 전까지 코트를 떠나지 않는 것도 미국에서 배워온 문화다. “산타크루즈 감독에게 코치 임무가 적혀있는 책을 받았어요. 거기에 맨 처음 있는 내용이 선수보다 절대 일찍 코트를 비우면 안 되는 것이에요. 12시간 넘도록 계속 체육관에 있었던 기억도 있어요.”

코치로서의 마인드를 갖추는데도 영향을 받았다. “당시 감독이 저한테 ‘절대 실수하면 안 된다’고 말했어요. 한 번 실수하는 순간 신뢰가 끊겨서 선수를 가르칠 수 없다고 했어요. 처음에는 이해하기 힘들었어요. 알고보니 준비를 안 하고 나가서 실수를 하면 신뢰가 끊겨 선수에게 가르치는 의미가 없다는 말이었어요. 당시 감독의 말은 제 지도철학의 바탕이 되고 있어요.”

또한 경기 직후에 선수들에게 잘못된 것을 지적하지 않는 것도 코치 이규섭의 모토다. “경기 직후에는 승패에 따라 감정이 다를 수가 있어요. 분석 없이 감정에 따라 잘못을 가려서는 안돼요. 경기 다음 날에 분석을 마치고 선수들에게 냉정하고 정확하게 말하는 것이 맞아요. 그래야 선수들도 수긍해요.”

미국서 잠깐이었지만 많은 것을 배웠다는 이규섭. “사실 여러 팀에 있었던 것도 아니고 오래있었던 것도 아니에요. 그렇다고 영어가 완벽한 것도 아니었고요. 기본적인 것들을 정말 많이 배웠어요. 만약 미국을 가지 않고 코치를 했다면 다른 모습의 코치였을 것 같아요. 시행착오를 많이 겪고 있지 않았을까요.” 

1년 만에 돌아온 삼성

미국에서 지내던 이규섭은 어느날 한국에서 온 전화 한 통을 받는다. 바로 삼성에 새로 부임한 이상민 감독의 전화였다. 이규섭은 당시 상황을 솔직하게 말했다. “플레이오프 원정 경기를 가려고 비행기를 타려는데 이상민 감독님한테 전화가 왔어요. 통화가 끝나고 1분도 지나지 않아 국장님한테 전화가 있어요. 솔직히 친분이 있었고, 같은 팀에서 뛰었으니 당연히 기대하는 것이 있었어요.”

그때가 2010년 4월 초. 이상민이 막 삼성의 신임감독으로 부임한 직후였다. 그런데 코칭스태프 발표는 그로부터 1주일이나 지나서야 이뤄졌다. 발표가 늦어지자 이규섭은 마음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기회가 아닌가 싶었죠. 산타크루즈 감독에게도 1년 더 하고 싶다는 의사를 표했어요. 긍정적인 반응이 나와서 미국에 남으려고 했죠. 그런데 감독님께 다시 전화가 왔어요.”



이규섭의 최종 결정은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 이유는 13년간 함께한 삼성이었기 때문이다. “13년간 계속 제가 있었던 팀이잖아요. 당시 미국에 간 것도 삼성에서 도와준 덕분이었고요. 만약에 삼성이 아니었다면 한 번 더 생각했을 것 같아요. 막연하게 속으로는 삼성으로 돌아갈 거라 생각이 있었어요.”

미국에 함께 갔던 가족들도 흔쾌히 오케이 했다. 그렇게 이규섭은 2014년 삼성 코치가 되어 한국으로 돌아왔다. 처음은 쉽지 않았다. 코치로서의 첫 시즌은 11승 45패, 최하위로 마감했다. “삼성이 힘들 때이긴 했어요. 첫 해에 오죽했으면 미국에서 연락이 왔겠어요. ‘힘들겠지만 그런 경험을 통해 공부를 하는 것이다’라고 연락이 오더군요.”

쓰라리지만 공부도 많이 됐던 시즌이었다. 이기기 위해 모든 방법을 찾았다. 그러면서 터득한 노하우를 선수들과 공유하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보낸 4년. 이규섭 코치의 첫 시즌은 최하위였지만 2016-2017시즌은 3위였다. 특히 지난 시즌에는 챔피언결정전 무대까지 밟았다. 선수와 코칭스태프가 함께 이룬 결과물이었다.

이규섭은 어떤 지도자가 되고 싶을까. 이규섭은 의미가 없을 것 같다고 답했다. “지금의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하다 생각해요. 코치는 감독님을 뒤에서 도와주는 자리잖아요. 감독님을 최대한 도와야죠. 아직도 ‘지시’와 ‘도움’의 선을 유지하는 게 어려워요. 감독님이 선수들에게 지시를 하고 코치는 감독님의 백업 역할이 우선이라 생각해요. 경기에 나설 때는 먼저 벤치의 분위기를 신경 써야죠. 항상 지금의 자세를 망각하지 않고 코치답게 팀에 보탬이 되고 싶습니다.”    

# 사진_점프볼 DB(문복주, 유용우, 홍기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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