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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NBA 옛날옛적에 (8) The First Champion
최연길
기사작성일 : 2017-10-02 19:56
[점프볼=최연길 칼럼니스트(MBC스포츠 플러스 해설위원)] NBA의 전신인 BAA가 출범할 때만 해도 이들은 큰 관심을 받지 못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리그답지 않았기 때문이다. 역사도 짧고 규모도 작았다. 초대 총재인 모리스 포돌로프와 대부분의 구단주들은 농구를 잘 모르는 문외한들이었다. 그러나 BAA에게 스타와 인기구단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통감하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초대 챔피언 자리에 오른 필라델피아 워리어스와 간판스타 조 퍽스는 BAA가 절실히 필요로 했던 두 가지 요소를 모두 갖춘 구세주였다. * 본 기사는 점프볼 2017년 9월호에 게재된 내용임을 밝힙니다. 

모굴과 점핑 조

필라델피아 워리어스를 논할 때 빠지지 않는 인물이 둘 있다. 한 명은 감독이던 에디 고틀립(Edward Gottlieb)이고, 다른 한 명은 주득점원인 조 퍽스다. 고틀립은 별명이 ‘미스터 바스켓볼’ 혹은 ‘모굴(The Mogul: 거물, 실력자라는 의미)’이었을 정도로 농구 역사에 미친 영향이 컸다. 1898년 9월 15일 우크라이나의 키에프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이민 온 고틀립은 1920년대 전설적인 필라델피아 유대인 농구팀 필라델피아 스파스(SPHAS:  South Philadelphia Hebrew Association의 이니셜)를 창단해 감독 겸 프로모터로 활약했다. 스파스는 당대 최고였던 뉴욕 오리지널 셀틱스, 뉴욕 르네상스와 어깨를 나란히 했던 명가였다. 

고틀립은 1946년 6월 16일(이후 현지시간) 뉴욕의 코모도어 호텔에 모여 BAA 창설을 논의한 13명 중 한 명이기도 하다. 고틀립은 또한 1950년 스파스를 매각했고 1953년에는 필라델피아 워리어스 구단을 매입해 구단주가 되었다. 1956년에는 다시 구단주가 되어 NBA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1963년 샌프란시스코 투자 그룹에 워리어스 구단을 매각한 고틀립은 NBA 총재 컨설턴트로 남아 NBA 일정을 짜고 규칙을 정비하는 등 중책을 맡아 오랫동안 NBA 발전에 공헌했다. 고틀립은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1972년 네이스미스 기념 농구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렸다. 또한 NBA는 고틀립의 공로를 인정해 NBA 올해의 신인에게 수여하는 트로피 명칭을 ‘에디 고틀립 트로피’라 명명했다. 
조 퍽스(Joseph Franklin Fulks)는 필라델피아 워리어스를 대표하는 간판스타이자 리그를 대표하는 첫 전국구 스타였다. 퍽스는 1921년 10월 26일 켄터키 주(州) 버밍햄에서 태어났다. 쿠타와 고등학교 시절, 학교 득점 기록을 모조리 갈아치우며 주 챔피언을 차지한 퍽스는 ‘쿠타와 클리퍼’라는 별명을 얻었다. 전형적인 시골 청년이었던 퍽스는 당대 최고 명문이던 켄터키 대학의 아돌프 럽 감독이 장학금을 제의했지만 미시시피 주 잭슨에 위치한 밀샙스 컬리지에 입학했고, 이후 머레이 주립 사범 대학(現 머레이 주립대학)로 진학했다. 1943년 해병대에 입대해 2차 대전에 참전한 퍽스는 필라델피아에 입단하기 전까지는 전국적으로 알려진 선수는 아니었다. 하지만 고틀립과 몇몇 감독들은 그의 능력을 눈 여겨 보고 있었다. 

퍽스는 머레이 주립 사범대학 시절 통산 평균 13.2득점을 올리며 켄터키 인터 컬리지 애슬레틱 컨퍼런스 올스타와 NAIA 올아메리칸에 뽑혔던 득점원이었다. 196cm의 포워드였던 퍽스는 당시는 드물었던 점프슈터였다. 물론 오늘날 점프슈터와는 다른 초창기 자신만의 특이한 슈팅 자세를 지닌 선수였다. 그는 ‘왼손은 거들 뿐’이라는 농구 교과서와는 거리가 먼 왼손의 비중도 큰 슈팅 폼을 지니고 있었다. 

이는 일명 ‘트위스트 점프슛’이라 불렸는데, 손을 약간 꼬면서 올라가는 자세로 상대 수비들에게 혼란을 일으켰다. 고틀립은 퍽스의 이런 능력을 높이 사며 퍽스의 공격 비중을 극대화 시키는 전술을 적용시켰다. 그 결과 퍽스는 1946-1947시즌 60경기에서 23.2득점, 야투성공률 30.5%(당시로는 높은 수치)를 기록하며 초대 득점왕에 올랐다. 또한 NBA 역사상 최초로 한 시즌 1,000득점을 올린 선수가 됐다.  퍽스는 1947-1948시즌에도 22.1득점으로 득점왕에 올랐고 1950-1951시즌에는 85.5%의 자유투성공률로 이 부문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퍽스는 1949년 2월 10일, 인디애나 제츠와 경기에서 63득점을 올렸는데 이는 24초 공격제한시간이 생기기 전 기록이라 더욱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퍽스의 뛰어난 득점력을 앞세운 필라델피아는 전국적인 인기 구단이 되었고, 퍽스 또한 전국구 스타가 되었다. 하지만 퍽스는 잦은 음주로 선수 생명이 길지 않았고 1954년 은퇴했다. 통산 기록은 8,003득점(경기당 16.4점)이었다. NBA 25주년 기념 위대한 25명의 선수에 선정된 퍽스는 1976년 3월 21일 여자 친구의 아들인 그렉 배니스터와 말다툼을 하다 총에 맞아 사망했다. 그리고 사망 후 2년 뒤인 1978년 퍽스는 네이스미스 기념 농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전사단 출격 준비를 하다

1946년 BAA가 출범 준비를 한다는 소식이 들리자 필라델피아 농구계의 거물 에디 고틀립은 AHL(American Hockey League)의 필라델피아 로케츠의 구단주이자 필라델피아 아레나의 소유주였던 피트 터렐을 설득해 필라델피아를 연고로 삼는 프로 농구단을 만들기로 합의했다. 그리고 팀명은 유대인 뿐 아니라 다양한 팬들을 고려해 스파스가 아닌 ABL 처음 가입당시 사용했던 필라델피아 워리어스로 정했다.

터렐은 고틀립에게 선수단 구성의 전권을 주었다. 고틀립은 스파스 출신 뿐 아니라 ABL 출신 베테랑들과 템플 대학, 세인트조셉스 대학 등 필라델피아에 위치한 대학 출신 선수들을 주축으로 선수들을 구성했다. 주요 선수로는 퍽스 외에 1942년 스탠포드 대학을 NCAA 우승으로 이끌고 MOP에 선정되었던 장신 포인트가드 하위 달마(194cm), ABL 득점왕 출신 아트 힐하우스(201cm), 1942-1943시즌 NCAA 득점왕 출신이자 뛰어난 수비력을 지녀 별명이 ‘문어(the Octopus)’였던 세인트조셉스 대학 출신 조지 세네스키(188cm), ABL 출신으로 가장 경험이 풍부했던 맷 구오카스(191cm, 아들 맷 구오카스 주니어도 필라델피아 76ers 출신으로 선수와 감독으로 몸 담았고 해설가로도 활약했다), 템플 대학 출신 포인트가드 안젤로 무시(175cm) 등이 있었다. 

이 중 무시는 워싱턴 캐피톨스의 레드 아워백 감독도 계약하길 원했던 선수였다. 하지만 고틀립이 연봉 5,500달러를 제시하자 고향인 필라델피아로 진로를 돌렸다. 고틀립은 퍽스에게도 연봉 8,000달러와 신형 자동차를 제의해 계약에 성공했다. 뉴욕 닉스의 구단주 네드 아이리시도 퍽스에게 더 많은 연봉을 제시했지만 퍽스가 이미 필라델피아와 계약한 후라 어쩔 수 없었다.

선수 구성을 마친 고틀립은 필라델피아에 위치한 브로드우드 호텔에 베이스캠프를 차리고 3주간 트레이닝 캠프를 가졌다. 하지만 처음에는 체육관 섭외가 쉽지 않아 고틀립은 필라델피아에 위치한 고등학교 팀들과 연습 경기를 잡았다. 그 중에는 훗날 코비 브라이언트의 모교로 유명세를 탄 로워 메리언 고등학교도 있었다. 또한 고틀립은 템플 대학, 빌라노바 대학 등 필라델피아 인근의 대학들과도 연습경기를 치렀다. 비록 고등학교 팀들에게도 패하는 등 성적이 좋지 않았지만 고틀립의 눈에는 자신감이 보였다. 선수들의 유대감과 조직력이 눈에 띄게 성장했기 때문이다. 선수들 또한 고틀립을 신뢰했다. 달마는 “고티(고틀립의 애칭)는 영악한 농구 지능을 지녔죠. 그의 집중력은 대단했습니다. 그는 매우 사랑스러워서 누구든 그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라며 고틀립을 칭찬했다.

트레이닝 캠프를 마친 고틀립의 시즌 계획은 명확해졌다. 발군의 득점력을 지닌 퍽스에게 공격 기회를 몰아주는 농구를 구사하는 것이었다. 필라델피아에는 ABL 득점왕 출신 힐하우스와 NCAA 득점왕 출신 세네스키가 있었다. 하지만 힐하우스의 득점은 대부분 공격 리바운드 후 풋백이었고 공격 기술은 없었다. 세네스키도 득점력이 좋았지만 기술로는 수비가 더 뛰어났다. 당시 프로 리그의 야투성공률은 대부분 30%에 미치지 않았다. 실제 1946-1947시즌 필라델피아에서 유일하게 야투성공률 30%를 넘긴 선수는 퍽스였다. 엄청난 상대의 수비 압박 속에서도 말이다. 1946-1947시즌 리그 평균 야투성공률은 27.9%였다. 당시 리그는 24초 공격제한이 없었고, 승리를 우선시 했으며 개인 기량이 떨어지는 상태라 대부분 팀들은 수비 지향적인 농구를 추구했다. 스파스 시절 강력한 수비와 조직력 농구 그리고 패스와 컷을 강조했던 고틀립이 BAA에서는 공격수 한 명에게 의존하는 특이한 변화를 준 것이다. 
화려한 시작과 시행착오

1946년 11월 7일 필라델피아 아레나에서는 필라델피아와 피츠버그 아이언멘의 개막전이 열렸다. 이날 경기에서 퍽스는 19개의 야투를 던져 9개를 성공했고 자유투 10개 중 7개를 성공하며 25득점을 올렸다. 퍽스를 앞세운 필라델피아는 피츠버그를 81-75로 물리치며 서전을 승리로 장식했다. 

개막전 포함 시즌 첫 5경기를 홈에서 치르는 행운을 안은 필라델피아는 2차전에서 워싱턴 캐피톨스를 68-65로 꺾고 2연승으로 산뜻한 출발을 이어갔다. 하지만 이후 세인트루이스 버머스, 시카고 스택스에게 패하며 2연패를 당하는 등 시즌 첫 8경기에서 4승 4패에 그쳤다. 첫 8경기 동안 퍽스는 20.1득점을 올리며 득점 선두로 나섰다. 프로비던스 스팀 롤러스와의 경기에서는 무려 37득점을 터뜨렸다. 

그러나 필라델피아는 퍽스에게 공격 의존도가 심했다. 시즌 동안 퍽스가 23.2득점을 올렸지만 팀내 두 번째 많은 득점을 올린 무시의 평균 득점은 겨우 9.4점이었다. 하지만 필라델피아는 이타적인 선수들이 많았고 고틀립 감독이 퍽스에게 공을 몰아주라고 해도 큰 불만을 가진 선수들이 없었다. 달마는 “조(퍽스)는 그가 원하는 무엇이든 할 수 있고 가고 싶은 어디든 갈 수 있는 허가증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가 피봇에 가고 싶으면 센터들이 윙으로 나왔죠. 하지만 우리들은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이타적인 선수들이었으니까요. 또한 승리를 거두기 시작하면서 모든 일이 잘 풀리는 듯 보였습니다. 만약 우리가 계속 패했다면 조의 이기심이 문제가 될 수도 있었겠죠”라며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필라델피아는 최고 인기 구단이었다. 당대 최고 스타였던 퍽스에 대해 「타임」지는 ‘농구계의 베이브 루스’라는 별명을 붙였을 정도였다. 1946-1947시즌 퍽스에 이어 득점 2위를 차지한 워싱턴의 밥 피어릭은 경기당 16.8득점에 그쳤다. 시즌이 지날수록 상대 팀들은 퍽스를 막기 위해 최고의 수비수들을 붙였다. 필라델피아 구단이 ‘공공의 적’이 된 것이다.

필라델피아는 시즌 내내 승률 5할 이상을 기록하는 강호였지만 고틀립은 만족하지 못했다. 그는 지는 것을 싫어했고 우승을 원했다. 1월 중순 필라델피아가 주춤거리며 15승 14패로 위기를 맞자 고틀립은 모 머피를 뉴욕 닉스에 내주고 랠프 카플로위츠를 받는 트레이드를 단행했다. 외곽슛이 정확했던 카플로위츠는 필라델피아의 마지막 퍼즐 조각이었다. 이후 필라델피아는 승승장구를 하며 35승 25패를 기록했다. 49승11패를 기록한 워싱턴 캐피톨스에 이어 동부 지구 2위에 올랐다.
최초의 챔피언에 등극하다

1946-1947시즌 플레이오프 방식은 특이했다. 각 지구의 우승팀끼리 붙어 챔피언 결정전에 먼저 진출하고 각 지구 2위는 2위끼리, 3위는 3위끼리 붙은 후 다시 승자들이 4강을 치른 후 챔피언 결정전에 오르는 방식이었다. 

따라서 동부 지구 1위 워싱턴이 서부 지구 1위 시카고 스택스와 붙은 후 챔피언 결정전에 오르고. 동부 2위 필라델피아는 서부의 2위 세인트루이스 버머스와 만났으며 동부  3위 뉴욕 닉스는 서부 3위 클리블랜드 레블스와 격돌했다.

플레이오프를 고틀립에게는 큰 고민거리가 있었다. 정규시즌을 마친 필라델피아 선수들이 플레이오프에 대해 그리 절박한 태도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타지에서 온 선수들은 집 월세 계약을 연장해야 했고 식비를 따로 제공받지 않았기 때문에 생활비를 포함한 지출이 크게 늘게 되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팀의 간판스타 퍽스도 “죄송합니다, 감독님. 저를 포함한 팀의 거의 모든 선수들에게 플레이오프는 흥미를 끌지 못합니다”라고 하소연할 정도였다.

리그 역시 고민거리가 있었다. 플레이오프 시작일은 4월 2일인데 비슷한 시기에 MLB 야구가 개막하고 AHL과 NHL 플레이오프도 시작해 관심도가 떨어지고 경기장을 대관하는 것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이런 이유로 다음 시즌 BAA는 경기수를 60경기에서 48경기로 줄이게 된다.

정규시즌이 끝난 후 하루 후인 3월 31일 고틀립은 선수단 전체를 애틀랜틱 시티 해변으로 데려가 신나는 휴식을 가졌다. 그리고 선수들에게 보너스를 약속했다. 선수단의 사기는 다시 높아졌다. 이틀 후인 4월 2일 필라델피아 아레나에서는 역사적인 첫 플레이오프 1차전이 치러졌다. 경기 전 터렐 구단주는 퍽스에게 쉐보레 자동차를 선물하며 선수단의 사기를 고취시켰다. 필라델피아 아레나는 8,273명의 관중으로 가득 메워졌고 일방적인 응원이 이어졌다. 수비력이 뛰어난 세인트루이스는 밥 돌이라는 뛰어난 수비수를 퍽스의 전담 수비수로 붙였다. 하지만 퍽스는 17득점을 올렸다. 또한 무시가 19득점, 힐하우스와 달마가 10득점씩 거든 덕분에 필라델피아는 1차전을 73-68로 승리했다. 이날 퍽스는 3쿼터 종료 10분30초 경 자유투를 성공해 한 시즌 통산 1,404득점을 올렸고 4쿼터에는 이 기록을 넘었다. 이는 1912년 센트럴 프로 리그 소속이던 코넬스빌의 윌리 커머가 세운 한 시즌 프로 최다 득점인 1,404점을 넘는 대기록(당시 규정상 커머는 팀의 거의 모든 자유투를 도맡아 던질 수 있었음)이었다. 원정에서 열린 2차전을 패한 필라델피아는 역시 원정에서 열린 3차전에서도 75-59로 대승을 거두며 4강에 오르는데 성공했다.

4강 상대는 동부 지구 3위 뉴욕이었다. 정규시즌 상대전적에서 4승 2패로 뉴욕에게 우위를 점했던 필라델피아는 뉴욕을 2전 전승으로 가볍게 요리하고 대망의 챔피언 결정전에 진출했다.

챔피언 결정전 상대는 시카고 스택스였다. 필라델피아는 정규리그 상대전적에서 시카고에게 1승 5패로 열세였다. 따라서 시카고는 자신감이 넘쳤다. 하지만 고틀립은 시카고 원정 3패는 모두 전날 디트로이트 팰컨스와 경기 후 이틀 연속 경기였다는 점, 시카고와 5패가 모두 접전이었다는 점, 퍽스가 시카고와 경기에서 평균 28득점을 올렸다는 점에서 자신감을 잃지 않았다. 또한 시카고가 홈코트 어드밴티지를 가져야 했지만 시카고 아레나에서 서커스가 열리는 관계로 필라델피아가 홈코트 어드밴티지를 얻게 된 점도 호재였다.

4월 16일 필라델피아 아레나는 7,918명의 관중이 모였다. 필라델피아는 척 길머의 밀착 수비에도 37득점을 폭발한 퍽스 덕에 84-71로 승리했다. 반면 시카고는 주포였던 맥스 자슬로프스키가 세네스키에게 꽁꽁 묶여 6득점에 그쳤다. 역시 홈에서 열린 2차전도 필라델피아는 주전들이 고루 활약하고 자슬로프스키를 틀어막으며 85-74로 승리했다. 

전문가들은 시카고 아레나에서 열리는 3차전이 시리즈 분수령이 되리라 내다봤다. 그러나 경기 초반 기세는 오히려 필라델피아가 더 무서웠다. 11-0까지 필라델피아가 달아나며 기선을 제압했다. 하지만 시카고도 반격에 나서며 17-18까지 쫓아왔다. 경기 양상은 필라델피아가 달아나면 시카고가 따라붙는 꼴이었다. 하지만 시카고의 추격에는 한계가 있었고 필라델피아가 75-72로 승리하며 우승을 눈 앞에 두게 되었다. 시카고도 홈에서 열린 4차전에서 74-73으로 힘겹게 승리했지만 다시 홈으로 돌아온 필라델피아의 기세는 만만치 않았다. 5차전은 혈투였다. 경기 종료 직전까지 80-80 동점이던 상황. 달마가 던진 중거리슛이 림을 여러 차례 맞다 그물을 갈랐다. 결국 필라델피아는 홈에서 83-80으로 승리하며 대망의 초대 챔피언에 등극하게 되었다.

FACT 정리
1. 필라델피아 워리어스의 초대 감독이자 훗날 구단주가 되는 인물은? 
에디 고틀립

2. NBA 올해의 신인에 뽑힌 선수에게 주어지는 트로피의 이름은?
에디 고틀립 트로피

3. NBA 초대 득점왕에 오른 선수는?
조 퍽스 (1946-1947시즌 경기당 23.3득점)

4. 1946-1947 시즌 리그 평균 야투성공률은? 
27.9% (단 한 팀도 평균 30% 이상의 야투성공률을 기록하지 못했다)

5. 초대 챔피언 필라델피아 워리어스의 시즌 개막전 상대와 결과는?
피츠버그 아이언멘(Pittsburgh Ironmen)과 홈경기에서 81-75로 승리.

6. 1946-1947시즌 퍽스에 이어 득점 2위를 차지한 선수는?
워싱턴 캐피톨스의 밥 피어릭(경기당 16.8득점)

7. 1946-1947시즌 플레이오프에 진출한 6팀은?
동부 1위 워싱턴 캐피톨스, 2위 필라델피아 워리어스, 3위 뉴욕 닉스
서부 1위 시카고 스택스, 2위 세인트루이스 버머스, 3위 클리블랜드 레블스

8. 조 퍽스 이전에 한 시즌 프로 통산 최다 득점 기록을 보유했던 선수는?
윌리 커머(1912년 1,404득점)

9. 1947년 챔피언 결정전에서 필라델피아에게 패해 준우승에 머문 팀은?
시카고 스택스

10. 1947년 챔피언 결정전 5차전에서 결승골을 넣은 선수는?
하위 달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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